2014년 11월 27일에 쓴 글.



새로 산 〈괴물2006〉 블루레이를 무심코 돌려보다가 처음 괴물의 습격이 끝난 뒤 이어지는 합동분향소 장면에 이르렀다. 현서(고아성)가 죽었다고 생각한 강두네 가족들은 하나둘 분향소에 모여들어 영정 사진 앞에 목 놓아 울고 부둥켜안다가 바닥을 뒹군다. 그 주위로 기자들이 달려들어 사진을 찍어댄다. 운동권 출신 남일(박해일)은 찍지 말라며 욕설을 내뱉는다. 소란이 계속되는 가운데 분향소 뒤편에서는 경비원이 나타나 큰 목소리로 차 번호를 부르며 주차를 그렇게 하면 어떻게 하느냐고 차주를 다그친다. 원래 이 장면은 봉준호 감독 특유의 '삑사리' 유머 감각이 잘 드러나는 사례로 거론되던 장면이다. 비극의 순간이지만, 지극히 '한국적'인 정서 과잉과 무심함이 민망하리만큼 적나라하게 표현된다. 가족들의 과도한 통곡, 특히 맨살이 드러날 정도로 바닥을 기어 다니는 남주(배두나)를 수직 부감 쇼트로 담고, 화면 뒤쪽에서 서슴없이 주차 문제를 꺼내 드는 경비원의 모습을 초점까지 옮겨가며 찍는 촬영을 보면 이것은 분명 유머를 의도한 연출이다. 개봉 당시 나도 웃었고 다른 관객들도 많이 웃었던 장면이다.

그런 8년이 지난 지금 다시 보니, 더는 분향소 장면이 웃기지 않았다. 물론 8년 사이에 영화의 형태가 바뀐 것은 아니다. 유머를 의도한 연출의 흔적은 역력하다. 웃으라고 마련한 타이밍이라는 점은 알겠다. 그러나 웃을 수 없었다. 아직 남일과 남주가 등장하기 전, 강두(송강호)와 희봉(변희봉)이 교복을 입은 현서의 사진이 내려다보는 가운데 넋을 놓고 있는 모습만으로 이미 기분이 가라앉았다. 그런 다음 남주가 등장한다. 남주의 풀린 손 아래로 (현서가 괴물에게 잡혀가기 전에 TV를 보며 응원했던 양궁 대회에서 딴) 동메달이 떨어진다. 나는 이전까지 이 동메달의 클로즈업을 별로 중요하게 생각하지 않았다. 이후 남일이 등장할 때 그 손에 소주병이 들린 것과 대구를 이루며 약간의 유머를 제공한다는 정도? 캐릭터의 특성을 보여주는 소품 이상으로는 여기지 않았다. 그러나 이번에는 동메달이 손에서 떨어짐과 동시에 가슴도 철렁했다. 정말로, 동메달이 떨어지는 소리가 "철렁!"인 것만 같았다. 그 시각적 운동의 리듬 안에 돌이킬 수 없는 상실이 있었다. 경비원이 등장하고 차주가 차를 빼러 나가는 대목에 이르기까지 그저 눈물과 악전고투했다. 분향소 풍경의 한심스러움은 유머가 아니라 슬픔과 좌절만 더욱 키웠다.

고등학생 교복과 합동분향소 풍경이라는 조합은 올해 들어 한국 사회 안에서 전에 없이 압도적인 상징성을 갖추게 되었고, 〈괴물〉이 구축한 영화 속 세계의 현실은 카메라 바깥의 현실이 획득한 그 상징성을 차단할 수 없는 지경에 이르렀다. 혹은 〈괴물〉의 이미지 안에 담겨 있던 한국이 뒤늦게 도래했다고 해도 좋고. 이 주박에서 풀려날 날이 올까? 아마도. 생각보다 빨리. 그러나 〈괴물〉이 유효한 영화인 한, 그 이미지는 언제든 또다시 현실로 옮겨올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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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5년 4월 13일에 쓰다 만 글을 옮기는 김에 마무리.



〈사고Accident, 1967〉와 〈화장2015〉에는 비슷한 기분을 불러일으키는 장면이 하나 나온다.

먼저 〈사고〉. 대학교수인 스티븐은 새로 받아들인 지도 학생인 애나에게 눈길을 준다. 이 눈길이 애정의 눈길인지 질투의 눈길인지는 명확하지 않지만, 여하튼 그가 애나를 자주 생각한다는 점은 꽤 분명해 보인다. 애나는 주말에 연인이자 스티븐의 다른 학생인 윌리엄과 함께 스티븐의 집에 놀러 온다. 윌리엄이 몹시 취하는 바람에 두 사람은 스티븐의 집에서 자고 가게 된다. 임신한 스티븐의 아내 마저리는 한참 먼저 방으로 들어갔고, 스티븐은 뒤늦게 침실로 올라가다가 어떤 여자가 자신보다 먼저 계단을 올라가 사라지는 모습을 본다. 스티븐이 침실에 들어서자 침대 위에 누군가 누워있다. 스티븐이 나지막이 말한다. "애나?" 하지만 가까이 다가가 보니 그 사람은 자고 있던 마저리였다. 스티븐은 다시 마저리의 이름을 부르며 침대로 들어간다. 연달아 자신을 부르는 스티븐의 목소리에 마저리가 잠에서 깬다.

다음 〈화장〉. 오 상무는 새로 입사한 사원인 추은주에게 눈길을 준다. 이 눈길이 바람을 피우고 싶다는 욕구로까지 나아가는지는 명확하지 않지만, 여하튼 그가 추은주를 자주 생각한다는 점은 분명하다. 추은주는 결혼 소식을 알렸다가 파혼한 뒤 업계의 다른 회사로 이직을 준비 중이다. 오 상무는 추천서를 써주고 싶어 하지만, 추은주는 사양한다. 그래도 오 상무는 어느 날 밤 뇌종양으로 죽어가는 아내의 병상 옆에서 노트북으로 추은주를 위한 추천서를 쓰기 시작한다. 아내가 잠에서 깬다. 일이 많으냐는 아내의 말에 오 상무는 그렇다고 말한다. 불교도인 아내는 잠이 깼으니 독경을 들려달라고 한다. 오 상무는 노트북을 덮고 일어나 아내에게 이어폰을 건네고 독경을 틀어준다.

두 장면 모두에서 남편으로서 느끼는 죄책감을 다소간 공유하게 된다는 점은, 생각해 보면 신기한 일이다. 두 남편은 결국 (물리적으로는) 부정을 저지르지 않는다. 손 한 번 잡지 않고 부적절한 말 한마디 하지 않는다. 하다못해 부정을 저지르려 시도하지도 않는다. 단지 작은 뉘앙스들, 시선의 머무름만으로 욕망이 생겨나고, 이제껏 표현하지 않았으며 앞으로도 표현하지 않을 그 욕망이 죄책감을 낳아 관객에게까지 번진다.

그보다 더 신기한 건, 두 장면을 보면서 아내가 남편의 심리를 알면서도 짐짓 모른 척하고 있지 않았겠느냐는 의심이 들었다는 점이다. 두 장면에서 아내가 깨어있으며 남편이 무슨 짓을 했는지 알아차렸다는 증거를 제시해주는 시청각 신호는 단 하나도 없었건만. 물론 〈화장〉의 아내는 영화 후반부에 가서 와인을 통해 자신이 남편의 마음을 꿰뚫어보고 있었음을 우회적으로 알리지만, 아직 해당 장면까지는 그런 아내의 마음을 알 도리가 없다. 그리고 〈사고〉에서는 해당 장면은 물론이고 영화가 끝날 때까지도 아내가 남편을 얼마나 간파하고 있었는지 확정할 수 없다. 그럼에도 두 장면을 보는 순간 남편이 아내에게 '들켰다'는 아찔함이 머리를 스치고 지나갔다. 심지어 들켰으면 좋겠다는 마음도 있었다.

영화가 끝나고 나서 두 영화를 함께 본 동행에게 이런 감상을 피력했더니 "그래, 여자는 그럴 때 반드시 알지."라는 답이 돌아왔다. 성급한 일반화의 오류를 차치하고 나면, 이 답 또한 흥미로웠다. 이 답에 따르면 해당 장면에서 아내의 간파는 영화 속 표현보다는 현실 논리 덕분에 성립한다. 물론 영화는 많은 부분을 현실 논리에 의지하여 간추리거나 생략한다. 그 덕분에 짧은 시간 안에 '매끄러운' 서사를 전할 수 있다. 관객의 관성에 의지할 수 없었다면 영화는 지금보다 훨씬 더 이야기하기에 적절하지 않은 매체가 되었을 것이다.

그러나 영화란 결국 영상과 소리의 연쇄를 통해 말을 거는 매체인 탓에, 현실 논리라는 관성에 의지해 이어붙인 이음매는 종종 미심쩍은 '허점'이 되기도 한다. 보이지 않고 들리지 않았는데, 거기에 없는데 어떻게 확신할 수 있지요? 예를 들면 철학자 스탠리 카벨이 『Contesting Tears: The Hollywood Melodrama of the Unknown Woman』에서 보여준 〈스탤라 댈러스Stella Dallas, 1937〉에 대한 독해. 〈스텔라 댈러스〉는 흔히 딸의 신분 상승을 위해 자신을 희생하는 어머니의 이야기를 다룬 최루성 멜로드라마로 받아들여지는 작품이지만, 카벨은 같은 영화의 이미지 안에서 가족과 사회적 지위라는 족쇄에서 벗어나 자신의 취향을 되찾기 위해 딸을 버리는 어머니의 이야기를 발견한다.

단, 카벨의 독해를 접했다고 해서 〈스탤라 댈러스〉의 의미가 한쪽에서 다른 쪽으로 완전히 옮겨가지는 않는다. 그보다는 현실을 질료로 삼는 영화라는 구조물이 바로 그 구조 때문에 다수의 현실 사이에서 확고한 해석을 피한 채 끊임없이 진동하고 있음을 보게 된다. 관객이라는 관찰자가 진동 상태인 영화를 해석하고 그중 한 현실로 수렴케 한다는 『쿼런틴』 농담도 피하고 싶다. 영화 속의 현실은 줄곧 진동 상태를 유지하며, 양립 불가능해 보이는 것들이 불안정하게 양립하도록 한다. 딸을 위해 희생하는 어머니와 자신을 위해 딸을 버리는 어머니의 양립. 부정을 바라는지 아닌지 알 수 없는 남편들의 마음을 알아차렸는지 아닌지 알 수 없는 아내들.

눈금이 어느 한쪽으로 확실하게 넘어갔다면 나는 지금만큼 영화를 좋아하지 않았을지도 모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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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5년 4월 13일에 쓴 글.



시네마테크 부산에서 "월드 시네마 XII" 상영작 〈진홍글자The Scarlet Letter, 1926〉를 보았다. 상영 제목은 오랜 관습을 따라 "주홍글자"였다. 이 무심한 제목이 바뀔 날은 오지 않는 걸까? 나 같은 사람이 백날 말하는 것보다 실제로 작품을 보여주는 쪽에서 좀 더 의식을 갖고 접근해주는 편이 훨씬 효과적일 텐데.

홈페이지와 팸플릿에는 상영 시간이 98분으로 소개돼 있었으나 실제 상영 시간은 70분 내외였다. "제작 당시의 필름과 현재의 영사 속도가 달라 실제 상영시간이 달라질 수 있"다는 안내처럼, 상영에 사용한 필름은 98분 분량인데 초당 24프레임으로 상영해서 70분 정도였을까? 원래 영사 속도가 초당 16프레임이었다는 가정하에 계산해 보니 원래 초당 16프레임으로 상영해야 하는 98분짜리 영화를 초당 24프레임으로 영사하면 상영 시간이 65분 정도 된다. 초당 18프레임으로 계산한다면 73분. 그럼 역시 그런 이유 때문이었나 보다.

영사 속도와는 별개로, 이번에 상영한 〈진홍글자〉 자체가 완전한 판본은 아니었다. 찾아보니 1926년에 개봉하여 격찬받았다는 원래의 형태는 찾아볼 길이 없는 듯하며, 98분 판본은 2000년에 미 의회 도서관 주도로 복원한 판본이라고 한다. 결락된 부분은 중후반부에 특히 집중되어 있었다. 아서 딤스데일 목사가 떠난 사이 헤스터 프린이 임신-출산을 겪는 과정이나 이후 꿋꿋하게 펄을 키우며 살아가다 죽은 줄 알았던 남편이 나타나며 갈등을 빚는 대목이 상당한 감정적 스트레스를 쌓아올린 다음 결말에서 쾅 터뜨렸어야 했는데, 플롯을 따라갈 수 있을 정도의 뼈대만 남아 안타까웠다. 원작 소설을 생각해 보면 이 대목은 서사뿐만 아니라 자연 묘사에서도 상당한 가능성을 품고 있는데, 마침 비교적 형태가 분명한 전반부에서 자연 묘사에 특히 강점을 보인 영화인지라 특히 아쉽다.

무성영화 속의 릴리언 기쉬는 볼 때마다 놀랍다. 기쉬에게는 '수난당하는 가녀린 여인'이라는 이미지가 따라붙곤 하지만, 실제로 스크린에서 마주하게 되는 모습은 늘 스테레오타입을 두들겨 깨는 생동감으로 가득하다. 그녀는 사회의 시선을 모를 정도로 무지하지는 않다. 하지만 시선에 맞추어 자신을 억누르고 조신하게 가다듬기보다는 솔직한 본성에 이끌려 환희나 분노나 결의나 망연자실을 매 순간 온 얼굴로 발산하기를 멈추지 않는다. 〈진홍글자〉의 헤스터 프린도 마찬가지다. 마을 주민 모두가 검은 옷을 입고 교회로 몰려드는 일요일, 교회가 화려함과 발랄함을 원치 않음을 알면서도 흰옷과 새의 노랫소리를 포기하지 못한 채 외출을 준비하며 집안을 활보하다 새장에서 도망친 새를 붙잡기 위해 머리카락을 휘날리며 숲 속을 뛰어다닌 끝에 예배 시간에 늦고 마는 헤스터의 생동감에 어찌 넘어가지 않을 수 있을까? 자신을 꾸짖으려다 손에 들린 속옷을 보고 황급히 도망가는 딤스데일 목사를 따라다니며 "이렇게 목사님께서 절 질책하시는 말을 들을 수 있어서 좋아요." 라고 웃는 헤스터에게 어찌 저항할 수 있을까? 그런 헤스터가 나중에 딤스데일 목사의 것까지 2인분의 죄를 뒤집어쓰고 살 테니 당신은 목회를 통해 참회하라고 말할 때면, 함부로 "희생자"라는 표현을 쓰는 것조차 망설여진다. 헤스터가 사회의 희생자가 아니어서가 아니라, 희생자라는 말이 담고 있는 일방적인 구도 안에 밀어 넣기에는 너무나 당당하고 주체적이기 때문이다.

온 마을을 흔들어 놓는 헤스터를 시각화하는 영화의 솜씨는 또 어떤가. 건물 2층에 있는 헤스터의 집에는 길 쪽으로 창문이 나 있고, 창문과 마주 보는 벽에는 꾸밈을 경계하라는 식의 청교도적 글귀가 적힌 걸개가 걸려 있다. 예배 참석을 앞두고 옷매무시를 하던 헤스터는 그 글귀를 바라보다가 걸개를 젖힌다. 걸개 뒤에는 거울이 숨겨져 있고, 헤스터는 거울을 보며 두건을 둘러 긴 머리카락을 감싼다. 거울이 창으로 들어온 햇빛을 반사하여 반대편 벽에 빛이 어른거리도록 한다. 헤스터는 그 빛을 보고 즐거워한다. (자크 타티의 〈나의 삼촌Mon oncle, 1958〉이 떠오르는 대목이다.) 그런데 화면이 길거리로 전환되며, 교회로 향하던 엄숙한 얼굴의 아녀자들 얼굴에까지 거울에 반사된 빛이 어린다. 그들은 헤스터의 집을 불쾌하게 노려본다. 이어 헤스터는 밤 동안 덮어두었던 새장의 덮개를 벗긴다. 새가 운다. 이제 아녀자들은 일요일 아침에 새 소리를 듣게 하는 헤스터의 몰지각함을 탓한다. 잠시 후, 그 새가 새장을 빠져나와 날아간다. 깜짝 놀란 헤스터는 주변 사람들은 신경도 쓰지 않은 채 흰 옷을 휘날리며 숲으로 달려간다. 대놓고 교회를 빠지는 그 모습에 군중들은 혀를 찬다. 숲을 뛰어다니던 헤스터의 머리에서 두건이 흘러내리며 더욱 자연스러운 아름다움을 드러낸다. 걸개, 거울, 빛, 새, 두건 등의 동물과 사물이 헤스터의 집 안이라는 사적 공간, 길거리라는 공적 공간, 숲이라는 자연 공간을 단숨에 연결하는 이 연쇄 작용에는 언어화된 사상이 아니라 물질의 흔들림으로 말을 걸어오는 무성영화의 비의가 담긴 듯하다.

두 가지만 더. 시네마테크 부산의 〈진홍글자〉 상영은 배경 음악 없이 완전 무성으로 상영되었다. 아마 서울아트시네마에서 〈탐욕Greed, 1924〉을 그렇게 본 이후 처음이 아닌가 싶은데, 역시나 즐거운 경험이었다. 음악이 영상을 해독하고 선별하여 전해주는 대신 영상 자체를 눈으로 보아내는 수밖에 없을 때, 영상이 얼마나 풍부한 내용물을 담고 있는지 새삼 실감하게 된다. 소리가 없어 지루하기는커녕 소리가 없는데도 볼 게 너무 많아서 다 못 보고 있다는 조바심이 들 정도다. 또 하나. 영화의 전당은 전에도 가보았으나 (그곳 최악의 극장인) 하늘연 극장만 들어가 봤을 뿐 시네마테크는 처음이었다. 미리 알아본 바로 스크린 가로세로 비율이 1.65:1 정도 된다고 하여 아주 이상적인 환경은 아니라고 생각했다. 2.35:1은 물론이고 1.85:1 비율 영화를 상영할 때만 해도 상하 마스킹을 해야 한다는 뜻이니까. 하지만 1.33:1 영화를 볼 때는 스크린 자체가 크고 좌석과 거리가 가까우며 좌우 마스킹을 많이 하지 않아도 되기 때문에 화면이 무지막지하게 크게 다가온다는 점은 매우 좋았다. 서울아트시네마에서는 2.35:1 영화를 상영할 때는 포만감을 느낄 수 있지만 1.33:1쯤 되면 어지간히 앞쪽에 앉지 않는 한 화면을 크게 즐기기는 어려웠으니까. 1.33:1 영화를 보며 영상의 크기 자체에 압도된 채 그 세부에 탐닉하게 되는 경험은 오랜만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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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5년 3월 29일에 쓴 글.



서울아트시네마에서 "아듀, 파라다이스" 상영작인 세르지오 레오네 감독의 〈옛날 옛적 미국에서Once Upon a Time in America, 1984〉 확장판을 보았다.

워낙에 판본에 관한 카더라 통신이 난무하는 영화인만큼, 우선 관련 정보를 정리하고 가도록 하자. 주로 영문 위키피디아를 참고했으며, 확인할 수 있는 한 출처나 다른 검색 자료도 견주어 확인했다.

① 촬영이 끝났을 때 총 필름 분량은 8~10시간이었다(8~10시간짜리 편집본이 있다거나 이게 감독판이라는 이야기로 오해하지 말 것).

② 레오네는 이를 약 6시간짜리로 편집했다. 각각 세 시간씩 두 편짜리 영화로 개봉하자는 계획이었다. 제작자는 이를 거절.

③ 레오네는 이것을 다시 269분으로 편집했다. 이 판본은 1984년 칸 국제영화제에서 상영됐다.

④ 칸 국제 영화제 상영 이후 레오네는 다시 이것을 229분으로 편집했다. 이 판본이 유럽 개봉판이며, 최근 확장판이 나오기 전까지 결정판이었다.

⑤ 미국 개봉판은 레오네의 참여 없이 스튜디오가 더 편집하여 139분으로 만들었다. 이것이 한국에도 개봉됐다.

⑥ 2011년, 레오네의 자손들이 볼로냐 시네마테크와 함께 세계영화재단의 도움을 받아 ③의 269분 판본을 복원 중이라고 발표.

⑦ 2012년 칸 국제영화제에서 복원 확장판 공개. 그러나 유럽 개봉판에 없던 삭제 분량의 판권 문제 때문에 전부를 공개하지 못하고 251분 판본으로 공개. 이 판권 문제는 아직도 해결되지 않았으며, 결국 블루레이로 출시되고 극장에서 재개봉한 확장판도 269분 판본이 아니라 251분 판본이다.

현재 확장판 배급을 맡고 있는 워너브라더스에서는 이 확장판을 "감독 확장판"이라고 부르고 있다. ②의 여섯 시간짜리 판본은 사실상 한 번도 공개 상영된 적이 없는 가편집본이라고 해도 좋을 테고, ③의 칸 국제영화제 상영본이야말로 감독의 의도가 반영된 최종본이라는 판단에서다.

그러나 1988년 레오네는 오레스테 데 포르나리와의 인터뷰에서 다음과 같이 말했다. (출처는 포르나리의 저서 『Sergio Leone: The Great Italian Dream of Legendary America』인 모양. 책을 직접 사서 확인하지는 못했다.)

"한 번도 개봉되지 않았고 50분 정도 더 긴 판본도 있지요. 네 시간 반짜리. 하지만 그걸 둘로 나눠서 TV에서 방영하자는 생각은 버렸어요. 워낙 복잡한 구조라 한 번에 몰아서 봐야하니까요. 게다가, 솔직히 말하는데, 지금 이게 내 판본입니다. 다른 판본이 상황을 더 명확하게 설명해줄 수도 있겠고, TV에서 2부나 3부로 나누어 방영할 수도 있겠지만, 내가 선호하는 판본은 지금 이겁니다. 무언가 약간 감추고 있다는 기분이 마음에 들어요."

아주 명확한 발언 아닌가? 레오네는 229분 판본을 269분 판본보다 선호했다. 새로이 공개하는 복원판으로 장사를 해야 하는 워너브라더스의 마음은 이해하지만, "감독 확장판"이라는 표현을 남발하여 229분 판본은 불완전하고 251분 판본이 (레오네가 보지 못한 편집본이라는 점에서는 이것이 더 불완전이면서) 감독의 의도를 더 정확히 반영했다는 식의 인식을 심어주어서는 곤란하다.

* * *

사전 정보 정리는 이 정도로 해두고, 실제로 확인한 확장판에 관해 이야기해보자. 나는 크게 두 가지 이유에서 이번 확장판이 엉망이라고 생각한다.

확장판이 엉망인 첫 번째 이유. 추가된 장면들은 레오네의 말처럼 상황을 보다 선명하게 해주기는 하지만, 영화 전체의 리듬을 망가뜨린다. 우선 새로이 전해주는 정보 중에 서사 이해에 반드시 필요한 정보는 없다. 오히려 굳이 설명하지 않아도 될 부분이 가시화되면서 영화가 몹시 앙상해진다는 느낌마저 든다. 예를 들어 나이 든 누들스가 죽은 세 친구의 유해가 안치된 묘소를 찾는 장면. 229분 판본에서는 누들스가 묘소 안에서 물품 보관소 열쇠를 발견한 다음 곧장 보관함에 열쇠를 넣는 장면으로 연결된다. 확장판에서는 열쇠를 발견한 후 묘소 안으로 관리소장이 들어와 한동안 묘소의 연원에 관한 대화를 나눈다. 누군가 누들스의 이름을 사칭하여 이 묘소를 의뢰했고, 자금은 외국 은행을 통해 전달하여 접촉할 방법은 없고 등등.

특히 배경 음악의 출처를 설명하는 대목은 최악이다. 229분 판본에서, 묘소의 문이 열리고 닫힐 때마다 엔니오 모리코네의 음악이 흐른다. 〈옛날 옛적 서부에서C'era una volta il West, 1968〉에서도 그랬지만, 레오네는 종종 음악의 출처를 불분명하게 사용하곤 한다. 이 음악은 누들스는 듣지 못하고 관객만 들을 수 있는 〈옛날 옛적 미국에서〉라는 영화의 배경 음악인가, 아니면 누들스가 방문한 묘 안의 스피커에서 흘러나오는 음악인가? 이 모호함이 문을 열고 닫는다는 행위와 겹치면서 〈옛날 옛적 미국에서〉 전체를 관통하는 가장 중요한 주제인 "영화 프레임을 통해 과거와 마주하는 관객"이라는 주제를 끌어낸다. 확장판은 그 음악이 묘소 안의 스피커에서 흘러나오고 있다는 점을 굳이 설명함으로써 모호함을 망가뜨리고 영화의 주제를 박살내며 장면을 거의 우스꽝스럽게 만든다.

또한 여기서 누들스는 자신을 따라다니는 의문의 자동차를 발견하고 차량 번호를 적는다. 이 차량 번호를 추적한 덕분에 나중에 누들스는 베일리 통상장관의 저택을 찾아내게 되고, 저택 앞에서 벌어진 폭탄 테러를 목격한다. 하지만 이것은 정보의 불필요한 중복이다. 베일리 장관의 저택이 그렇게 일찍 제시될 필요가 없다. 영화 말미에 누들스가 베일리 장관의 저택을 찾는 것은 데보라와 만난 덕분이라고만 설명해도 충분하지 않은가? 더구나 저택 앞 폭탄 테러는 직접 목격하기보다 모의 술집에서 TV로 목격하는 편이 훨씬 앞뒤 장면과 자연스럽게 붙으며 관객의 미스디렉션을 유도한다.

229분 판본에서 폭탄 테러와 관련된 장면의 흐름은 다음과 같다. "누들스가 친구들과 살인을 저지른 다음 차를 몰아 강물에 뛰어든다 → 박살난 차의 잔해 클로즈업에서 시작하여 폭탄 테러를 다루는 TV 뉴스로 연결 → TV에서 베일리 장관의 스캔들에 관한 이야기를 다룬다 → 제임스 콘웨이 오도넬이 증인으로 나온다 → 누들스가 콘웨이를 알아본다 → 콘웨이의 젊은 시절로 플래시백"

이 흐름에서 베일리 장관의 스캔들은 곁다리로 제시되며 (관객은 베일리 장관이라는 이름을 여기서 처음 듣는다. 누들스도 모르는 사람이라고 말한다) 그보다는 콘웨이가 중심이 되어 영화를 계속 나아가게 한다.

확장판에서 장면의 흐름은 다음과 같다. "누들스가 친구들과 살인을 저지른 다음 차를 몰아 강물에 뛰어든다 → 누들스가 보이지 않자 친구들은 망연자실한 표정으로 강 위에서 움직이는 중장비를 바라본다 → 중장비가 쓰레기차의 클로즈업으로 연결 → 카메라가 빠지면 베일리 저택 앞이다 → 누들스가 번호를 적어두었던 차가 저택에서 나오다가 폭발한다 → 박살난 차의 잔해 클로즈업에서 시작하여 폭탄 테러를 다루는 TV 뉴스로 연결 → TV에서 베일리 장관의 스캔들에 관한 이야기를 다룬다 → 제임스 콘웨이 오도넬이 증인으로 나온다 → 누들스가 콘웨이를 알아본다 → 콘웨이의 젊은 시절로 플래시백"

이 흐름에서 관객은 베일리 장관의 스캔들에 주목하게 되며 (관객은 베일리 장관의 저택에도 가보았고, 그가 누들스를 미행했다는 것도 안다) 콘웨이의 이야기는 곁다리처럼 느껴진다. 하지만 영화는 이후 상당 시간을 콘웨이와 관련된 이야기에 집중하므로, 여기서는 베일리 장관의 존재가 중심에 와서는 안 되었다. 베일리 장관은 마지막까지 감춰두었다 꺼내야 관객이 '아, 아까 TV에서 잠깐 다뤘던 그 사람!' 하며 상황을 새로이 인식하게 된다. 이처럼 관객 쪽에서 수행하는 기억의 재발견이 〈옛날 옛적 미국에서〉의 주제이기에, 이 구조는 더욱 중요하다. 확장판은 정보를 서둘러 과도하게 펼쳐놓음으로써 의식의 흐름을 망친다. 더구나 강물에 뛰어든 누들스가 갑자기 사라지고 중장비의 클로즈업에서 쓰레기차의 클로즈업으로 이어지는 대목은 지나치게 의미심장한 티를 내려 드는 연출이다.

장면 연결의 문제를 거론했으니 다시 묘소 장면으로 돌아가 보자. 여기서도 장면 연결의 문제가 나타난다. 229분 판본에서 "열쇠 발견 → 물품 보관소"로 연결되었던 장면은 이제 "열쇠 발견 → 관리소장과 한참 대화 → 물품 보관소"로 바뀐다. 관리소장과의 대화가 이런저런 정보를 제공하기는 하지만, 이미 설명했듯 그것들은 불필요한 정보다. 더구나 그 과정에서 열쇠라는 소품이 만들어내는 시각적 흐름이 끊긴다. 관리소장과의 대화는 쓸데없이 의미심장하고 부적절한 대화로 마무리되어 ("선생님도 안치소를 마련해보시는 게 어때요? 생각해보세요." 늙었으니 죽을 준비하라는 소린데, 웃으면서 할 이야기는 아니지 않나? 이 대사는 강 위의 중장비와 마찬가지로 상황에서 자연스럽게 우러나오기보다는 상징성만이 두드러진다) 관객의 집중을 흐려놓고, 그런 다음 다시 열쇠가 나온다.

확장판에 새로 추가된 장면들이 죄다 이런 식이다. 지엽적이고 그 순간 의미있어 보이는 정보는 늘어났지만, 실상 그 정보는 전체 얼개를 망가뜨리고 영화를 따라가는 관객의 의식 흐름을 부자연스럽게 흐려놓는다. 다시 말하지만 〈옛날 옛적 미국에서〉의 가장 중요한 주제이자 가장 위대한 점은 사건 자체가 아니라 사건의 배열을 따라가고 기억하고 회상하며 재회하는 관객의 의식을 다루는 방식에 있다. 확장판은 그것을 망가뜨린 채 그저 감상적이고 과도하게 친절한 갱스터 영화로만 남는다. 프랜시스 포드 코폴라가 〈지옥의 묵시록Apocalypse Now, 1979〉을 만들어놓고 다시 〈지옥의 묵시록 리덕스Apocalypse Now Redux, 2001〉를 발표하면서 벌인 짓거리와 비슷하다고나 할까.

확장판이 엉망인 두 번째 이유. 확장판 블루레이가 나온 이후 숱한 리뷰어와 팬들이 지적한 문제, 바로 색감의 문제다.

우선 새로 발견하여 추가한 장면은 필름 소스 자체의 문제로 화질이 좋지 않다. 선명도도 떨어지고 전체적으로 빛이 바랬다. 물론 영화 복원에 익숙한 사람들이라면 이 점은 문제 삼을 이유가 없다. 감상에도 지장을 주지 않는다.

문제는 229분 판본에도 있었던 기존 장면들의 색감이다. 확장판은 어떤 이유에서인지 기존에 있던 장면들의 색깔을 완전히 바꿔놓았다. 한결 어둡고, 황갈색으로 물들어 있다. 복원을 주도한 측에서는 색깔 변환의 이유를 명확히 밝히지 않고 있다. 리뷰어와 팬들은 혹시 새로 추가된 장면과의 격차를 줄이기 위해 일부러 색감을 바꾼 게 아니냐고 의심하고 있다.

이유야 어찌되었든, 이 확장판의 색깔은 재앙이다. 처음 블루레이 리뷰를 통해서 이 소식을 접했을 때는 그래도 괜찮으리라 생각했다. 두 판본을 비교하면 차이가 두드러지지만 확장판만 놓고 보면 일관성이 있으니 신경 쓰이지 않을 줄 알았다. 순진한 생각이었다. 확장판은 종종 지나치게 어두워 229분 판본에서는 명확하게 전달되던 정보가 흐려지는 감이 있으며, 전체적으로 이미지에서 오는 감흥을 몹시 떨어뜨린다. 나는 이전에도 이후에도 서울아트시네마에서 DCP 상영을 경험했으니, 이것이 극장 영사 문제가 아니리라 확신한다. 블루레이도 갖고 있어서 다시 확인해보기도 했다.

한 장면만 예를 들어보자. 누들스가 데보라와 저녁을 함께 보낸 후 무참한 짓을 저지르고 차에서 내려 홀로 서성이는 장면이 있다. 레오네 특유의 크레인 카메라 활용을 잘 보여주는 장면이다. 처음에 카메라는 비교적 지표 가까운 곳에서 출발한다. 누들스의 뒤로는 초록빛 갈대밭이 넓게 펼쳐져 있다. 카메라는 천천히 크레인을 타고 올라간다. 순간, 갈대밭 뒤로 이전에는 전혀 보이지 않았던 푸른 바닷빛이 쏟아진다. 이 초록색과 파란색의 갑작스러운 대조가 관객의 시각을 자극하면서 해당 장면의 비통함과 쓸쓸함을 다른 차원으로 고양한다. 확장판에서는 색깔이 전체적으로 우중충해진 탓에 갈대밭과 바다의 대조가 사라진다. 바다가 나타나더라도 '어, 바다도 있구나' 하는 정도에 머무른다. 장면 전체가 초라하고 따분하여, 아무런 효과도 얻지 못하면서 괜히 크레인 움직임을 과시하고 의미를 부여하려 애쓰는 것처럼만 보인다.

레오네의 영화에서는 스타일의 과시가 생명이다. 그 과시는 단지 카메라의 움직임이나 편집의 과시가 아니라, 카메라가 담고 있는 피사체의 형상과도 함께하는 과시다. 과시는 알맹이 없는 허영이 아니라 피사체의 기운을 한껏 끌어올려 장엄함을 성취하도록 해준다. 확장판은 레오네가 포착했던 피사체의 힘을 다 죽여버리고, 그의 카메라 운용을 그저 허영으로만 남게 한다. 함께 이 영화를 본 동행은─역시 예전에 극장에서 필름으로 229분 판본을 보았던 동행이었는데─새로운 판본의 차이를 미리 알고 있지는 않았지만, 영화를 보고 나서 "이것보다 훨씬 아름다운 영화 아니었어?" 라고 말했다. 확장판은 아름다웠던 영화를 후줄근하고 속 보이는 영화로 전락시켰다.

확장판 vs 229분 판

위가 확장판, 아래가 229분 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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복원을 지원한 세계영화재단의 설립자 마틴 스콜세지 감독은 확장판을 두고 "위대한 영화가 길어진 만큼 더 위대해졌다"고 말했다. 워너브라더스는 이 말을 인용하여 홍보에 써먹고 있다. 장사를 위해 복원판을 홍보할 필요가 있다는 점은 이해하지만, 그래도 부끄러운 줄 알아야지.

확장판 복원에 의미가 없다고 말하지는 않겠다. 삭제 장면의 판권 문제가 얼마나 복잡한지 모르므로 더 기다렸다가 269분 판으로 복원해야 했다고 말하지도 않겠다. 또한 워너브라더스가 그렇게 성실하지 않다는 것을 알고 있으므로, 229분 판본도 색깔에 손대지 말고 다시 4K 복원해주어야 한다고까지 요구하지도 않으련다. 하지만 251분 판본을 "감독 확장판"이라고 부르며 229분 판본보다 더 '완성된' 판본인 양 취급한다면, 그리하여 장차 모두가 이것을 정본처럼 여기게 된다면, 그건 죄악이다. 새로 추가된 장면은 쓸모없을뿐더러 있던 장면도 흔들리게 하고 있다. 색감은 완전히 잘못되어 영화를 망치고 있다. 적어도 훗날 전 세계의 시네마테크에서 이 영화를 상영하기 위해 상영 소스를 구하거나 판권을 문의할 때 양자택일의 가능성만이라도 활짝 열어놓아야 할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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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5년 3월 27일에 쓴 글.



서울아트시네마에서 "아듀, 파라다이스" 상영작인 나루세 미키오 감독의 〈흐트러진 구름乱れ雲, 1967〉을 보았다. 가기 전에 시놉시스를 보며 내가 이걸 봤나 안 봤나 긴가민가 했는데 역시 본 영화였다. 2011년의 "나루세 미키오 특별전"이 아니었나 싶다. 그때도 부산아시아필름아카이브 소장 필름으로 봤을 테고. 처음 로고 뜰 때부터 필름에 경탄했다. 확실히 부산아시아필름아카이브는 필름 보존고가 있어서 그런지 필름이 쉽게 낡지 않는 모양이다.

봤는지 안 봤는지 잘 기억이 나지 않을 정도로 인상이 희미했던 모양인데, 다시 보니 말도 못 하게 좋았다. 전에는 이토록 정념 가득한 영화라고 생각하지는 않았던 것 같은데, 어떻게 이처럼 긴장 가득한 영화인 줄 몰라봤을까 싶다. 이런 경험을 할 때면 나는 내가 생각하는 것보다 훨씬 더 오랫동안 성적으로 미숙한 사람이었을지 모르겠다는, 혹은 지금도 그럴지 모르겠다는 생각이 든다. 사물이나 몸짓, 시선의 긴장을 인지하지 못하던 때가 있었달까.

영화 초반부, 교통사고로 관료를 죽이게 된 남자 주인공이 상무에게서 전근 통보를 받은 후 그때까지 사귀던 상무의 딸과 만나는 장면이 있다. 여자가 먼저 남자의 집에 와 있다. 집안 습도를 조절하려는 것인지 수건에 물을 적셔 창문에 펴붙인다. 카메라는 창밖에서 방 안을 들여다보는 구도. 카메라의 위치와 여자의 행위 때문에 창에 주목하게 된다. 남자가 들어온다. 남자는 자신이 전근을 가게 됐다고 말한다. 여자는 자신은 함께 가지 않겠노라고 말한다. 더 관계를 지속할 수 없다는 이별 통보. 남자는 담담히 이를 받아들인다. 여자쪽이 더 미안해하고, 변명한다. 서로가 감정을 추스르는 동안 창문과의 거리를 기준으로 남자와 여자의 위치가 몇 차례 바뀐다. 마지막에는 남자가 출입문 쪽에 서고 여자가 창문으로 다가간다. 여자는 유리창 외에 종이창까지 닫고 남자를 향해 돌아선다. 몇 년 전의 나는 이 행동을 이해했을까? 오늘은 명확하게 이해했다. 그 심정도 이해한다. 자책과 아쉬움과 이별과 습관이 뒤섞인 섹스를 제안하는 행동이다.

카메라는 다시 맨 처음 자리, 창 바깥으로 나간다. 종이창이 닫혔기 때문에 이제 방 안이 들여다보이지 않는다. 여기서 페이드아웃으로 장면을 끝내면 둘은 섹스를 했다는 상징적인 표현이 된다. 십중팔구 그런 느낌이었다. 그런데 갑자기! 종이창이 확 열린다. 방 안의 두 사람을 볼 수 없었기에 관객은 놀란다. 내 뒤쪽에 앉은 관객이 헉! 하고 숨을 들이켜는 소리가 들렸다. 남자가 종이창을 걷은 것이다. 말없이 그는 창문을 다시 연다. 거절의 행위. 여자는 그런 남자를 본다. 핸드백의 클로즈업이 이어진다. 클로즈업이 등장한 순간에만 해도, 나는 여자가 문을 열고 퇴장하는 모습을 보여주는 대신 핸드백을 챙기는 행위로 이별을 물화하리라 생각했다. 실제로 여자의 손이 핸드백을 화면 바깥으로 빼낸다. 하지만 결정타는 핸드백이 아니었다. 핸드백을 치우자 그 아래 지금까지 한 번도 보이지 않았던 열쇠가 모습을 드러낸다. '핸드백이 간다'는 움직임이었던 것이 '핸드백은 가지만, 열쇠는 남는다'라는 비/움직임으로 바뀌면서 예상했던 바 이상의 인지적/정서적 타격을 준다.

이 상무의 딸이라는 캐릭터가 존재한다는 사실은 바로 앞 장면에서야 처음 언급되었고, 이 이별 장면이 〈흐트러진 구름〉 전체에서 그녀가 등장하는 처음이자 마지막 장면이었다. 남자와 여자는 필요한 사항들 외에 구구절절 심정을 토로하지도 않았다. 나루세에게는 방 안에서 남자와 여자의 위치, 젖은 수건, 유리창, 종이창, 핸드백, 열쇠, 그것으로 충분했다. 내가 무릎을 꿇는 데에도 그것으로 충분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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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좌백의 신작. 몇 년 전부터 웹에서 연재 중이라는 소식은 들었으나 아직 전자책의 세계로 들어서지 않은 독자인지라 과연 언제 볼 수 있을까 싶었는데 늦게나마 책으로 나와주었다. 책으로 4권까지 나오다 소식이 끊긴 『흑룡도하』의 전례가 있기에 1, 2권이 나온 뒤에도 과연 후속권은 언제 나오려나 걱정했으나 이미 웹에서 연재를 마친 완결작이라 그런지 놀랍게도 두 달 만에 다섯 권이 주르륵 나오면서 깔끔하게 마무리를 지어주었다. 좌백의 장편이 단행본으로 끝까지 나온 것은 2005년 『비적유성탄』 이후 10년만의 일이라 감개무량하다. 작가와 출판사 양쪽에 엎드려 고마워할 일이다.

 게다가 심지어 걸작이야!

 백 년 넘게 소림사에 틀어박혀 절정 고수가 된 두 노승이 느닷없이 강호로 나서 난리가 난다는 설정만 들었을 때는 짓궂다고만 생각했고, 실제로 한동안은 일종의 피카레스크 소설로 읽었다. 외모는 영준한 젊은이 같으나 세상 물정은 하나도 모르는 사형과 외모는 쭈그렁 바가지인데 하는 짓은 천하의 악동이 따로 없는 사제라는 조합이 이미 우습고, 그들이 고강한 무공과 상식를 벗어나는 사고방식으로 모든 무림인을 벙찌게 하는 소동을 일으키는 과정 자체가 마냥 즐겁다. 거기에 그저 독자를 웃기려고 웃기는 게 아니라 실리를 따져가며 말이 되게 웃기는, 그래서 부지불식간에 무협 특유의 위엄을 박살 내는 좌백의 유머 감각도 여전하여 바닥을 데굴데굴 굴러다니며 웃었다.

 그런데 본격 화장실 유머가 나오는 3권에서 웃음이 정점을 찍더니 4권 들어서 불현듯 주인공들이 老 + 僧임을 상기시키며 회한과 번뇌를 불러오고, 마냥 웃으며 즐겼던 사건들이 어쨌거나 품고 있던 무게를 실감케 한다. 특히 짧다면 짧은 여정인데도 공령, 공심 일행이 함께한 시간을 애착을 갖고 돌아보게 되어 놀랐다. 이전까지 좌백 소설에서 긴 시간의 흐름은 국면 전환을 위해 필요하기는 하지만 빨리감기로 얼른 넘겨버려야 할 거추장스러운 짐 같다는 기분이 있었는데, 이번에는 더 짧은 시간을 더 촘촘하고 소중하게 다룬달까. 예전 같았으면 은화 사태와 하수정 같은 캐릭터는 낭비된 조연이었다고 잘라 말했을 테지만, 이번에는 구멍이라는 생각도 안 들고 그들도 나름대로 흔적을 남긴 일원으로 생각하게 된다. 좌백 소설이 이보다 더 긴 시간을 다룬 경우는 많으나 이처럼 시간의 흐름에서 오는 연대감을 절절하게 느끼도록 한 작품은 『소림쌍괴』가 처음이 아닌가 싶다.

 그렇기에 이야기가 공령, 공심 일행을 중심으로 완결되지 않고 무림 전체의 일로 확산하는 듯한 기미를 보았을 때는 더 불안한 감이 있었다. 이 사람들 이야기만 해도 충분할 것 같은데 굳이 중원무림의 패권 운운하는, 정작 주인공들은 관심도 없을 "하위 플롯"을 집어넣어야 하나. 게다가 그런 기미가 본격적으로 나타난 게 4권 후반부라서, 이러다가는 또 5권에서 플롯 정리하느라 시간 다 보내고 얼렁뚱땅 끝나지 않을까 걱정도 됐고. 하지만 좌백은 이번에는 그마저도 가볍게 해결한다. 소림사 안에서 펼쳐지는 클라이맥스는 어떻게 싸워서 누가 이기느냐 하는 무협 특유의 '액션'을 간소화하더라도 이 장르에서 달리 씹고 즐기고 싸울 거리가 많음을 다시금 보여주는 한편, "소림"쌍괴라는 설정도 장르 관습을 무심히 끌어다 쓴 결과가 아니라 이런 이야기를 마무리하기 위한 필연적인 선택이었음을 보여주며, 두 주인공의 성격과 행보를 마무리하는 데에도 더할 나위 없이 잘 들어맞는다. 그 시너지 효과 덕분인지 결말에 이르러서는 눈물이 글썽거리더라니까. 인물과 환경과 플롯의 균형과 조화라는 점에서 보자면 좌백의 최고작이라고 해도 과언이 아니겠다. 성격이 괴팍한 초절정고수를 주인공으로 삼아 플롯을 유야무야 덮고 가면서 후반부를 성급히 맺는다는 비판을 면치 못하던 작풍이 『비적유성탄』에 이르러 비로소 해결책을 찾았구나 싶었는데 거기서도 더 나아갔구나. (1996년에 처음 구상했고 2003년에 연재하다 중단했던 작품이라지만, 과연 그때 완성했어도 이런 모습이었을까)

 오랫동안 좋아했으나 3년 전에 나온 단편집 외에는 소식이 없어 애타던 작가를 오랜만에 새로운 작품으로 다시 만났다는 사실도 기쁜데, 그 작품이 이토록 좋으니 더욱 기쁘다. 더구나 대여점 체제의 쇠락과 작가의 건강 문제로 한동안 신작은 포기하고 있었는데 인터넷 연재와 전자책 시장이 활로를 뚫으면서 다시 왕성한 창작이 이어지는 듯하여 지속 가능한 팬심을 품을 수 있게 됐다. 과연 그중에서 단행본 출간으로까지 이어질 작품이 몇이나 될까 싶기도 한데, 당장 『소림쌍괴』는 두 권짜리 소장본으로도 나온다고 하고, 권말 광고를 보니 4월에는 『하급무사』도 출간한다고 하니 아주 회의적으로만 볼 일은 아닌 모양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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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일본 신본격 미스터리를 썩 좋아하지 않지만, 그 와중에도 인정할 수밖에 없었던 명작『점성술 살인사건』의 작가 시마다 소지의 또 다른 수작이라니 관심이 생겨 보았다.

 신본격과 사회파를 융합했다고 하여 그 방식이 궁금했는데, 역시나 범행 트릭은 본격이 맡고 범행 동기 쪽을 사회파가 맡는 형식이었다. 일부러 나쁘게 말하자면, 굉장히 어려운 트릭을 탐정이 풀어낸 다음 모두에게 '하지만 범인에게는 그럴 만한 사정이 있었어!'라고 말하는데 그 사정이라는 것이 기나긴 역사적 우여곡절과 연관된, 그런 꼴이다. 여기에다 더욱 냉정하게 생각하자면 그 역사적 우여곡절이라는 것도 실상은 범인의 성격에 일조하고 있을 뿐, 미스터리의 가운데에 놓인 사건의 성격이나 동기와는 직접적으로 연관되지 않는다. 작가가 좀 억지를 부려 둘을 연결하고 있지는 않은가 하는 의문을 완전히 떨치기는 어렵다.

 다만 이것은 다 읽은 다음 전체 사건을 객관적으로 배열했을 때 그러하다는 이야기이고, 소설의 차원에서는, 그러니까 진상을 조금씩 밝혀내며 그때그때 충격을 받는 주인공 요시키 형사의 주관적인 시선을 따라가는 독자의 독서 과정이라는 차원에서 보자면 상당한 설득력을 갖춘 이야기다. 특히 트릭에만 지나치게 심취한 신본격은 트릭이 공개된 다음에 범인이 트릭을 수행하기 위한 인형처럼 보인다는 단점을 드러내곤 하는데, 이 작품도 아주 무리가 없는 것은 아니지만 ─ 이렇게 오랫동안 자신을 철저히 버려가며 원한 하나에 매달리는 인간을 상상하기란 쉽지 않다 ─ 범인의 속사정을 서서히 알아감에 따라 그에 이입하는 요시키 형사의 감정 상태가 독자마저 설득해 낸다. 결국 미스터리를 '소설의 탈을 썼을 뿐 결국은 작가가 독자에게 내는 퀴즈'로 볼 것인가, 아니면 '범죄를 바라보는 인간의 시선을 담은 소설'로 볼 것인가에 따라 평가가 갈릴 만한 작품이다. 전자로 봤을 때는 군더더기가 많은 데다 '본론'에는 잘 달라붙지 않아 문제가 될 테고, 후자로 봤을 때는 대체로 만족스럽다. 그런 면에서는 소재뿐만 아니라 작가의 태도와 작법이라는 차원에서 보더라도 사회파적인 성격이 짙은 셈이다.

 미스터리의 성격과는 별개로, 일본 특유의 괴담 분위기도 좋았다. 아니, 이 경우는 일본식 괴담이라기보다는 스티븐 킹이나 클라이브 바커 쪽이 더 생각나기는 했는데. 아무튼 전편을 압도하는 "춤추는 피에로의 수수께끼"가 남기는 시각적 심상이 무척 강렬하고 기괴하다. 한밤중에 읽다가 잠자리에 들었는데 오랜만에 옷장 속이랄지 문 뒤랄지 머리 위가 좀 무섭게 느껴져 공포 소설이라고 해도 좋지 않을까 싶을 정도였다. 요코미조 세이시의 긴다이치 코스케 시리즈에서도 그렇지만, 본격 미스터리에 이런 기괴하고 음습한 심상을 결합하고 다시 그 뒤에 인간의 뒤틀린 사정이 얹는 수법은 상당히 효과적인 듯하다. 결국 범행 트릭이 논리적으로 파해 되더라도 답을 알게 된 것만으로는 해소할 수 없는 잔념이 남아 범죄라는 행위의 불쾌하고 끈끈한 점을 꾸역꾸역 각인시킨다. 악취미라고 해도 어쩔 수 없으나, 역시 범죄를 다루는 이야기에는 그런 정도의 불편함이 남는 편이 좋다.

* * *

 이 작품에 국한한 이야기는 아닌데, 일본 작가가 자기 작품을 통해 제국주의 시대 일본이 행한 잔악한 행위를 반성하고 심지어 피해자들을 향해 사과하는 모습을 보고 있노라면 난처한 기분이 든다. 특히 다른 한국 독자들이 해당 작가를 '개념 있다'고 칭송하거나 올바른 역사의식에 관해 이야기할 때면 더더욱.

 작가 쪽은 문제 없다. 자신의 양심과 의식에 따라 자신이 할 수 있는 방식대로 실천에 나섰을 뿐이라고 생각한다. 문제는 피해자의 경험이 있는 국가의 후손인 나다. 작가는 작품을 통해 말하는 이상 독자에게 말할 수밖에 없는데, 그렇다면 사과도 일단은 내가 받는 게 된다. 바로 그게 난처하다. 내가 뭘 했다고 사과를 받는단 말인가.

 유감이라고 해야 할지 행운이라고 해야 할지 모르겠으나, 나는 일본 제국의 직접적인 피해자가 아니다. 내 부모님이 직접적인 피해를 겪는 모습을 보거나 듣지도 못했다. 국가 단위, 문화 단위에서 받은 간접적인 피해의 경위를 추적하여 '이건 일본 탓!'이라고 말하며 분노할 만큼 시야가 좁고 성실하지도 않다. 그래도 어쨌든 민족의 과거니까 민족적 공분을 느낀다는 논리에는 찬동할 수 없다. (그런 식의 막연하고 거대한 민족 의식은 안 좋은 방향으로 엇나가기가 훨씬 쉽다.)

 무엇보다도 지금 한국 사회는 구성원들에게 근현대사를 돌아보기를 권장하지 않는다. 그에 비하면 막연하게 우리는 피해자야, 우리는 당했어, 쟤들은 사과해야 해, 하는 구호를 내뱉으며 댓글에 쌍욕을 지껄여 자신의 애국심을 확인하는 데에 만족하는 모습은 너무 많지 않은가. 정작 아직도 생존해 있는 실제 피해자들을 국가/민족 차원에서 거듭 확인하고 위무하는 데에는 별다른 관심이 없으면서. 그러니까, 이 나라의 구성원으로서 나는 솔직히 말해 일본 제국주의 피해자에 관해 명확히 아는 바가 별로 없다. 장담컨대 그건 한국인인 나보다는 일본인인 시마다 소지가 훨씬 잘 알 거다. 이 사람이 더 신경 쓰며 발언하고 싶어 할 거다. 그런데 내가 뭐라고 이런 성실하고 양심적인 작가가 자신의 작품을 통해 고개 숙이는 앞에 뻔뻔히 서 있을 수 있겠나. 몇 세대가 지나고 나면 사과를 받는 데에도 공부가 필요하고 자성이 필요하다. 그게 부족해서, 고개를 숙이는 요시키 형사 앞에 굉장히 부끄러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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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약 한 달에 걸쳐 카야타 스나코의 『델피니아 전기』를 17권까지 읽었다. 처음 읽는 작품은 아니다. 한국어판 1권이 출간된 2002년부터 마지막 권인 18권이 출간된 2004년까지 꾸준히 한 권씩 모으며 아꼈던 추억이 있다. 그러다 어느 해엔가 팬터지 소설과 거리를 두기로 마음먹고 수납공간 확보를 위해 책을 처분하는 김에 팔아버렸더랬지. 문고본 크기라고 해도 열여덟 권이니 당장 차지하는 부피가 제법 되었고, 열여덟 권이나 되는 책을 과연 또 읽을 날이 오겠냐는 마음도 있었다. 그렇게 팔아치운 많은 책 중 『델피니아 전기』만은 몇 년에 한 번씩 다시 생각날 줄, 그때는 미처 몰랐다. 이후 간간이 생각날 때마다 손을 내뻗다가도 이미 팔아버린 열여덟 권짜리 책을 다시 사기 멋쩍어 몇 번이고 마음을 돌렸고, 그러다가 정말로 다시 읽고 싶어졌을 즈음에는 어느덧 절판 신세였다. 전질을 한 번에 구하자면 대여점용 디럭스판(단가 줄이려고 일러스트 다 빼고 싸게 낸 판본인데 뭐가 디럭스냐, 뭐가)조차 프리미엄을 붙여 사야 하는 지경이었다. 수년 전에 좋아했던 적이 있는 열여덟 권짜리 소설을 상태도 썩 좋지 않은 중고로 몇만 원씩 주고 사고 싶지는 않았다. 그때 팔지 말고 조금만 더 놔둘걸, 결국 『델피니아 전기』와의 인연은 여기까지구나 싶었다.

 그런데 한 달 전 동네 알라딘 중고서점에 갔다가 우연히 『델피니아 전기』 1~9권을 보았다. 디럭스판도 아니었고 상태도 좋았다. 무엇보다도 절판 프리미엄에 둔한 알라딘 중고서점이다 보니 권당 가격이 1500~1800원으로 책정돼 있었다. 고민했다. 상태나 가격은 딱 좋은데, 과연 10~18권도 이런 식으로 구할 수 있을까? 결국 못 구하면 괜히 또 중고 전질을 비싸게 주고 다시 사게 되지 않을까? 해서 결단을 미루고 귀가하여 검색에 들어갔다. 알라딘 홈페이지에서 각 중고서점 지점에 들어가서 일일이 둘러보았다. 전국 열여덟 개 지점을 다 뒤졌는데, 놀랍게도, 정말 놀랍게도 10~18권을 갖추고 있는 지점이 하나 있었다. 게다가 그 지점은 내 고향에 있는 지점이었다. 더구나 당시 그 지점에는 9~18권만 있었다. 마치 나더러 앞부분을 찾아오라는 듯이. 이것도 천운인가 싶어 당장 나가서 1~9권을 샀다. (서점에 도착해서는 당장 계산대로 가지 않고 선 채로 1권 앞부분을 읽어보며 여유를 부리고 있었는데, 몇 분 후 한 청년이 와서 라이트 노벨 코너를 기웃거리더니 내가 들고 있는 책의 표지를 유심히 지켜보았다. 혹시 자네도 같은 책을 노리고 온 건가? 내가 약간 빨랐군. 미안해.) 읽어본 사람이라면 알 테지만 이 책은 일단 갖춰만 놓으면 읽는 데에는 오래 걸리지 않는다. 워낙 가볍고도 재미있어서 금세 다음 권을 집어 들게 된다. 그나마도 아껴가면서 일주일 동안 다 읽었다.

 그런 다음 고향에 갈 때까지 3주를 기다렸다. 알라딘 오프라인 중고서점은 인터넷 주문이나 배송은 해주지 않는다는 사실을 그렇게 알게 됐다. 정 급하면 고향에 계신 부모님께 부탁해도 됐을 테지만 아무래도 만화책 크기에다 각종 캐릭터가 그려진 표지를 보시면 한심스러워하실까 봐 말 꺼내기가 어려웠다. 고향에 연락을 주고받는 친구도 없었다. 매일 홈페이지에 들어가 재고를 확인하며 귀향 일정을 검토할 뿐이었다. 물론 걱정도 됐다. 혹시 가진 돈이 많지 않았던 어느 학생이 1~8권만 샀다가 나중에 9~18권을 사려고 했던 건 아닐까. 그래서 어느 날 검색해 보면 사라져 있는 게 아닐까. 하지만 정말 그런 학생이 있다면 학창 시절의 나라고 생각하고 양보하지 뭐. 내 현재 거주지와 옛 거주지에 있는 중고서점에 각각 전반부와 후반부가 있다는 사실을 확인하고 느낀 전율에 대한 믿음도 있었다. 터무니없이 낭만적인 이야기인지도 모르겠으나, 운명의 힘에 의지한 채 기다렸다가 때가 되었을 때 만나면 더 기쁘리라는 생각에 사로잡히기도 했다. 심지어 3주가 지나고 고향에 갔을 때도 첫날은 그냥 보내고 둘째 날 오후 느지막이 서점을 찾았다. 책은 거기서 날 기다리고 있었다. 디럭스판도 아니었고 상태도 대체로 좋았으며 가격도 여전히 1500~1800원이었다. 그렇게 나는 『델피니아 전기』를 다시 한 번 내 책장에 들였다. 작품의 내용 이전에 책을 만나는 과정 자체가 어쩐지 『델피니아 전기』답다는 기분이 들었다. 왜냐하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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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델피니아 전기』는 역자 후기도 재미있다. 1~8권은 김희정이 번역했고 9~18권은 김소형이 번역했는데 어느 역자든 간에 통상의 소설책 뒤에 실린 무게 있는 후기 대신 역자/독자로서 자신의 관심사를 독자들과 공유하듯 도란도란 말을 거는 후기를 썼다. 문체부터가 독자에게 말을 건네는 문체였다. 그중 김희정은 번역하기 고민스러웠던 부분을 후기에서 나누는 역자였다. 그는 일본어에서 "나"를 가리키는 표현의 차이를 설명하며 그것을 어떤 식으로 반영했는지, 자신이 "수갑"이라고 옮긴 장비가 무엇을 가리키는지 등을 찬찬히 설명했다. 나도 역자 후기라고 한다면 역자가 작품을 해설하기보다는 자신의 번역 작업에 관해 말하는 편이 더 재미있지 않을까 생각하는데, 그게 어쩌면 십여 년 전 읽었던 『델피니아 전기』의 영향일 수도 있겠구나 싶어 새삼 감회가 새로웠다.

 그런 후기 중에서도 특히 재미있었던 건 6권의 후기였다.

 하지만 언제나 그렇듯, 번역으로 역자를 괴롭히지(?) 않으면 델피니아가 아니지요. 이번에는 정말 모든 것이 스무스하게 흘러간다고 생각했습니다. 별로 어려운 내용도 없고, 만담들이 쏟아져 나오는 통에 역자도 폭소를 하면서 번역해 나간 즐거운 한 편이었습니다.
 그러나 여기에서 걸리는 것이 하나 있더라 이겁니다.
 파로트의 암살부대원들…, 즉 '행동원'이라고 번역된 실전 부대들, 셰라도 속한 바로 그 계급의 원래 이름이 무엇이냐 하면….
 '행자(行者)'였던 것입니다.
 지금 무언가 움찔, 하신 분들. 아마 역자와 비슷한 느낌을 받으셨을 겁니다.
 저는 사실 그다지 인터넷 쪽에서 서클이나 게시판 활동을 하진 않습니다. 인터넷은 어디까지나 자료 탐색용으로 주로 쓰고 있는데…. 그런 저마저 이 행자라는 단어에는 갑자기 뜨악하게 되더군요. 더구나 혹시나 해서 그 단어를 친구나 가족들에게 불러주고 '뭐가 제일 먼저 떠올라?'라고 하니까 당장에…, 바로 '그 대답'이 돌아오는 겁니다.
 더구나 그 부분을 읽어본 가족이 "그럼 실전부대에 선출돼서 행자가 되는 건 득행하는 거야?"라던가 "셰라는 리를 압박하다가 쎄우러 들어간 거네?"라던가 하는 소리를 내뱉는 걸 듣다보면…. (오 마이 갓)
 바꿀 수박에 없었습니다. 행자라는 말이 사실 지극히 자연스럽고 잘 어울림에도 불구하고, 이건 '워리'와 마찬가지 사태가 벌어지고 말겠더군요.
 덕분에 실행 부대의 이름은 '행동원'이라는 너무나 지극당연한 단어가 되어버렸습니다. 어쩌겠습니까. 대한민국의 현실인데요~(눈물).
 혹시 무슨 소리인지 모르겠다는 분들이 계시다면 그냥 그러려니하고(뭔 소리인지 아시려 하지 마시고) 읽어주세요.

 이 후기를 읽다가 나는 역자와는 다른 이유에서 잠시 정신이 멍해졌다. 저 단어들이 무슨 뜻인지 잠시나마 더듬어 보는 시간이 필요했다. 대체 얼마만에 듣는 "햏자"요 "득햏"이며 "방법"이고 "쎄우다"란 말인가. 맞아, 그런 게 있었지. 이건 2002년 12월에 쓴 후기다. 그때는 정말 모두가 다 아는 말이었고 특히 다른 어휘는 몰라도 "방법" 같은 표현은 계속 쓰일 줄 알았는데. 12년이 지나는 동안 어느새 사어가 되어가고 있었구나. 이 후기를 쓰던 당시 역자는 12년 뒤의 독자가 느낄 시간적 거리감 같은 건 상상도 못 했을 텐데. 머나먼 옛날 글이 아니라 내가 기억하고 있는 어린 시절의 글마저 이렇게 나이 먹을 수 있다는 사실을 눈앞에서 실감하게 되자 어쩐지 코끝이 찡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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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김소형은 김희정과는 달리 독자의 감상에 가까운 역자 후기를 썼다. 좀 더 정확히 말하자면 그는 작품을 읽으며 떠오른 뇌내망상을 후기에서 공유하는 역자였다. 그는 진도를 나가지 못하는 주인공 커플의 신세를 한탄했고, 카야타 스나코는 묘사하지 않았던 사건의 이면을 팬픽 쓰듯 상상해 들려주었다. 특히 드레스를 끔찍하게 싫어하는 주인공 리가 공식 석상에 나서기로 한 뒤 리의 시녀가 겪었을 짧은 행복의 나날과 그 결말의 무참함을 되짚어주는 12권의 후기는 걸작이었다. 작가인 카야타 스나코도 그 후기를 보았더라면 뛸뜻이 좋아했으리라.

 그렇게 10여 년 전의 역자와 기쁨을 함께하며 후반부를 달린 끝에 결말까지 한 권 남은 지금, 나는 좀 머뭇거리고 있다. 김소형은 17권의 역자 후기에 이렇게 썼다.

 여기서 조금 개인적인 이야기.
 최근에 제가 굉장히 좋아하는 모 소설 시리즈가 근 14년 만에 종결을 맞이했습니다. 팬으로서 정말로 좋아하는 인물들이 더 이상 나오지 않는다는 것은, 이미 출판된 분량 이후로는 더 이상 볼 수 없다는 것은 자신이 좋아하는 캐릭터의 시간이 거기서 영원히 정지되었다는 것을 뜻합니다.
 끝났다고 해서 좋아하던 작품이 싫어지는 것은 아닙니다. 다시 읽고 또 읽을 때마다 새로운 감동이 있고 새로운 발견이 있지요. 등장인물의 감정에 다시 젖어보며 눈시울을 적시고, 때로는 패러디 거리를 발견해 즐거워하며 계속해서 즐길 수 있습니다.
 하지만 그들의 시간은 영원히 멈췄습니다.
 생생한 모습 그대로 굳어버린 폼페이 화산의 유적을 바라보는 듯한 기분일까요.
 여전히 좋아하고 앞으로도 좋아할 테지만, 더 이상 움직이지 않는 캐릭터를 바라보는 마음은 어딘가 싸아해지는 구석이 있습니다.
 그들은 이 자리에 멈춰버렸고, 현실을 살아가는 저는 앞으로도 계속 움직여야 합니다.
 바라지 않아도 조금씩 조금씩, 제가 걸어감에 따라 그들과도 조금씩 멀어져가겠지요.

 이 후기가 이중 삼중으로 마음을 울렸다. 과연, 1~9권은 오랜만에 만난 옛 친구와의 재회를 기뻐하는 기분으로 읽었다면 10권 이후로는 다가올 이별에 대한 예감 속에 읽었다. 자세한 장면은 기억나지 않지만, 18권에 이르러 리와 델피니아 사람들이 헤어진다는 점만은 분명하다. 좋은 결말임은 이해한다. 갑자기 이쪽 세계에 나타났으니 작품 끝날 즈음엔 원래 세계로 돌아가야지. 리는 델피니아에서 잘 살아가는 와중에도 언제나 자신이 이방인임을 자각하고 있었고, 늘 두고 온 파트너를 그리워했다. 오히려 어떻게 해서든 남도록 했다면 작품이 망가졌겠지. 하지만 이별을 능동적으로 선택한다는 건 어찌 되었든 슬픈 일이다. 이쪽도 살아있고 저쪽도 살아있고 이쪽저쪽 모두 상대를 좋아하는데도 앞으로 다시는 만나지 않기로 하고 작별을 고하다니. 그런 이별이라면 되도록 미루고 싶은 마음이다. 월이 그렇듯, 언젠가는 올 테지만 그건 그냥 막연하게 언젠가로만 해두고 싶다.

 게다가 이 후기를 쓴 역자 김소형은 더는 세상에 없다. 내가 죽은 사람들의 글을 읽을 때마다 언제나 상념에 잠긴다는 이야기는 아니다. 하지만 김소형은 건강 문제로 번역을 그만 둔 후 2012년에 고작 서른일곱의 나이로 세상을 떴다. 내가 처음 『델피니아 전기』를 읽을 때만 해도 멀쩡히 살아서 좋은 번역으로 많은 독자들에게 즐거움을 안겨주었고, 그 자신 또한 독자로서 후기를 통해 마음껏 망상을 펼치고 캐릭터들을 사랑하던 사람이다. 그랬는데, 10년이 지난 지금 나는 여전히 살아있건만 그는 고인이 되어 활자로만 남아 있다. 그런 이가 하필이면 책이 끝나는 순간 자리에 멈춰버리는 캐릭터에 관한 이야기를 하고 있으니, 어찌 머뭇거리지 않을 수 있을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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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카야타 스나코는 『델피니아 전기』와 세계를 공유하는 『새벽의 천사들』과 『크래시 블레이즈』를 줄줄이 써냈다. (『스칼렛 위저드』도 같은 시리즈라고 할 수 있지만 그 자체로는 『델피니아 전기』와 접점이 미미하다니까.) 하지만 이 작품들까지는 보고 싶지 않다. 여러 작품에 걸쳐 세계를 확장하는 작가에 대한 불신도 불신이지만, 무엇보다도 리가 다른 세계로 넘어가서 또 다른 사람들과 친분을 맺고 델피니아에 있을 때만큼이나 즐겁거나 슬픈 일을 겪는 모습을 보고 싶지 않아서다. 리가 『델피니아 전기』의 리로만 남아주면 좋겠다, 그런 이기적인 마음이 있다. 가이아에서 지구로 돌아간 칸자키 히토미가 반 파넬 없는 세계에서 근사한 사람 만나 세계일주 하면서 겪는 모험담 같은 걸 보고 싶을 리가 없잖아.

 『델피니아 전기 외전』도 두 권이 있다고 한다. 그 또한 망설이게 된다. 궁금하기는 하다. 하지만 『델피니아 전기 외전』은 또 다른 역자가 번역했는데, 거의 이질감이 없었던 『델피니아 전기』 8권 → 9권과는 달리 호칭이나 고유명사 번역에 차이가 있어서 말들이 많다. 하필이면. 옛 번역자의 부재를 느끼고 싶지 않은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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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나는 앞으로 계속 움직여야 한다는 사실을 선뜻 받아들이기 어렵다. 재회가 없는 이별이라면 피하고만 싶다. 다시 만났을 때 여전히 그대로였으면 좋겠다. 10여 년 만에 다시 만난 『델피니아 전기』가 여전했듯, 그렇게 영원토록 제자리에 머물러 있고만 싶은 마음이 분명히 있다. 리와 월이 그러하듯, 변화를 받아들여야 함을 알면서도. 이번의 재회가 가져다준 달콤씁쓸한 변화를 음미하고 있으면서도.

Posted by 거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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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간밤에 잠 못 이루고 있다가 어찌어찌 하여 김기영 감독의 〈이어도〉를 봤다. 유튜브의 한국영상자료원 한국고전영화극장 채널을 통해서 처음부터 끝까지 본 첫 영화가 아닌가 싶다. 인터넷 스트리밍 서비스로 영화 보기를 꺼리는 편이라 그간 손이 잘 가지 않았는데 꽤 괜찮더라. 720p로 제공된 〈이어도〉는 물론이고 그다음에 조금 보다가 잔 〈양산도〉는 360p였는데도 아쉬운 대로 그럭저럭 볼 만했으니. 하기야 그 정도 영상을 대형 스크린에 띄워놓고 본 적도 몇 번 있으니까. 고전기 할리우드 영화라면 이런 식으로 볼 마음이 나지 않았을 텐데 한국의 옛 영화에 대해서는 화질이나 음질에 대한 기대가 현저히 떨어지다 보니 오히려 조금 안 좋은 소스로도 별 불만 없이 보게 되는 모양이다.

 〈이어도〉는 2007년에 서울아트시네마의 "시네마테크 전용관 설립을 위한 2007년 시네마테크의 친구들 영화제"에서 필름으로 한 번 본 적이 있다. 당시에는 좀 지루하게 봤고, 아마 중후반부에서는 좀 졸았던 것 같다. 많이들 김기영 감독의 영화를 처음 보는 순간의 쇼크에 관해 말하는데, 나는 이상하게도 처음 만날 때는 나른함을 느끼는 편이다. 물론 몇몇 장면이 뇌리에 콱 박히기는 마찬가지지만, 영화 전체를 흥미진진하게 즐기게 되는 건 두 번째, 세 번째 다시 볼 때부터다. 심지어 〈하녀〉도 그랬다.

 더구나 당시 서울아트시네마에서 가져온 필름은 삭제판이었다. 그때도 이미 〈이어도〉의 충격적인 '그 장면'에 대한 소문은 익히 들어 알고 있었는데, 막상 내가 본 영화에는 그런 장면이 없지 뭔가. 혹시 내가 졸았나? 아니야, 그 장면만은 꼭 보려고 집중했는데? 아까 그게 전부인가? 하긴, 그런 장면은 21세기 한국 영화에서도 보여주기 어렵잖아. 각본상에서만 적나라하게 묘사되고 실제 영화에서는 간접적으로 넘어갈 수밖에 없었겠지? 그런데 그렇게 생각하고 있던 차에 그날 관객과의 대화 진행을 맡은 김홍준 교수가 '한국영상자료원이 소장하고 있는 〈이어도〉 필름 중에는 삭제판이 있고 무삭제판이 있는데 방금 여러분들이 보신 것은 삭제판이다. 착오가 있었던 모양이다.' 라고 설명하는 게 아닌가. 나 원 참. 그게 〈이어도〉 첫 상영이었던 터라 서울아트시네마에서는 이후 상영에서는 무삭제판 필름을 새로 가져다 상영하겠다고 했지만, 당시 서울에서 살지 않았던 나는 주말이 아닌 다른 상영일은 챙길 수 없었다.

 그 후 김기영 컬렉션 DVD 박스 세트도 나왔고, 한국영상자료원에서도 몇 번 상영했을 테고, KMDb VOD 서비스나 유튜브를 통해서도 얼마든지 볼 수 있었지만, 첫 감상이 미적지근했던 탓에 선뜻 〈이어도〉를 다시 볼 마음이 들지 않았다. 그렇게 어느덧 7년이 지난 거다. 그 7년 동안 늘 궁금했다. 정말 '그 장면'은 실재하는 걸까? 실재한다면 어떤 식으로? 아무리 생각해봐도 그게 나올 수 있을 리가 없잖아? 역시 간접적으로 묘사하는 거겠지. 그런데 간접 묘사라면 왜들 그렇게 난리일까? 김기영 신화화의 일환은 아닐까? 왜, 어떤 예술가가 일정한 명성을 쌓게 되면 그가 한 미적지근한 일도 덩달아 와와와 하면서 개성의 증거로 떠받드는 그런 분위기가 있지 않나. 더구나 김기영은 한국영화계 구전설화의 끝판왕 같은 존재니까, 뭔가 좀 독특한 게 있으면 부풀려지기도 한결 쉬울 터. 아마 그런 상황일 테지… 하지만 정말 '그 장면'이 실재하면 어쩌지? 막상 확인하면 실망할 것 같다는 걱정과, 실체를 알고 싶은 호기심이 끝없이 줄다리기를 벌였다. 어쩌면 그런 기대와 불안 사이에 서성이는 기분 자체에 홀려 무의식적으로 〈이어도〉와의 재회를 미뤄왔는지도 모르겠다. 영화를 보는 순간 줄다리기는 끝날 테니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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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사실 어젯밤에도 이번에야말로 기필코 〈이어도〉의 실체를 확인하고 말겠다는 굳은 마음가짐으로 영화를 보기 시작했던 건 아니다. 그저 화질이나 확인해 보고 두어 장면쯤 보다가 끄고 잠자리에 들 생각이었다. 첫 장면에서 '야, 섬 멋지네. 화질도 이만하면 좋은데?' 하다가 그만 어어어, 하고 관성에 휩쓸려버릴 줄 알았나. 마음의 준비가 되지 않은 상태에서 얼결에 '맨눈'으로 영화를 보는, 오늘날에는 드문 감상 체험. 앞으로 〈이어도〉를 다시 보더라도 이 같은 뜻밖의 기쁨을 누리기는 쉽지 않으리라.

 다시 만난 〈이어도〉는 역시나 기억보다 훨씬 근사했다. 우선 이 영화는 (좋은 의미에서) 김기영 감독의 몇 안 되는 '웰메이드' 영화다. 각본과 촬영, 편집의 고른 매무새도 그렇지만 필름 보존 상태까지 포함해서 하는 얘기다. 아마도 〈이어도〉가 〈하녀〉와 더불어 김기영의 대표 걸작으로 손꼽히는 까닭도 어느 정도는 그 원형을 고스란히 만끽할 수 있기 때문이 아닐까. 특히 〈화녀〉나 〈충녀〉가 불그죽죽 외국어 자막이 박힌 필름으로만 간신히 존속하고 있음을 떠올리노라면 정일성 촬영감독이 김기영과 더불어 고심하여 빚어낸 색감을 큰 불편 없이 맛볼 수 있다는 사실은 한결 더 값지게 다가온다. 이연호가 쓴 『전설의 낙인』에 실린 정일성의 증언에 따르면 〈이어도〉는 일부러 수묵화처럼 색깔을 빼서 만든 영화였다지만, 그 창백함 속에서도 푸른색, 붉은색, 초록색이 도드라지며 시네마스코프 구석구석 눈길을 사로잡을 때마다 탄식이 절로 나오고 마리오 바바가 부럽지 않다. 이 영화의 섬에 관해서 이야기할 때 어찌 시퍼런 풀빛을 배제할 수 있을까. 또 이화시의 마성을 이야기할 때 어찌 붉은 저고리를 빼놓을 수 있을까.

 화려한 촬영과 더불어 김기영의 편집 양식에 관해 다시 생각하게 된 것은 이번 감상의 가장 큰 수확이었다. 여러 차례 '증인'들의 회상 속을 드나드는 안정적인 구조가 주는 인상과는 달리, 김기영은 사실 시공간을 난폭하게 다룬다. 여러 개의 사건-시공간은 밑도 끝도 없이 시작하여 끝난다. 하지만 각각의 시공간 조각들은 최면에 가까운 음향 효과나 끝없이 반복될 것 같은 음악, 비슷한 상황이나 대조적인 인과 관계를 연결고리로 삼아 한 호흡으로 묶인다. 흐름을 따라가려면 매 순간 관객이 개입하여 빈틈을 메우며 따라가야 한다. (구글링해보니 난삽한 편집이라는 감상들이 있던데, 김기영의 다른 영화라면 몰라도 〈이어도〉에 관해서는 동의하기 어렵다.) 그 불가피한 '몰입' 덕분에 잦은 회상 구조 속에서도 감상자의 긴장이 흐트러지지 않는다. 마스무라 야스조나 박찬욱이 떠오르는 이런 편집 방식은 시공간의 연속성과 밀도가 높은 〈하녀〉에서는 미처 느끼지 못했던 특성으로(다만 음악의 성질은 유사하다), 장차 김기영의 다른 영화를 접할 때 좀 더 눈여겨볼 일이다.

 김기영 영화를 처음 보는 관객들에게 웃음을 선사하곤 하는 특유의 연기 양식 또한 이번에는 전혀 우습지 않았다. "~다."로 끝나는 특유의 어투가 낯설 수는 있다. 하지만 많은 요소가 고도로 양식화된 이런 영화에서 연기에만 현실주의를 요구해야 할 이유는 없다. 상식적인 차원에서는 무의미하거니 기괴해 보이는 몸짓이나 동선은, 인물이 처한 극단적인 상황에서 나올 법한 감정을 신체 언어로 충실히 옮겨낸 결과물로 보인다. 신문사에 입사한 후 환경 오염 실태를 취재하던 천남석이 비분강개하여 "현재 바다 고기가 모두 죽고 있습니다! 난 싸웁니다! 난 싸웁니다! 싸운다고요! 난 싸울 거라고요! 난 싸운다고요!"라고 외치며 두 팔을 풍차처럼 휘두르고 달려가는 모습조차도, 그의 성격이나 상황을 고려하면 과격할지언정 우스꽝스럽지는 않다. 그런가 하면 천남석의 시신을 불러들이는 굿판을 벌이던 도중 선우현과 편집국장을 질타하는 무당 뒤로 슬며시 다가와 뜻 모를 눈길을 던지는 술집 여자의 기이한 자태는 영화의 후반부에 휘몰아치게 될 감정을 얼마나 잘 반영하고 있는지. 〈이어도〉의 연기 양식이나 감정선은 멜로드라마(장르로서가 아닌 양식으로서의 멜로드라마)를 극단으로 밀어붙인 결과일 뿐이다. 마스무라의 연기 양식을 존중할 수 있다면 이제 김기영의 연기 양식 또한 괴이하다거나 황당하다거나 하는 수사는 접어두고 진지하게 받아들일 수 있어야 하지 않겠나.

 여기에 김기영 영화에 늘 따라붙는 '전근대와 근대의 동거'도 (약간 뒷북치는 기분이지만) 빼놓을 수 없겠다. 예전에는 이를 다소 추상적으로만 이해했으나 이제 구체적인 실체를 지닌 상황으로 받아들이게 된 것은 그간 이 문제에 관해 좀 더 민감해진 탓일까? 표면적으로 〈이어도〉의 등장인물들은 근대적 기획에 매달리고 있다. 그것은 환경 문제, 양식업, 관광 산업, 언론, 상식의 형태로 등장한다. 그리고 반대편에는 섬의 폐쇄성, 일부다처제, 가부장적 착취, 무속 신앙, 가문의 저주와 같은 전근대적 의식이 있다. 문제는 이 둘이 한몸이라는 사실이다. 근대와 전근대는 편을 갈라 싸우지 않는다. 근대적 인물과 전근대적 인물이 나뉘지도 않는다. 모든 사람이 전근대적 의식에 머무른 채 근대를 갈구한다. 둘은 하나의 몸-공동체 안에서 각자 상대를 경멸하고 상대를 향해 퇴행하고 상대를 착취한다. 양쪽 모두 자신의 목표를 완전하게 관철하기 전에 자멸한다. 이 불균형은 거의 현대 한국의 원죄처럼 보이며, 절망스러울 정도로 동시대적이다. (최근 한국 사회에서 발생한/발굴된 갖가지 사건들을 돌이켜보건대 심지어 '영화적 과장'이라는 단서조차 필요 없을 듯하다.)

* * *

 이 모든 폭격 뒤에, 문제의 '그 장면'이 도래한다. 그래, 그 장면은 있었다. 정말로 있었다. 전설에서만, 각본에서만, 외화면에서만 있는 게 아니라 정말로 있었다. 화면 가장자리에 살짝 걸쳐서도 아니고, 그림자에 가려서도 아니고, 카메라 정중앙에 정말로 있었다. 그걸 보는 순간 어안이 벙벙해지고 사고 회로가 정지했다. 물론 얘기는 많이 들었다. 물론 모형인 줄도 안다. 하지만 저게 어떻게 저 자리에 정말로 있을 수가 있는 거지? 잠시 후에 깨달았다. 아, 개봉 당시에는 당연히 삭제됐지만 다행히 검열 전의 무삭제판도 살아남은 덕분에 오히려 '고전영화 복원'이라는 이름으로 동시대 한국 영화보다 더 과격한 장면을 볼 수 있게 된 거구나. 그렇게 생각한 다음, 다시 잠시 후에 깨달았다. 그러니까, 어쨌든 김기영이 그것을 찍.었.다.는 얘기로구나. 잘리지 않을 리가 없다는 사실을 알면서도. 이건 이론의 여지가 없다. 이런 장면은 잘리지 않을 방법이 없다. 지금 찍어도 이건 잘리기에 십상이다. 영등위가 없더라도 투자자들이 먼저 잘라낼 것이다. 애초에 검열을 회피할 수 있는 다른 묘사를 궁리해야만 한다. 다른 영화의 예를 들 것도 없이 〈이어도〉의 초반부에서 이미 강간 장면을 은유적으로 처리한 적이 있지 않던가. 그런데도 김기영은 그 장면만큼은 그대로 찍는 방법 외에 다른 길은 알지 못한다는 듯 그냥 찍어버렸다. 그리고 영화는 기어이 잘리고야 말았다. 대체 무슨 심정으로? 언젠가 좋은 날이 와서 자기 영화가 살아남을 수 있으리라는 희망으로? 아니면 잘려나간 자리를 볼 때마다 고함을 지르기 위해? 어느 쪽이든 거기에선 무시무시한 목소리가 들린다. 나는 내가 할 수 있는 최선의 영화를 만들었어. 그리고 너희는 이걸 망가뜨림으로써 너희가 문제라는 사실을 스스로 증명하게 될 거야. 장면의 내용 때문이 아니라 그 장면이 실재한다는 사실만으로 나는 그만 모골이 송연해졌다. 37년 만에 뒤늦게 도달한 분노의 흔적. 마치 대학가 술집 한구석 새내기들의 낙서로 까맣게 뒤덮인 누런 벽 한쪽 귀퉁이에 아직도 남아있는 시위대의 낙서처럼 그렇게 절절하게, 〈이어도〉는 도착했다.

YouTube 영상을 스크린캡처하여 jpg로 저장함. 720p랬으니까 가로를 1280픽셀로 맞춘 다음 블랙 바를 잘라내었다.



본문에서 언급한 영화 :
 - 양산도 (1955)
 - 이어도 (1977)
 - 하녀 (1960)
 - 화녀 (1971)
 - 충녀 (1972)

Posted by 거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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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아래 다른 글에서 언급했다시피 현재 4월 서울아트시네마에서 열릴 버드 뵈티커 특별전 상영작을 번역하고 있다. 꽤 오랫동안 '이 감독 좋아하는 사람은 한국에 나밖에 없는 거 아닌가' 하는 오만한 애정마저 품었던 감독인데, 이렇게 소개된다니 반갑기도 하고 허전하기도 하다. 어차피 이번에 소개된다고 한들 갑자기 우리나라에서 인기인이 될 리는 없겠고, 고전기 할리우드의 더 유명한 감독들만큼 알려질 리도 없을 테고, 아마 그저 라울 월쉬나 새뮤얼 풀러보다 약간 못한 정도, 대충 리처드 플라이셔 정도의 인지도를 쌓고 끝나지 않을까 싶긴 하지만.

 하여간 이 거의 알려지지 않은 감독에 관해서 한국 영화 업계 종사자들이 종종 겪곤 했던 어려움이 하나 있으니(당사자들이 과연 어려움이라고 여겼는지는 의문이지만), 바로 "Boetticher"라는 성을 어떻게 부르고 표기하느냐 하는 문제다. 답은 2001년 12월 1일 이 감독이 세상을 떠났을 때 『뉴욕 타임즈』에 실린 부고 기사에서 확인할 수 있다. 미국인들에게도 이것은 약간 신경 쓰이는 문제였던지, 기사는 Boetticher 옆에 "pronounced BET-i-ker"라는 설명을 덧붙여두었다. 더불어 지금은 인터넷 시대다. 유튜브를 조금 뒤져보면 사람들이 유명인사의 이름을 어떻게 부르는지 직접 확인하기란 그리 어렵지 않다. 뵈티커를 존경했던 마틴 스콜세지, 클린트 이스트우드, 그리고 실제로 뵈티커와 함께 일했던 로드 테일러, 스튜어트 위트먼 등은 모두 그를 "BET-i-ker"라고 부른다. 한국어로는 "베티커" 정도? 혹은 Boetticher라는 성이 원래 독일계이며 실제로 발음할 때 "ㅗ" 음가가 살짝 들어가는 것을 고려하면 "뵈티커"라고 할 수도 있겠고.

 서울아트시네마에서는 현재 "버드 보티커"로 낙점한 모양인데, 기존에 널리 쓰이던 "보티처"나 "보에티처"가 되지 않은 것은 다행이지만 "boe"를 "보"로 표기하기로 한 것은 역시 조금은 낯설고 아쉽다. 외국어 발음을 한국어 표기로 옮기는 과정에서는 어느 정도의 음차가 발생하기 마련이니 완벽한 표기는 없다고 해야 할지도 모르겠지만, 그렇더라도 "보"보다는 "베"나 "뵈"가 더 실제 통용되는 발음에도 가깝고 외래어 표기법에도 맞는지라. 이렇게 한 번 선례를 만들면 아무래도 이후에 널리 쓰일 텐데.
Posted by 거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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