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15년 4월 13일에 쓰다 만 글을 옮기는 김에 마무리.



〈사고Accident, 1967〉와 〈화장2015〉에는 비슷한 기분을 불러일으키는 장면이 하나 나온다.

먼저 〈사고〉. 대학교수인 스티븐은 새로 받아들인 지도 학생인 애나에게 눈길을 준다. 이 눈길이 애정의 눈길인지 질투의 눈길인지는 명확하지 않지만, 여하튼 그가 애나를 자주 생각한다는 점은 꽤 분명해 보인다. 애나는 주말에 연인이자 스티븐의 다른 학생인 윌리엄과 함께 스티븐의 집에 놀러 온다. 윌리엄이 몹시 취하는 바람에 두 사람은 스티븐의 집에서 자고 가게 된다. 임신한 스티븐의 아내 마저리는 한참 먼저 방으로 들어갔고, 스티븐은 뒤늦게 침실로 올라가다가 어떤 여자가 자신보다 먼저 계단을 올라가 사라지는 모습을 본다. 스티븐이 침실에 들어서자 침대 위에 누군가 누워있다. 스티븐이 나지막이 말한다. "애나?" 하지만 가까이 다가가 보니 그 사람은 자고 있던 마저리였다. 스티븐은 다시 마저리의 이름을 부르며 침대로 들어간다. 연달아 자신을 부르는 스티븐의 목소리에 마저리가 잠에서 깬다.

다음 〈화장〉. 오 상무는 새로 입사한 사원인 추은주에게 눈길을 준다. 이 눈길이 바람을 피우고 싶다는 욕구로까지 나아가는지는 명확하지 않지만, 여하튼 그가 추은주를 자주 생각한다는 점은 분명하다. 추은주는 결혼 소식을 알렸다가 파혼한 뒤 업계의 다른 회사로 이직을 준비 중이다. 오 상무는 추천서를 써주고 싶어 하지만, 추은주는 사양한다. 그래도 오 상무는 어느 날 밤 뇌종양으로 죽어가는 아내의 병상 옆에서 노트북으로 추은주를 위한 추천서를 쓰기 시작한다. 아내가 잠에서 깬다. 일이 많으냐는 아내의 말에 오 상무는 그렇다고 말한다. 불교도인 아내는 잠이 깼으니 독경을 들려달라고 한다. 오 상무는 노트북을 덮고 일어나 아내에게 이어폰을 건네고 독경을 틀어준다.

두 장면 모두에서 남편으로서 느끼는 죄책감을 다소간 공유하게 된다는 점은, 생각해 보면 신기한 일이다. 두 남편은 결국 (물리적으로는) 부정을 저지르지 않는다. 손 한 번 잡지 않고 부적절한 말 한마디 하지 않는다. 하다못해 부정을 저지르려 시도하지도 않는다. 단지 작은 뉘앙스들, 시선의 머무름만으로 욕망이 생겨나고, 이제껏 표현하지 않았으며 앞으로도 표현하지 않을 그 욕망이 죄책감을 낳아 관객에게까지 번진다.

그보다 더 신기한 건, 두 장면을 보면서 아내가 남편의 심리를 알면서도 짐짓 모른 척하고 있지 않았겠느냐는 의심이 들었다는 점이다. 두 장면에서 아내가 깨어있으며 남편이 무슨 짓을 했는지 알아차렸다는 증거를 제시해주는 시청각 신호는 단 하나도 없었건만. 물론 〈화장〉의 아내는 영화 후반부에 가서 와인을 통해 자신이 남편의 마음을 꿰뚫어보고 있었음을 우회적으로 알리지만, 아직 해당 장면까지는 그런 아내의 마음을 알 도리가 없다. 그리고 〈사고〉에서는 해당 장면은 물론이고 영화가 끝날 때까지도 아내가 남편을 얼마나 간파하고 있었는지 확정할 수 없다. 그럼에도 두 장면을 보는 순간 남편이 아내에게 '들켰다'는 아찔함이 머리를 스치고 지나갔다. 심지어 들켰으면 좋겠다는 마음도 있었다.

영화가 끝나고 나서 두 영화를 함께 본 동행에게 이런 감상을 피력했더니 "그래, 여자는 그럴 때 반드시 알지."라는 답이 돌아왔다. 성급한 일반화의 오류를 차치하고 나면, 이 답 또한 흥미로웠다. 이 답에 따르면 해당 장면에서 아내의 간파는 영화 속 표현보다는 현실 논리 덕분에 성립한다. 물론 영화는 많은 부분을 현실 논리에 의지하여 간추리거나 생략한다. 그 덕분에 짧은 시간 안에 '매끄러운' 서사를 전할 수 있다. 관객의 관성에 의지할 수 없었다면 영화는 지금보다 훨씬 더 이야기하기에 적절하지 않은 매체가 되었을 것이다.

그러나 영화란 결국 영상과 소리의 연쇄를 통해 말을 거는 매체인 탓에, 현실 논리라는 관성에 의지해 이어붙인 이음매는 종종 미심쩍은 '허점'이 되기도 한다. 보이지 않고 들리지 않았는데, 거기에 없는데 어떻게 확신할 수 있지요? 예를 들면 철학자 스탠리 카벨이 『Contesting Tears: The Hollywood Melodrama of the Unknown Woman』에서 보여준 〈스탤라 댈러스Stella Dallas, 1937〉에 대한 독해. 〈스텔라 댈러스〉는 흔히 딸의 신분 상승을 위해 자신을 희생하는 어머니의 이야기를 다룬 최루성 멜로드라마로 받아들여지는 작품이지만, 카벨은 같은 영화의 이미지 안에서 가족과 사회적 지위라는 족쇄에서 벗어나 자신의 취향을 되찾기 위해 딸을 버리는 어머니의 이야기를 발견한다.

단, 카벨의 독해를 접했다고 해서 〈스탤라 댈러스〉의 의미가 한쪽에서 다른 쪽으로 완전히 옮겨가지는 않는다. 그보다는 현실을 질료로 삼는 영화라는 구조물이 바로 그 구조 때문에 다수의 현실 사이에서 확고한 해석을 피한 채 끊임없이 진동하고 있음을 보게 된다. 관객이라는 관찰자가 진동 상태인 영화를 해석하고 그중 한 현실로 수렴케 한다는 『쿼런틴』 농담도 피하고 싶다. 영화 속의 현실은 줄곧 진동 상태를 유지하며, 양립 불가능해 보이는 것들이 불안정하게 양립하도록 한다. 딸을 위해 희생하는 어머니와 자신을 위해 딸을 버리는 어머니의 양립. 부정을 바라는지 아닌지 알 수 없는 남편들의 마음을 알아차렸는지 아닌지 알 수 없는 아내들.

눈금이 어느 한쪽으로 확실하게 넘어갔다면 나는 지금만큼 영화를 좋아하지 않았을지도 모른다.
Posted by 거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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