두 가지 인용. 첫 번째. 현재 서울아트시네마 로비 벽에 붙어 있는 영화인들의 시네마테크 후원 메시지 중 박찬욱 감독의 말.
두 번째. 얼마 전에 번역한 스티븐 소더버그의 연설.
그러니까, 정말로 누군가는 영화를 열심히 보고 있었다. 〈컨저링〉은 〈감시자들〉과 더불어 올해의 온고지신, 괄목상대 영화라 할 만하다. 내 취향은 이것보다도 약간 더 '고전'이기는 하지만, 유니버셜, 발 루튼, 해머 공포 영화까지 거슬러 올라가 버리면 21세기 관객에게 먹히기란 쉽지 않겠지. 어쨌거나 이 정도로 잘해놓으면 뭐라고 아쉬워할 마음은 눈곱만큼도 생기지 않는다. '어머나 씨발 깜짝이야=공포'라는 착각에 기대지 않은 채 관객과 캐릭터의 인지를 교란하며 불안을 쌓아나가는 솜씨란 이제 무형문화재로 지정해서 보존해야 하는 시대가 도래했다고 생각하고 있었건만, 저 지긋지긋한 쏘우 시리즈의 감독이자 제작자가 그런 실력을 발휘할지 누가 알았으랴.
감상을 찾아보니 어디서 많이 봤던 것들만 있을 뿐, 창의성이 없다는 지적도 있더라. 그렇게 말하는 사람과 나는 각자 영화란 무엇인가에 관해 생각하는 바가 다른 듯하다. 나는 영화를 만날 때 내가 듣도 보도 못한 새로운 이야기, 새로운 소재, 새로운 설정을 만나기를 간절히 바라지 않으며, 영화가 그래야만 고유성을 획득할 수 있는 매체라고 생각하지도 않는다. 중요한 것은 다루는 대상의 구체적인 형질이며, 그에 맞게 표현하는 것뿐이다. 그러니까 귀신 들린 집 이야기가 백 개든 천 개든 상관없다. 구체적으로 그 집이 어떻게 생겼는가, 거기에 사는 사람은 어떻게 생긴 어떤 사람인가가, 어떤 일이 어느 때에 어디에서 발생하는가가 중요하며, 그에 충실한 영화인 한, 그 영화는 고유하다. 정말로 창의성이 부족한 영화는 자기 앞에 놓인 대상에 신경 쓰기보다는 관습을 의식하면서 게으른 결정을 내리는 영화다.
말하자면 한밤중 누군가 발을 잡아당기는 느낌에 잠에서 깬 신디가 침대 밑을 내려다보았을 때 클로즈업으로 귀신이 불쑥 튀어나오도록 해서 비명으로 장면을 마무리하는 영화. 창의성이 부족한 영화란 그런 영화를 가리키는 말이다. 〈컨저링〉에서는 같은 상황을 다음과 같이 처리한다. 일단 신디는 침대 밑을 내려다보는 것조차 두려워하여 벌벌 떨며 침대 위의 '안전한 영역'에 웅크린다. 하지만 그걸로 불안이 가실 리가 없다. 결국 신디는 조심스럽게 침대의 다른 쪽 모서리로 자리를 옮겨 기어이 침대 밑을 내려다본다. 화면이 침대 밑을 거꾸로 바라보는 신디의 시점으로 바뀌면 카메라가 좌우로 느리게 패닝하면서 관객으로 하여금 프레임 바깥에 있을 무언가가 바로 옆에서 튀어나오리라는 기대/불안에 가슴을 졸이게 한다. 하지만 그런 쇼크 효과는 없다. 대신 문이 삐그덕 움직이는 음향이 들려온다. 이에 신디와 관객의 시선은 출입문이 있는 화면 후경으로 옮겨 간다. 신디는 몸을 일으켜 출입문을 바라본다. (이때 카메라는 컷 없이 허공에서 180도 몸을 뒤집는다. 실로 예기치 못한 근사한 움직임이다.) 신디는 문 뒤의 암흑에서 눈을 떼지 못한 채 바짝 졸아있다. 옆 침대에서 자고 있는 언니 크리스틴을 부르지도 못할 정도다. 다행히 크리스틴이 깨어난다. 신디는 왜 그러느냐는 크리스틴의 말에 벌벌 떨며 간신히 입을 연다. 문 뒤에 누군가 있어. 여기서부터 관객은 이 장면을 서서히 신디의 시점이 아니라 크리스틴의 시점으로 보게 된다. 이전까지의 공포가 '방 안에, 문 뒤에 누군가 있을지도 몰라'였다면, 여기서부터는 '크리스틴과 관객은 보지 못하는 무언가를 신디는 보고 있는 것 같아'라는 공포가 시작된다. 이내 신디(와 관객)의 간절한 만류에도 크리스틴이 침대 밖으로 나가 문 뒤로 다가간다. 크리스틴은 문 뒤를 들여다보고는 거기에 아무것도 없다고 선언한다. 관객은 잠시 안도하며, 동시에 공포영화의 관습상 이대로 이 장면이 끝날 리가 없다는 불안이 찾아온다. 게다가 크리스틴은 신디를 달래느라 문 뒤의 어둠에 등을 돌리고 있다. 신디는 말한다. 그것이 언니 뒤에 있다고. 순간, 롱 쇼트 상태에서 크리스틴 바로 뒤에 있던 문이 느닷없이 닫힌다. 신디가 발작적으로 비명을 지른다. 크리스틴의 시선으로 보자면 신디가 악몽 때문에 헛것을 보았을 뿐이라는 해석은 충분히 합리적이다. 따라서 다음 장면에서 방에 모인 온 가족이 신디를 다독일 뿐, 추가 조치를 하지 않는 것도 충분히 합리적이다. 공간의 구조, 시선의 방향, 관습적인 쇼크 효과에 대한 기대 심리와 위반, 뜻밖의 카메라 움직임, 인물의 추가에 따른 시점의 전환, 그에 따른 두려움의 원인 변화, 캐릭터의 납득할 만한 사후 반응까지. 내게는 한 장면 안에서 이 모든 요소를 능수능란하게 엮어내는 솜씨야말로 〈컨저링〉이 갖춘 창의성의 증거로 보인다. 게다가 〈컨저링〉은 그 재주를 110분 동안 고르게 유지한다. 풍악을 울려도 모자랄 판이다.
* * *
〈컨저링〉을 보는 동안 오른쪽에 두 관객이 앉아있었다. 둘 다 적게는 중학교 고학년에서 많게는 대학교 새내기 정도로 보이는 남자 관객이었다. 둘은 팝콘을 뒤적이며 광고 시간 내내 잡담을 주고받았다. 그런데 영화가 막 시작했을 때, 명랑하게 이야기를 나누던 두 관객 중 내 바로 오른쪽에 앉은 이가 느닷없이 자기 동행에게 고백하듯 말했다. 나 무서운 영화 못 보는데. 그러고는 혹시 귀마개 없느냐고 묻더니 이내 이어폰을 귀에 꽂는 게 아닌가. 그렇다고 음악을 들었다는 이야기는 아니고, 그저 귀마개 대용이었던 것 같다. 영리한 방법이라고 생각했다. 공포영화는 영상을 가리는 것보다 음향을 막는 편이 덜 무섭지. 그렇지만 그는 그러고도 110분 내내 무언가 불길한 일이 일어날 것 같은 대목마다 팝콘 상자를 들어 올려 눈을 가렸다. 보다 못한 동행이 눈을 가리면 상상하게 되니 더 무섭고 차라리 봐버리는 게 낫다고 충고하자 "아, 그런가?"라고 말했지만, 끝내 눈 가리기를 포기하지 않았다. 또 그는 영화가 끝날 때까지 "좆나 무서워."라는 말을 적어도 50번은 넘게 되뇌었다. 때로는 동행과 영화에 관해 대화도 나누었다. (거울을 통해 소년의 귀신을 보여주는 오르골이 등장했을 때 거울에 그려진 나선형 문양이 돌아가는 것을 보고 "저거 최면 아냐?"라고 말한 것은 나름대로 참신했다. 여담이지만 그렇게 열심히 팝콘 상자를 들어 올렸는데도, 그는 좀처럼 플롯을 놓치지 않았다.) 하필 귀에 이어폰을 꽂은 바람에 그 목소리가 상영관 안의 모든 사람에게 들릴 만큼 컸다. 영화 끝나기 25분 전에는 휴대폰을 꺼내 얼마나 남았는지 시각도 확인했다. 클라이맥스 즈음에는 너무 쉬지 않고 말을 쏟아내는 바람에 결국 한 차례 노려보며 주의를 주었다.
하지만 나는 사실 그 관객이 은근히 마음에 들었다. 그가 그토록 소란스러웠던 이유를 이해할 수 있기 때문이며, 그가 그 이유에 대해 솔직했기 때문이다. 한때 그처럼 겁 많은 관객이었던 사람으로서, 그의 소란스러움이 마음속의 두려움을 조금이라도 밖으로 꺼내 덜어보려고 몸부림치는 것임을 어렵지 않게 느낄 수 있었다. 설령 그가 "좆나 무서워."를 연발하지 않았더라도 알았을 것이다. 어떻게든 자기 귀에 자신의 목소리를 들려줌으로써 자신이 스크린 바깥에 있음을 상기시키려고, 스크린 안의 세계에 몰입하지 않으려고 애쓰는 그 발버둥을, 한때 그처럼 겁 많았던 이 관객은 안다.
그런데 겁 많았던 관객이 아는 것이 또 있다. 영화가 자아내는 두려움 앞에서 자신을 보호하고 싶을 때 택하는 또 다른 방법이 있다. 바로 그 영화를 헐뜯고 짐짓 짜증 내는 방법이다. 이 방법은 자신이 겁을 먹은 게 아니라 단지 영화의 후줄근한 모양새에 불쾌해하고 있음을 만천하에 알림으로써 다른 사람 앞에서 체면을 차리는 한편 자신에게 영화를 보는 안목이 있다는 뉘앙스를 곁들이는 방식으로 나타난다. 가장 대표적인 예로는 '뭔 놈의 영화가 쓸데없이 시끄럽기만 하고 지루하기 짝이 없다'는 불평을 되뇌는 수법이 있다. 물론 실제로 쓸데없이 시끄럽기만 하고 지루하기 짝이 없는 영화도 많기는 하지만, 그러한 불쾌감을 동행에게 과도하게 표출하는 관객은 실은 겁을 먹고 있을 가능성이 높다.
내 오른쪽에 앉은 그 관객은 자신의 무서움 앞에 솔직했다. 그럼으로써 〈컨저링〉이 자신을 사로잡고 있음을 거듭 인정했다. 예전의 나는 그걸 인정하는 게 정말 쉽지 않았다. 공포영화 자체를 경멸하는 편이 훨씬 쉬웠다. 너무 겁이 많았던 나머지 애초에 공포영화를 보는 일도 거의 없었지만, 간혹 어쩔 수 없이 보게 되었을 때는 비겁한 관객이 되는 편을 택하곤 했다. 그렇기에 그 관객의 끝없는 오두방정은 차라리 영화에 대한 더없이 순수한 고백처럼 들렸다. 게다가 그는 심지어 정중하기까지 했다. 영화가 끝나고 여느 때처럼 엔딩 크레딧을 보고 있었는데, 그가 조심스럽게 말을 걸어왔다. 그는 시끄럽게 해서 죄송합니다, 라며 허리까지 꾸벅 숙여 인사를 하고는 일행과 함께 자리를 떴다. 그렇게 겁 많은 이가 도대체 어쩌다 심야 상영 시간에 〈컨저링〉을 보러 왔는지는 알 수 없는 노릇이다. (어떤 영화인지 모르고 온 것도 아니었다. 특정 장면에서는 "으으, 예고편에 나온 그거다."라며 먼저 겁을 집어먹기도 했다.) 어쨌든, 나는 언젠가 그와 다시 만나 발 루튼 공포영화라도 소개해 줄 수 있으면 좋겠다고 생각했다.
요즘 영화들이 다 비슷비슷해 보이는 건 요즘 영화인들이 다 요즘 영화들만 보기 때문인지도 모르곘다. 당대 사람들끼리의 생각과 취향만 주거니 받거니 하다 보면 서로 닮는 게 당연하지 않을까? 그래서 '옛 영화를 보아야 새 영화를 만든다'라는 [말은], 얼핏 들으면 역설 같지만 결코 역설이 아니다. 영화보기의 재미만 따져봐도 '옛 영화가 새 영화보다 새롭다'. 고전은 살아있다. 고전이 사는 집, 시네마테크 만세!
두 번째. 얼마 전에 번역한 스티븐 소더버그의 연설.
전 좌절감을 느낄 때마다 생각합니다. 자, 저 밖 어딘가에서 누군가가, 우리가 이렇게 여기 앉아있는 동안 저 바깥 어딘가에서, 누군가가 장차 우리가 사랑하게 될 정말 끝내주는 물건을 만들고 있을 거야. 그 생각이 저를 계속 나아갈 수 있도록 해줍니다.
그러니까, 정말로 누군가는 영화를 열심히 보고 있었다. 〈컨저링〉은 〈감시자들〉과 더불어 올해의 온고지신, 괄목상대 영화라 할 만하다. 내 취향은 이것보다도 약간 더 '고전'이기는 하지만, 유니버셜, 발 루튼, 해머 공포 영화까지 거슬러 올라가 버리면 21세기 관객에게 먹히기란 쉽지 않겠지. 어쨌거나 이 정도로 잘해놓으면 뭐라고 아쉬워할 마음은 눈곱만큼도 생기지 않는다. '어머나 씨발 깜짝이야=공포'라는 착각에 기대지 않은 채 관객과 캐릭터의 인지를 교란하며 불안을 쌓아나가는 솜씨란 이제 무형문화재로 지정해서 보존해야 하는 시대가 도래했다고 생각하고 있었건만, 저 지긋지긋한 쏘우 시리즈의 감독이자 제작자가 그런 실력을 발휘할지 누가 알았으랴.
감상을 찾아보니 어디서 많이 봤던 것들만 있을 뿐, 창의성이 없다는 지적도 있더라. 그렇게 말하는 사람과 나는 각자 영화란 무엇인가에 관해 생각하는 바가 다른 듯하다. 나는 영화를 만날 때 내가 듣도 보도 못한 새로운 이야기, 새로운 소재, 새로운 설정을 만나기를 간절히 바라지 않으며, 영화가 그래야만 고유성을 획득할 수 있는 매체라고 생각하지도 않는다. 중요한 것은 다루는 대상의 구체적인 형질이며, 그에 맞게 표현하는 것뿐이다. 그러니까 귀신 들린 집 이야기가 백 개든 천 개든 상관없다. 구체적으로 그 집이 어떻게 생겼는가, 거기에 사는 사람은 어떻게 생긴 어떤 사람인가가, 어떤 일이 어느 때에 어디에서 발생하는가가 중요하며, 그에 충실한 영화인 한, 그 영화는 고유하다. 정말로 창의성이 부족한 영화는 자기 앞에 놓인 대상에 신경 쓰기보다는 관습을 의식하면서 게으른 결정을 내리는 영화다.
말하자면 한밤중 누군가 발을 잡아당기는 느낌에 잠에서 깬 신디가 침대 밑을 내려다보았을 때 클로즈업으로 귀신이 불쑥 튀어나오도록 해서 비명으로 장면을 마무리하는 영화. 창의성이 부족한 영화란 그런 영화를 가리키는 말이다. 〈컨저링〉에서는 같은 상황을 다음과 같이 처리한다. 일단 신디는 침대 밑을 내려다보는 것조차 두려워하여 벌벌 떨며 침대 위의 '안전한 영역'에 웅크린다. 하지만 그걸로 불안이 가실 리가 없다. 결국 신디는 조심스럽게 침대의 다른 쪽 모서리로 자리를 옮겨 기어이 침대 밑을 내려다본다. 화면이 침대 밑을 거꾸로 바라보는 신디의 시점으로 바뀌면 카메라가 좌우로 느리게 패닝하면서 관객으로 하여금 프레임 바깥에 있을 무언가가 바로 옆에서 튀어나오리라는 기대/불안에 가슴을 졸이게 한다. 하지만 그런 쇼크 효과는 없다. 대신 문이 삐그덕 움직이는 음향이 들려온다. 이에 신디와 관객의 시선은 출입문이 있는 화면 후경으로 옮겨 간다. 신디는 몸을 일으켜 출입문을 바라본다. (이때 카메라는 컷 없이 허공에서 180도 몸을 뒤집는다. 실로 예기치 못한 근사한 움직임이다.) 신디는 문 뒤의 암흑에서 눈을 떼지 못한 채 바짝 졸아있다. 옆 침대에서 자고 있는 언니 크리스틴을 부르지도 못할 정도다. 다행히 크리스틴이 깨어난다. 신디는 왜 그러느냐는 크리스틴의 말에 벌벌 떨며 간신히 입을 연다. 문 뒤에 누군가 있어. 여기서부터 관객은 이 장면을 서서히 신디의 시점이 아니라 크리스틴의 시점으로 보게 된다. 이전까지의 공포가 '방 안에, 문 뒤에 누군가 있을지도 몰라'였다면, 여기서부터는 '크리스틴과 관객은 보지 못하는 무언가를 신디는 보고 있는 것 같아'라는 공포가 시작된다. 이내 신디(와 관객)의 간절한 만류에도 크리스틴이 침대 밖으로 나가 문 뒤로 다가간다. 크리스틴은 문 뒤를 들여다보고는 거기에 아무것도 없다고 선언한다. 관객은 잠시 안도하며, 동시에 공포영화의 관습상 이대로 이 장면이 끝날 리가 없다는 불안이 찾아온다. 게다가 크리스틴은 신디를 달래느라 문 뒤의 어둠에 등을 돌리고 있다. 신디는 말한다. 그것이 언니 뒤에 있다고. 순간, 롱 쇼트 상태에서 크리스틴 바로 뒤에 있던 문이 느닷없이 닫힌다. 신디가 발작적으로 비명을 지른다. 크리스틴의 시선으로 보자면 신디가 악몽 때문에 헛것을 보았을 뿐이라는 해석은 충분히 합리적이다. 따라서 다음 장면에서 방에 모인 온 가족이 신디를 다독일 뿐, 추가 조치를 하지 않는 것도 충분히 합리적이다. 공간의 구조, 시선의 방향, 관습적인 쇼크 효과에 대한 기대 심리와 위반, 뜻밖의 카메라 움직임, 인물의 추가에 따른 시점의 전환, 그에 따른 두려움의 원인 변화, 캐릭터의 납득할 만한 사후 반응까지. 내게는 한 장면 안에서 이 모든 요소를 능수능란하게 엮어내는 솜씨야말로 〈컨저링〉이 갖춘 창의성의 증거로 보인다. 게다가 〈컨저링〉은 그 재주를 110분 동안 고르게 유지한다. 풍악을 울려도 모자랄 판이다.
〈컨저링〉을 보는 동안 오른쪽에 두 관객이 앉아있었다. 둘 다 적게는 중학교 고학년에서 많게는 대학교 새내기 정도로 보이는 남자 관객이었다. 둘은 팝콘을 뒤적이며 광고 시간 내내 잡담을 주고받았다. 그런데 영화가 막 시작했을 때, 명랑하게 이야기를 나누던 두 관객 중 내 바로 오른쪽에 앉은 이가 느닷없이 자기 동행에게 고백하듯 말했다. 나 무서운 영화 못 보는데. 그러고는 혹시 귀마개 없느냐고 묻더니 이내 이어폰을 귀에 꽂는 게 아닌가. 그렇다고 음악을 들었다는 이야기는 아니고, 그저 귀마개 대용이었던 것 같다. 영리한 방법이라고 생각했다. 공포영화는 영상을 가리는 것보다 음향을 막는 편이 덜 무섭지. 그렇지만 그는 그러고도 110분 내내 무언가 불길한 일이 일어날 것 같은 대목마다 팝콘 상자를 들어 올려 눈을 가렸다. 보다 못한 동행이 눈을 가리면 상상하게 되니 더 무섭고 차라리 봐버리는 게 낫다고 충고하자 "아, 그런가?"라고 말했지만, 끝내 눈 가리기를 포기하지 않았다. 또 그는 영화가 끝날 때까지 "좆나 무서워."라는 말을 적어도 50번은 넘게 되뇌었다. 때로는 동행과 영화에 관해 대화도 나누었다. (거울을 통해 소년의 귀신을 보여주는 오르골이 등장했을 때 거울에 그려진 나선형 문양이 돌아가는 것을 보고 "저거 최면 아냐?"라고 말한 것은 나름대로 참신했다. 여담이지만 그렇게 열심히 팝콘 상자를 들어 올렸는데도, 그는 좀처럼 플롯을 놓치지 않았다.) 하필 귀에 이어폰을 꽂은 바람에 그 목소리가 상영관 안의 모든 사람에게 들릴 만큼 컸다. 영화 끝나기 25분 전에는 휴대폰을 꺼내 얼마나 남았는지 시각도 확인했다. 클라이맥스 즈음에는 너무 쉬지 않고 말을 쏟아내는 바람에 결국 한 차례 노려보며 주의를 주었다.
하지만 나는 사실 그 관객이 은근히 마음에 들었다. 그가 그토록 소란스러웠던 이유를 이해할 수 있기 때문이며, 그가 그 이유에 대해 솔직했기 때문이다. 한때 그처럼 겁 많은 관객이었던 사람으로서, 그의 소란스러움이 마음속의 두려움을 조금이라도 밖으로 꺼내 덜어보려고 몸부림치는 것임을 어렵지 않게 느낄 수 있었다. 설령 그가 "좆나 무서워."를 연발하지 않았더라도 알았을 것이다. 어떻게든 자기 귀에 자신의 목소리를 들려줌으로써 자신이 스크린 바깥에 있음을 상기시키려고, 스크린 안의 세계에 몰입하지 않으려고 애쓰는 그 발버둥을, 한때 그처럼 겁 많았던 이 관객은 안다.
그런데 겁 많았던 관객이 아는 것이 또 있다. 영화가 자아내는 두려움 앞에서 자신을 보호하고 싶을 때 택하는 또 다른 방법이 있다. 바로 그 영화를 헐뜯고 짐짓 짜증 내는 방법이다. 이 방법은 자신이 겁을 먹은 게 아니라 단지 영화의 후줄근한 모양새에 불쾌해하고 있음을 만천하에 알림으로써 다른 사람 앞에서 체면을 차리는 한편 자신에게 영화를 보는 안목이 있다는 뉘앙스를 곁들이는 방식으로 나타난다. 가장 대표적인 예로는 '뭔 놈의 영화가 쓸데없이 시끄럽기만 하고 지루하기 짝이 없다'는 불평을 되뇌는 수법이 있다. 물론 실제로 쓸데없이 시끄럽기만 하고 지루하기 짝이 없는 영화도 많기는 하지만, 그러한 불쾌감을 동행에게 과도하게 표출하는 관객은 실은 겁을 먹고 있을 가능성이 높다.
내 오른쪽에 앉은 그 관객은 자신의 무서움 앞에 솔직했다. 그럼으로써 〈컨저링〉이 자신을 사로잡고 있음을 거듭 인정했다. 예전의 나는 그걸 인정하는 게 정말 쉽지 않았다. 공포영화 자체를 경멸하는 편이 훨씬 쉬웠다. 너무 겁이 많았던 나머지 애초에 공포영화를 보는 일도 거의 없었지만, 간혹 어쩔 수 없이 보게 되었을 때는 비겁한 관객이 되는 편을 택하곤 했다. 그렇기에 그 관객의 끝없는 오두방정은 차라리 영화에 대한 더없이 순수한 고백처럼 들렸다. 게다가 그는 심지어 정중하기까지 했다. 영화가 끝나고 여느 때처럼 엔딩 크레딧을 보고 있었는데, 그가 조심스럽게 말을 걸어왔다. 그는 시끄럽게 해서 죄송합니다, 라며 허리까지 꾸벅 숙여 인사를 하고는 일행과 함께 자리를 떴다. 그렇게 겁 많은 이가 도대체 어쩌다 심야 상영 시간에 〈컨저링〉을 보러 왔는지는 알 수 없는 노릇이다. (어떤 영화인지 모르고 온 것도 아니었다. 특정 장면에서는 "으으, 예고편에 나온 그거다."라며 먼저 겁을 집어먹기도 했다.) 어쨌든, 나는 언젠가 그와 다시 만나 발 루튼 공포영화라도 소개해 줄 수 있으면 좋겠다고 생각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