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15년 4월 13일에 쓴 글.
시네마테크 부산에서 "월드 시네마 XII" 상영작 〈진홍글자The Scarlet Letter, 1926〉를 보았다. 상영 제목은 오랜 관습을 따라 "주홍글자"였다. 이 무심한 제목이 바뀔 날은 오지 않는 걸까? 나 같은 사람이 백날 말하는 것보다 실제로 작품을 보여주는 쪽에서 좀 더 의식을 갖고 접근해주는 편이 훨씬 효과적일 텐데.
홈페이지와 팸플릿에는 상영 시간이 98분으로 소개돼 있었으나 실제 상영 시간은 70분 내외였다. "제작 당시의 필름과 현재의 영사 속도가 달라 실제 상영시간이 달라질 수 있"다는 안내처럼, 상영에 사용한 필름은 98분 분량인데 초당 24프레임으로 상영해서 70분 정도였을까? 원래 영사 속도가 초당 16프레임이었다는 가정하에 계산해 보니 원래 초당 16프레임으로 상영해야 하는 98분짜리 영화를 초당 24프레임으로 영사하면 상영 시간이 65분 정도 된다. 초당 18프레임으로 계산한다면 73분. 그럼 역시 그런 이유 때문이었나 보다.
영사 속도와는 별개로, 이번에 상영한 〈진홍글자〉 자체가 완전한 판본은 아니었다. 찾아보니 1926년에 개봉하여 격찬받았다는 원래의 형태는 찾아볼 길이 없는 듯하며, 98분 판본은 2000년에 미 의회 도서관 주도로 복원한 판본이라고 한다. 결락된 부분은 중후반부에 특히 집중되어 있었다. 아서 딤스데일 목사가 떠난 사이 헤스터 프린이 임신-출산을 겪는 과정이나 이후 꿋꿋하게 펄을 키우며 살아가다 죽은 줄 알았던 남편이 나타나며 갈등을 빚는 대목이 상당한 감정적 스트레스를 쌓아올린 다음 결말에서 쾅 터뜨렸어야 했는데, 플롯을 따라갈 수 있을 정도의 뼈대만 남아 안타까웠다. 원작 소설을 생각해 보면 이 대목은 서사뿐만 아니라 자연 묘사에서도 상당한 가능성을 품고 있는데, 마침 비교적 형태가 분명한 전반부에서 자연 묘사에 특히 강점을 보인 영화인지라 특히 아쉽다.
무성영화 속의 릴리언 기쉬는 볼 때마다 놀랍다. 기쉬에게는 '수난당하는 가녀린 여인'이라는 이미지가 따라붙곤 하지만, 실제로 스크린에서 마주하게 되는 모습은 늘 스테레오타입을 두들겨 깨는 생동감으로 가득하다. 그녀는 사회의 시선을 모를 정도로 무지하지는 않다. 하지만 시선에 맞추어 자신을 억누르고 조신하게 가다듬기보다는 솔직한 본성에 이끌려 환희나 분노나 결의나 망연자실을 매 순간 온 얼굴로 발산하기를 멈추지 않는다. 〈진홍글자〉의 헤스터 프린도 마찬가지다. 마을 주민 모두가 검은 옷을 입고 교회로 몰려드는 일요일, 교회가 화려함과 발랄함을 원치 않음을 알면서도 흰옷과 새의 노랫소리를 포기하지 못한 채 외출을 준비하며 집안을 활보하다 새장에서 도망친 새를 붙잡기 위해 머리카락을 휘날리며 숲 속을 뛰어다닌 끝에 예배 시간에 늦고 마는 헤스터의 생동감에 어찌 넘어가지 않을 수 있을까? 자신을 꾸짖으려다 손에 들린 속옷을 보고 황급히 도망가는 딤스데일 목사를 따라다니며 "이렇게 목사님께서 절 질책하시는 말을 들을 수 있어서 좋아요." 라고 웃는 헤스터에게 어찌 저항할 수 있을까? 그런 헤스터가 나중에 딤스데일 목사의 것까지 2인분의 죄를 뒤집어쓰고 살 테니 당신은 목회를 통해 참회하라고 말할 때면, 함부로 "희생자"라는 표현을 쓰는 것조차 망설여진다. 헤스터가 사회의 희생자가 아니어서가 아니라, 희생자라는 말이 담고 있는 일방적인 구도 안에 밀어 넣기에는 너무나 당당하고 주체적이기 때문이다.
온 마을을 흔들어 놓는 헤스터를 시각화하는 영화의 솜씨는 또 어떤가. 건물 2층에 있는 헤스터의 집에는 길 쪽으로 창문이 나 있고, 창문과 마주 보는 벽에는 꾸밈을 경계하라는 식의 청교도적 글귀가 적힌 걸개가 걸려 있다. 예배 참석을 앞두고 옷매무시를 하던 헤스터는 그 글귀를 바라보다가 걸개를 젖힌다. 걸개 뒤에는 거울이 숨겨져 있고, 헤스터는 거울을 보며 두건을 둘러 긴 머리카락을 감싼다. 거울이 창으로 들어온 햇빛을 반사하여 반대편 벽에 빛이 어른거리도록 한다. 헤스터는 그 빛을 보고 즐거워한다. (자크 타티의 〈나의 삼촌Mon oncle, 1958〉이 떠오르는 대목이다.) 그런데 화면이 길거리로 전환되며, 교회로 향하던 엄숙한 얼굴의 아녀자들 얼굴에까지 거울에 반사된 빛이 어린다. 그들은 헤스터의 집을 불쾌하게 노려본다. 이어 헤스터는 밤 동안 덮어두었던 새장의 덮개를 벗긴다. 새가 운다. 이제 아녀자들은 일요일 아침에 새 소리를 듣게 하는 헤스터의 몰지각함을 탓한다. 잠시 후, 그 새가 새장을 빠져나와 날아간다. 깜짝 놀란 헤스터는 주변 사람들은 신경도 쓰지 않은 채 흰 옷을 휘날리며 숲으로 달려간다. 대놓고 교회를 빠지는 그 모습에 군중들은 혀를 찬다. 숲을 뛰어다니던 헤스터의 머리에서 두건이 흘러내리며 더욱 자연스러운 아름다움을 드러낸다. 걸개, 거울, 빛, 새, 두건 등의 동물과 사물이 헤스터의 집 안이라는 사적 공간, 길거리라는 공적 공간, 숲이라는 자연 공간을 단숨에 연결하는 이 연쇄 작용에는 언어화된 사상이 아니라 물질의 흔들림으로 말을 걸어오는 무성영화의 비의가 담긴 듯하다.
두 가지만 더. 시네마테크 부산의 〈진홍글자〉 상영은 배경 음악 없이 완전 무성으로 상영되었다. 아마 서울아트시네마에서 〈탐욕Greed, 1924〉을 그렇게 본 이후 처음이 아닌가 싶은데, 역시나 즐거운 경험이었다. 음악이 영상을 해독하고 선별하여 전해주는 대신 영상 자체를 눈으로 보아내는 수밖에 없을 때, 영상이 얼마나 풍부한 내용물을 담고 있는지 새삼 실감하게 된다. 소리가 없어 지루하기는커녕 소리가 없는데도 볼 게 너무 많아서 다 못 보고 있다는 조바심이 들 정도다. 또 하나. 영화의 전당은 전에도 가보았으나 (그곳 최악의 극장인) 하늘연 극장만 들어가 봤을 뿐 시네마테크는 처음이었다. 미리 알아본 바로 스크린 가로세로 비율이 1.65:1 정도 된다고 하여 아주 이상적인 환경은 아니라고 생각했다. 2.35:1은 물론이고 1.85:1 비율 영화를 상영할 때만 해도 상하 마스킹을 해야 한다는 뜻이니까. 하지만 1.33:1 영화를 볼 때는 스크린 자체가 크고 좌석과 거리가 가까우며 좌우 마스킹을 많이 하지 않아도 되기 때문에 화면이 무지막지하게 크게 다가온다는 점은 매우 좋았다. 서울아트시네마에서는 2.35:1 영화를 상영할 때는 포만감을 느낄 수 있지만 1.33:1쯤 되면 어지간히 앞쪽에 앉지 않는 한 화면을 크게 즐기기는 어려웠으니까. 1.33:1 영화를 보며 영상의 크기 자체에 압도된 채 그 세부에 탐닉하게 되는 경험은 오랜만이었다.
시네마테크 부산에서 "월드 시네마 XII" 상영작 〈진홍글자The Scarlet Letter, 1926〉를 보았다. 상영 제목은 오랜 관습을 따라 "주홍글자"였다. 이 무심한 제목이 바뀔 날은 오지 않는 걸까? 나 같은 사람이 백날 말하는 것보다 실제로 작품을 보여주는 쪽에서 좀 더 의식을 갖고 접근해주는 편이 훨씬 효과적일 텐데.
홈페이지와 팸플릿에는 상영 시간이 98분으로 소개돼 있었으나 실제 상영 시간은 70분 내외였다. "제작 당시의 필름과 현재의 영사 속도가 달라 실제 상영시간이 달라질 수 있"다는 안내처럼, 상영에 사용한 필름은 98분 분량인데 초당 24프레임으로 상영해서 70분 정도였을까? 원래 영사 속도가 초당 16프레임이었다는 가정하에 계산해 보니 원래 초당 16프레임으로 상영해야 하는 98분짜리 영화를 초당 24프레임으로 영사하면 상영 시간이 65분 정도 된다. 초당 18프레임으로 계산한다면 73분. 그럼 역시 그런 이유 때문이었나 보다.
영사 속도와는 별개로, 이번에 상영한 〈진홍글자〉 자체가 완전한 판본은 아니었다. 찾아보니 1926년에 개봉하여 격찬받았다는 원래의 형태는 찾아볼 길이 없는 듯하며, 98분 판본은 2000년에 미 의회 도서관 주도로 복원한 판본이라고 한다. 결락된 부분은 중후반부에 특히 집중되어 있었다. 아서 딤스데일 목사가 떠난 사이 헤스터 프린이 임신-출산을 겪는 과정이나 이후 꿋꿋하게 펄을 키우며 살아가다 죽은 줄 알았던 남편이 나타나며 갈등을 빚는 대목이 상당한 감정적 스트레스를 쌓아올린 다음 결말에서 쾅 터뜨렸어야 했는데, 플롯을 따라갈 수 있을 정도의 뼈대만 남아 안타까웠다. 원작 소설을 생각해 보면 이 대목은 서사뿐만 아니라 자연 묘사에서도 상당한 가능성을 품고 있는데, 마침 비교적 형태가 분명한 전반부에서 자연 묘사에 특히 강점을 보인 영화인지라 특히 아쉽다.
무성영화 속의 릴리언 기쉬는 볼 때마다 놀랍다. 기쉬에게는 '수난당하는 가녀린 여인'이라는 이미지가 따라붙곤 하지만, 실제로 스크린에서 마주하게 되는 모습은 늘 스테레오타입을 두들겨 깨는 생동감으로 가득하다. 그녀는 사회의 시선을 모를 정도로 무지하지는 않다. 하지만 시선에 맞추어 자신을 억누르고 조신하게 가다듬기보다는 솔직한 본성에 이끌려 환희나 분노나 결의나 망연자실을 매 순간 온 얼굴로 발산하기를 멈추지 않는다. 〈진홍글자〉의 헤스터 프린도 마찬가지다. 마을 주민 모두가 검은 옷을 입고 교회로 몰려드는 일요일, 교회가 화려함과 발랄함을 원치 않음을 알면서도 흰옷과 새의 노랫소리를 포기하지 못한 채 외출을 준비하며 집안을 활보하다 새장에서 도망친 새를 붙잡기 위해 머리카락을 휘날리며 숲 속을 뛰어다닌 끝에 예배 시간에 늦고 마는 헤스터의 생동감에 어찌 넘어가지 않을 수 있을까? 자신을 꾸짖으려다 손에 들린 속옷을 보고 황급히 도망가는 딤스데일 목사를 따라다니며 "이렇게 목사님께서 절 질책하시는 말을 들을 수 있어서 좋아요." 라고 웃는 헤스터에게 어찌 저항할 수 있을까? 그런 헤스터가 나중에 딤스데일 목사의 것까지 2인분의 죄를 뒤집어쓰고 살 테니 당신은 목회를 통해 참회하라고 말할 때면, 함부로 "희생자"라는 표현을 쓰는 것조차 망설여진다. 헤스터가 사회의 희생자가 아니어서가 아니라, 희생자라는 말이 담고 있는 일방적인 구도 안에 밀어 넣기에는 너무나 당당하고 주체적이기 때문이다.
온 마을을 흔들어 놓는 헤스터를 시각화하는 영화의 솜씨는 또 어떤가. 건물 2층에 있는 헤스터의 집에는 길 쪽으로 창문이 나 있고, 창문과 마주 보는 벽에는 꾸밈을 경계하라는 식의 청교도적 글귀가 적힌 걸개가 걸려 있다. 예배 참석을 앞두고 옷매무시를 하던 헤스터는 그 글귀를 바라보다가 걸개를 젖힌다. 걸개 뒤에는 거울이 숨겨져 있고, 헤스터는 거울을 보며 두건을 둘러 긴 머리카락을 감싼다. 거울이 창으로 들어온 햇빛을 반사하여 반대편 벽에 빛이 어른거리도록 한다. 헤스터는 그 빛을 보고 즐거워한다. (자크 타티의 〈나의 삼촌Mon oncle, 1958〉이 떠오르는 대목이다.) 그런데 화면이 길거리로 전환되며, 교회로 향하던 엄숙한 얼굴의 아녀자들 얼굴에까지 거울에 반사된 빛이 어린다. 그들은 헤스터의 집을 불쾌하게 노려본다. 이어 헤스터는 밤 동안 덮어두었던 새장의 덮개를 벗긴다. 새가 운다. 이제 아녀자들은 일요일 아침에 새 소리를 듣게 하는 헤스터의 몰지각함을 탓한다. 잠시 후, 그 새가 새장을 빠져나와 날아간다. 깜짝 놀란 헤스터는 주변 사람들은 신경도 쓰지 않은 채 흰 옷을 휘날리며 숲으로 달려간다. 대놓고 교회를 빠지는 그 모습에 군중들은 혀를 찬다. 숲을 뛰어다니던 헤스터의 머리에서 두건이 흘러내리며 더욱 자연스러운 아름다움을 드러낸다. 걸개, 거울, 빛, 새, 두건 등의 동물과 사물이 헤스터의 집 안이라는 사적 공간, 길거리라는 공적 공간, 숲이라는 자연 공간을 단숨에 연결하는 이 연쇄 작용에는 언어화된 사상이 아니라 물질의 흔들림으로 말을 걸어오는 무성영화의 비의가 담긴 듯하다.
두 가지만 더. 시네마테크 부산의 〈진홍글자〉 상영은 배경 음악 없이 완전 무성으로 상영되었다. 아마 서울아트시네마에서 〈탐욕Greed, 1924〉을 그렇게 본 이후 처음이 아닌가 싶은데, 역시나 즐거운 경험이었다. 음악이 영상을 해독하고 선별하여 전해주는 대신 영상 자체를 눈으로 보아내는 수밖에 없을 때, 영상이 얼마나 풍부한 내용물을 담고 있는지 새삼 실감하게 된다. 소리가 없어 지루하기는커녕 소리가 없는데도 볼 게 너무 많아서 다 못 보고 있다는 조바심이 들 정도다. 또 하나. 영화의 전당은 전에도 가보았으나 (그곳 최악의 극장인) 하늘연 극장만 들어가 봤을 뿐 시네마테크는 처음이었다. 미리 알아본 바로 스크린 가로세로 비율이 1.65:1 정도 된다고 하여 아주 이상적인 환경은 아니라고 생각했다. 2.35:1은 물론이고 1.85:1 비율 영화를 상영할 때만 해도 상하 마스킹을 해야 한다는 뜻이니까. 하지만 1.33:1 영화를 볼 때는 스크린 자체가 크고 좌석과 거리가 가까우며 좌우 마스킹을 많이 하지 않아도 되기 때문에 화면이 무지막지하게 크게 다가온다는 점은 매우 좋았다. 서울아트시네마에서는 2.35:1 영화를 상영할 때는 포만감을 느낄 수 있지만 1.33:1쯤 되면 어지간히 앞쪽에 앉지 않는 한 화면을 크게 즐기기는 어려웠으니까. 1.33:1 영화를 보며 영상의 크기 자체에 압도된 채 그 세부에 탐닉하게 되는 경험은 오랜만이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