며칠 전에 쓴 「〈우주 전쟁〉의 삼발이는 인간을 찢어발기지 않아도 무섭다」에 ABC 님께서 다신 댓글에 댓글을 달다가 글을 따로 빼기로 했다. 글이 길어지기도 하고, 본문과는 거리가 있는 내용이기도 하고, 좀 사소하고 간단한 이야기들로 블로그를 대충 채워나가고 싶다는 생각이 있어서. 물론 한 번이라도 더 〈우주 전쟁〉이라는 단어를 노출함으로써 좀 더 많은 사람이 2월 18일 토요일에 시네마테크 서울아트시네마에서 있을 마지막 상영을 찾아주기를 바라는 마음도 있고. 암만 스필버그가 거장이네 어쩌네 해봐야 〈우주 전쟁〉을 극장에서 다시 볼 기회는 그리 자주 찾아오지 않을 테니까.

당연히 〈우주 전쟁War of the Worlds, 2005〉에 대한 스포일러 있음. 통상 한국 관객들이 피하려 애쓰는 부류의 스포일러에는 별로 개의치 않지만, 여기서는 장면의 구체적인 연출에 대해서도 약간 언급할 생각이라 명백한 스포일러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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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우주 전쟁〉의 마지막에서 두 번째 장면은 섬뜩하다.

물론 전체적인 상황만 봐서는 '스필버그식' '가족 재결합'이다. 천신만고 끝에 보스턴에 있는 전처 메리 앤의 부모님 댁에 도착한 레이와 레이첼은 메리 앤과 무사히 재회하고, 피난길에 헤어졌던 로비가 살아서 먼저 도착해 있었다는 것도 알게 된다. '스필버그는 가부장을 중심으로 한 가족 공동체의 결속을 찬미하는 감독'이라는 고정관념에 사로잡혀 있다면, 이 장면 역시 마찬가지라고 할지도 모르겠다.

하지만 이 장면의 생김새는 무언가 다른 이야기를 하고 있다.

먼저 공간의 위화감. 그간 보기 드물었던 강한 햇살이 거리 전체를 비추는 가운데 낙엽이 바람에 흩날리며 뜻밖의 서정성을 불러일으킨다. 낙엽과 비슷한 색조의 건물들은 태풍을 가볍게 견뎌낸 고목 같다. 전력을 잃은 차들이 거리 여기저기에 아무렇게나 방치돼 있기는 하지만, 그러고 보면 삼발이의 등장 이후 이렇게 건물이 멀쩡한 지역도 오랜만이다. 영화 도입부에서부터 레이와 메리 앤의 사회적 차이는 줄곧 암시되었거니와, 레이가 문자 그대로 죽을 고생을 하며 당도한 이곳은 외계인의 공습에도 아랑곳하지 않고 고고함을 지키고 있었던 건가, 하는 억하심정도 조금은 든다.

바로 그 위화감 때문일까. 레이는 메리 앤에게 다가가지 못한다. 레이에게 안겨 있던 레이첼은 거침없이 메리 앤에게 달려가 안기지만, 레이는 레이첼을 놓아준 순간부터 더 앞으로 나아가지 못하고 어정쩡하게 서 있다. 존 윌리엄스의 음악조차, 레이첼이 메리 앤에게 달려가 안길 때는 피아노를 도입하며 '감동의 모녀상봉'을 연출하더니 메리 앤이 '아, 그러고 보면 레이도 있었지?' 하는 표정으로 뒤를 돌아보는 순간 음산하게 급변한다. 돌아서는 메리 앤과 함께 옆으로 미끄러진 카메라가 세 사람의 거리를 보여준다.[각주:1] 메리 앤은 나직하게 고맙다고 말할 뿐, 레이에게 다가서거나 레이를 불러들이지 않는다. 뒤늦게 문을 열고 나온 메리 앤의 가족들도 마찬가지다.

메리 앤의 가족들 입장에서 보자면 이해할 만한 거리감이다. 그들은 외계인들의 침공을 코앞에서 실감하지는 않았을 것이다. 외계인들이 침공한 곳마다 모든 전력이 끊겼던 만큼, 그들이 집에서 TV 등을 통해 외계인의 공습 과정을 목격했을 가능성도 작다. 그들은 보스턴 밖의 위협을 보지 못했다. 다만 아이들이 돌아오지 않아 걱정했을 뿐. 그러고 보면 애초에 아이들이 가족과 떨어진 것도 레이를 만나러 갔기 때문이다(이혼에 따른 합의사항이었을 것이다). 부당하게 레이를 원망하는 마음마저 있었을지도 모른다. 게다가 난리가 터지기 전까지 레이와 메리 앤의 가족들은 사이가 좋지 않았다. 그런 상대가 마땅히 돌아와야 했을 아이를 뒤늦게 데리고 왔다는 이유만으로 보자마자 반색하며 집 안으로 불러들여야 하나? 당장 꺼지라고 매몰차게 내쫓은 것도 아니고, 얼굴 보고 몇십 초 정도 망설이는 건 이해할 만하다.

레이 쪽에서 느끼는 거리감도 있다. 레이로서도 별로 사이도 좋지 않은 전처 집에 들어가 관계를 개선하고 싶었을 것 같지는 않다. 메리 앤만 있다면 또 모르겠지만, 그를 싫어하는 메리 앤의 어머니와 메리 앤의 새 연인(혹은 배우자?)도 있는 판국이니.[각주:2] 관객의 대리자로서 두 시간 가까이 고난을 겪었던 그가 메리 앤의 공간에서 느꼈을 위화감에 대해서는 이미 이야기했다. 이것은 "전쟁"이었고, 전장에서 끔찍한 광경을 보고 돌아온 사람들은 종종 전장을 전혀 알지 못하는 고국의 일상에 섞이지 못한다. 즉, 메리 앤의 가족들이 느끼는 거리감이 재난을 보지 못한 데에서 비롯한 거리감이라면, 레이에게는 재난을 본 사람의 거리감이 있다.

재난을 보느냐 보지 못하느냐. 그것을 죽음을 보느냐 보지 못하느냐로 바꿔 말해도 좋겠다. 피난길 내내 레이는 레이첼에게 죽음의 광경을 보지 못하게 하는 수호자였다. 그는 비행기가 추락한 현장을 보지 말고 자기 얼굴만 보라고 했고, 강에서 시체들이 떠내려오자 레이첼의 눈을 가렸다. 그런데 레이는 레이첼이 죽음을 보지 못하게 하는 과정에서 함께 눈을 돌리는 대신 자신은 너무 많은 것을 본 사람이 된다. 그리고 (삼발이의 촉수 끝에 달린 카메라가 암시하듯?) 죽음을 본다는 것은 곧 죽음을 야기하는 능력과도 연결된다. 정신이 불안정하고 난폭해질 수도 있는 남자 할란 오길비와 지하실에 함께 있게 된 상황에서, 레이는 레이첼이 볼 수 없도록 문을 닫은 다음 할란을 죽였다(설마 관객에게 보여주지 않았다는 이유만으로 레이가 남자를 죽이지 않았다고 주장할 사람은 없겠지?).

워낙 끔찍한 일들이 연달아 일어나기에 이 또한 극한 상황에서 일어난 재난 중 하나로만 생각하고 넘어가기 쉽지만, 이 살인은 큰 문제다. 우선 정당성의 문제. 법리를 따지지 않더라도 레이의 살인은 지나치다. 혹은 레이가 살인했다고 단정하도록 유도하는 연출이 지나치게 가혹하다. 물론 급박한 상황이기는 했다. 밖에 아직 삼발이들이 돌아다니고 있는데 지하실에 숨은 할란이 공황상태에 빠져 고래고래 소리를 지르고 소란을 일으켰다. 외계인들이 그 소리를 듣고 다시 찾아와 세 사람을 죽였을지도 모른다. 레이는 레이첼의 안전을 위해서라도 할란의 입을 막아야 했다. 하지만 입을 막아야 한다는 말이 꼭 죽여야 한다는 뜻은 아니지 않은가. 더 관대한 연출도 얼마든지 가능했다. 할란은 혼잣말을 중얼거리면서 터널을 판답시고 삽질에만 열중하고 있었다. 따라서 레이가 할란의 머리를 쳐서 기절시킨 다음 손발을 묶고 입을 막는 정도로만 묘사하고 넘어갈 수도 있었다. 그런데도 이 장면은 두 남자가 목숨을 걸고 싸울 수밖에 없었다는 것처럼 전개된다. 레이가 할란을 제압하기로 마음먹고 레이첼의 눈을 가리며 준비를 마치자, 할란이 갑자기 살의를 느꼈다는 듯 혼잣말을 멈추고 돌아서서 레이를 맞이한다. 레이가 들어서자 문이 닫히고, 소란이 이어지고, 정적이 흐르고, 레이가 넋을 잃은 얼굴로 피를 흘리며 나온다. 누가 봐도 죽였다고밖에 할 수 없는 연출이다. 그것도 정당방위라고 하기에는 다소 미묘한, 위협의 가능성을 미리 제거하기 위해 살의를 품고 벌인 살인이다. '과잉보호=보지 못하게 하는 행위'와 '보는 행위=과잉대응'은 동전의 양면처럼 함께 갈 수밖에 없다는 듯이.

그리고 사후 처리의 문제. 레이는 고의로 살인을 저질렀다. 외계인의 공습이라는 특수 상황이었다고 해서 용납할 수 있을까? 난리가 끝난 후 그는 결백한 시민으로 돌아갈 수 있을까? 문명사회의 상식으로는 그렇지 않다. 전투 중 군인이 군인을 살해한 상황이 아니다. 재난 중에 민간인이 민간인을 대상으로 저지른 살인이 문제가 되지 않을 리 없다. 할란의 시체가 발견되고 수사가 진행된다면 레이는 살인죄로 기소되어 형을 살지도 모른다. 난리 통에 증거가 사라져 수사조차 이루어지지 않더라도 상관없다. 레이의 행위가 문명사회에서 처벌 대상으로 여기는 금기 행위였다는 점은 바뀌지 않는다. 레이는 살인자다. 레이첼을 구하기 위해서라고 주장하겠지만, 그래도 살인자다. 레이 스스로도 모를 리 없다. 그는 살인을 대수롭지 않게 생각하는 싸이코패스도, 살인에 익숙한 전문가도 아니다.

보지 못하게 한다. 보지 못하게 하는 자신은 본다. 과잉대응에 나선다. 살인을 저지른다. 난리통이었다고 해도 합리화 할 수 없는 살인을. 그러므로 레이가 메리 앤 가족에게 느끼는 거리감의 기저에는 다음과 같은 딜레마가 숨어있다. '너무 많은 것을 본 나는 당신들이 아무것도 보지 못 하게 하기 위해 당신들 세계의 금기를 자행했다. 그런 내가 당신들 곁에 가도 괜찮은 걸까? 나를 거리낌 없이 받아들이는 순간 당신들의 세계를 지탱하는 원칙은 무너지지 않는가?'

미루고 미루었지만, 결국 이 이야기를 할 수밖에 없다. 그래서 〈우주 전쟁〉은 미국 서부극의 전통을 잇는 영화다. 서부극에서는 다음과 같은 도식이 자주 등장한다. 아직 문명이 완전히 자리 잡지 않은 황야에, 이제 막 개척 중인 마을이 있다. 한 악당이 폭력을 휘둘러 마을을 무법지대로 만든다. 마을을 더 올바르게 가꿔나가고자 하는 시민들은 악당의 횡포에 고통받는다. 이곳에 총잡이가 등장한다. 그는 시민들의 편이고, 그들의 가치를 존중하지만, 그의 가장 큰 무기는 폭력이다. 그는 참고 또 참다가 결국 분연히 일어나 악당을 쏘아 죽인다. 그럼 악당을 죽인 이후 총잡이는 마을에 남아도 괜찮은가? 마을의 미래를 위해 그 역시 떠나야 하는 게 아닐까? 두뇌 칩을 없애기 위해 용광로에 들어가는 T-800처럼?

〈우주 전쟁〉 이후 스필버그를 이야기할 때 존 포드가 널리 거론되기 시작한 것도 이 때문이다. 존 포드는 자신의 서부극에서 여러 차례 '떠나야만 하는 총잡이'의 문제를 자의식적으로 다루었다. 〈우주 전쟁〉의 결말은 그중에서도 〈수색자The Searchers, 1956〉의 결말을 빼닮았다.[각주:3] 보호해야 할 여자아이를 데리고 온 남자는 아이를 넘긴 뒤 집 안으로 들어가지 못한다. 그는 의식적으로든 무의식적으로든 자신이 집에 들어갈 수 없다는 사실을 안다. 단, 차이도 있다. 〈수색자〉의 주인공 이든은 다른 모두가 집에 들어가는 모습을 지켜보다 몸을 돌려 황야로 떠나지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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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집에 들어가지도, 떠나지도 못하고 어정쩡하게 선 레이 앞에는 피난 중에 헤어진 뒤 죽었으리라 생각했던 아들 로비가 멀쩡한 모습으로 나타난다.

로비가 등장한 순간, 두 가지 아이러니를 동시에 느꼈다. 하나는, 살(리)기 위해 무진 애를 썼던 레이의 노력이 헛수고였다는 아이러니다. 레이는 자기 목숨을 구하기 위해, 또 로비와 레이첼을 무사히 보스턴까지 데려가기 위해 천신만고를 겪었다. 그가 못난 아비일망정 나름대로 죽을 고생을 해가며 목숨을 구하고자 노력했다는 사실은 아무도 부정하지 않으리라. 하지만 그 와중에 로비는 레이의 만류를 뿌리치고 다른 길을 갔다. 군에 합류하겠단다. 공포 영화에서는 보통 그런 놈들이 먼저 죽는다. 주인공의 현명한 판단을 따라야지 말이야. 위기 상황을 피하기는커녕 준비도 안 됐으면서 무작정 맞서 싸우자고 하다니. 그런데 그렇게 삼발이의 공격을 받아 불타는 언덕을 올라갔던 로비가 결말에 이르러 아무렇지도 않은 모습으로, 복장마저 그대로인 채로 나타난다. 심지어 레이보다 목적지에도 먼저 도착했다. 관객으로서는 그 모습을 보는 순간 로비가 레이와 헤어진 뒤 레이보다는 덜 고생했으리라 생각하게 된다. 관객은 로비의 고생은 보지 못했으니까. 더구나 로비는 보스턴의 그 평온한 길, 메리 앤의 부모가 사는 집 안에서 나타난다. 멀쩡한 로비의 모습은 보스턴의 길거리와 마찬가지로 레이의 생고생을 어쩐지 하찮고 무의미하게 만든다. 레이가 부모의 위신을 내세우며 "거봐라, 내가 뭐라고 했냐."라고 면박 줄 수 없는 상대. 오히려 "그러게 진즉 아들 말 좀 듣지, 뭐 잘났다고 혼자 그 난리를 피웠대?"라고 레이를 조롱할 것만 같은 상대. 바로 직전에 두 번이나 삼발이를 물리치는 데에 공헌했던 레이의 '영웅적' 행동마저 삽시간에 왜소해진다. 넌 네가 항상 영웅인 줄 알지? 여긴 그런 세계가 아니야. 레이첼이 살아 돌아왔다고 해서 네가 더 나은 사람이 되거나 변화하거나 중요한 사람이 되는 게 아니야.

그런데 두 번째 아이러니는 첫 번째 아이러니와 반대 방향으로 작동한다. 레이를 맞이하는 로비의 반응을 보면서, 나는 이전까지만 해도 절대 집에 들어갈 수 없었을 것 같던 레이가 로비 덕분에 집에 들어갈 수 있을지도 모른다는 인상을 받았다. 문밖으로 나온 로비의 행동은 어떤가? 로비는 곧장 레이에게 다가가 그를 끌어안는다. 메리 앤 집의 누구도 하지 않았던 일이다. 심지어 로비는 동생 레이첼에게는 아직 인사 한마디 하지 않는다. 레이첼이 살아 돌아온 로비를 보고 믿을 수 없다는 듯 "로비?"라고 불렀는데도. 이상한 일이다. 영화 내내 로비는 레이와는 사사건건 충돌했던 반면 레이첼과는 매우 다정한 사이였다. 남매가 어찌나 다정했던지 자기 전에 서로에게 "사랑해."라고 말할 정도였다. 그런데 그런 로비가 사랑하는 동생을 무시하고 레이에게 먼저 가다니. 레이의 살인 장면과 마찬가지로, 이 장면도 얼마든지 다르게 연출할 수 있었다. 로비가 처음부터 메리 앤과 함께 문밖으로 나와 레이첼을 얼싸안을 수도 있었다. 또는 로비가 뒤늦게 등장하더라도 윗 문단에서 이야기한 첫 번째 아이러니만을 전달한 뒤 레이첼과 메리 앤에게 합류하게 함으로써 레이를 더욱더 고립시킬 수도 있었다. 하지만 굳이 지금처럼 연출했다. 어째서? 사실 레이와 로비는 닮은꼴이니까. 로비가 레이처럼 되었으니까. 아니면 레이가 로비처럼 되었으니까.

〈우주 전쟁〉 개봉 당시 많은 관객이 로비를 싫어했다. 로비는 끊임없이 주인공 레이와 충돌하는 데다 앞뒤 안 가리고 외계인과 싸워야 한다는 소리를 해대며 레이와 레이첼까지 위험에 처하게 하는 골칫거리다. 한편 레이가 너무 레이첼만 애지중지한다는 감상도 많았다. 끊임없이 레이첼만 보살피려 하니 로비가 그렇게 엇나갈 만도 하다는 농담까지 나왔다. 둘은 그런 와중에 중간에 동선까지 갈렸다. 은연중에 레이와 레이첼을 한 묶음으로 놓고 로비는 덜 중요한 조연 정도로 따로 놓고 생각하는 것도 이해할 만하며, 뒤늦게 로비가 다시 나타나 화해 무드를 조성하자 당황스러울 법도 하다.

그렇다면 잠시 로비는 제쳐놓고, 정말로 레이와 레이첼이 가깝기나 했는지부터 돌아보자. 레이첼은 로비보다는 스스럼없이 레이와 말을 섞는다. 그럼 로비보다는 더 살가운 자식인 걸까? 하지만 레이첼이 레이에게 하는 말의 내용이 그렇게 호의적이지는 않았다. 레이첼은 레이가 한심한 아빠임을 알고 있고, 특히 일상생활에서라면 레이의 말을 따를 생각도 없다. 레이는 자신이 로비를 대하는 태도를 나무라는 레이첼에게 "네가 내 엄마 아님 네 엄마라도 되냐?"라고 말하기도 하는데, 과연 레이첼은 메리 앤의 세계에 속한 존재다. 현명하고, 말 잘하고, 배달음식조차 건강식을 시켜먹고, 땅콩버터 알레르기와 폐소공포증이 있는 '까탈스러운', '보호해줘야 할', '여자' '아이'. 레이에게 레이첼은 끊임없이 눈과 귀를 가리고 보호해주어야 할 연약한 존재다. 더 냉정하게 말하자면, 레이첼은 전통적인 남성 중심 영웅 서사 안에서 (평소에는 한심하기 그지없는) 남자 주인공의 (액션과 폭력에 바탕을 둔) 가치를 증명해줄 대상이기에 소중하다. 마침 레이첼을 연기한 배우는 당시 '똘똘하고 귀여운 여자애' 이미지로 유명세를 떨쳤던 다코타 패닝이다. '힘든 일은 아빠한테 맡겨'주의자들이라면 '아빠 미소'를 지으면서 레이와 레이첼의 관계가 이상적이며 전형적인 부녀 관계라고 착각할 법도 하다. 레이첼을 향한 레이의 과잉보호를 제외하면 둘 사이에 어떠한 이해나 관계의 진전도 없다는 사실을 망각한 채로.

로비는 그 반대다. 로비는 레이와 만난 순간부터 대립각을 세우지만, 실상은 아버지를 경멸하면서도 아버지와 닮은 아들이다. 레이의 차를 훔쳐 몰고 간 걸 보면 로비도 레이처럼 차를 좋아하는 남자애 같다. 남의 차를 훔쳐 타고 가는 것도 제 아비를 닮았다. 팀은 다르지만 레이처럼 야구 팬이고, 레이와 마찬가지로 캐치볼로 분노를 표현할 줄 안다. 로비는 레이처럼 고래고래 소리를 지르며 레이와 맞서 싸우면서 레이처럼 생각 없는 모습을 드러낸다. 차를 빼앗겼을 때는 레이와 더불어 사람들과 싸운다. 유람선에 오른 뒤 한 사람이라도 더 태우려 드는 로비의 영웅주의적 활약 역시 후반부 레이의 활약상과 공명한다.

두 부자의 근본적인 유사성은 레이와 로비가 헤어지는 장면에서 극명하게 드러난다. 로비는 언덕에 진을 치고 삼발이들과 맞서는 군대를 보자 레이와 레이첼을 두고 군과 합류하려 든다. 로비는 이전에도 적을 피해 도망치지 말고 맞서 싸워야 한다고 고집한 바 있다. 하지만 그게 단지 싸우기 위해서만은 아니다. 로비가 자신을 말리는 레이에게 하는 대사를 나열하면 다음과 같다.[각주:4] "전 여기 있고 싶어요. 전 이걸 봐야 해요. 제발, 절 보내줘요. 절 보내줘요. 제발요. 절 보내줘요, 아빠. 전 여기 있어야 해요. 전 이걸 보고 싶어요. 제발, 절 보내줘요. 아빠는 절 보내줘야 해요." 로비는 레이를 설득하면서 싸우러 가겠다는 표현을 사용하지 않는다. 여기에서 이 광경을 봐야겠다고만 말한다. 심지어 자신이 이 광경을 볼 수 있게 해주는 것이 레이의 의무인 것처럼 말한다. 한편, 레이의 대사도 의미심장하다. 이 장면의 대화는 레이의 대사로 시작한다. "이러지 마라. 네가 싸우고 싶어 하는 거 알아." 레이가 잠시 말을 멈춘 순간 로비의 대사가 겹치듯 뒤를 잇는다. "전 여기 있고 싶어요. 전 이걸 봐야 해요." 그리고 다시 레이의 말이 이어진다. "그래야만 하는 것처럼 보일 테지만 그렇지 않아. 그렇지 않다고." 대사가 교차하는 타이밍 덕분에, 레이의 말은 '너는 네가 싸워야 한다고 느낄 테지만 그렇지 않아.'라는 뜻으로 들리기도 하고 '너는 네가 이걸 봐야 한다고 느낄 테지만 그렇지 않아.'라고 들리기도 한다. 레이의 대사를 마저 들어보자. "난 네가 이런 일을 하게 내버려 두지 않을 거다. 날 미워해도 돼. 하지만 난 널 사랑해. 난 네가 이런 일을 하게 내버려 두지 않을 거야." 이런 일이란 뭘 가리키는 걸까? 싸우는 것? 보는 것? 그런데 앞서 말했듯, 이 영화에서 둘은 같다. 이 부자는 너무 많이 보는 자 = 폭력을 행하는 자라는 공통점을 지닌다. 처음부터 그런 사람이 되고자 했던 로비를 지금껏 레이가 막고 있었을 뿐이다.

에이, 목숨을 구하기 위해 할란을 살해한 레이와 군대에 합류해 외계인과 싸우고자 하는 로비를 폭력성이라는 특징만으로 뭉뚱그려 묶는 건 무리한 일이 아닐까? 하지만 할란을 죽인 것은 시작에 불과했다. '전사' 레이는 계속 진화하고, 그의 폭력은 점점 더 정당화된다. 레이는 할란을 죽일 때만 해도 큰 결심을 한 뒤 문을 닫고 들어가 힘겹게 살인을 저질렀고, 살인의 무게를 실감했다. 하지만 다음 장면에서는 레이첼 바로 앞에 다가온 삼발이의 촉수를 카메라가 보는 앞에서 도끼로 찍어 죽인다.[각주:5] 워낙 급박한 상황인지라 그가 한때 할란의 도끼질을 막았던 사람이라는 사실을 되새길 여유조차 없다. 그 상황에서는 그렇게 하는 게 당연하지! 이어서 레이는 레이첼을 잡아간 삼발이를 통째로 수류탄으로 날린다. 여기서는 세 가지가 마음에 걸린다. 첫째는 수류탄. 권총과 도끼는 개인의 자위 수단으로 볼 수 있지만, 수류탄은 민간인의 도구가 아니다. 온몸으로 '평범한 미국 민간인 남자'를 표방하던 레이가 문득 수류탄으로 적을 해치우는 순간 무언가가 변화한다. 둘째는 레이를 적극적으로 돕는 다른 사람들. 즉, 레이의 폭력은 이제 공동체가 찬성하는 일이자 공동체를 구원하는 일이 된다. 셋째, 그럼으로써 레이는 이 영화에서 처음으로 전형적인 할리우드 액션 블록버스터의 남성 영웅처럼 보인다. 필사적으로 살려고 한 행동일 뿐이라거나 자신도 특별히 의도하지는 않았던 행동이라는 식의 변명은 얼마든지 가능할 테지만, 나는 〈우주 전쟁〉을 본 모든 관객이 그럼에도 이 장면에서 약간의 위화감이랄까 '그러면 그렇지' 하는 나른한 안도감을 느꼈으리라 생각한다. 역시나, 톰 크루즈가 주인공인 할리우드 블록버스터인데 외계인에게 쫓기기만 할 리 없지! 그렇게 레이는 조금씩 달라진다.

그런 다음 보스턴에 이르면 최종 진화가 기다린다. 어쩔 수 없는 자위행위로 삼발이를 수류탄으로 날리고 개인 영웅이 되었던 레이는 이곳에서 아예 군대의 인정을 받는다. 레이는 삼발이의 방어막이 사라졌다는 사실을 발견하고 군 지휘관에게 이 사실을 알려 삼발이를 공격하도록 한다.[각주:6] 삼발이가 쓰러지고, 조종석에서 축 늘어진 외계인이 나와 인류의 승리를 알린다. 이 장면은 할란을 살해하는 장면만큼이나 과도하다. 거기서 삼발이를 쏠 필요가 있었나? 레이는 삼발이들이 갑자기 무기력해졌다는 군인의 이야기를 들어 알고 있었다. 삼발이가 건물에 기대선 채 가동을 중단한 모습도 보았다. 남아서 휘청거리는 삼발이도 더는 광선을 쏘며 사람을 죽이지 않았다. 군대는 침착하게 상황을 통제하고 있었다. 그런데도 굳이 삼발이를 쏘아 거꾸러뜨리고 외계인의 시신을 통해 승리를 확인하는 과정이 끼어든다. 잠재적 위협을 적극적으로 제거하라. 익숙한 과잉대응이다. 할란을 죽인 레이의 태도는 이제 공적으로 승인받았다.

그제야 레이는 로비와 재회한다. 미리 와 있던 로비. 처음부터 '보아야' 한다고, 군과 함께해야 한다고 주장했던 로비. 멀쩡히 살아남음으로써 자신이 옳았음을 증명했고 레이의 고생을 순간 허탈하게 만든 로비. 전통적인 부자 관계는 뒤집혔다. 레이는 먼 길을 돌아 비로소 로비가 되었다. 그렇게 아버지는 아들이 된다. 자위권을 행사하던 개인은 군인이 된다. 금기시되던 사적 폭력은 공적으로는 찬미할 만한 영웅적 행위가 된다. 떠날 필요 없어요. 들어와도 돼요. 난 처음부터 집 안에 있었으니까. 〈수색자〉식으로 말해볼까. 떠나려는 이든을 마틴과 다른 기병대원들이 붙잡는다. 자네도 들어오게. 예전에는 자네를 탐탁치 않게 생각했지만 결국 자네가 옳았잖아. 우리도 자네와 함께 말을 달리며 인디언들을 죽이고 우리의 여자아이를 구해오지 않았던가. 자네는 우리 사람이야.

원작을 모르는 관객들을 당황스럽게 했던 모건 프리먼의 마지막 내레이션도 이제는 달리 들린다. "침입자들이 도착하여 우리의 공기를 들이쉬고, 먹고, 마셨을 때부터, 그들은 파멸할 운명이었다. 인간의 모든 무기와 장치는 무력했으나, 신이 지혜로이 이 땅에 심어둔 가장 작은 생명체 앞에 그들은 실패하고 말살당했다. 수십억의 죽음을 치르며 인류는 면역력을 획득했고, 이 행성의 무수한 생명체 사이에서 살아남을 권리를 획득했다. 어떠한 도전 앞에서도 그 권리는 우리의 것이니, 이는 인류의 삶과 죽음이 헛되지 않았음이라." 처음부터 이렇게 될 운명이었다. 이미 인류의 몸 안에 적을 말살할 능력이 있었다. 수십억을 죽여가며 얻은 이 능력으로 우리는 살아남을 것이다. 보는 능력, 해치는 능력으로. 여자들이 끔찍한 것을 보지 않아도 괜찮도록 지켜주는, 스포츠를 좋아하고 자동차를 좋아하고 몸으로 벌어 먹고살고 자식들을 사랑하지만 소통하는 법은 모르고 세련되지는 않은 평범한 남자들의 능력으로. 군인이 될 남자들의 능력으로.

하지만 〈우주 전쟁〉은 봉합을 승인하고 지지하는 영화가 아니다. 영화들은 암묵적인 규약이나 기성 가치의 요구와 타협하는 과정에서 종종 봉합을 시도한다. 때로는 마지못해 대충 봉합한 자리가 균열을 이기지 못하고 벌어지면서 표면의 서사를 내파하며 이의를 제기한다. 더 나아가 고의로 균열과 여백을 남겨 위험천만한 속내를 드러내는 영화도 있다. 〈우주 전쟁〉도 마찬가지다. 그 가공할 속도에 휘말려 놓치고 지나가기 쉽지만, 곳곳에 난처한 대목들이 산재해 있다. 변명을 대며 어물쩍 넘어가려면 넘어갈 수도 있지만, 그렇게 넘어간 뒤에도 영 개운치 않은 얼룩들이다. 망설이는 레이와 환영하는 로비는 그간의 얼룩들이 어쩌다 실수로 나온 것이 아니라 확신범의 소행이었음을 입증하는 클라이맥스다. 이 클라이맥스는 '이건 좀 이상하지 않냐?'라고 스스로 의문을 제기하며, 부드러운 소화를 방해하고, 대충 넘겼던 모든 것들을 게워낸다. 완벽한 거짓말을 들려주는 영화 이상으로 그런 완벽한 거짓말이 불가능함을 암시하는 징후를 드러내는 영화에 매혹을 느끼며, 그것이 더 영화다운 일이라고 생각하는 관객으로서, 이 머뭇거리는 클라이맥스가 없었더라면 〈우주 전쟁〉을 지금처럼 좋아하지는 못했을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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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 정도 글을 쓰는 데에도 일주일이 걸렸다. 게다가 언제나처럼 시간이 지나고 나면 엉망진창인 문장들이 눈에 밟혀 한참을 고칠 테고. 현재 2월 18일 정오가 조금 지난 시점. 시네마테크 서울아트시네마의 〈우주 전쟁〉 마지막 상영까지는 네 시간도 남지 않았다. 원래도 글 쓰는 속도가 느린 데다 요즘은 취미 삼아 쓰는 글을 오래 붙들고 앉아 이어나갈 여유가 없다. 10분씩 짬을 내어 쓸 수도 없는 노릇이고, 반드시 뭔가 중요한 활동을 포기해야 한다. 고민이다.



  1. 여담이지만 여기에서 메리 앤이 뒤를 돌아보게 한다는 연출도 근사하다. 공간 구조상 레이와 메리 앤은 처음에는 마주 보고 있었다. 따라서 메리 앤이 레이를 돌아보려면 그 전에 먼저 그를 등져야 한다. 어떻게? 무슨 동기에서? 스필버그는 달려가는 레이첼과 그런 레이첼을 끌어안는 메리 앤의 동작이 만들어내는 관성을 이용해 메리 앤이 레이첼을 들어 올리며 몸을 돌리도록 한다. 너무 간단해서 지적할 것조차 없을 듯한 사소한 연출이지만, 덕분에 뒤늦게 레이의 존재를 상기하는 메리 앤의 표정, 레이를 가리다가 메리 앤의 표정과 동작이 나온 뒤에야 그의 거리를 비춰주는 카메라의 위치와 움직임, 윌리엄스 음악의 음산한 전개를 한 화면 안에서 선명하면서도 경제적으로 전달할 수 있었다. 누구나 보아도 명장면임을 알 수 있는 세트피스보다도 이런 사소한 선택에서 '거장의 손길'을 실감하게 된다. [본문으로]
  2. 과거의 할리우드 재난 영화에서는 재난의 극복과 종결이 허물어지는 가족의 재결합과 연결되는 경우가 허다했다. 스필버그가 8~90년대에 〈우주 전쟁〉을 만들었더라면 레이와 메리 앤은 이혼이 아니라 별거 중이고, 둘은 결말에서 감동의 포옹을 나누지 않았을까. 하지만 이제 시대가 바뀌었다. 메리 앤은 처음 등장할 때부터 다른 남자를 대동한다. 못난이 아빠가 직접 물어볼 자신은 없으니까 아이들에게 "너희 엄마 요즘 누구 만나는 사람 있냐?"라고 물으며 재결합의 가능성을 탐색하는 클리셰 따위는 들어설 자리도 없다. [본문으로]
  3. 결말의 시각적 유사성 외에도 두 작품이 비슷한 점은 여러 가지지만, 여기에서는 〈수색자〉에서 존 포드가 중요한 죽음의 순간을 보여주는 방식을 환기하는 정도로만 넘어가겠다. [본문으로]
  4. 이 문단에서 인용한 대사들은 원래 대사의 어휘들을 전달하기 위해 일부러 딱딱하게 옮겼다. [본문으로]
  5. 삼발이는 기계일 뿐이지만, 촉수의 디자인과 움직임 때문에 시종일관 생물처럼 느껴진다. [본문으로]
  6. 레이가 지휘관에게 삼발이를 보라고 할 때, 처음에는 소란 때문에 지휘관이 레이의 말을 듣지 못한다는 점도 의미심장하다. 레이는 자신의 말을 듣지 못하는 지휘관에게 삼발이를 '보라'고 가리킨다. 레이는 확실히 '보는 사람'이다. [본문으로]
Posted by 거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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