지금 대한민국에서 〈헤이와이어〉가 훌륭하다고 말하는 사람은 나뿐인가?

 스티븐 소더버그 감독이 어마어마한 걸작을 만든 것은 아니다. 영화가 놀랍도록 참신하거나 기발한 이야기를 들려주는 것도 아니다. 〈헤이와이어〉가 연말 베스트 목록에 들어갈 가능성도 그리 높지는 않다. 하지만 지금 이 영화계(영화를 받아들이는 관객의 문화까지 포함하여)에서 이 영화는 주의 깊게 다루어져야 한다. 적어도 〈프로메테우스〉와 〈어메이징 스파이더맨〉에 관해 그토록 열을 올려 지면을 할애하는 시대에 이 영화에 관해 이야기하지 않는 것은 울적한 일이다. (혹은 결국 그런 정도니까 이 영화에 관해서는 말하지 못하는 거겠지, 라고 비아냥거리고 싶은 마음도 조금 있다.)

 물론 이유는 잘 알고 있다. 이 영화는 배우들의 명연과 유려한 대사, 화려한 특수효과나 귀를 낚아채는 음악, 반전을 거듭하는 영리한 플롯으로 관객의 이목을 붙들 생각이 없다. 격투기 선수인 지나 카라노를 주연 배우로 내세워 근사한 액션 장면을 만들어 내지만, 딱히 독창적이거나 빼어난 액션 안무를 보여줄 의향도 없다. 말하자면 '볼거리'도 없고, 뒤통수를 때려주지도 않는다. 특히 절대다수의 관객은 결말에서 배신감을 느낄 가능성이 높다. 사정이 이러니 미국 개봉 당시의 미적지근한 반응이나, 우리나라에 개봉했다는 사실을 알 수도 없을 정도의 푸대접도 당연하다.

 소더버그가 〈헤이와이어〉에서 한 일은 거칠게 요약하면 두 가지뿐이다. 잘 찍고, 잘 붙인다. 그 외에는 없다. 바로 그래서 이 영화는 중요하다. 영화가 관객을 적극 홀려야만 살아남을 수 있는 이 시대에, 그는 거의 기본기만으로 만든 액션 영화를 내놓았다. 그리고 영화는 그걸로 충분하다는 사실을 실력으로 증명한다. 촬영과 편집이 시시하므로 어쩔 수 없이 이야기 설정과 소위 '스타일'이라고 불리는 난장과 거창하고 실속 없는 특수효과와 정치적 태도와 산업적 환경에서만 의의를 찾아 헤매게 되는 영화들을 주야장천 보다가 그 모든 걸 포기한 채 오직 카메라 앞에 있는 것을 찍어서 자르고 붙였다는 사실로만 승부하는 〈헤이와이어〉의 자태를 보는 경험은 거의 황홀하기까지 하다. (사실 나는 그런 영화만 보지는 않지만.) 아직도 영화가 이 정도로까지 담백해질 수 있단 말인가?

 패스트푸드만 먹다가 어느 날 건강식을 먹었을 때 문득 '아, 그간 내 식습관이 엉망진창이었군.'이라는 깨달음이 찾아오는 것처럼, 〈헤이와이어〉를 보는 경험은 그간 수많은 자극을 통해 몸에 배어버린 자신의 나쁜 관습을 깨달으며 영화라는 표현 수단의 기본 골격을 더듬을 수 있도록 해준다. 이쯤에서는 뭔가 튀어나와서 나를 깜짝 놀라게 하겠지, 머리가 팍 터지고 피가 솟구치면서 급박한 상황이 전개되겠지 등등, 자극에 대한 온갖 기대를 불러일으키는 상황에서〈헤이와이어〉는 담담히 가던 길을 계속 간다. 굳이 갑작스러운 충격 요법으로 자극하지 않아도 이미 정확한 구도의 화면 구성과 편집 안에 긴장감은 들어 있고, 그렇다면 그걸로 충분하다는 식이다. 경찰 특공대와 벌이는 추격전을 보라. 한 쇼트 안에서 움직이는 말로리와 경찰 특공대의 타이밍을 이용하여 추격을 연출하는 그 솜씨는 새삼 영화에서 안무와 카메라 움직임이 얼마나 풍요로운 요소인지를 깨닫게 한다. 이 영화를 보고 있으면 패닝이 이렇게 멋진 기법이었나, 하고 생각하게 될 정도다.

 주인공 말로리가 폴과 한바탕 싸움을 벌인 뒤 호텔을 빠져나와 길거리를 걷다가 미행을 눈치채는 장면을 언급하고 싶다. 이 장면은 너무 쉽게 찍어서 훌륭하다고 인정하기 싫을 정도다. 그저 미행자를 의식하며 계속 길을 걸어가는 말로리의 모습과, 길 건너에서 말로리를 따라 걷는 미행자, 그리고 그 사이를 지나가는 거리의 자동차가 있을 뿐이다. 갑자기 총이 발사되거나, 누가 옆에서 덮친다거나, 예고 없이 음악이 쾅 때리면서 전력질주가 시작된다거나 하는 자극은 하나도 없다. 심지어 상황을 의식하고 판단하느라 바짝 긴장한 말로리의 클로즈업도 없다. 미행자의 모습은 그저 롱 쇼트로만 담긴다. (그래서 관객은 그가 정말 미행자인지 아니면 단순히 말로리의 신경과민인지 알 길이 없다.) 여기에 소더버그는 음악 대신 주변음, 특히 길거리 신호등 소리를 교묘하게 안배하여 청각적인 긴장을 안배한다. 맙소사, 이렇게까지 기름기 없는 서스펜스 연출을 마지막으로 본 게 언제였지? 이건 정말 영화의 기본기에 자신이 있는 사람만 할 수 있는 연출이다. 〈헤이와이어〉에는 이런 순간이 곧잘 나온다. 그냥 한 공간 안에 서 있는 모습, 단순히 오토바이를 타고 어디론가 가는 인서트 쇼트만 보아도 화면 자체의 힘에 절로 행복해진다. 바로 이런 영화가 극장에서 큰 스크린으로 보아야 할 영화다.

 〈헤이와이어〉는 지금 수많은 영화, 특히 액션 영화들이 더욱 새로운 것, 더욱 창의적인 것, 더욱 관객을 깜짝 놀라게 할 만한 것, 더욱 돈을 벌 수 있는 것을 찾다가 놓치고 있는 것이 무엇인지를 보여준다. 이건 너무 기본적인 문제라서 학자들은 새삼 거론할 가치를 느끼지 않고, 도무지 '힙'하지 않으니 평론가나 기자들도 다룰 생각이 없고, (사실 이런 점에 관심이 있는지나 의문이긴 하다. 모두가 점점 더 영화라는 표현 수단 자체에 관해 말하지 않고 있다. 줄거리와 볼거리와 가십에 열광하든가, 아니면 한 "작가"의 심오한 경향에 경배를 바치든가. 심지어 요즘엔 그 둘이 하나로 묶인 듯하다.) 안 그래도 돈은 벌 수 있으니까 만드는 사람도 신경 쓰지 않으며, 관객들은 그런 건 학자들/평론가들이나 알면 된다고 생각하고 있다. 결국 이런 시대 속에서 소더버그가 제공한 교훈은 그 자신에게만 의미가 있을 뿐, 널리 전해지지 못한 채 묻히고 말 것이다. 하지만 이건 정말 중요한 문제다. 모두가 〈헤이와이어〉 같은 영화를 만들어야 한다는 얘기는 아니다. 하지만 〈프로메테우스〉도, 〈어메이징 스파이더맨〉도, 만약 〈헤이와이어〉가 제기하는 문제에 관심을 기울였더라면 훨씬 더 나은 영화, 더욱 박진감 넘치고 가슴을 졸이게 하는 영화가 되었을 것이다. 영화인들이여, 제발 이런 목소리에 귀를 기울여달라. 〈헤이와이어〉가 무슨 천하에 둘도 없는 걸작인 것처럼 이렇게까지 말하지 않아도 괜찮은 영화계를 만들어달라.




본문에서 언급한 영화 :
 - 어메이징 스파이더맨 (The Amazing Spider-Man, 2012)
 - 프로메테우스 (Prometheus, 2012)
 - 헤이와이어 (Haywire, 2011)
Posted by 거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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