약 한 달에 걸쳐 카야타 스나코의 『델피니아 전기』를 17권까지 읽었다. 처음 읽는 작품은 아니다. 한국어판 1권이 출간된 2002년부터 마지막 권인 18권이 출간된 2004년까지 꾸준히 한 권씩 모으며 아꼈던 추억이 있다. 그러다 어느 해엔가 팬터지 소설과 거리를 두기로 마음먹고 수납공간 확보를 위해 책을 처분하는 김에 팔아버렸더랬지. 문고본 크기라고 해도 열여덟 권이니 당장 차지하는 부피가 제법 되었고, 열여덟 권이나 되는 책을 과연 또 읽을 날이 오겠냐는 마음도 있었다. 그렇게 팔아치운 많은 책 중 『델피니아 전기』만은 몇 년에 한 번씩 다시 생각날 줄, 그때는 미처 몰랐다. 이후 간간이 생각날 때마다 손을 내뻗다가도 이미 팔아버린 열여덟 권짜리 책을 다시 사기 멋쩍어 몇 번이고 마음을 돌렸고, 그러다가 정말로 다시 읽고 싶어졌을 즈음에는 어느덧 절판 신세였다. 전질을 한 번에 구하자면 대여점용 디럭스판(단가 줄이려고 일러스트 다 빼고 싸게 낸 판본인데 뭐가 디럭스냐, 뭐가)조차 프리미엄을 붙여 사야 하는 지경이었다. 수년 전에 좋아했던 적이 있는 열여덟 권짜리 소설을 상태도 썩 좋지 않은 중고로 몇만 원씩 주고 사고 싶지는 않았다. 그때 팔지 말고 조금만 더 놔둘걸, 결국 『델피니아 전기』와의 인연은 여기까지구나 싶었다.

 그런데 한 달 전 동네 알라딘 중고서점에 갔다가 우연히 『델피니아 전기』 1~9권을 보았다. 디럭스판도 아니었고 상태도 좋았다. 무엇보다도 절판 프리미엄에 둔한 알라딘 중고서점이다 보니 권당 가격이 1500~1800원으로 책정돼 있었다. 고민했다. 상태나 가격은 딱 좋은데, 과연 10~18권도 이런 식으로 구할 수 있을까? 결국 못 구하면 괜히 또 중고 전질을 비싸게 주고 다시 사게 되지 않을까? 해서 결단을 미루고 귀가하여 검색에 들어갔다. 알라딘 홈페이지에서 각 중고서점 지점에 들어가서 일일이 둘러보았다. 전국 열여덟 개 지점을 다 뒤졌는데, 놀랍게도, 정말 놀랍게도 10~18권을 갖추고 있는 지점이 하나 있었다. 게다가 그 지점은 내 고향에 있는 지점이었다. 더구나 당시 그 지점에는 9~18권만 있었다. 마치 나더러 앞부분을 찾아오라는 듯이. 이것도 천운인가 싶어 당장 나가서 1~9권을 샀다. (서점에 도착해서는 당장 계산대로 가지 않고 선 채로 1권 앞부분을 읽어보며 여유를 부리고 있었는데, 몇 분 후 한 청년이 와서 라이트 노벨 코너를 기웃거리더니 내가 들고 있는 책의 표지를 유심히 지켜보았다. 혹시 자네도 같은 책을 노리고 온 건가? 내가 약간 빨랐군. 미안해.) 읽어본 사람이라면 알 테지만 이 책은 일단 갖춰만 놓으면 읽는 데에는 오래 걸리지 않는다. 워낙 가볍고도 재미있어서 금세 다음 권을 집어 들게 된다. 그나마도 아껴가면서 일주일 동안 다 읽었다.

 그런 다음 고향에 갈 때까지 3주를 기다렸다. 알라딘 오프라인 중고서점은 인터넷 주문이나 배송은 해주지 않는다는 사실을 그렇게 알게 됐다. 정 급하면 고향에 계신 부모님께 부탁해도 됐을 테지만 아무래도 만화책 크기에다 각종 캐릭터가 그려진 표지를 보시면 한심스러워하실까 봐 말 꺼내기가 어려웠다. 고향에 연락을 주고받는 친구도 없었다. 매일 홈페이지에 들어가 재고를 확인하며 귀향 일정을 검토할 뿐이었다. 물론 걱정도 됐다. 혹시 가진 돈이 많지 않았던 어느 학생이 1~8권만 샀다가 나중에 9~18권을 사려고 했던 건 아닐까. 그래서 어느 날 검색해 보면 사라져 있는 게 아닐까. 하지만 정말 그런 학생이 있다면 학창 시절의 나라고 생각하고 양보하지 뭐. 내 현재 거주지와 옛 거주지에 있는 중고서점에 각각 전반부와 후반부가 있다는 사실을 확인하고 느낀 전율에 대한 믿음도 있었다. 터무니없이 낭만적인 이야기인지도 모르겠으나, 운명의 힘에 의지한 채 기다렸다가 때가 되었을 때 만나면 더 기쁘리라는 생각에 사로잡히기도 했다. 심지어 3주가 지나고 고향에 갔을 때도 첫날은 그냥 보내고 둘째 날 오후 느지막이 서점을 찾았다. 책은 거기서 날 기다리고 있었다. 디럭스판도 아니었고 상태도 대체로 좋았으며 가격도 여전히 1500~1800원이었다. 그렇게 나는 『델피니아 전기』를 다시 한 번 내 책장에 들였다. 작품의 내용 이전에 책을 만나는 과정 자체가 어쩐지 『델피니아 전기』답다는 기분이 들었다. 왜냐하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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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델피니아 전기』는 역자 후기도 재미있다. 1~8권은 김희정이 번역했고 9~18권은 김소형이 번역했는데 어느 역자든 간에 통상의 소설책 뒤에 실린 무게 있는 후기 대신 역자/독자로서 자신의 관심사를 독자들과 공유하듯 도란도란 말을 거는 후기를 썼다. 문체부터가 독자에게 말을 건네는 문체였다. 그중 김희정은 번역하기 고민스러웠던 부분을 후기에서 나누는 역자였다. 그는 일본어에서 "나"를 가리키는 표현의 차이를 설명하며 그것을 어떤 식으로 반영했는지, 자신이 "수갑"이라고 옮긴 장비가 무엇을 가리키는지 등을 찬찬히 설명했다. 나도 역자 후기라고 한다면 역자가 작품을 해설하기보다는 자신의 번역 작업에 관해 말하는 편이 더 재미있지 않을까 생각하는데, 그게 어쩌면 십여 년 전 읽었던 『델피니아 전기』의 영향일 수도 있겠구나 싶어 새삼 감회가 새로웠다.

 그런 후기 중에서도 특히 재미있었던 건 6권의 후기였다.

 하지만 언제나 그렇듯, 번역으로 역자를 괴롭히지(?) 않으면 델피니아가 아니지요. 이번에는 정말 모든 것이 스무스하게 흘러간다고 생각했습니다. 별로 어려운 내용도 없고, 만담들이 쏟아져 나오는 통에 역자도 폭소를 하면서 번역해 나간 즐거운 한 편이었습니다.
 그러나 여기에서 걸리는 것이 하나 있더라 이겁니다.
 파로트의 암살부대원들…, 즉 '행동원'이라고 번역된 실전 부대들, 셰라도 속한 바로 그 계급의 원래 이름이 무엇이냐 하면….
 '행자(行者)'였던 것입니다.
 지금 무언가 움찔, 하신 분들. 아마 역자와 비슷한 느낌을 받으셨을 겁니다.
 저는 사실 그다지 인터넷 쪽에서 서클이나 게시판 활동을 하진 않습니다. 인터넷은 어디까지나 자료 탐색용으로 주로 쓰고 있는데…. 그런 저마저 이 행자라는 단어에는 갑자기 뜨악하게 되더군요. 더구나 혹시나 해서 그 단어를 친구나 가족들에게 불러주고 '뭐가 제일 먼저 떠올라?'라고 하니까 당장에…, 바로 '그 대답'이 돌아오는 겁니다.
 더구나 그 부분을 읽어본 가족이 "그럼 실전부대에 선출돼서 행자가 되는 건 득행하는 거야?"라던가 "셰라는 리를 압박하다가 쎄우러 들어간 거네?"라던가 하는 소리를 내뱉는 걸 듣다보면…. (오 마이 갓)
 바꿀 수박에 없었습니다. 행자라는 말이 사실 지극히 자연스럽고 잘 어울림에도 불구하고, 이건 '워리'와 마찬가지 사태가 벌어지고 말겠더군요.
 덕분에 실행 부대의 이름은 '행동원'이라는 너무나 지극당연한 단어가 되어버렸습니다. 어쩌겠습니까. 대한민국의 현실인데요~(눈물).
 혹시 무슨 소리인지 모르겠다는 분들이 계시다면 그냥 그러려니하고(뭔 소리인지 아시려 하지 마시고) 읽어주세요.

 이 후기를 읽다가 나는 역자와는 다른 이유에서 잠시 정신이 멍해졌다. 저 단어들이 무슨 뜻인지 잠시나마 더듬어 보는 시간이 필요했다. 대체 얼마만에 듣는 "햏자"요 "득햏"이며 "방법"이고 "쎄우다"란 말인가. 맞아, 그런 게 있었지. 이건 2002년 12월에 쓴 후기다. 그때는 정말 모두가 다 아는 말이었고 특히 다른 어휘는 몰라도 "방법" 같은 표현은 계속 쓰일 줄 알았는데. 12년이 지나는 동안 어느새 사어가 되어가고 있었구나. 이 후기를 쓰던 당시 역자는 12년 뒤의 독자가 느낄 시간적 거리감 같은 건 상상도 못 했을 텐데. 머나먼 옛날 글이 아니라 내가 기억하고 있는 어린 시절의 글마저 이렇게 나이 먹을 수 있다는 사실을 눈앞에서 실감하게 되자 어쩐지 코끝이 찡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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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김소형은 김희정과는 달리 독자의 감상에 가까운 역자 후기를 썼다. 좀 더 정확히 말하자면 그는 작품을 읽으며 떠오른 뇌내망상을 후기에서 공유하는 역자였다. 그는 진도를 나가지 못하는 주인공 커플의 신세를 한탄했고, 카야타 스나코는 묘사하지 않았던 사건의 이면을 팬픽 쓰듯 상상해 들려주었다. 특히 드레스를 끔찍하게 싫어하는 주인공 리가 공식 석상에 나서기로 한 뒤 리의 시녀가 겪었을 짧은 행복의 나날과 그 결말의 무참함을 되짚어주는 12권의 후기는 걸작이었다. 작가인 카야타 스나코도 그 후기를 보았더라면 뛸뜻이 좋아했으리라.

 그렇게 10여 년 전의 역자와 기쁨을 함께하며 후반부를 달린 끝에 결말까지 한 권 남은 지금, 나는 좀 머뭇거리고 있다. 김소형은 17권의 역자 후기에 이렇게 썼다.

 여기서 조금 개인적인 이야기.
 최근에 제가 굉장히 좋아하는 모 소설 시리즈가 근 14년 만에 종결을 맞이했습니다. 팬으로서 정말로 좋아하는 인물들이 더 이상 나오지 않는다는 것은, 이미 출판된 분량 이후로는 더 이상 볼 수 없다는 것은 자신이 좋아하는 캐릭터의 시간이 거기서 영원히 정지되었다는 것을 뜻합니다.
 끝났다고 해서 좋아하던 작품이 싫어지는 것은 아닙니다. 다시 읽고 또 읽을 때마다 새로운 감동이 있고 새로운 발견이 있지요. 등장인물의 감정에 다시 젖어보며 눈시울을 적시고, 때로는 패러디 거리를 발견해 즐거워하며 계속해서 즐길 수 있습니다.
 하지만 그들의 시간은 영원히 멈췄습니다.
 생생한 모습 그대로 굳어버린 폼페이 화산의 유적을 바라보는 듯한 기분일까요.
 여전히 좋아하고 앞으로도 좋아할 테지만, 더 이상 움직이지 않는 캐릭터를 바라보는 마음은 어딘가 싸아해지는 구석이 있습니다.
 그들은 이 자리에 멈춰버렸고, 현실을 살아가는 저는 앞으로도 계속 움직여야 합니다.
 바라지 않아도 조금씩 조금씩, 제가 걸어감에 따라 그들과도 조금씩 멀어져가겠지요.

 이 후기가 이중 삼중으로 마음을 울렸다. 과연, 1~9권은 오랜만에 만난 옛 친구와의 재회를 기뻐하는 기분으로 읽었다면 10권 이후로는 다가올 이별에 대한 예감 속에 읽었다. 자세한 장면은 기억나지 않지만, 18권에 이르러 리와 델피니아 사람들이 헤어진다는 점만은 분명하다. 좋은 결말임은 이해한다. 갑자기 이쪽 세계에 나타났으니 작품 끝날 즈음엔 원래 세계로 돌아가야지. 리는 델피니아에서 잘 살아가는 와중에도 언제나 자신이 이방인임을 자각하고 있었고, 늘 두고 온 파트너를 그리워했다. 오히려 어떻게 해서든 남도록 했다면 작품이 망가졌겠지. 하지만 이별을 능동적으로 선택한다는 건 어찌 되었든 슬픈 일이다. 이쪽도 살아있고 저쪽도 살아있고 이쪽저쪽 모두 상대를 좋아하는데도 앞으로 다시는 만나지 않기로 하고 작별을 고하다니. 그런 이별이라면 되도록 미루고 싶은 마음이다. 월이 그렇듯, 언젠가는 올 테지만 그건 그냥 막연하게 언젠가로만 해두고 싶다.

 게다가 이 후기를 쓴 역자 김소형은 더는 세상에 없다. 내가 죽은 사람들의 글을 읽을 때마다 언제나 상념에 잠긴다는 이야기는 아니다. 하지만 김소형은 건강 문제로 번역을 그만 둔 후 2012년에 고작 서른일곱의 나이로 세상을 떴다. 내가 처음 『델피니아 전기』를 읽을 때만 해도 멀쩡히 살아서 좋은 번역으로 많은 독자들에게 즐거움을 안겨주었고, 그 자신 또한 독자로서 후기를 통해 마음껏 망상을 펼치고 캐릭터들을 사랑하던 사람이다. 그랬는데, 10년이 지난 지금 나는 여전히 살아있건만 그는 고인이 되어 활자로만 남아 있다. 그런 이가 하필이면 책이 끝나는 순간 자리에 멈춰버리는 캐릭터에 관한 이야기를 하고 있으니, 어찌 머뭇거리지 않을 수 있을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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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카야타 스나코는 『델피니아 전기』와 세계를 공유하는 『새벽의 천사들』과 『크래시 블레이즈』를 줄줄이 써냈다. (『스칼렛 위저드』도 같은 시리즈라고 할 수 있지만 그 자체로는 『델피니아 전기』와 접점이 미미하다니까.) 하지만 이 작품들까지는 보고 싶지 않다. 여러 작품에 걸쳐 세계를 확장하는 작가에 대한 불신도 불신이지만, 무엇보다도 리가 다른 세계로 넘어가서 또 다른 사람들과 친분을 맺고 델피니아에 있을 때만큼이나 즐겁거나 슬픈 일을 겪는 모습을 보고 싶지 않아서다. 리가 『델피니아 전기』의 리로만 남아주면 좋겠다, 그런 이기적인 마음이 있다. 가이아에서 지구로 돌아간 칸자키 히토미가 반 파넬 없는 세계에서 근사한 사람 만나 세계일주 하면서 겪는 모험담 같은 걸 보고 싶을 리가 없잖아.

 『델피니아 전기 외전』도 두 권이 있다고 한다. 그 또한 망설이게 된다. 궁금하기는 하다. 하지만 『델피니아 전기 외전』은 또 다른 역자가 번역했는데, 거의 이질감이 없었던 『델피니아 전기』 8권 → 9권과는 달리 호칭이나 고유명사 번역에 차이가 있어서 말들이 많다. 하필이면. 옛 번역자의 부재를 느끼고 싶지 않은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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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나는 앞으로 계속 움직여야 한다는 사실을 선뜻 받아들이기 어렵다. 재회가 없는 이별이라면 피하고만 싶다. 다시 만났을 때 여전히 그대로였으면 좋겠다. 10여 년 만에 다시 만난 『델피니아 전기』가 여전했듯, 그렇게 영원토록 제자리에 머물러 있고만 싶은 마음이 분명히 있다. 리와 월이 그러하듯, 변화를 받아들여야 함을 알면서도. 이번의 재회가 가져다준 달콤씁쓸한 변화를 음미하고 있으면서도.

Posted by 거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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