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15년 3월 27일에 쓴 글.



서울아트시네마에서 "아듀, 파라다이스" 상영작인 나루세 미키오 감독의 〈흐트러진 구름乱れ雲, 1967〉을 보았다. 가기 전에 시놉시스를 보며 내가 이걸 봤나 안 봤나 긴가민가 했는데 역시 본 영화였다. 2011년의 "나루세 미키오 특별전"이 아니었나 싶다. 그때도 부산아시아필름아카이브 소장 필름으로 봤을 테고. 처음 로고 뜰 때부터 필름에 경탄했다. 확실히 부산아시아필름아카이브는 필름 보존고가 있어서 그런지 필름이 쉽게 낡지 않는 모양이다.

봤는지 안 봤는지 잘 기억이 나지 않을 정도로 인상이 희미했던 모양인데, 다시 보니 말도 못 하게 좋았다. 전에는 이토록 정념 가득한 영화라고 생각하지는 않았던 것 같은데, 어떻게 이처럼 긴장 가득한 영화인 줄 몰라봤을까 싶다. 이런 경험을 할 때면 나는 내가 생각하는 것보다 훨씬 더 오랫동안 성적으로 미숙한 사람이었을지 모르겠다는, 혹은 지금도 그럴지 모르겠다는 생각이 든다. 사물이나 몸짓, 시선의 긴장을 인지하지 못하던 때가 있었달까.

영화 초반부, 교통사고로 관료를 죽이게 된 남자 주인공이 상무에게서 전근 통보를 받은 후 그때까지 사귀던 상무의 딸과 만나는 장면이 있다. 여자가 먼저 남자의 집에 와 있다. 집안 습도를 조절하려는 것인지 수건에 물을 적셔 창문에 펴붙인다. 카메라는 창밖에서 방 안을 들여다보는 구도. 카메라의 위치와 여자의 행위 때문에 창에 주목하게 된다. 남자가 들어온다. 남자는 자신이 전근을 가게 됐다고 말한다. 여자는 자신은 함께 가지 않겠노라고 말한다. 더 관계를 지속할 수 없다는 이별 통보. 남자는 담담히 이를 받아들인다. 여자쪽이 더 미안해하고, 변명한다. 서로가 감정을 추스르는 동안 창문과의 거리를 기준으로 남자와 여자의 위치가 몇 차례 바뀐다. 마지막에는 남자가 출입문 쪽에 서고 여자가 창문으로 다가간다. 여자는 유리창 외에 종이창까지 닫고 남자를 향해 돌아선다. 몇 년 전의 나는 이 행동을 이해했을까? 오늘은 명확하게 이해했다. 그 심정도 이해한다. 자책과 아쉬움과 이별과 습관이 뒤섞인 섹스를 제안하는 행동이다.

카메라는 다시 맨 처음 자리, 창 바깥으로 나간다. 종이창이 닫혔기 때문에 이제 방 안이 들여다보이지 않는다. 여기서 페이드아웃으로 장면을 끝내면 둘은 섹스를 했다는 상징적인 표현이 된다. 십중팔구 그런 느낌이었다. 그런데 갑자기! 종이창이 확 열린다. 방 안의 두 사람을 볼 수 없었기에 관객은 놀란다. 내 뒤쪽에 앉은 관객이 헉! 하고 숨을 들이켜는 소리가 들렸다. 남자가 종이창을 걷은 것이다. 말없이 그는 창문을 다시 연다. 거절의 행위. 여자는 그런 남자를 본다. 핸드백의 클로즈업이 이어진다. 클로즈업이 등장한 순간에만 해도, 나는 여자가 문을 열고 퇴장하는 모습을 보여주는 대신 핸드백을 챙기는 행위로 이별을 물화하리라 생각했다. 실제로 여자의 손이 핸드백을 화면 바깥으로 빼낸다. 하지만 결정타는 핸드백이 아니었다. 핸드백을 치우자 그 아래 지금까지 한 번도 보이지 않았던 열쇠가 모습을 드러낸다. '핸드백이 간다'는 움직임이었던 것이 '핸드백은 가지만, 열쇠는 남는다'라는 비/움직임으로 바뀌면서 예상했던 바 이상의 인지적/정서적 타격을 준다.

이 상무의 딸이라는 캐릭터가 존재한다는 사실은 바로 앞 장면에서야 처음 언급되었고, 이 이별 장면이 〈흐트러진 구름〉 전체에서 그녀가 등장하는 처음이자 마지막 장면이었다. 남자와 여자는 필요한 사항들 외에 구구절절 심정을 토로하지도 않았다. 나루세에게는 방 안에서 남자와 여자의 위치, 젖은 수건, 유리창, 종이창, 핸드백, 열쇠, 그것으로 충분했다. 내가 무릎을 꿇는 데에도 그것으로 충분했다.
Posted by 거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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