필립 시모어 호프먼의 부고가 전해진 후, 유튜브에 그가 출연한 영화의 클립이 이것저것 올라오고 있다. 아래 클립도 처음 부고를 들었을 때는 없었는데 그 사이에 올라온 영상이다. 멋진 장면을 고화질로 화면비 맞게 올려준 유튜브 회원 Geeks of Doom에게 고마움을 표한다.

 카메론 크로우 감독의 로큰롤 드라마 〈무제〉에서, 록 저널리스트 레스터 뱅스가 자신처럼 되고 싶어 찾아온 열여섯 살짜리 로큰롤 팬 윌리엄 밀러에게 충고를 건넨다. 이 영화를 처음 보았을 때나 지금이나 나는 록에 열광한다고 말할 수도 없고, 레스터 뱅스와 윌리엄 밀러, 혹은 카메론 크로우가 겪은 그 시대를 겪어보지도 못했지만, "쿨의 산업"이라는 개념만은 단번에 머릿속에 콱 박혀들었다. 뱅스의 말을 듣는 순간 나는 내가 이미 그런 시대를 살고 있음을 부끄럽게 실감할 수 있었다.

 시간이 흐르자 이제는 그의 말을 영화에도 적용할 수 있음을 알겠다. 십대 소년에게 뱅스가 들려준 말은 나이를 먹어감에 따라 빛을 잃기는커녕 오히려 이제야 더 매서운 진실로 다가온다. 창작물에 관해 말하고 싶다면 창작자들과 친해지는 것을 경계해라. 쿨한 사람들과 어울린다고 해서 네가 쿨해지는 게 아니다. 그리고 특히, "영광스럽고 마땅하게도 멍청한 것"인 형식에 관한 말. 이 짧은 몇 마디는 수잔 손택이 「해석에 반대한다」에서 해석과 상징주의로부터 벗어난 영화 형식의 직접성을 말하는 대목(및 오늘날 그 대목을 읽으며 느끼는 안타까움)과 크게 다르지 않은 듯하다.

 그리고 이 모든 것을 알면서도 여전히 부나방처럼 뛰어들 수밖에 없는 소년을 바라볼 때에 그가 느낀 안타까운 기쁨도 짐작하겠다.

 한동안 잊고 있었건만, 그도 나의 선생이었음을 뒤늦게 깨닫고 있다.

 
일단 L.A.에 가고 나면 친구를 수도 없이 사귀게 될 게다. 하지만 놈들은 가짜 친구야. 널 타락시킬 거라고. 네 순진한 얼굴에 대고 뭐든지 말해주겠지.

하지만 록 스타와는 친구가 될 수 없어.

네가 진정한 저널리스트, 록 저널리스트가 된다면…….

…일단 돈은 많이 못 벌어. 그래도 레코드 회사에서 레코드는 공짜로 줘.

나원, 네 꼬락서니가 눈에 선하다. 추한 꼴 많이 볼 거야. 네게 술도 사주고, 여자 애들도 만나고, 공짜로 비행기도 태워주면서 이리저리 데리고 다니고, 약도 주겠지. 근사하게 들릴 거라는 건 알아. 하지만 놈들은 네 친구가 아니야. 놈들은 네가 록 스타의 천재성에 관해 신실한 척하는 기사를 써주길 바라는 거고, 그렇게 로큰롤을 말아먹고 우리가 로큰롤에서 사랑했던 모든 것들을 목 졸라 죽일 거야. 놈들은 로큰롤에다가 품위를 사서 안겨주고 싶어하는데 말이다, 이 형식은 영광스럽고 마땅하게도 멍청한 거잖냐! 너도 그 정도는 알잖니. 로큰롤이 멍청하기를 그만두는 순간 로큰롤은 진짜가 아니게 된다고. 그렇잖아? 그 다음에 남는 건 쿨의 산업뿐이야.

넌 로큰롤에 큰 위기가 찾아온 시점에 발을 들인 거야. 전쟁은 끝났어. 놈들이 이겼어. 요즘 로큰롤이랍시고 나다니는 것들의 99%는 말이다, 차라리 침묵이 더 흥미로울 지경이라고.

그러니까 난 네가 그만 등 돌리고 돌아가서 변호사 같은 거나 하는 게 낫다고 본다.

…하지만 네 얼굴을 보아하니 그럴 것 같지는 않구나.



Posted by 거시다
,
 〈하오의 연정〉을 추천하며 아드리앙 공보의 글을 인용한 김에, 『씨네21』의 "외신기자칼럼"에 관해 이야기하고 싶다.

 『씨네21』의 짧지 않은 역사 속에서 가장 멋진 기획은 무엇이었나? 『씨네21』을 창간호부터 꼼꼼히 읽지는 않았지만, 나는 2003년 12월부터 2011년 4월까지 7년 넘게 이어진 "외신기자칼럼"이었다고 답하고 싶다. 달시 파켓, 아드리앙 공보, 데릭 엘리, 스티븐 크레민 네 사람이 번갈아 가며 연재한 이 칼럼은 『씨네21』에서 (좋은 의미로) 가장 이질적이고 자유로운 기획이었으며, 독자로서 내가 영화계 언론에 바라는 바가 무엇인지 깨닫게 해준 기획이었다.

 회당 A4 한 장 내외에 불과한 분량이었던 이 기획이 무슨 대단한 야심을 내걸었던 것은 아니다. 그냥 이제 한국 영화계도 웬만큼 커서 세계 영화계 가운데 한 자리를 차지하게 됐으니 '외부'의 시선도 곁들이면 좋겠다는 생각 정도에서 나온 기획이 아니었을까. 분량으로 보나 내용으로 보나 실린 위치로 보나, "외신기자클럽"이 『씨네21』의 중심에 선 적은 없었던 것 같다. 내가 접한 한에서만 말하자면, 독자 쪽도 마찬가지였다. 애초에 이 칼럼의 이름을 언급하는 사람조차 드물었다.

 어쩌면 그 사소함, 그 가벼움, 그 주목받지 못하는 성격 덕분에 "외신기자칼럼"이 그토록 훌륭해질 수 있었는지도 모른다. 『씨네21』에서 무엇을 요구했는지는 모르겠으나, 네 필진은 이 코너를 통해 온갖 주제를 다루었다. 물론 외국인으로서 한국 영화를 보는 경험이나 외국 영화제 속 한국 영화에 대한 반응을 전하는 글처럼 한국 독자들이 '외국인 필진'에게서 기대함 직한 이야기도 있었다. 하지만 그들은 종종 한국 영화계와는 아무런 상관도 없어 보이는 외국의 영화제에 관해 투덜거리기도 했고, 자신이 남몰래 좋아하는 감독의 신작이 몇 년째 나오지 않는다고 울상 짓기도 했으며, 때로는 예기치 못한 통찰을 담은 비평에 가까운 글을 쓰는가 하면 또 어떨 때는 영화에 등장한 로케이션에 관해 수필에 가까운 소회를 남기기도 했다. 한국 영화계(만드는 사람과 보는 사람 양자 모두 포함)에서 지금 당장 관심을 보일 법한 굵직한 주제 외의 다른 주제에 관한 글이라면 어떤 글이든 받아주는 게 아닐까 싶을 정도였다.

 그들의 글에 담긴 통찰력이나 문장력 자체를 따지기 이전에, 바로 그 주제의 비한국적 성격이야말로 이 칼럼이 독자들에게 내려준 가장 큰 축복이었다고 생각한다. 네 필진은 각자 나름대로 한국 영화를 좋아하고 한국 영화계에 애정이 있기는 했지만, 자신들은 무엇보다도 '영화'를 좋아하는 사람들이며, 이때 영화란 한국 영화계가 영화라고 지칭하는 대상보다 훨씬 거대하다는 사실을 이미 알고 있었다. 또한 그들은 한국 영화계 언론인들처럼 한국 영화인들과 가깝지도 않았고, 한국 영화계에 얽매여 있지도 않았다. 그래서 그들은 '서로 사정 다 아니까' 넘어갈 만한 일들을 넘기지 않았고, 또 대다수 독자가 관심을 보일 만한 주제만을 자세히 다루려 애쓰지도 않았다. 그럼으로써 "외신기자칼럼"은 한국 영화계의 담론 소비 패턴에서 벗어나서 훨씬 더 크고 넓은 세계가 있음을, 생각해야 할 것들이 무수히 많은 세계가 있음을 알려주었다.

 더 광대한 세계가 있다는 사실을 깨닫는다는 건 무슨 뜻일까? 이걸 그저 정보의 확대로만 이해하면 안 된다. (흔히 무용담이나 풍물기행 따위로 전락하고 마는, 그런 주제에 '밖에 나갔다 와야 시야가 넓어진다'고 주장하는 여행담들을 떠올려보라.) 저곳에는 저런 것들이 있어, 라는 정보라면 정말이지 인터넷으로도 충분하다. 하지만 더 광대한 세계가 있다는 사실을 깨닫는다는 것은, 사실은 저곳에 관한 이야기가 아니라 이곳에 관한 이야기다. 더 광대한 세계가 있다는 사실을 깨닫는다는 것은, 이곳에도 지금과는 다른 삶의 방식이 존재할 수 있는 가능성이 있음을 체감한다는 뜻이다. 지금 여기에서 일어나는 일에 관해서, 지금 여기에서 유행하는 사고 방식과는 다른 방식으로 생각할 수 있는 새로운 시공간을 확보하게 된다는 뜻이다. "외신기자클럽"은 바로 그런 일을 해줄 수 있었다. 그들이 전해준 건 단순한 정보가 아니라 영화를 대하는 태도였고 결이었다.

 그 주에 새로 나온 영화는 무엇인지, 그중 어떤 영화가 보러 갈 만한지, 그중 어떤 영화가 경천동지할 만한 성취를 보여주며 올해의 걸작으로 거듭날 수 있을지, 오랜만에 신작을 들고 나온 이 배우와 저 감독은 무슨 말을 하는지, 결국 최종 흥행 성적은 어떻고 돈은 얼마나 벌었는지, 그리고 다음 주에는 어떤 영화가 우리를 기다리고 있는지─ 한국 영화계(당연히 언론과 관객 포함)가 제목만 다르고 패턴은 같은 노름판 속에서 유행을 따라가느라 분주한 동안, "외신기자클럽"의 네 사람은 그 판에 박힌 흐름에서 빠져나가 다른 속도와 다른 시공간에서 다른 영화를 다른 각도로 볼 수도 있음을 직접 보여주었다.

* * *

 게다가, 젠장, 그들은 눈도 밝고 글도 정말 잘 썼다.

 데릭 엘리는 7년이 넘도록 각종 국제영화제를 비판하는 일에 자신의 필력을 바쳤다. 그는 영화제가 영화를 사랑하는 사람들을 위한 축제의 장이 아니라 또 다른 정치권력을 지닌 단체로 변하는 과정을 극도로 싫어했다. 특히 그 정치권력이 프로그래밍이나 시상에 영향을 미치면 사정없이 물어뜯었다. 사실 자기 차례만 오면 어딘가의 영화제를 씹는 모습을 보여줘서 나중에는 좀 지치는 기분도 들었다. 게다가 틈틈이 드러나는 그의 영화 보는 눈이 나와 맞지 않는 것도 사실이었고. 하지만 늘 못된 소리만 한 덕분일까. 그가 가끔 영화제 권력 비판에서 벗어나 다른 이야기를 꺼내거나 생각지도 못했던 영화를 옹호할 때면 그만큼 순수한 기쁨이 느껴졌다. 이병헌 주연의 로맨틱 코미디 〈누구나 비밀은 있다〉가 사실은 피에르 파올로 파솔리니의 〈테오라마〉를 리메이크한 〈아담에 관하여〉를 리메이크한 영화라는 이야기를 들려주며 좋은 리메이크란 무엇인가를 말하는 목소리을 또 어디에서 들을 수 있겠는가.

 다른 세 사람에 비해 약간 늦게 합류한 스티븐 크레민은 데릭 엘리와 마찬가지로 국제영화제를 이야기를 자주 했으나 관심의 폭은 좀 더 해당 국가의 영화 산업이나 문화적 경향 쪽에 맞춰져 있었다. 가령 그는 2009년에 쓴 "'여성감독' 영화제가 아닌 거야"라는 글에서는 서울국제여성영화제가 여성 감독에만 집중하고 있음을 지적하면서 감독을 지나치게 중심으로 여기는 전통적인 영화제 모델을 재고하기를 촉구한다. 한편, 그가 종종 자기 이야기의 사례로 언급하는 영화들은 시간이 좀 더 지난 후에 보면 뜻밖의 공명을 일으킬 때가 있다. 나는 이 글 끝에 첨부할 칼럼 목록을 정리하다가 그의 첫 글, "작가는 있지만 대중 감독은 없다"를 읽고 깜짝 놀랐다. 그 글은 대만 영화의 정책사를 간략하게 풀어놓으면서 21세기 들어 나타나고 있는 새로운 변화를 언급하는 것으로 마무리된다. 그런데 그 마지막 단락에 이르러 등장하는 인물이 다름 아닌 수차오핀 감독이 아닌가. 한자어를 그대로 읽으면 소조빈인 이 중국 감독의 존재를 나는 2010년에 양자경과 정우성이 출연한 무협 영화 〈검우〉가 개봉했을 때에야 처음 들었다. (그나마 당시에도 우리나라에서는 공동 연출로 참여한 오우삼의 이름을 꺼내어 서극과 대립시키느라 정신이 없어서 소조빈의 이름은 묻혔다.) 그런데 크레민의 글은 〈검우〉가 소개되기 5년 전에 이미 소조빈의 영화를 거론하며 "하이 컨셉의 장르를 넘나드는 시나리오 작가"라고 소개하고 있었다. 이 설명은 〈검우〉에도 훌륭하게 먹힌다. 이럴 때 나는 절로 내가 알지 못했던 곳에서 활발하게 작동한 또 다른 역사에 관해 생각하게 된다.

 아드리앙 공보는 두 사람보다 더 사적인 글을 썼다. 그는 종종 한국 독자로서는 알 길이 없는 동시대 프랑스 영화계의 감독에 관한 애정을 드러내기도 하고, 영화에서 점점 담배를 볼 수 없게 되는 세태에 불만을 품는가 하면, 프랑스에서 흥행 중인 영국 영화들을 거론하며 고다르, 트뤼포 시대와 달리 프랑스인들은 이제 영국 영화를 좋아한다는 이야기를 들려주기도 했다. 그런 와중에 그는 당연하다고 여겼던 문제에 관해 딴죽을 걸며 새로운 시각을 내놓기도 했고, A4 한 장짜리 칼럼에서는 기대하지 않았던 비평적 통찰의 흔적을 보여주기도 했다. 예를 들어 나는 한국인들이 유현목 감독의 〈오발탄〉에 관해 하는 판에 박힌 소리보다는 유현목이 세상을 떠난 뒤 공보가 그에 관해 쓴 글이 관객으로서 훨씬 마음을 울리고 〈오발탄〉을 다시 보게 해준다고 생각한다. (특히 "2004년 부산영화제에서 만든 카탈로그에서는 유현목이 "한국 리얼리즘에 빛을 밝힌 사람"이라고 지칭되기도 했다. 한데 오히려 나 같은 외국인의 눈으로 본 유 감독은 언제나 '꿈'에 가까운 작가였다."라는 진술은 새겨들을 필요가 있다. 하지만 이 이야기는 언젠가 다른 기회에.) 또 그는 종종 깊은 여운을 남기는 말을 빚어내는 문장가이기도 했다. 공보가 2007년에 쓴 마지막 글의 마지막 문단에서 〈짝패〉와 한국 영화에 관해 남긴 열한 개의 문장은 그저 냉담하게 읽어내려가기 어렵다. 그는 심지어 한 시절을 뜨겁게 달궜던 제니퍼 애니스톤-브래드 피트-안젤라니 졸리의 관계에 관한 글조차도 근사하게 써냈다.

 달시 파켓은 네 사람 중 가장 한국에 가까이 있었다. 그는 10년이 넘게 한국을 주 거주지로 하여 살고 있고, 한국 영화에 관한 가장 유명한 영어권 웹사이트를 운영하고 있고, 한국 대학에서 강의하며, 한국영상자료원에서 고전 한국 영화를 소개하기도 했으며, 아, 그렇지, 심지어 서울 시장 선거 당시 시민으로서 투표도 했다. 어떤 사람들은 외국인이 한국 영화에 관해 글을 쓰면 일단 '외국인이 뭘 알겠나' 하는 태도를 취하곤 하는데, (그에 관해서는 그가 2006년에 쓴 "〈브로크백 마운틴〉 서울 시사기"를 참고할 것.) 부디 한국 관객인 내 말을 믿으시라. 그는 '우리'보다 '우리 영화'에 관해 훨씬 더 잘 안다. 하지만 그는 동시에 국외자였고, 그래서 한국인들은 좀처럼 관심을 기울이거나 발언하지 않는 문제, 그러나 한국 영화에 관련된 문제에 관해서 말할 수 있었다. 이를테면 그가 한국 영화의 영어 제목, 영어 자막, 영어 대사에 관해 얼마나 여러 번 이야기했던가. 또 그는 남들이 '우리나라 실정에는 그런 거 안 돼요'라는 김빠진 소리나 할 줄 알면서도 한국 영화계가 안고 있는 문제를 타개할 만한 다른 제안을 내놓곤 했다. 그리하여 재개봉관이 필요하다는 이야기도 했고, 디지털 배급을 제안하기도 했고, 왜 경찰들은 길거리에서 파는 불법 DVD를 단속하지 않는가 의아해하며 오대수처럼 망치로 그걸 다 깨버리고 싶다고 화를 내기도 했고, 한국 영화계가 아시아의 다른 나라 영화에도 제작 지원을 할 줄 알아야 한다고 했고, 좋은 말로 할 때 각본가들 대접 잘해주는 게 좋을 거라고 경고했으며, 보도자료에 느낌표 좀 남용하지 말라고도 했다. 나는 한국 영화인들이 그가 한 말에 귀를 기울였더라면 이 판이 좀 더 나아지지 않았을까 생각하곤 한다.

 또한 그는 비평이란 뭘까, 평론가는 뭘 하는 사람일까, 영화가 관객에게 준 감동이 관객을 어떻게 바꿀 수 있을까 계속해서 질문했다. 영화에 대한 그의 통찰은 팔짱 끼고 이맛살을 찌푸리며 볼 필요 없이 쉬우면서도 정확했고, 관객 이전에 영화를 만든 사람들이 보았으면 싶었다. 가령 〈피터팬의 공식〉과 음향의 활용에 관한 글, 스릴러는 '왜'보다 '어떻게'에 더 중점을 두어야 하는데 한국 영화는 '왜'에 매달리다가 김을 뺀다는 지적, 필수적인 것만 보여주고 칼을 내려쳐 완벽한 결말을 만들어달라는 당부. 하지만 그의 최고작은 아마도 2009년에 쓴 "〈업〉을 떨리는 마음으로 기대함"일 것이다. 그 소박하고 유머 넘치는 글을 처음 읽었을 때, 좀처럼 느끼지 않던 질투심이 이글이글 타올랐던 기억이 아직도 생생하다. 듣자하니 정성일 감독은 당시 그 글을 너무나 좋아한 나머지 해당 페이지를 떼어내어 벽에 붙여놓았다고 한다.

* * *

 물론 "외신기자클럽"만 있었던 것은 아니다. 『FILM 2.0』에서 "김영진의 러프 컷"이 비슷한 꿈을 꾸었고, 『씨네21』의 "전영객잔"도 처음에는 그러려고 했으며, "씨네산책"도 잠시나마 웅대한 포부를 가졌고, "김혜리의 영화의 일기"도 조용히 반항을 일삼았다. 사실 새겨 읽을 만한 글을 쓰는 영화 글쟁이들은 어떻게든 그런 기미를 보이기 마련이다. 하지만 7년이 넘는 세월 동안 주 단위로 소비될 수밖에 없는 저널리즘의 터전에 발을 디딘 채 일관되게 저항한 이들은 "외신기자칼럼"뿐이었다. 아마 그러한 태도를 의식적으로 취하지 않아도 될 만큼 시공간적으로 떨어져 있는 사람들이었던 덕분이리라.

 돌이켜보건대 이 네 사람을 기자나 평론가라고 부르는 것은 오히려 그들이 해준 일에 대한 과소평가처럼 느껴진다. 차라리 레지스탕스가 아니었는지. 한국 영화 언론계의 그림자 군단.

 (물론 그 옆에는 심지어 지금까지도 1인 전쟁을 벌이고 있는 테러리스트 DJUNA가 있음을 결코 잊어서는 안 된다. 하지만 그것은 또 다른 이야기니까.)

 이 글은 몇 년 전, 아직 "외신기자칼럼"이 현재형으로 진행 중일 때 썼어야 했다. 하지만 너무 늦지는 않았다고 믿는다. 꽤 길게 이야기했는데도 아직 이 칼럼이 남겨준 것의 반의반의 반의반도 다 이야기하지 못했으니, 나머지는 직접 읽으며 체감하시길.

 이 블로그를 운영하면서 웬만해서는 외부 링크를 달지 않으려 애쓰고 있다. 웹 상의 글이라는 게 그렇게 수명이 길지 않음을 알기 때문이다. 혹시 글이 없어지지는 않더라도, 주소만 바뀌어도 링크는 망가진다. 하지만 그 위험을 무릅쓰고, "외신기자클럽"에 경의를 표하며, 현재 『씨네21』 웹사이트에 올라온 "외신기자클럽" 글 전부를 모아보았다. 중간중간 빠진 호는 아마 이런저런 이유로 한 주 쉬어간 대목인 듯하며, 필자 이름이 없는 글은 사이트에 필자 명이 적혀 있지 않았기 때문에 비워두었다.

2003년 (No. 430~434)
2004년 (No. 435~484)

No. 435 사실은, 환상이지 (+영어원문) - 데릭 엘리
No. 436 중장년층 관객이 있다면? (+영어원문) - 달시 파켓
No. 437 영화사랑과 페티시즘 - 아드리앙 공보
No. 438 검을 놓고 주먹으로 싸우라 - 데릭 엘리
No. 439 한국은 정말 작은 시장인가? (+영어원문) - 달시 파켓
No. 440 낯선 영화들에게서 더 멀어진 스크린 (+불어원문) - 아드리앙 공보
No. 441 베를린, 혁신성에 표를 던지다 (+영어원문) - 데릭 엘리
No. 442 한국을 유명 촬영지로 만들자면? (+영어원문) - 달시 파켓
No. 443 스타의 쇠퇴 (+불어원문) - 아드리앙 공보
No. 444 기지개 켜는 헝가리 영화 (+영어원문) - 데릭 엘리
No. 445 디지털 배급 시스템, 기다릴 필요없다 (+영어원문) - 달시 파켓
No. 446 스페인의 이몽룡 (+불어원문) - 아드리앙 공보
No. 447 대만영화 폐업 간판 내거나? (+영어원문) - 데릭 엘리
No. 448 한국영화의 힘? 다양성의 힘! (+영어원문) - 달시 파켓
No. 449 영화의 유용? 그 위험한 변신 (+불어원문) - 아드리앙 공보
No. 450 칸, 한국의 젊은 피를 인정하다 - 데릭 엘리
No. 451 한국과 프랑스 '누벨바그'의 차이 (+불어원문) - 아드리앙 공보
No. 452 작지만 힘센 우디네 극동영화제 (+영어원문) - 달시 파켓
No. 453 터키 영화 '발견'의 즐거움 (+영어원문) - 데릭 엘리
No. 454 칸에서 보는 한국, 그리고 일본과의 관계 (+영어원문) - 달시 파켓
No. 455 칸의 11일, 조각들의 모자이크 (+불어원문) - 아드리앙 공보
No. 456 칸의 알짜 재미는 칸 마켓에 있다 (+영어원문) - 데릭 엘리
No. 457 영화시장 제약하는 해적판, 물렀거라 (+영어원문) - 달시 파켓
No. 458 '홍상수' 읽기의 두 가지 태도 - 아드리앙 공보
No. 459 스크린쿼터에 관한 일장춘몽 (+영어원문) - 데릭 엘리
No. 460 외국영화 지원하는 한국영화기금을 꿈꾼다 (+영어원문) - 달시 파켓
No. 461 광대들을 들라 하라! (+불어원문) - 아드리앙 공보
No. 462 '서서 응시하는' 진정한 축제가 되길 (+영어원문) - 데릭 엘리
No. 463 
No. 464 영화와 록을 연결하려는 유일한 축제, 부천국제판타스틱영화제 (+불어원문) - 아드리앙 공보
No. 465 시대와 문화에 '딱' 맞는게 최고의 리메이크 (+영어원문) - 데릭 엘리
No. 466 고전 한국영화의 진흥 및 해외 마케팅 필요(+영어원문) - 달시 파켓
No. 467 영화학도 미셸 휘르끄의 영화, 사랑 그리고 죽음 (+불어원문) - 아드리앙 공보
No. 468 로카르노영화제 등 세계 영화제-내실보다 장식 위주로 변해 (+영어원문) - 데릭 엘리
No. 469 한국의 미국인이 본 양국의 영화문화 차이 (+영어원문) - 달시 파켓
No. 470 배두나는 대단한 배우다 (+불어 원문) - 아드리앙 공보
No. 471 세련된 몬트리올 vs 화려한 토론토 영화제 (+영어 원문) - 데릭 엘리
No. 472 〈나이트 워치〉 등 자국영화 붐… 90년대 중반 한국영화 붐과 비슷(+영어 원문) - 달시 파켓
No. 473 사후 20주년 트뤼포를 다시 보다 (+불어원문) - 아드리앙 공보
No. 474 주성치의 '모조'는 어디로? (+영어원문) - 데릭 엘리
No. 475 자막이라는 스캔들 (+영어원문) - 달시 파켓
No. 476 존경을 표하는 동양과 서양의 방법 (+불어원문) - 아드리앙 공보
No. 477 영국인 브리짓이 된 미국인 젤위거 (+영어원문) - 데릭 엘리
No. 478 북미시장, 한인을 노려라 (+영어원문) - 달시 파켓
No. 479 당신의 눈 안으로 스며드는 연기 (+불어원문) - 아드리앙 공보
No. 480 실속없는 아카데미 최우수 외국어영화상, (+영어원문) - 데릭 엘리
No. 481 쿨하든지 보기 좋든지 (+영어원문) - 달시 파켓
No. 482 임권택 감독의 가장 뛰어난 성공 중 하나 (+불어원문) - 아드리앙 공보
No. 483 〈알렉산더〉의 콜린 파렐, 최고의 연기 선보여 (+영어원문) - 데릭 엘리
No. 484 한국영화, 세계로 가려면 안정된 시스템과 충분한 인력 필수 - 달시 파켓


닫기

2005년 (No. 485~534)

No. 485 
No. 486 성격파 배우, 멸종 위기 다가오나? (+영어원문) - 데릭 엘리
No. 487 "미장센을 팝니다" (+영어원문) - 달시 파켓
No. 488 상하이의 엽기적인 동업자들 (+불어원문) - 아드리앙 공보
No. 489 영화제, 여전히 백인녀석들이 지배한다 (+영어원문) - 데릭 엘리
No. 490 좋은 영어제목 갖지 못한 한국영화들 (+영어원문) - 달시 파켓
No. 491 신체 장애와 영웅주의 (+불어원문) - 아드리앙 공보
No. 492 부천시와 PiFan, 누가 기억될 것인가 (+영어원문) - 데릭 엘리
No. 493 한국 러브 스토리들을 좋아하는 이유 (+영어원문) - 달시 파켓
No. 494 절제된 형식으로 완성한 9시간 다큐 (+불어원문) - 아드리앙 공보
No. 495 독일 상업영화의 도전들 (+영어원문) - 데릭 엘리
No. 496 한국에 스타 시스템은 존재하는가 (+영어원문) - 달시 파켓
No. 497 잊혀진 아랍의 영화들 (+불어원문) - 아드리앙 공보
No. 498 해와 달과 유성들 (+영어원문) - 데릭 엘리
No. 499 과장이 심한 한국의 보도자료들 (+영어원문) - 달시 파켓
No. 500 낯선 억양을 접하는 즐거움 (+불어원문) - 아드리앙 공보
No. 501 칸의 기준은 무엇인가 (+영어원문) - 데릭 엘리
No. 502 요즘 시네필들은 어디에서 모이나? (+영어원문) - 달시 파켓
No. 503 금발은 어떻게 영상을 사로잡았나? (+불어원문) - 아드리앙 공보
No. 504 한국영화, 스스로의 힘으로 전진하라 (+영어원문) - 데릭 엘리
No. 505 아시아를 알아야, 한류를 안다 (+영어 원문) - 달시 파켓
No. 506 이민자들의 영화가 주목받는 이유 (+불어원문) - 아드리앙 공보
No. 507 비영어권 영화들에 대한 편견 (+영어원문) - 데릭 엘리
No. 508 한국에서 사용되는 콩글리시 용어들 (+영어원문) - 달시 파켓
No. 509 〈하류인생〉 프랑스에서 개봉 못한 사연 (+불어원문) - 아드리앙 공보
No. 510 글로벌 할리우드의 힘 (+영어원문) - 데릭 엘리
No. 511 시적인 공포영화 (+영어원문) - 달시 파켓
No. 512 무질서한 격투의 미학 (+불어원문) - 아드리앙 공보
No. 513 형이상학적 공포의 강렬함 (+영어원문) - 데릭 엘리
No. 514 웰컴 투 〈웰컴 투 동막골〉 (+영어원문) - 달시 파켓
No. 515 왜 유럽 영화는 존재하지 않는가? (+불어원문) - 아드리앙 공보
No. 516 영화계에 바라는 7가지 제언 (+영어원문) - 데릭 엘리
No. 517 국내용 뉴스 따로, 국외용 뉴스 따로? (+영어원문) - 달시 파켓
No. 518 척추장애인 배우들의 비극적 운명 (+불어원문) - 아드리앙 공보
No. 519 에든버러국제영화제 2005 (+영어원문) - 데릭 엘리
No. 520 영화제보다 기관에 대한 지원이 필요한 때 - 달시 파켓
No. 521 한국영화, 피묻은 역사를 깨우다 (+불어원문) - 아드리앙 공보
No. 522 영화제에 마켓은 필수불가결한가 (+영어원문) - 데릭 엘리
No. 523 표준화된 영어 제목이 필요하다 (+영어 원문) - 달시 파켓
No. 524 찍는 그림과 그린 그림 사이 (+불어 원문) - 아드리앙 공보
No. 525 2015 부산영화제는 더 중요하다 (+영어 원문) - 데릭 엘리
No. 526 소리의 여백을 활용하는 법 (+영어 원문) - 달시 파켓
No. 527 장선우 감독, 그의 광기가 그립다 (+불어 원문) - 아드리앙 공보
No. 528 중산층화의 위기 (+영어 원문) - 데릭 엘리
No. 529 오리엔탈리스트 비평가의 전략 (+불어 원문) - 아드리앙 공보
No. 530 유비쿼터스 영화 (+영어 원문) - 달시 파켓
No. 531 좋은 영화만으로는 부족하다 (+영어 원문) - 데릭 엘리
No. 532 작가는 있지만 대중 감독은 없다 (+영어 원문) - 스티븐 크레민
No. 533 별의 효용성 (+영어원문) - 달시 파켓
No. 534 2005년 나를 짜릿하게 만든 순간들 (+영어원문) - 데릭 엘리


닫기

2006년 (No. 535~584)

No. 535 나는 미키 루크가 늙어가는 걸 보았노라 (+불어원문) - 아드리앙 공보
No. 536 홍콩영화가 비빌 언덕은 어디? (+영어원문) - 스티븐 크레민
No. 537 사자는 사자고, 고양이는 고양이다 (+영어원문) - 달시 파켓
No. 538 신은 영화 속에 있는가 (+불어원문) - 아드리앙 공보
No. 539 인도산 〈올드보이〉의 예술적 향기 (+영어원문) - 데릭 엘리
No. 540 방콕국제영화제는 어디로 가는가 (+영어원문) - 스티븐 크레민
No. 541 〈브로크백 마운틴〉 서울 시사기 (+영어원문) - 달시 파켓
No. 542 다큐멘터리영화의 미학 (+불어원문) - 아드리앙 공보
No. 543 영화제 심사위원은 정치가인가 (+영어원문) - 데릭 엘리
No. 544 당신의 이웃을 깔보지 말라 (+영어원문) - 스티븐 크레민
No. 545 비대한 영화의 빈약한 자신감 (+영어원문) - 달시 파켓
No. 546 파리와 서울, 두 영화의 도시 (+불어원문) - 아드리앙 공보
No. 547 인도 뮤지컬 영화의 힘 (+영어원문) - 데릭 엘리
No. 548 아시아 영화는 지금 순수한 사랑 중 (+영어원문) - 스티븐 크레민
No. 549 '왜?'와 '어떻게?' (+영어원문) - 달시 파켓
No. 550 한국이 간과한 한국영화의 효과 (+불어원문) - 아드리앙 공보
No. 551 TV 드라마의 중요성, 간과하지 말라 (+영어원문) - 데릭 엘리
No. 552 영화제 프로그래밍 이대로 좋은가 (+영어원문) - 스티븐 크레민
No. 553 한국영화, 마케팅 내공을 키워라 (+영어원문) - 달시 파켓
No. 554 일상 속의 고대극 (+불어원문) - 아드리앙 공보
No. 555 칸은 유럽영화만 사랑해 (+영어원문) - 데릭 엘리
No. 556 칸에서 일본영화가 보이지 않았던 이유 (+영어원문) - 스티븐 크레민
No. 557 작은 맥락과 큰 맥락 (+영어원문) - 달시 파켓
No. 558 톰 크루즈가 샤룩 칸에게 밀린 까닭 (+불어원문) - 아드리앙 공보
No. 559 그래도 있는 게 낫다 (+영어원문) - 데릭 엘리
No. 560 아시아만의 영화 축제가 필요하다 (+영어원문) - 스티븐 크레민
No. 561 응집된 아시아 공동체를 위한 초석 - 달시 파켓
No. 562 아름다움의 감염, 〈내 생애 가장 아름다운 일주일〉 - 아드리앙 공보
No. 563 영화제가 부리는 마법 - 데릭 엘리
No. 564 작은 영화제가 성장하는 방법 - 스티븐 크레민
No. 565 한국영화여, 외국어 대사 처리에 노련해져라 - 달시 파켓
No. 566 내 사랑 베티의 스무번째 생일을 축하하며 - 아드리앙 공보
No. 567 전쟁과도 같은 영화제 만들기 - 데릭 엘리
No. 568 영화 수집, 그 참을 수 없는 즐거움 - 스티븐 크레민
No. 569 완벽한 결말을 만나는 기쁨 - 달시 파켓
No. 570 마릴린 먼로의 마지막 무대 - 아드리앙 공보
No. 571 정치적인, 너무나 정치적인 - 데릭 엘리
No. 572 정확한 박스오피스 집계의 중요성 - 스티븐 크레민
No. 573 실패한 영화를 바라보는 차가운 시선 - 달시 파켓
No. 574 류승완 감독, 쓸쓸한 얼굴로 돌아보다 - 아드리앙 공보
No. 575 영화를 자유롭게, 마음껏 보고 싶다! - 데릭 엘리
No. 576 영화제는 산업의 윤활유 되어야 - 스티븐 크레민
No. 577 한국영화, 리메이크 아닌 재촬영을 제안한다 - 달시 파켓
No. 578 갇힘의 환상
No. 579 
No. 580 아시아영화에 관한 아시아적 관점이 필요하다 - 스티븐 크레민
No. 581 한국 영웅의 출현을 기대한다
No. 582 2006년의 영화를 되돌아보다 - 아드리앙 공보
No. 583 아시아의 독보적인 사업책이 필요하다 - 데릭 엘리
No. 584 영화 저작권과 관객의 볼 권리 - 스티븐 크레민


닫기

2007년 (No. 585~634)

No. 585 오늘날의 한국영화는 무엇으로 불러야하는가
No. 586 보보스와 〈괴물〉 - 아드리앙 공보
No. 587 제대로 꿰어진 구슬목걸이 - 데릭 엘리
No. 588 영화광의 숙취 - 아드리앙 공보
No. 589 시나리오작가들에게 고함
No. 590 수출용 남자 배우들의 현재 - 스티븐 크레민
No. 591 베를린, GO, 이스트! - 데릭 엘리
No. 592 중화권 영화와 한국 영화사의 연애담 - 스티븐 크레민
No. 593 부산에서 만나요 - 달시 파켓
No. 594 불 좀 빌려주세요 - 아드리앙 공보
No. 595 이 감독을 추천합니다 - 데릭 엘리
No. 596 대만여성영화제의 도전 - 스티븐 크레민
No. 597 두 도시 이야기 - 달시 파켓
No. 598 파괴적인 대리인들 - 아드리앙 공보
No. 599 가짓수만 맞춰주면 통합되나? - 데릭 엘리
No. 600 영화제에 로그인하시겠습니까? - 스티븐 크레민
No. 601 보통 중국영화들을 위하여 - 달시 파켓
No. 602 잊혀진 수상작 - 아드리앙 공보
No. 603 영화제 쿼터의 정치학 - 데릭 엘리
No. 604 누가누가 많이 나왔나 - 스티븐 크레민
No. 605 내 머릿속의 목소리 - 달시 파켓
No. 606 르 클레지오의 한국영화 산책 - 아드리앙 공보
No. 607 전도연의 여우주연상 수상이 의미하는 것 - 데릭 엘리
No. 608 세계 최고 영화도서관의 몰락 - 스티븐 크레민
No. 609 위트 스틸먼을 기다리며 - 달시 파켓
No. 610 리비에라 해안에 작별 인사를! - 아드리앙 공보
No. 611 노동자 경찰이 돌아왔다 - 데릭 엘리
No. 612 떠나간 거장, 에드워드 양을 추모하다 - 데릭 엘리
No. 613 언어와 글로벌 스타의 상관관계 - 스티븐 크레민
No. 614 한국영화의 진짜 얼굴 - 달시 파켓
No. 615 취한 여자들의 진심과 속셈 - 아드리앙 공보
No. 616 타이영화 리메이크 성공시대 - 스티븐 크레민
No. 617 진정한 평론가란? - 달시 파켓
No. 618 할아버지가 만드는 영화 - 아드리앙 공보
No. 619 문전성시를 이루는 영화제를 위하여 - 데릭 엘리
No. 620 벗어라, 영화! 열려라, 참깨! - 스티븐 크레민
No. 621 위기는 창조의지가 잠든 사이 찾아올지니 - 달시 파켓
No. 622 예술영화는 대중영화 상영관에 통합되는가 - 아드리앙 공보
No. 623 중국 영화계, 대인이 필요한 때 - 데릭 엘리
No. 624 대륙의 새로운 빛 - 스티븐 크레민
No. 625 인터뷰의 기술 - 달시 파켓
No. 626 한국영화의 시조 - 아드리앙 공보
No. 627 영화제에 문화혁명이 필요하다 - 데릭 엘리
No. 628 인터넷 검색으로 관객을 읽는다 - 스티븐 크레민
No. 629 중견들을 위한 젊은 기술 - 달시 파켓
No. 630 '어워드'라는 이름의 게임 - 스티븐 크레민
No. 631 요즘 극장에는 빅브러더가 산다 - 데릭 엘리
No. 632 동양 남자의 관능 - 아드리앙 공보
No. 633 천 개의 평론보다 한 마디 입소문! - 달시 파켓
No. 634 "어차피 잘 안 풀릴 텐데" - 아드리앙 공보

닫기

2008년 (No. 635~684)

No. 635 덜 섹시하고, 더 멍청하게 - 데릭 엘리
No. 636 자국영화를 껴안는 두 가지 방법 - 스티븐 크레민
No. 637 한국영화에 건네는 달콤쌉싸름한 조언 - 달시 파켓
No. 638 가까이하기엔 너무 먼 영화 - 아드리앙 공보
No. 639 둘이 하나되어 더욱 풍요로워지다 - 데릭 엘리
No. 640 불법복제에 대처하는 우리들의 방법 - 스티븐 크레민
No. 641 아시아의 역사로 우린 무엇을 하는가? - 아드리앙 공보
No. 642 충무로 주식시장, 재미있지 않을까? - 달시 파켓
No. 643 영화제들이여, 몸집을 줄여라 - 데릭 엘리
No. 644 정부 보조금과 창의성의 관계 - 스티븐 크레민
No. 645 한국 정부는 왜 수수방관하는 걸까? - 달시 파켓
No. 646 자신만의 시스템을 만들어야 합니다 - 아드리앙 공보
No. 647 노래하지 않는 스위니 토드? - 데릭 엘리
No. 648 발상의 전환이 필요한 때다 - 스티븐 크레민
No. 649 영화 스타의 힘이란? - 달시 파켓
No. 650 한편의 코미디, 프랑스를 덥히다 - 아드리앙 공보
No. 651 터키 거장들의 영화가 없는 이스탄불 - 데릭 엘리
No. 652 우디네는 신하균을 좋아해 - 스티븐 크레민
No. 653 영화제가 특별한 해를 기리는 방법 - 달시 파켓
No. 654 누벨바그, 오해에서 비롯됐다? - 아드리앙 공보
No. 655 뉴웨이브의 씨앗은 무엇이었나 - 데릭 엘리
No. 656 아시아에서 가장 뜨는 배우는 누구인가 - 스티븐 크레민
No. 657 미친 영화를 위하여 - 달시 파켓
No. 658 삼류라고 무시하지 마세요 - 아드리앙 공보
No. 659 영화제용 러프 컷의 탄생 비화 - 스티븐 크레민
No. 660 상하이국제영화제를 좋아하는 이유 - 데릭 엘리
No. 661 반복의 마력 - 달시 파켓
No. 662 그녀는 여전히 계단 위쪽에 서 있다 - 아드리앙 공보
No. 663 할리우드에 진정한 슈퍼히어로는 없는가? - 데릭 엘리
No. 664 우스꽝스러운 천재, 열성스런 장인 - 아드리앙 공보
No. 665 보다 성숙해진 부천국제판타스틱영화제 - 스티븐 크레민
No. 666 한국영화 지지자들의 고향을 만드는 법 - 달시 파켓
No. 667 세계가 중국을 바라보는 시선 - 아드리앙 공보
No. 668 로카르노, 그 화려했던 과거는 어디에 - 데릭 엘리
No. 669 허우샤우시엔의 블록버스터 도전 - 스티븐 크레민
No. 670 100분 동안 낄낄댈 전염성 높은 코미디
No. 671 상대적이며 복잡한 아시아 영화지리학 - 아드리앙 공보
No. 672 마르코 뮐러의 실패로 얼룩진 베니스영화제 - 데릭 엘리
No. 673 아시아는 왜 아카데미상에 집착하는가? - 스티븐 크레민
No. 674 음악, 눈물, 그리고 순수에 대한 집착 - 달시 파켓
No. 675 내 기억을 훔쳐간 왕가위 - 아드리앙 공보
No. 676 한국식 화법은 격렬해 - 데릭 엘리
No. 677 아이디어 없어도 살아남으려면 - 스티븐 크레민
No. 678 말 꺼내기 전 30분간의 침묵 - 달시 파켓
No. 679 불황에 타오르는 영감 - 아드리앙 공보
No. 680 도시가 길러낸 영화 시인들 - 데릭 엘리
No. 681 지중해에서 취향을 생각하다 - 스티븐 크레민
No. 682 올해 데뷔한 감독들에게 축배를! - 달시 파켓
No. 683 
No. 684 안 본 영화에 대해 말하는 법 - 아드리앙 공보


닫기

2009년 (No. 685~735)

No. 685 
No. 686 3등이지만, 주신을 주목해줘 - 데릭 엘리
No. 687 제발 인도네시아영화를 보여줘라 - 스티븐 크레민
No. 688 시스템을 믿지 말라 - 달시 파켓
No. 689 장 뤽 고다르, 파편들만 튀고… - 아드리앙 공보
No. 690 일제시대, 거 참 민감하군 - 스티븐 크레민
No. 691 
No. 692 오, 환타스틱 70mm - 데릭 엘리
No. 693 욕구불만의 다른 표현인가 - 아드리앙 공보
No. 694 스타여, 내 뺨을 갈겨다오 - 달시 파켓
No. 695 서울은 역시 국제도시야 - 스티븐 크레민
No. 696 시대극, 그게 특기잖아 - 데릭 엘리
No. 697 관점을 바꾸는 마법 - 달시 파켓
No. 698 폭력적인 영화의 구원 - 아드리앙 공보
No. 699 이런 여배우는 많지 않다 - 데릭 엘리
No. 700 '여성감독'영화제가 아닌 거야 - 스티븐 크레민
No. 701 한국 영화음악 멜로디를 줄여요 - 달시 파켓
No. 702 놀리우드 제국의 진실은 - 아드리앙 공보
No. 703 영어자막, 돈 얼마나 든다고… - 스티븐 크레민
No. 704 칸, 부르조아적 보수노선의 선택 - 데릭 엘리
No. 705 〈업〉을 떨리는 마음으로 기대함 - 달시 파켓
No. 706 진짜배기 '롤로'를 추억하며 - 아드리앙 공보
No. 707 아라타, 아소, 그리고 황우슬혜 - 스티븐 크레민
No. 708 중국 뉴웨이브의 섬광적 순간 - 데릭 엘리
No. 709 전지현, 당신의 미래는 밝아! - 달시 파켓
No. 710 프랑스인들은 영국영화를 좋아해 - 아드리앙 공보
No. 711 중국에 극장만 지으면 뭐하나 - 스티븐 크레민
No. 712 영화제의 기본 정신으로 돌아가라 - 데릭 엘리
No. 713 고 유현목 감독의 못다 핀 꿈 - 달시 파켓
No. 714 유현목의 그 "가자"는 뭔가 - 아드리앙 공보
No. 715 서울 영화계 휴가갔나 - 데릭 엘리
No. 716 멜버른영화제와 '진짜 중국' - 스티븐 크레민
No. 717 〈이웃집 좀비〉의 일장일단 - 달시 파켓
No. 718 셰에라자드가 아니어도 괜찮아 - 아드리앙 공보
No. 719 로카르노영화제는 죽었다 - 데릭 엘리
No. 720 〈20세기 소년〉 3부작의 정체 - 스티븐 크레민
No. 721 부산의 멋진 선택 - 달시 파켓
No. 722 벨기에영화의 저력 - 아드리앙 공보
No. 723 소피의 중국매뉴얼 - 데릭 엘리
No. 724 영화제 경제학을 바꾸자 - 스티븐 크레민
No. 725 주네씨, 그럼 3년 뒤에 보나요? - 아드리앙 공보
No. 726 영화의 목적은 역사 교육이 아니다 - 달시 파켓
No. 727 작은 영화제가 그립다 - 데릭 엘리
No. 728 슈퍼파워, 중국을 주목하라 - 스티븐 크레민
No. 729 세계를 변화시키는 작은 시도 - 달시 파켓
No. 730 영화인의 천재성 유통기간은? - 아드리앙 공보
No. 731 안개(FoG) 속의 그리스 감독들 - 데릭 엘리
No. 732 그래도 멋진 한해였어 - 스티븐 크레민
No. 733 10억원 미만 영화상을 제안함 - 달시 파켓
No. 734 포르노배우 가츠니와 류승완 - 아드리앙 공보
No. 735 홈스의 진짜 문제점은 '드라마' - 데릭 엘리


닫기

2010년 (No. 736~785)

No. 736 
No. 737 대만의 중국영화 쿼터제 - 스티븐 크레민
No. 738 갱스터 에픽 〈흑사회〉 - 달시 파켓
No. 739 로메르와의 마지막 인터뷰 - 아드리앙 공보
No. 740 베를린이여 배짱 좀 키우시게 - 데릭 엘리
No. 741 
No. 742 피터 잭슨의 창조적 위기는 실수일 뿐 - 달시 파켓
No. 743 모란봉이 다시 보이기까지 - 아드리앙 공보
No. 744 
No. 745 2009년 타이영화계를 구원한 네편의 영화 - 스티븐 크레민
No. 746 프로듀서들은 어디로 갔나 - 달시 파켓
No. 747 스크린 속 그녀와의 눈빛교환 - 아드리앙 공보
No. 748 영화제도 애국주의 타령? - 데릭 엘리
No. 749 잔인하다고 안 틀어? - 스티븐 크레민
No. 750 웃기기 위한 클리셰는 그만! - 달시 파켓
No. 751 어느 천재의 현기증 - 아드리앙 공보
No. 752 시작은 〈여인잔혹사 물레야 물레야〉 - 데릭 엘리
No. 753 〈의형제〉가 아시아에서 흥행 1위 - 스티븐 크레민
No. 754 "어- 어- 어" 그 소리가 좋다 - 달시 파켓
No. 755 서양 무사영화 다시 돌아왔나 - 아드리앙 공보
No. 756 올해도 영화산업과 따로 놀았군 - 데릭 엘리
No. 757 발견! 리웨이란, 리팡팡 감독 - 스티븐 크레민
No. 758 〈씨네21〉의 포드캐스트를 기다리며 - 달시 파켓
No. 759 몸으로 말해요 - 아드리앙 공보
No. 760 지금 대륙의 아이콘은 판빙빙 - 데릭 엘리
No. 761 지하전영 작품마저 배제 - 스티븐 크레민
No. 762 입장료 올리기 위한 변명 아냐? - 달시 파켓
No. 763 즐거운 인생 - 아드리앙 공보
No. 764 월드 프리미어 따윈 집어치우라구! - 데릭 엘리
No. 765 일본영화산업 영화사들이 죽인다? - 스티븐 크레민
No. 766 돈보단 대담성, 고로 〈인셉션〉에 한표를 - 달시 파켓
No. 767 늙은 사자의 이빨은 아직도 날카롭군 - 아드리앙 공보
No. 768 심리적으로 너무 위험해 - 데릭 엘리
No. 769 대만영화사 복원할 단초를 얻었노라 - 스티븐 크레민
No. 770 〈김복남 살인 사건의 전말〉은 최고다 - 달시 파켓
No. 771 아듀, 알랭 코르노 - 아드리앙 공보
No. 772 ActiveX에 집착하는 한국, 그리고 부산 - 데릭 엘리
No. 773 베트남도 국제영화제 팡파르 - 스티븐 크레민
No. 774 보고싶다! 봉준호, 이창동의 다큐멘터리를 - 달시 파켓
No. 775 그 너머로 아름다움과 폭력을 보다 - 아드리앙 공보
No. 776 영화의 바다에 '바다'가 없다니… - 데릭 엘리
No. 777 정부 꼭두각시 노릇 그만! - 스티븐 크레민
No. 778 영어 대화, 문법적으로 틀려도 괜찮아 - 달시 파켓
No. 779 이 다리, 현실과 환상 사이 - 아드리앙 공보
No. 780 위대한 영화 유산을 남기고 떠나네 - 데릭 엘리
No. 781 대륙 외화 융단폭격! 알고 보니… - 스티븐 크레민
No. 782 스타의, 스타를 위한, 스타에 의한 축제 - 달시 파켓
No. 783 '무기력 유발하는 관심'을 거부한다 - 아드리앙 공보
No. 784 놀랍도다, 풍요로운 중국영화 역사 - 데릭 엘리
No. 785 일본영화 스틸 위키리크스가 필요해 - 스티븐 크레민


닫기

2011년 (No. 786~799)

No. 786 비주류 영화의 취향을 공략하라 - 달시 파켓
No. 787 피해와 분단 그리고 타자 - 아드리앙 공보
No. 788 게유를 아십니까 - 데릭 엘리
No. 789 게으르고 나태한 베를린 - 스티븐 크레민
No. 790 시나리오작가를 잘 대우해줘 - 달시 파켓
No. 791 팝콘 먹으며 철학 공부를 - 아드리앙 공보
No. 792 
No. 793 베를린 곰… 죽었니? 살았니? - 데릭 엘리
No. 794 아이튠즈로 배급하라 - 스티븐 크레민
No. 795 유머는 놓치고 성차별만 드러날까봐 - 달시 파켓
No. 796 의혹과 결함에서 탄생한 두 감독 - 아드리앙 공보
No. 797 쇼브라더스 전성기의 한 챕터 - 데릭 엘리
No. 798 대만 금마장상 '웃음거리' - 스티븐 크레민
No. 799 한국영화계의 흥미로운 얘깃거리였길 - 달시 파켓


닫기
Posted by 거시다
,
 - 메가박스 신촌 7관에서 봤다. 상단 마스킹을 잘못해서 화면 위쪽이 살짝 잘려나갔다.

 - 그간 〈올드보이〉 블루레이가 제대로 나오질 못하고 피터팬픽처스 같은 립핑 전문 회사에서 후줄근한 무판권 타이틀로 나온 것은 한국 내 판권 문제가 복잡했기 때문이라는 소문을 들은 적이 있는데, 이번에 보니 맨 앞에 CJ 엔터테인먼트 로고가 새로 붙었더라. 결국 CJ에서 가져가게 된 것인지?

 - 이 영화가 그렇게까지 내 속에 깊이 들어와 있는 줄은 몰랐다. 안 본 지 정말 오래됐는데 거의 모든 쇼트가 낯익었다. 추억을 돌아보는 자리로 만들지 않으려고 했지만, 보는 내내 2003년에 처음 이 영화를 보면서 순간순간 느꼈던 기분이나 그 시절 친구들과 이야기했던 바가 자꾸 떠올라 2013년의 감상에 섞여들었다. 새삼 지난 10년이 〈올드보이〉의 10년이었을 뿐만 아니라 내 영화 인생 전부였고 그 출발점에 박찬욱의 영화가 있었음을 실감했다. 전에는 그게 〈복수는 나의 것〉에만 해당하는 이야기이리라 생각했는데, 〈올드보이〉도 뿌리 중 하나였구나.

 - 박찬욱은 이 영화 이후로는 줄곧 닫힌 공간/일상에서 떨어진 공간에서 벌어지는 이야기를 다루거나 로케이션을 다루더라도 거기서 가능한 한 세월의 흔적을 제거하려 하는 편이었다. 그런 의미에서 〈올드보이〉는 박찬욱 영화의 카메라가 실제 세계를 기록하는 역할을 기피하지 않은 (지금까지는) 마지막 영화가 아니었을까. 나는 이 영화의 로케이션이 어디인지 정확히 알지 못하지만, 박찬욱 세계의 인물이 일상 공간을 누비고 다니는 모습에는 어쩔 수 없는 시간의 더께가 얹혀 있다. 그곳이 "좆빵새"를 가르쳐 준 양아치들과 싸운 굴다리 밑이든, 스톡홀름에서 양부모와 함께 산다는 딸 에바의 주소를 얻은 후 터벅터벅 거닐던 시장길이든, 도청 장치를 제거한 용산 전자 상가든, 미도가 사는 "운암동 세운아파트"든, 오대수가 감금방에서 저 유명한 장도리 액션을 펼친 다음 피를 흘리며 쓰러진 건널목이든, 상록고등학교든. 여기에는 어쩔 수 없이 현실의 표면을 기록하고 있는 물건으로 픽션을 만든다는 행위에서 발생하는 긴장이 있다. 박찬욱은 이후의 영화에서 되도록 이 긴장을 걷어내고 원형에 가까운 서사뿐만 아니라 세계의 형상까지도 원형처럼 배치하려고 하는데, 〈스토커〉 감상에서도 슬쩍 말했지만, 나는 그 변화가 그리 달갑지 않다. 그래서 새삼 〈올드보이〉가 더 정겹게 와 닿았는지도.

 - 분명히 한국 영화계에 "스릴러"라는 말이 낯설던 시절이 있었다. 그건 미국놈들이나 만드는 장르라고 여기던 시절. 스릴러가 그냥 하나의 장르라기보다는 영화 표현의 세련미를 나타내는 지표이자 한 문화가 추격과 폭력으로 점철된 이야기를 즐길 수 있는 단계에 이르렀다는 징후처럼 느껴지던 시절. 그런 인식을 대대적으로 바꾸기 시작한 선두주자가 2003년의 〈살인의 추억〉과 〈올드보이〉였다. 그리고 이제 〈올드보이〉를 보며 지난 10년간의 성과를 돌이켜보노라니 결국 한국 스릴러의 주도권을 가져간 쪽은 〈살인의 추억〉이었구나 싶다. 〈살인의 추억〉은 장르로서의 스릴러를 한국이라는 풍경/역사 안에 어떻게 안착시킬 것인가를 보여준 영화였고, 그건 한 감독의 개성을 벗어나 거대한 제작 시스템 안으로 한결 쉽게 스며들 수 있는 방식이었다. 반면 〈올드보이〉는 그보다는 시청각을 교란하고 관객을 은연중에 영화의 구조 안에 동참하게 하는 화법으로 스릴러가 된 영화인데, 이것은 제작하는 쪽에서나 감상하는 쪽에서나 좀처럼 눈여겨보고 귀담아듣지 않는 영역이며, 연출이라는 감독 고유의 영역에 좀 더 가까이 위치한 특성이다. 결국 10년이 흐르고 나니 분명해졌다. 〈살인의 추억〉은 타의 모범이 된 영화고, 〈올드보이〉는 비할 상대가 없는 영화다.

 - 이와 관련해서, 특히 〈올드보이〉에서 여러 종류의 음향을 이용해 관객의 착오를 의도적으로 이끌어낸 다음 한발 늦게 진실을 알려줌으로써 착오를 수정하고 영화의 상태를 다시 인식하게 하는 솜씨가 참으로 즐거웠다. 한편으로는 예전에는 재기 어린 연출의 예로만 여겼던 것들을 이제는 한데 엮어놓고 다른 방식으로 이야기할 수 있을 것 같다는 기쁨인 것 같기도 하다.

 - 세월이 흐르면서 달라진 감상 하나. 10년 전의 나는 오대수가 자신의 잘못을 잊어버렸다는 설정을 두고 그럴 수도 있겠다고 여기기는 했으나 실감하지는 못했다. 이제는 실감할 수 있다. 나이를 먹어가며 다 기억할 수 없는 개인사와 말빚이 차곡차곡 쌓여가는 탓이겠지.

 - 디지털 리마스터링 결과는 그리 인상적이지는 않았으나 딱히 뭐라고 할 말은 없다. 극장에서는 정말로 10년 만에 만난 영화였다. 10년 전 필름의 색감이나 밝기 따위를 기억하고 있을 리가 없지 않은가. 이미 오늘날 내 〈올드보이〉 체험의 주도권을 쥔 쪽은 2003년의 필름이 아니라 그간 틈틈이 봤던 DVD며 블루레이란 말이지. 다만 몇몇 쇼트에서 디지털 노이즈가 지나치게 심하다는 생각은 들었다. 특히 감금방에 갇힌 오대수가 처음 등장하는 쇼트 ─ 배식구로 얼굴 내밀고 애원하는 모습 ─ 는 노이즈가 무척 심해서 집에 와서 캐나다판 블루레이를 찾아봤다. 블루레이 쪽은 그렇지 않은데. 필름 그레인이면 환영했을 텐데 아무리 봐도 그저 디지털 노이즈로밖에 보이질 않았다. 마침 2014년 봄에 플레인 아카이브에서 드디어 제대로 된 한국판 블루레이를 내놓는다는 소식이 전해졌는데, 제작 과정에서 좀 더 손볼 여지가 있으려나 모르겠다. 그리고 이제 시간도 많이 지났으니 전 세계 모든 판본 중 궁극판 DVD에만 수록된 김영진 평론가 단독 음성해설과 해리 놀즈 단독 음성해설까지 넣을 수 있으면 넣어도 좋지 않으려나. 단편 〈심판〉도 궁극판 DVD에만 있었는데 그것도 넣을 수 있음 좋겠고. (궁극판 DVD가 없어서 원통해서 하는 말이 아니라 공익을 위해 하는 말이다. 난 궁극판 DVD 갖고 있음.)


 플레인 아카이브 2014년 봄 출시 예정작 티저 예고편



 - 플레인 아카이브 하니까 생각나는데, 엔딩 크레딧을 보니 "부가판권 판매대행"이 알토미디어(주)였다. 알토미디어는 DVD 업계에서 "한국의 크라이테리언"이라고 불리던 회사였다. 요즘은 플레인 아카이브가 그 이름을 계승할 기세이니 이 또한 인연이라고 해야 할지.

 - 텅 빈 상영관에서 혼자 보게 되나 싶었는데 시작할 즈음 다른 관객이 들어왔다. 엔딩 크레딧을 보고 있는데 그 관객이 정말 고마웠다. 혼자서 그 엔딩 크레딧을 보고 텅 빈 상영관을 뒤로 한 채 나가면 견딜 수 없이 슬플 것 같았는데.

Posted by 거시다
,
 두 가지 인용. 첫 번째. 현재 서울아트시네마 로비 벽에 붙어 있는 영화인들의 시네마테크 후원 메시지 중 박찬욱 감독의 말.

요즘 영화들이 다 비슷비슷해 보이는 건 요즘 영화인들이 다 요즘 영화들만 보기 때문인지도 모르곘다. 당대 사람들끼리의 생각과 취향만 주거니 받거니 하다 보면 서로 닮는 게 당연하지 않을까? 그래서 '옛 영화를 보아야 새 영화를 만든다'라는 [말은], 얼핏 들으면 역설 같지만 결코 역설이 아니다. 영화보기의 재미만 따져봐도 '옛 영화가 새 영화보다 새롭다'. 고전은 살아있다. 고전이 사는 집, 시네마테크 만세!

 두 번째. 얼마 전에 번역한 스티븐 소더버그의 연설.

전 좌절감을 느낄 때마다 생각합니다. 자, 저 밖 어딘가에서 누군가가, 우리가 이렇게 여기 앉아있는 동안 저 바깥 어딘가에서, 누군가가 장차 우리가 사랑하게 될 정말 끝내주는 물건을 만들고 있을 거야. 그 생각이 저를 계속 나아갈 수 있도록 해줍니다.

 그러니까, 정말로 누군가는 영화를 열심히 보고 있었다. 〈컨저링〉은 〈감시자들〉과 더불어 올해의 온고지신, 괄목상대 영화라 할 만하다. 내 취향은 이것보다도 약간 더 '고전'이기는 하지만, 유니버셜, 발 루튼, 해머 공포 영화까지 거슬러 올라가 버리면 21세기 관객에게 먹히기란 쉽지 않겠지. 어쨌거나 이 정도로 잘해놓으면 뭐라고 아쉬워할 마음은 눈곱만큼도 생기지 않는다. '어머나 씨발 깜짝이야=공포'라는 착각에 기대지 않은 채 관객과 캐릭터의 인지를 교란하며 불안을 쌓아나가는 솜씨란 이제 무형문화재로 지정해서 보존해야 하는 시대가 도래했다고 생각하고 있었건만, 저 지긋지긋한 쏘우 시리즈의 감독이자 제작자가 그런 실력을 발휘할지 누가 알았으랴.

 감상을 찾아보니 어디서 많이 봤던 것들만 있을 뿐, 창의성이 없다는 지적도 있더라. 그렇게 말하는 사람과 나는 각자 영화란 무엇인가에 관해 생각하는 바가 다른 듯하다. 나는 영화를 만날 때 내가 듣도 보도 못한 새로운 이야기, 새로운 소재, 새로운 설정을 만나기를 간절히 바라지 않으며, 영화가 그래야만 고유성을 획득할 수 있는 매체라고 생각하지도 않는다. 중요한 것은 다루는 대상의 구체적인 형질이며, 그에 맞게 표현하는 것뿐이다. 그러니까 귀신 들린 집 이야기가 백 개든 천 개든 상관없다. 구체적으로 그 집이 어떻게 생겼는가, 거기에 사는 사람은 어떻게 생긴 어떤 사람인가가, 어떤 일이 어느 때에 어디에서 발생하는가가 중요하며, 그에 충실한 영화인 한, 그 영화는 고유하다. 정말로 창의성이 부족한 영화는 자기 앞에 놓인 대상에 신경 쓰기보다는 관습을 의식하면서 게으른 결정을 내리는 영화다.

 말하자면 한밤중 누군가 발을 잡아당기는 느낌에 잠에서 깬 신디가 침대 밑을 내려다보았을 때 클로즈업으로 귀신이 불쑥 튀어나오도록 해서 비명으로 장면을 마무리하는 영화. 창의성이 부족한 영화란 그런 영화를 가리키는 말이다. 〈컨저링〉에서는 같은 상황을 다음과 같이 처리한다. 일단 신디는 침대 밑을 내려다보는 것조차 두려워하여 벌벌 떨며 침대 위의 '안전한 영역'에 웅크린다. 하지만 그걸로 불안이 가실 리가 없다. 결국 신디는 조심스럽게 침대의 다른 쪽 모서리로 자리를 옮겨 기어이 침대 밑을 내려다본다. 화면이 침대 밑을 거꾸로 바라보는 신디의 시점으로 바뀌면 카메라가 좌우로 느리게 패닝하면서 관객으로 하여금 프레임 바깥에 있을 무언가가 바로 옆에서 튀어나오리라는 기대/불안에 가슴을 졸이게 한다. 하지만 그런 쇼크 효과는 없다. 대신 문이 삐그덕 움직이는 음향이 들려온다. 이에 신디와 관객의 시선은 출입문이 있는 화면 후경으로 옮겨 간다. 신디는 몸을 일으켜 출입문을 바라본다. (이때 카메라는 컷 없이 허공에서 180도 몸을 뒤집는다. 실로 예기치 못한 근사한 움직임이다.) 신디는 문 뒤의 암흑에서 눈을 떼지 못한 채 바짝 졸아있다. 옆 침대에서 자고 있는 언니 크리스틴을 부르지도 못할 정도다. 다행히 크리스틴이 깨어난다. 신디는 왜 그러느냐는 크리스틴의 말에 벌벌 떨며 간신히 입을 연다. 문 뒤에 누군가 있어. 여기서부터 관객은 이 장면을 서서히 신디의 시점이 아니라 크리스틴의 시점으로 보게 된다. 이전까지의 공포가 '방 안에, 문 뒤에 누군가 있을지도 몰라'였다면, 여기서부터는 '크리스틴과 관객은 보지 못하는 무언가를 신디는 보고 있는 것 같아'라는 공포가 시작된다. 이내 신디(와 관객)의 간절한 만류에도 크리스틴이 침대 밖으로 나가 문 뒤로 다가간다. 크리스틴은 문 뒤를 들여다보고는 거기에 아무것도 없다고 선언한다. 관객은 잠시 안도하며, 동시에 공포영화의 관습상 이대로 이 장면이 끝날 리가 없다는 불안이 찾아온다. 게다가 크리스틴은 신디를 달래느라 문 뒤의 어둠에 등을 돌리고 있다. 신디는 말한다. 그것이 언니 뒤에 있다고. 순간, 롱 쇼트 상태에서 크리스틴 바로 뒤에 있던 문이 느닷없이 닫힌다. 신디가 발작적으로 비명을 지른다. 크리스틴의 시선으로 보자면 신디가 악몽 때문에 헛것을 보았을 뿐이라는 해석은 충분히 합리적이다. 따라서 다음 장면에서 방에 모인 온 가족이 신디를 다독일 뿐, 추가 조치를 하지 않는 것도 충분히 합리적이다. 공간의 구조, 시선의 방향, 관습적인 쇼크 효과에 대한 기대 심리와 위반, 뜻밖의 카메라 움직임, 인물의 추가에 따른 시점의 전환, 그에 따른 두려움의 원인 변화, 캐릭터의 납득할 만한 사후 반응까지. 내게는 한 장면 안에서 이 모든 요소를 능수능란하게 엮어내는 솜씨야말로 〈컨저링〉이 갖춘 창의성의 증거로 보인다. 게다가 〈컨저링〉은 그 재주를 110분 동안 고르게 유지한다. 풍악을 울려도 모자랄 판이다.

* * *

 〈컨저링〉을 보는 동안 오른쪽에 두 관객이 앉아있었다. 둘 다 적게는 중학교 고학년에서 많게는 대학교 새내기 정도로 보이는 남자 관객이었다. 둘은 팝콘을 뒤적이며 광고 시간 내내 잡담을 주고받았다. 그런데 영화가 막 시작했을 때, 명랑하게 이야기를 나누던 두 관객 중 내 바로 오른쪽에 앉은 이가 느닷없이 자기 동행에게 고백하듯 말했다. 나 무서운 영화 못 보는데. 그러고는 혹시 귀마개 없느냐고 묻더니 이내 이어폰을 귀에 꽂는 게 아닌가. 그렇다고 음악을 들었다는 이야기는 아니고, 그저 귀마개 대용이었던 것 같다. 영리한 방법이라고 생각했다. 공포영화는 영상을 가리는 것보다 음향을 막는 편이 덜 무섭지. 그렇지만 그는 그러고도 110분 내내 무언가 불길한 일이 일어날 것 같은 대목마다 팝콘 상자를 들어 올려 눈을 가렸다. 보다 못한 동행이 눈을 가리면 상상하게 되니 더 무섭고 차라리 봐버리는 게 낫다고 충고하자 "아, 그런가?"라고 말했지만, 끝내 눈 가리기를 포기하지 않았다. 또 그는 영화가 끝날 때까지 "좆나 무서워."라는 말을 적어도 50번은 넘게 되뇌었다. 때로는 동행과 영화에 관해 대화도 나누었다. (거울을 통해 소년의 귀신을 보여주는 오르골이 등장했을 때 거울에 그려진 나선형 문양이 돌아가는 것을 보고 "저거 최면 아냐?"라고 말한 것은 나름대로 참신했다. 여담이지만 그렇게 열심히 팝콘 상자를 들어 올렸는데도, 그는 좀처럼 플롯을 놓치지 않았다.) 하필 귀에 이어폰을 꽂은 바람에 그 목소리가 상영관 안의 모든 사람에게 들릴 만큼 컸다. 영화 끝나기 25분 전에는 휴대폰을 꺼내 얼마나 남았는지 시각도 확인했다. 클라이맥스 즈음에는 너무 쉬지 않고 말을 쏟아내는 바람에 결국 한 차례 노려보며 주의를 주었다.

 하지만 나는 사실 그 관객이 은근히 마음에 들었다. 그가 그토록 소란스러웠던 이유를 이해할 수 있기 때문이며, 그가 그 이유에 대해 솔직했기 때문이다. 한때 그처럼 겁 많은 관객이었던 사람으로서, 그의 소란스러움이 마음속의 두려움을 조금이라도 밖으로 꺼내 덜어보려고 몸부림치는 것임을 어렵지 않게 느낄 수 있었다. 설령 그가 "좆나 무서워."를 연발하지 않았더라도 알았을 것이다. 어떻게든 자기 귀에 자신의 목소리를 들려줌으로써 자신이 스크린 바깥에 있음을 상기시키려고, 스크린 안의 세계에 몰입하지 않으려고 애쓰는 그 발버둥을, 한때 그처럼 겁 많았던 이 관객은 안다.

 그런데 겁 많았던 관객이 아는 것이 또 있다. 영화가 자아내는 두려움 앞에서 자신을 보호하고 싶을 때 택하는 또 다른 방법이 있다. 바로 그 영화를 헐뜯고 짐짓 짜증 내는 방법이다. 이 방법은 자신이 겁을 먹은 게 아니라 단지 영화의 후줄근한 모양새에 불쾌해하고 있음을 만천하에 알림으로써 다른 사람 앞에서 체면을 차리는 한편 자신에게 영화를 보는 안목이 있다는 뉘앙스를 곁들이는 방식으로 나타난다. 가장 대표적인 예로는 '뭔 놈의 영화가 쓸데없이 시끄럽기만 하고 지루하기 짝이 없다'는 불평을 되뇌는 수법이 있다. 물론 실제로 쓸데없이 시끄럽기만 하고 지루하기 짝이 없는 영화도 많기는 하지만, 그러한 불쾌감을 동행에게 과도하게 표출하는 관객은 실은 겁을 먹고 있을 가능성이 높다.

 내 오른쪽에 앉은 그 관객은 자신의 무서움 앞에 솔직했다. 그럼으로써 〈컨저링〉이 자신을 사로잡고 있음을 거듭 인정했다. 예전의 나는 그걸 인정하는 게 정말 쉽지 않았다. 공포영화 자체를 경멸하는 편이 훨씬 쉬웠다. 너무 겁이 많았던 나머지 애초에 공포영화를 보는 일도 거의 없었지만, 간혹 어쩔 수 없이 보게 되었을 때는 비겁한 관객이 되는 편을 택하곤 했다. 그렇기에 그 관객의 끝없는 오두방정은 차라리 영화에 대한 더없이 순수한 고백처럼 들렸다. 게다가 그는 심지어 정중하기까지 했다. 영화가 끝나고 여느 때처럼 엔딩 크레딧을 보고 있었는데, 그가 조심스럽게 말을 걸어왔다. 그는 시끄럽게 해서 죄송합니다, 라며 허리까지 꾸벅 숙여 인사를 하고는 일행과 함께 자리를 떴다. 그렇게 겁 많은 이가 도대체 어쩌다 심야 상영 시간에 〈컨저링〉을 보러 왔는지는 알 수 없는 노릇이다. (어떤 영화인지 모르고 온 것도 아니었다. 특정 장면에서는 "으으, 예고편에 나온 그거다."라며 먼저 겁을 집어먹기도 했다.) 어쨌든, 나는 언젠가 그와 다시 만나 발 루튼 공포영화라도 소개해 줄 수 있으면 좋겠다고 생각했다.

Posted by 거시다
,
 ① 초당 48프레임 영상에 관한 정보를 모아둔 웹페이지 : http://www.48fpsmovies.com/

 〈호빗: 뜻밖의 여정〉뿐만 아니라 〈아바타〉, 〈인셉션〉 등의 48프레임, 60프레임짜리 예고편을 볼 수 있고 그 외 24프레임과 48프레임의 비교 영상도 있다.



 ② 아주아주 간단히 말하자면, 그동안 1초를 스물넉 장의 사진으로 쪼개서 보던 걸 마흔여덟 장, 예순 장으로 쪼개서 보는 거니까 움직임이 훨씬 부드럽고 선명해진다. 시각 안에서 잔상 효과가 담당하던 부분을 좀 더 많은 실제 이미지로 대체하는 셈이려나? 막연히 생각해 보면 눈으로 들어오는 가시광선을 통해 형성되는 인간의 시각은 (초 당 몇 장의 정지 이미지로 나뉘는 것이 아니라 빛의 스펙트럼처럼) 연속적이니까, 이처럼 프레임 수가 늘어날수록 인간의 '자연스러운' 시각에 가까워질 것 같다.



 ③ 그런데 과연 그런가? 그 가정이 성립하려면 애초에 카메라라는 기계를 통해 형성된 이미지는 그 '성능'이 인간의 눈에 비해 떨어질 뿐, '특질'은 동일하다는 전제가 있어야 한다. 하지만 24든 48이든 60이든 애초에 광학 기계를 통해 포착한 이미지는 눈을 통해 형성된 이미지와는 아예 다른 종류의 이미지로 분리해서 생각해야 하지 않을까. 정확히 어디서 차이가 나는지는 과학적 지식이 부족하여 모르겠으나, 영화 이미지가 움직이는 모습이나 초점 이동만 보더라도 그것은 사람의 눈과는 본질적으로 다르다는 생각만 든다. 가령 화면의 모든 피사체에 초점이 맞는 딥포커스 화면을 보고 있노라면 정작 내 눈은 세상을 그런 식으로 본 적이 한 번도 없다는 생각이 드는 거다. 지금 잠시 모니터에서 시선을 돌리고 확인해보아도, 나로서는 시야 안에 들어오는 모든 것을 한꺼번에 선명하게 인지한다는 게 불가능한 것이다.

 그러니 단순히 프레임 수가 늘어난다고 해서 그것이 더 '자연스럽'고 '사실에 가까운' 것이라고 단언할 수 있는지 의문이다.



 ④ 좀 더 구체적인 현상을 보자면, 무엇보다도 프레임 수가 높아지면 평소에 보던 영화 이미지보다 화면 내 피사체의 움직임이 더 빠르고 '지나치게' 부드러워서 흡사 화면을 1.X배속 정도로 빨리 감은 듯한 느낌이 든다.

 질문 하나. 이 이질감은 단지 우리의 눈이 초당 24프레임 이미지에 익숙해져 있기 때문에 느껴지는 일시적인 현상일 뿐인가?

 질문 둘. 그것이 우리 자신의 '사실적'이고 '자연스러운' 시각에 더 가까운가?




 ⑤ 더불어 만약 48프레임이나 60프레임이 더 실감 나는 영상을 만들어낸다고 하더라도, 그 '실감'이란 대체 무엇을 실감 나게 한다는 말인가를 잘 생각해야 한다. 〈호빗: 뜻밖의 여정〉을 본 관객 중에는 이것이 영화를 마치 재연 드라마처럼 보이게 한다는 소감을 피력한 사람이 적지 않다. 세트가 너무 세트 같고, 배우가 너무 배우 같다는 식이다. 가운데땅에서 벌어지는 호빗 빌보의 모험담, 즉 허구의 이야기를 더 '실감'나게 느끼는 대신 뉴질랜드의 스튜디오 안에 세워진 세트나 마틴 프리먼이라는 배우, 즉 영화 촬영 현장이 더 자신의 존재감을 뽐내며 '실감'나게 느꼈다는 이야기다. 영화 만드는 사람들의 희망/주장/믿음과는 달리, 이 '실감나는' 영상 덕분에 화면 위에 덧씌운 픽션의 힘은 오히려 약해지고 있다.

 이런 현상은 몇 해 전 개봉한 마이클 만 감독의 〈공공의 적들〉을 떠올리도록 한다. 만이 디지털 촬영에서 얻고자 했던 것도 그놈의 '실감'이었다. 동시대의 도시를 무대로 한 〈콜래트럴〉과 〈마이애미 바이스〉에서는 그 의도가 주효했다고 생각한다. 만의 뉴스 영상 같은 화면 덕분에 LA의 밤거리를 돌아다니는 택시 기사와 킬러, 혹은 마이애미의 밤을 달리는 두 형사는 가공의 우주 속에만 존재하는 LA나 마이애미 속의 캐릭터가 아니라 지금 우리가 사는 이 시대 이 지구의 LA와 마이애미에 실재하는 인물처럼 보였다. 문제는 30년대를 배경으로 하는 시대극 〈공공의 적들〉이었다. 만은 디지털 촬영이 30년대가 마치 눈앞에서 생생하게 펼쳐지는 듯한 감각을 제공한다고 주장했다. 그러나 내가 보기에 그 영화의 '재연 드라마' 질감은 30년대를 눈앞에서 생생하게 펼쳐내는 대신 30년대를 재현하기 위해 노력한 21세기 영화 현장만을 눈앞에서 생생하게 펼쳐냈다. 의상이나 소품, 배경 등은 (만의 성격상) 철저히 고증을 따랐겠지만, 그 '생생한' 디지털 화면 때문에 30년대의 의상이나 소품, 배경이 아니라 30년대를 흉내 내는 21세기의 가짜 의상, 소품, 배경이라는 인상이 강했다. 그 영화에서 내가 본 것은 대공황기에 활약한 갱스터 존 딜린저가 아니라 딜린저의 이야기를 재연하고 있는 조니 뎁이었다.

 실은 나는 극영화에서 잘 짜인 픽션을 넘어 픽션과 함께 공존하는 촬영 현장의 물성을 느끼는 것이 중요하다고 생각하며, 따라서 잭슨이나 만의 실험도 호의적으로 즐기는 편이다. 하지만 그 실험의 방향이란 영화를 만든 그 사람들이 원했던 바나 인터뷰에서 주장하는 내용, 극장을 찾는 관객이 원하는 바와는 한참 다르지 않으냐고 묻고 싶다.



 ⑥ 하지만 '무엇이 더 사실적인가'를 따지는 이런 왈가왈부의 이면에는, 너무 많은 사람이 간과하는 더 근원적인 질문 하나가 숨어있다.

 왜 영화 이미지가 더 사실적이기를, 더욱 현실과 가깝기를, 우리의 감각 체계를 모사하기를 바라는가? 영화는 그래야만 하는가? 그것이 영화의 '발전'인가?

 이 질문이 먼저다. 특히 HFR뿐만 아니라 디지털 촬영, 3D, 아이맥스를 지지하는 사람은 이에 대해 생각해야 한다. 물론 뤼미에르 형제의 〈라시오타 역에 도착하는 기차〉가 그 '실감'으로 관객에게 육박한 이래 영화는 소리를 첨가하고 색을 첨가하고 화면 크기를 키우는 등 현실의 특질을 모사하기 위해 갖은 애를 썼다. 관객들은 언제나 스크린 속에서 더욱 생생한 현실을 만끽하고 싶어했던 듯하다. 하지만 생생한 현실을 제공한다는 그 자체가 영화에 대한 매혹의 근원일 리는 없다. 그 생생한 현실은 영화를 보지 않을 때(그리고 영화를 볼 때조차) 늘 겪으니까. 오히려 결코 그럴 리가 없는데, 이것이 현실일 리가 없는데 현실처럼 보인다는 측면이 더 중요하지 않은가? 스크린 안의 현실만큼이나 스크린이라는 인공적인 경계가 중요하지 않은가? 영화가 현실을 모사하지 않기에 역설적으로 그 안에서 현실을 찾게 되는 것은 아닌가? 영화를 영화답게 하는 것은 무엇인가?

 '더 사실적임'을 향한 맹목적인 지지의 정체가 무엇인지, 그 지지가 영화에 가져올 결과가 무엇인지 먼저 생각해야 한다.



 ⑦ 어쩌면 영화사는 영화 기술의 '발전'을 중심으로 기술하는 대신에 거꾸로 영화 매체의 '그럴 리가 없는' 부분, 생생하지 않은 부분이 제공하는 괴리를 조금씩 망각하고 상실하는 과정으로 기술할 수 있을지도 모른다.



 ⑧ 궁금하다. 크리스토퍼 놀란은 HFR을 원할까? 그는 아이맥스로 '실감'을 얻고 싶어하지만, 디지털과 3D는 거부한다. 그는 픽션의 '실감'을 드높이면서도 촬영 현장의 '실감'은 억누르고자 줄타기를 하는 듯하다. 그렇다면 추측건대 그는 HFR은 받아들이지 않을 것이다.
Posted by 거시다
,
 지금 대한민국에서 〈헤이와이어〉가 훌륭하다고 말하는 사람은 나뿐인가?

 스티븐 소더버그 감독이 어마어마한 걸작을 만든 것은 아니다. 영화가 놀랍도록 참신하거나 기발한 이야기를 들려주는 것도 아니다. 〈헤이와이어〉가 연말 베스트 목록에 들어갈 가능성도 그리 높지는 않다. 하지만 지금 이 영화계(영화를 받아들이는 관객의 문화까지 포함하여)에서 이 영화는 주의 깊게 다루어져야 한다. 적어도 〈프로메테우스〉와 〈어메이징 스파이더맨〉에 관해 그토록 열을 올려 지면을 할애하는 시대에 이 영화에 관해 이야기하지 않는 것은 울적한 일이다. (혹은 결국 그런 정도니까 이 영화에 관해서는 말하지 못하는 거겠지, 라고 비아냥거리고 싶은 마음도 조금 있다.)

 물론 이유는 잘 알고 있다. 이 영화는 배우들의 명연과 유려한 대사, 화려한 특수효과나 귀를 낚아채는 음악, 반전을 거듭하는 영리한 플롯으로 관객의 이목을 붙들 생각이 없다. 격투기 선수인 지나 카라노를 주연 배우로 내세워 근사한 액션 장면을 만들어 내지만, 딱히 독창적이거나 빼어난 액션 안무를 보여줄 의향도 없다. 말하자면 '볼거리'도 없고, 뒤통수를 때려주지도 않는다. 특히 절대다수의 관객은 결말에서 배신감을 느낄 가능성이 높다. 사정이 이러니 미국 개봉 당시의 미적지근한 반응이나, 우리나라에 개봉했다는 사실을 알 수도 없을 정도의 푸대접도 당연하다.

 소더버그가 〈헤이와이어〉에서 한 일은 거칠게 요약하면 두 가지뿐이다. 잘 찍고, 잘 붙인다. 그 외에는 없다. 바로 그래서 이 영화는 중요하다. 영화가 관객을 적극 홀려야만 살아남을 수 있는 이 시대에, 그는 거의 기본기만으로 만든 액션 영화를 내놓았다. 그리고 영화는 그걸로 충분하다는 사실을 실력으로 증명한다. 촬영과 편집이 시시하므로 어쩔 수 없이 이야기 설정과 소위 '스타일'이라고 불리는 난장과 거창하고 실속 없는 특수효과와 정치적 태도와 산업적 환경에서만 의의를 찾아 헤매게 되는 영화들을 주야장천 보다가 그 모든 걸 포기한 채 오직 카메라 앞에 있는 것을 찍어서 자르고 붙였다는 사실로만 승부하는 〈헤이와이어〉의 자태를 보는 경험은 거의 황홀하기까지 하다. (사실 나는 그런 영화만 보지는 않지만.) 아직도 영화가 이 정도로까지 담백해질 수 있단 말인가?

 패스트푸드만 먹다가 어느 날 건강식을 먹었을 때 문득 '아, 그간 내 식습관이 엉망진창이었군.'이라는 깨달음이 찾아오는 것처럼, 〈헤이와이어〉를 보는 경험은 그간 수많은 자극을 통해 몸에 배어버린 자신의 나쁜 관습을 깨달으며 영화라는 표현 수단의 기본 골격을 더듬을 수 있도록 해준다. 이쯤에서는 뭔가 튀어나와서 나를 깜짝 놀라게 하겠지, 머리가 팍 터지고 피가 솟구치면서 급박한 상황이 전개되겠지 등등, 자극에 대한 온갖 기대를 불러일으키는 상황에서〈헤이와이어〉는 담담히 가던 길을 계속 간다. 굳이 갑작스러운 충격 요법으로 자극하지 않아도 이미 정확한 구도의 화면 구성과 편집 안에 긴장감은 들어 있고, 그렇다면 그걸로 충분하다는 식이다. 경찰 특공대와 벌이는 추격전을 보라. 한 쇼트 안에서 움직이는 말로리와 경찰 특공대의 타이밍을 이용하여 추격을 연출하는 그 솜씨는 새삼 영화에서 안무와 카메라 움직임이 얼마나 풍요로운 요소인지를 깨닫게 한다. 이 영화를 보고 있으면 패닝이 이렇게 멋진 기법이었나, 하고 생각하게 될 정도다.

 주인공 말로리가 폴과 한바탕 싸움을 벌인 뒤 호텔을 빠져나와 길거리를 걷다가 미행을 눈치채는 장면을 언급하고 싶다. 이 장면은 너무 쉽게 찍어서 훌륭하다고 인정하기 싫을 정도다. 그저 미행자를 의식하며 계속 길을 걸어가는 말로리의 모습과, 길 건너에서 말로리를 따라 걷는 미행자, 그리고 그 사이를 지나가는 거리의 자동차가 있을 뿐이다. 갑자기 총이 발사되거나, 누가 옆에서 덮친다거나, 예고 없이 음악이 쾅 때리면서 전력질주가 시작된다거나 하는 자극은 하나도 없다. 심지어 상황을 의식하고 판단하느라 바짝 긴장한 말로리의 클로즈업도 없다. 미행자의 모습은 그저 롱 쇼트로만 담긴다. (그래서 관객은 그가 정말 미행자인지 아니면 단순히 말로리의 신경과민인지 알 길이 없다.) 여기에 소더버그는 음악 대신 주변음, 특히 길거리 신호등 소리를 교묘하게 안배하여 청각적인 긴장을 안배한다. 맙소사, 이렇게까지 기름기 없는 서스펜스 연출을 마지막으로 본 게 언제였지? 이건 정말 영화의 기본기에 자신이 있는 사람만 할 수 있는 연출이다. 〈헤이와이어〉에는 이런 순간이 곧잘 나온다. 그냥 한 공간 안에 서 있는 모습, 단순히 오토바이를 타고 어디론가 가는 인서트 쇼트만 보아도 화면 자체의 힘에 절로 행복해진다. 바로 이런 영화가 극장에서 큰 스크린으로 보아야 할 영화다.

 〈헤이와이어〉는 지금 수많은 영화, 특히 액션 영화들이 더욱 새로운 것, 더욱 창의적인 것, 더욱 관객을 깜짝 놀라게 할 만한 것, 더욱 돈을 벌 수 있는 것을 찾다가 놓치고 있는 것이 무엇인지를 보여준다. 이건 너무 기본적인 문제라서 학자들은 새삼 거론할 가치를 느끼지 않고, 도무지 '힙'하지 않으니 평론가나 기자들도 다룰 생각이 없고, (사실 이런 점에 관심이 있는지나 의문이긴 하다. 모두가 점점 더 영화라는 표현 수단 자체에 관해 말하지 않고 있다. 줄거리와 볼거리와 가십에 열광하든가, 아니면 한 "작가"의 심오한 경향에 경배를 바치든가. 심지어 요즘엔 그 둘이 하나로 묶인 듯하다.) 안 그래도 돈은 벌 수 있으니까 만드는 사람도 신경 쓰지 않으며, 관객들은 그런 건 학자들/평론가들이나 알면 된다고 생각하고 있다. 결국 이런 시대 속에서 소더버그가 제공한 교훈은 그 자신에게만 의미가 있을 뿐, 널리 전해지지 못한 채 묻히고 말 것이다. 하지만 이건 정말 중요한 문제다. 모두가 〈헤이와이어〉 같은 영화를 만들어야 한다는 얘기는 아니다. 하지만 〈프로메테우스〉도, 〈어메이징 스파이더맨〉도, 만약 〈헤이와이어〉가 제기하는 문제에 관심을 기울였더라면 훨씬 더 나은 영화, 더욱 박진감 넘치고 가슴을 졸이게 하는 영화가 되었을 것이다. 영화인들이여, 제발 이런 목소리에 귀를 기울여달라. 〈헤이와이어〉가 무슨 천하에 둘도 없는 걸작인 것처럼 이렇게까지 말하지 않아도 괜찮은 영화계를 만들어달라.




본문에서 언급한 영화 :
 - 어메이징 스파이더맨 (The Amazing Spider-Man, 2012)
 - 프로메테우스 (Prometheus, 2012)
 - 헤이와이어 (Haywire, 2011)
Posted by 거시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