간밤에 잠 못 이루고 있다가 어찌어찌 하여 김기영 감독의 〈이어도〉를 봤다. 유튜브의 한국영상자료원 한국고전영화극장 채널을 통해서 처음부터 끝까지 본 첫 영화가 아닌가 싶다. 인터넷 스트리밍 서비스로 영화 보기를 꺼리는 편이라 그간 손이 잘 가지 않았는데 꽤 괜찮더라. 720p로 제공된 〈이어도〉는 물론이고 그다음에 조금 보다가 잔 〈양산도〉는 360p였는데도 아쉬운 대로 그럭저럭 볼 만했으니. 하기야 그 정도 영상을 대형 스크린에 띄워놓고 본 적도 몇 번 있으니까. 고전기 할리우드 영화라면 이런 식으로 볼 마음이 나지 않았을 텐데 한국의 옛 영화에 대해서는 화질이나 음질에 대한 기대가 현저히 떨어지다 보니 오히려 조금 안 좋은 소스로도 별 불만 없이 보게 되는 모양이다.

 〈이어도〉는 2007년에 서울아트시네마의 "시네마테크 전용관 설립을 위한 2007년 시네마테크의 친구들 영화제"에서 필름으로 한 번 본 적이 있다. 당시에는 좀 지루하게 봤고, 아마 중후반부에서는 좀 졸았던 것 같다. 많이들 김기영 감독의 영화를 처음 보는 순간의 쇼크에 관해 말하는데, 나는 이상하게도 처음 만날 때는 나른함을 느끼는 편이다. 물론 몇몇 장면이 뇌리에 콱 박히기는 마찬가지지만, 영화 전체를 흥미진진하게 즐기게 되는 건 두 번째, 세 번째 다시 볼 때부터다. 심지어 〈하녀〉도 그랬다.

 더구나 당시 서울아트시네마에서 가져온 필름은 삭제판이었다. 그때도 이미 〈이어도〉의 충격적인 '그 장면'에 대한 소문은 익히 들어 알고 있었는데, 막상 내가 본 영화에는 그런 장면이 없지 뭔가. 혹시 내가 졸았나? 아니야, 그 장면만은 꼭 보려고 집중했는데? 아까 그게 전부인가? 하긴, 그런 장면은 21세기 한국 영화에서도 보여주기 어렵잖아. 각본상에서만 적나라하게 묘사되고 실제 영화에서는 간접적으로 넘어갈 수밖에 없었겠지? 그런데 그렇게 생각하고 있던 차에 그날 관객과의 대화 진행을 맡은 김홍준 교수가 '한국영상자료원이 소장하고 있는 〈이어도〉 필름 중에는 삭제판이 있고 무삭제판이 있는데 방금 여러분들이 보신 것은 삭제판이다. 착오가 있었던 모양이다.' 라고 설명하는 게 아닌가. 나 원 참. 그게 〈이어도〉 첫 상영이었던 터라 서울아트시네마에서는 이후 상영에서는 무삭제판 필름을 새로 가져다 상영하겠다고 했지만, 당시 서울에서 살지 않았던 나는 주말이 아닌 다른 상영일은 챙길 수 없었다.

 그 후 김기영 컬렉션 DVD 박스 세트도 나왔고, 한국영상자료원에서도 몇 번 상영했을 테고, KMDb VOD 서비스나 유튜브를 통해서도 얼마든지 볼 수 있었지만, 첫 감상이 미적지근했던 탓에 선뜻 〈이어도〉를 다시 볼 마음이 들지 않았다. 그렇게 어느덧 7년이 지난 거다. 그 7년 동안 늘 궁금했다. 정말 '그 장면'은 실재하는 걸까? 실재한다면 어떤 식으로? 아무리 생각해봐도 그게 나올 수 있을 리가 없잖아? 역시 간접적으로 묘사하는 거겠지. 그런데 간접 묘사라면 왜들 그렇게 난리일까? 김기영 신화화의 일환은 아닐까? 왜, 어떤 예술가가 일정한 명성을 쌓게 되면 그가 한 미적지근한 일도 덩달아 와와와 하면서 개성의 증거로 떠받드는 그런 분위기가 있지 않나. 더구나 김기영은 한국영화계 구전설화의 끝판왕 같은 존재니까, 뭔가 좀 독특한 게 있으면 부풀려지기도 한결 쉬울 터. 아마 그런 상황일 테지… 하지만 정말 '그 장면'이 실재하면 어쩌지? 막상 확인하면 실망할 것 같다는 걱정과, 실체를 알고 싶은 호기심이 끝없이 줄다리기를 벌였다. 어쩌면 그런 기대와 불안 사이에 서성이는 기분 자체에 홀려 무의식적으로 〈이어도〉와의 재회를 미뤄왔는지도 모르겠다. 영화를 보는 순간 줄다리기는 끝날 테니까.

* * *

 사실 어젯밤에도 이번에야말로 기필코 〈이어도〉의 실체를 확인하고 말겠다는 굳은 마음가짐으로 영화를 보기 시작했던 건 아니다. 그저 화질이나 확인해 보고 두어 장면쯤 보다가 끄고 잠자리에 들 생각이었다. 첫 장면에서 '야, 섬 멋지네. 화질도 이만하면 좋은데?' 하다가 그만 어어어, 하고 관성에 휩쓸려버릴 줄 알았나. 마음의 준비가 되지 않은 상태에서 얼결에 '맨눈'으로 영화를 보는, 오늘날에는 드문 감상 체험. 앞으로 〈이어도〉를 다시 보더라도 이 같은 뜻밖의 기쁨을 누리기는 쉽지 않으리라.

 다시 만난 〈이어도〉는 역시나 기억보다 훨씬 근사했다. 우선 이 영화는 (좋은 의미에서) 김기영 감독의 몇 안 되는 '웰메이드' 영화다. 각본과 촬영, 편집의 고른 매무새도 그렇지만 필름 보존 상태까지 포함해서 하는 얘기다. 아마도 〈이어도〉가 〈하녀〉와 더불어 김기영의 대표 걸작으로 손꼽히는 까닭도 어느 정도는 그 원형을 고스란히 만끽할 수 있기 때문이 아닐까. 특히 〈화녀〉나 〈충녀〉가 불그죽죽 외국어 자막이 박힌 필름으로만 간신히 존속하고 있음을 떠올리노라면 정일성 촬영감독이 김기영과 더불어 고심하여 빚어낸 색감을 큰 불편 없이 맛볼 수 있다는 사실은 한결 더 값지게 다가온다. 이연호가 쓴 『전설의 낙인』에 실린 정일성의 증언에 따르면 〈이어도〉는 일부러 수묵화처럼 색깔을 빼서 만든 영화였다지만, 그 창백함 속에서도 푸른색, 붉은색, 초록색이 도드라지며 시네마스코프 구석구석 눈길을 사로잡을 때마다 탄식이 절로 나오고 마리오 바바가 부럽지 않다. 이 영화의 섬에 관해서 이야기할 때 어찌 시퍼런 풀빛을 배제할 수 있을까. 또 이화시의 마성을 이야기할 때 어찌 붉은 저고리를 빼놓을 수 있을까.

 화려한 촬영과 더불어 김기영의 편집 양식에 관해 다시 생각하게 된 것은 이번 감상의 가장 큰 수확이었다. 여러 차례 '증인'들의 회상 속을 드나드는 안정적인 구조가 주는 인상과는 달리, 김기영은 사실 시공간을 난폭하게 다룬다. 여러 개의 사건-시공간은 밑도 끝도 없이 시작하여 끝난다. 하지만 각각의 시공간 조각들은 최면에 가까운 음향 효과나 끝없이 반복될 것 같은 음악, 비슷한 상황이나 대조적인 인과 관계를 연결고리로 삼아 한 호흡으로 묶인다. 흐름을 따라가려면 매 순간 관객이 개입하여 빈틈을 메우며 따라가야 한다. (구글링해보니 난삽한 편집이라는 감상들이 있던데, 김기영의 다른 영화라면 몰라도 〈이어도〉에 관해서는 동의하기 어렵다.) 그 불가피한 '몰입' 덕분에 잦은 회상 구조 속에서도 감상자의 긴장이 흐트러지지 않는다. 마스무라 야스조나 박찬욱이 떠오르는 이런 편집 방식은 시공간의 연속성과 밀도가 높은 〈하녀〉에서는 미처 느끼지 못했던 특성으로(다만 음악의 성질은 유사하다), 장차 김기영의 다른 영화를 접할 때 좀 더 눈여겨볼 일이다.

 김기영 영화를 처음 보는 관객들에게 웃음을 선사하곤 하는 특유의 연기 양식 또한 이번에는 전혀 우습지 않았다. "~다."로 끝나는 특유의 어투가 낯설 수는 있다. 하지만 많은 요소가 고도로 양식화된 이런 영화에서 연기에만 현실주의를 요구해야 할 이유는 없다. 상식적인 차원에서는 무의미하거니 기괴해 보이는 몸짓이나 동선은, 인물이 처한 극단적인 상황에서 나올 법한 감정을 신체 언어로 충실히 옮겨낸 결과물로 보인다. 신문사에 입사한 후 환경 오염 실태를 취재하던 천남석이 비분강개하여 "현재 바다 고기가 모두 죽고 있습니다! 난 싸웁니다! 난 싸웁니다! 싸운다고요! 난 싸울 거라고요! 난 싸운다고요!"라고 외치며 두 팔을 풍차처럼 휘두르고 달려가는 모습조차도, 그의 성격이나 상황을 고려하면 과격할지언정 우스꽝스럽지는 않다. 그런가 하면 천남석의 시신을 불러들이는 굿판을 벌이던 도중 선우현과 편집국장을 질타하는 무당 뒤로 슬며시 다가와 뜻 모를 눈길을 던지는 술집 여자의 기이한 자태는 영화의 후반부에 휘몰아치게 될 감정을 얼마나 잘 반영하고 있는지. 〈이어도〉의 연기 양식이나 감정선은 멜로드라마(장르로서가 아닌 양식으로서의 멜로드라마)를 극단으로 밀어붙인 결과일 뿐이다. 마스무라의 연기 양식을 존중할 수 있다면 이제 김기영의 연기 양식 또한 괴이하다거나 황당하다거나 하는 수사는 접어두고 진지하게 받아들일 수 있어야 하지 않겠나.

 여기에 김기영 영화에 늘 따라붙는 '전근대와 근대의 동거'도 (약간 뒷북치는 기분이지만) 빼놓을 수 없겠다. 예전에는 이를 다소 추상적으로만 이해했으나 이제 구체적인 실체를 지닌 상황으로 받아들이게 된 것은 그간 이 문제에 관해 좀 더 민감해진 탓일까? 표면적으로 〈이어도〉의 등장인물들은 근대적 기획에 매달리고 있다. 그것은 환경 문제, 양식업, 관광 산업, 언론, 상식의 형태로 등장한다. 그리고 반대편에는 섬의 폐쇄성, 일부다처제, 가부장적 착취, 무속 신앙, 가문의 저주와 같은 전근대적 의식이 있다. 문제는 이 둘이 한몸이라는 사실이다. 근대와 전근대는 편을 갈라 싸우지 않는다. 근대적 인물과 전근대적 인물이 나뉘지도 않는다. 모든 사람이 전근대적 의식에 머무른 채 근대를 갈구한다. 둘은 하나의 몸-공동체 안에서 각자 상대를 경멸하고 상대를 향해 퇴행하고 상대를 착취한다. 양쪽 모두 자신의 목표를 완전하게 관철하기 전에 자멸한다. 이 불균형은 거의 현대 한국의 원죄처럼 보이며, 절망스러울 정도로 동시대적이다. (최근 한국 사회에서 발생한/발굴된 갖가지 사건들을 돌이켜보건대 심지어 '영화적 과장'이라는 단서조차 필요 없을 듯하다.)

* * *

 이 모든 폭격 뒤에, 문제의 '그 장면'이 도래한다. 그래, 그 장면은 있었다. 정말로 있었다. 전설에서만, 각본에서만, 외화면에서만 있는 게 아니라 정말로 있었다. 화면 가장자리에 살짝 걸쳐서도 아니고, 그림자에 가려서도 아니고, 카메라 정중앙에 정말로 있었다. 그걸 보는 순간 어안이 벙벙해지고 사고 회로가 정지했다. 물론 얘기는 많이 들었다. 물론 모형인 줄도 안다. 하지만 저게 어떻게 저 자리에 정말로 있을 수가 있는 거지? 잠시 후에 깨달았다. 아, 개봉 당시에는 당연히 삭제됐지만 다행히 검열 전의 무삭제판도 살아남은 덕분에 오히려 '고전영화 복원'이라는 이름으로 동시대 한국 영화보다 더 과격한 장면을 볼 수 있게 된 거구나. 그렇게 생각한 다음, 다시 잠시 후에 깨달았다. 그러니까, 어쨌든 김기영이 그것을 찍.었.다.는 얘기로구나. 잘리지 않을 리가 없다는 사실을 알면서도. 이건 이론의 여지가 없다. 이런 장면은 잘리지 않을 방법이 없다. 지금 찍어도 이건 잘리기에 십상이다. 영등위가 없더라도 투자자들이 먼저 잘라낼 것이다. 애초에 검열을 회피할 수 있는 다른 묘사를 궁리해야만 한다. 다른 영화의 예를 들 것도 없이 〈이어도〉의 초반부에서 이미 강간 장면을 은유적으로 처리한 적이 있지 않던가. 그런데도 김기영은 그 장면만큼은 그대로 찍는 방법 외에 다른 길은 알지 못한다는 듯 그냥 찍어버렸다. 그리고 영화는 기어이 잘리고야 말았다. 대체 무슨 심정으로? 언젠가 좋은 날이 와서 자기 영화가 살아남을 수 있으리라는 희망으로? 아니면 잘려나간 자리를 볼 때마다 고함을 지르기 위해? 어느 쪽이든 거기에선 무시무시한 목소리가 들린다. 나는 내가 할 수 있는 최선의 영화를 만들었어. 그리고 너희는 이걸 망가뜨림으로써 너희가 문제라는 사실을 스스로 증명하게 될 거야. 장면의 내용 때문이 아니라 그 장면이 실재한다는 사실만으로 나는 그만 모골이 송연해졌다. 37년 만에 뒤늦게 도달한 분노의 흔적. 마치 대학가 술집 한구석 새내기들의 낙서로 까맣게 뒤덮인 누런 벽 한쪽 귀퉁이에 아직도 남아있는 시위대의 낙서처럼 그렇게 절절하게, 〈이어도〉는 도착했다.

YouTube 영상을 스크린캡처하여 jpg로 저장함. 720p랬으니까 가로를 1280픽셀로 맞춘 다음 블랙 바를 잘라내었다.



본문에서 언급한 영화 :
 - 양산도 (1955)
 - 이어도 (1977)
 - 하녀 (1960)
 - 화녀 (1971)
 - 충녀 (1972)

Posted by 거시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