좌백의 신작. 몇 년 전부터 웹에서 연재 중이라는 소식은 들었으나 아직 전자책의 세계로 들어서지 않은 독자인지라 과연 언제 볼 수 있을까 싶었는데 늦게나마 책으로 나와주었다. 책으로 4권까지 나오다 소식이 끊긴 『흑룡도하』의 전례가 있기에 1, 2권이 나온 뒤에도 과연 후속권은 언제 나오려나 걱정했으나 이미 웹에서 연재를 마친 완결작이라 그런지 놀랍게도 두 달 만에 다섯 권이 주르륵 나오면서 깔끔하게 마무리를 지어주었다. 좌백의 장편이 단행본으로 끝까지 나온 것은 2005년 『비적유성탄』 이후 10년만의 일이라 감개무량하다. 작가와 출판사 양쪽에 엎드려 고마워할 일이다.

 게다가 심지어 걸작이야!

 백 년 넘게 소림사에 틀어박혀 절정 고수가 된 두 노승이 느닷없이 강호로 나서 난리가 난다는 설정만 들었을 때는 짓궂다고만 생각했고, 실제로 한동안은 일종의 피카레스크 소설로 읽었다. 외모는 영준한 젊은이 같으나 세상 물정은 하나도 모르는 사형과 외모는 쭈그렁 바가지인데 하는 짓은 천하의 악동이 따로 없는 사제라는 조합이 이미 우습고, 그들이 고강한 무공과 상식를 벗어나는 사고방식으로 모든 무림인을 벙찌게 하는 소동을 일으키는 과정 자체가 마냥 즐겁다. 거기에 그저 독자를 웃기려고 웃기는 게 아니라 실리를 따져가며 말이 되게 웃기는, 그래서 부지불식간에 무협 특유의 위엄을 박살 내는 좌백의 유머 감각도 여전하여 바닥을 데굴데굴 굴러다니며 웃었다.

 그런데 본격 화장실 유머가 나오는 3권에서 웃음이 정점을 찍더니 4권 들어서 불현듯 주인공들이 老 + 僧임을 상기시키며 회한과 번뇌를 불러오고, 마냥 웃으며 즐겼던 사건들이 어쨌거나 품고 있던 무게를 실감케 한다. 특히 짧다면 짧은 여정인데도 공령, 공심 일행이 함께한 시간을 애착을 갖고 돌아보게 되어 놀랐다. 이전까지 좌백 소설에서 긴 시간의 흐름은 국면 전환을 위해 필요하기는 하지만 빨리감기로 얼른 넘겨버려야 할 거추장스러운 짐 같다는 기분이 있었는데, 이번에는 더 짧은 시간을 더 촘촘하고 소중하게 다룬달까. 예전 같았으면 은화 사태와 하수정 같은 캐릭터는 낭비된 조연이었다고 잘라 말했을 테지만, 이번에는 구멍이라는 생각도 안 들고 그들도 나름대로 흔적을 남긴 일원으로 생각하게 된다. 좌백 소설이 이보다 더 긴 시간을 다룬 경우는 많으나 이처럼 시간의 흐름에서 오는 연대감을 절절하게 느끼도록 한 작품은 『소림쌍괴』가 처음이 아닌가 싶다.

 그렇기에 이야기가 공령, 공심 일행을 중심으로 완결되지 않고 무림 전체의 일로 확산하는 듯한 기미를 보았을 때는 더 불안한 감이 있었다. 이 사람들 이야기만 해도 충분할 것 같은데 굳이 중원무림의 패권 운운하는, 정작 주인공들은 관심도 없을 "하위 플롯"을 집어넣어야 하나. 게다가 그런 기미가 본격적으로 나타난 게 4권 후반부라서, 이러다가는 또 5권에서 플롯 정리하느라 시간 다 보내고 얼렁뚱땅 끝나지 않을까 걱정도 됐고. 하지만 좌백은 이번에는 그마저도 가볍게 해결한다. 소림사 안에서 펼쳐지는 클라이맥스는 어떻게 싸워서 누가 이기느냐 하는 무협 특유의 '액션'을 간소화하더라도 이 장르에서 달리 씹고 즐기고 싸울 거리가 많음을 다시금 보여주는 한편, "소림"쌍괴라는 설정도 장르 관습을 무심히 끌어다 쓴 결과가 아니라 이런 이야기를 마무리하기 위한 필연적인 선택이었음을 보여주며, 두 주인공의 성격과 행보를 마무리하는 데에도 더할 나위 없이 잘 들어맞는다. 그 시너지 효과 덕분인지 결말에 이르러서는 눈물이 글썽거리더라니까. 인물과 환경과 플롯의 균형과 조화라는 점에서 보자면 좌백의 최고작이라고 해도 과언이 아니겠다. 성격이 괴팍한 초절정고수를 주인공으로 삼아 플롯을 유야무야 덮고 가면서 후반부를 성급히 맺는다는 비판을 면치 못하던 작풍이 『비적유성탄』에 이르러 비로소 해결책을 찾았구나 싶었는데 거기서도 더 나아갔구나. (1996년에 처음 구상했고 2003년에 연재하다 중단했던 작품이라지만, 과연 그때 완성했어도 이런 모습이었을까)

 오랫동안 좋아했으나 3년 전에 나온 단편집 외에는 소식이 없어 애타던 작가를 오랜만에 새로운 작품으로 다시 만났다는 사실도 기쁜데, 그 작품이 이토록 좋으니 더욱 기쁘다. 더구나 대여점 체제의 쇠락과 작가의 건강 문제로 한동안 신작은 포기하고 있었는데 인터넷 연재와 전자책 시장이 활로를 뚫으면서 다시 왕성한 창작이 이어지는 듯하여 지속 가능한 팬심을 품을 수 있게 됐다. 과연 그중에서 단행본 출간으로까지 이어질 작품이 몇이나 될까 싶기도 한데, 당장 『소림쌍괴』는 두 권짜리 소장본으로도 나온다고 하고, 권말 광고를 보니 4월에는 『하급무사』도 출간한다고 하니 아주 회의적으로만 볼 일은 아닌 모양이다.

Posted by 거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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