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우주 전쟁War of the Worlds, 2005〉 상영 첫날이다. 나는 보러 가지 못한다. 서울에 사는 지인 중에는 갈 사람이 있을까. 〈E. T.E.T. the Extra-Terrestrial, 1982〉와 스티븐 스필버그를 무척 좋아하는 지인은 어떨까? 그런데 그는 폭력적이고 고통스러운 이미지에 취약했지. 그럼 만약 그가 〈우주 전쟁〉을 보지 않았다면(실제로 어떤지는 모른다), 과연 나는 스필버그가 만든 가장 무서운 공포 영화인 이 작품을 권할 수 있었을까?

당연히 권할 수 있지.

그러고 보니 그것도 〈우주 전쟁〉의 대단한 점 중 하나다. 이 영화에는 관객을 일순 충격에 빠뜨릴 만한 이미지가 여럿 등장하지만, 과격한 신체 훼손이나 갑작스러운 소음과 불쑥 튀어나오는 피사체를 이용해 깜짝 놀라게 하는 등 무릎을 나무망치로 때리는 식의 '폭력적'인 시청각 연출은 없다. 물론 '조용한' 공포 영화나 스릴러야 드물지 않다. 하지만 〈우주 전쟁〉은 어디까지나 외계인이 거대 기계를 타고 사람들을 죽이고 피를 빨아 뿌리고 도시를 쾅쾅 때려 부수는 21세기 할리우드 블록버스터라는 본분에 충실한 영화다. 그런데도 〈인디펜던스 데이Independence Day, 1996〉처럼 액션 영화 쪽으로 치우치지도 않고, 조건 반사적 자극에 의지하지도 않은 채, 시종일관 공포 영화의 정조를 유지한다. 생각을 거듭해봐도 그런 영화는 잘 떠오르지 않는다.

이건 등급을 낮추기 위해 순화된 표현을 사용하는 정도로만 될 일은 아니다. 맨 처음 삼발이가 나타나 사람들을 학살하는 장면을 떠올려 본다. 광선의 파괴력을 PG-13 등급에 맞추어 묘사하기란 어렵지 않다. 핵심은 그러면서도 그 위협을 각인시켜야 한다는 데에 있다. 이럴 때 영화 만들기란 어린아이들의 놀이와 비슷한 면이 있다. 카메라를 어디에 놓을까, 무슨 렌즈를 쓸까, 조명을 어떻게 칠까, 화면의 지속 시간은 어느 정도로 하고 다음 화면은 무엇으로 할까 등등의 영화적 기본기는 물론 중요하지만, 그 이전에 외계인이 탄 삼발이는 어떻게 생겼고, 어디에서 광선을 발사하고, 광선을 맞으면 사람이 어떻게 되는지를 매우 진지하게 꾸며내야 한다. 스필버그는 이 방면에서 대다수 블록버스터 감독들이 범접할 수 없는 상상력과 균형 감각을 지닌 '어린아이'다. 그리하여 잭 스나이더 영화였다면 기껏해야 고출력의 레이저빔 정도로나 묘사되었을 삼발이의 광선은 〈우주 전쟁〉에서는 간단하면서도 기묘한 성질을 띤다.

먼저 광선의 정밀도. 그 정도로 강력한 무기를 갖고 있다면 적어도 처음 등장할 때는 광범위 포격을 가하는 것이 더 자연스러울 법도 한데, 삼발이는 처음 등장했을 때부터 사람을 한 명 한 명 조준 사격한다. 흔히 〈우주 전쟁〉을 재난 영화라고 하지만, 그 조준 사격에서는 자연재해에서는 느낄 수 없는 잔인한 악의가 느껴진다.

다음으로 광선의 효과. 어째서인지 이 광선은 사람의 몸을 삽시간에 재로 만들지만, 옷은 비교적 멀쩡하게 남는다. 재와 옷. 생각해 보면 무척 소름 끼치고 효과적이면서도 낯선 표현 방식이다. 입고 있던 사람은 재로 변신하고, 옷은 허공에 남아 힘없이 펄럭이며 땅으로 떨어진다. 아예 몸과 옷이 함께 녹아 없어지거나 폭발에 휘말렸더라면 더 볼 것이 없었을 텐데, 구체적인 형상을 잃은 채 허공에 흩날리는 재와 옷은 그 자체로 관객의 눈길을 끄는 새로운 시각 요소[각주:1]인 동시에 '조금 전까지 여기에 사람이 있었음'을 뜻하는 폭력적인 부재의 표식이다. 인간 증발은 변신이나 순간 이동을 표현하는 데에 쓰이거나 미스터리의 소재로는 사용되어도 이렇듯 즉각적인 살해 방식으로 사용되는 경우는 드물기에 낯설고, 그 낯선 부재의 방식이 공포를 거든다. (여기에서 전제를 깔아둔 스필버그는 중반부에 가서는 아예 허공에서 펄럭이는 옷들이 비처럼 쏟아지는 모습만으로 절멸의 기운을 불러일으킨다.)

재에 대한 첨언. 만약 광선이 인간 증발을 일으킨다고 하더라도 멜리에스 영화처럼 "뿅"하고 사라지는 방식을 취했더라면 낯설거나 신기하거나 어색하기만 할 뿐 두려움은 없었으리라. 그런 방식은 시각적으로는 단순히 존재하던 것이 사라졌음을 뜻할 뿐이다. On/Off 스위치와 같다고나 할까. 그 경우 폭력의 가능성은 시각적으로는, 시간 속에서는 존재하지 않는다. 하지만 흩날리는 재는 그냥 Off가 아니라 시간 속에서(비록 아주 짧은 시간이기는 하지만) 벌어진 폐기의 흔적이다. 재는 증발의 과정을 증언한다. 재는 조금 전까지 재였던 사람이 갑자기 사라지거나 다른 곳으로 간 것이 아니라 재라는 다른 존재로 변했고 영영 사람으로는 돌아올 수 없음을 보여준다.

그리고 광선이 등장하기까지의 예비 단계와 묘사의 순서. 재난 영화, 괴물 영화들은 종종 스펙터클의 핵심을 너무 늦게 드러낸다는 비판을 받곤 한다. 영화의 절반 이상을 숨바꼭질로 만든 〈고질라Godzilla, 2014〉 같은 영화가 대표적인 예다. 그런 면에서 〈우주 전쟁〉은 처음부터 밝은 대낮에 삼발이의 본체를 보여주고 화끈하게 때려 부수는, 뜸 들이지 않는 영화임이 분명하다. 하지만 삼발이가 등장하기까지의 과정을 보면 오히려 스필버그만큼 뜸을 잘 들이는 연출자도 없다. 광범위한 시공간에 걸쳐 동선을 이으려고 아등바등 서커스를 벌이며 뜸을 들이는 〈고질라〉와는 반대로[각주:2] 매우 제한적인 시공간 안에서 구렁이 담 넘어가듯 장면을 잇고 동선을 연결하면서 순식간에 몇 단계를 밟아 나가기 때문에 뜸을 들이고 있다는 사실을 의식할 새도 없을 뿐이다.

삼발이가 광선을 쏘기까지의 과정을 되짚어 볼까. 레이는 딸 레이첼에게서 아들 로비가 허락도 없이 자기 차를 가지고 나갔다는 사실을 듣고 화가 나서 집을 뛰쳐나간다. 그렇게 집을 나갔는데 어째선지 사람들이 전부 자기 뒤쪽 하늘을 올려다보고 있기에 돌아보니 낮 하늘에 무슨 성운을 방불케하는 먹구름이 깔려 있다(①). 레이는 로비를 찾으러 나왔다는 것도 잊고 멍하니 하늘을 보다가 뒷마당에서 보면 더 잘 보일 거라며 집 뒤로 돌아간다. 레이와 주민들이 저마다 뒷마당에서 하늘을 구경하는데, 레이는 바람의 방향이 이상하게도 '폭풍'의 중심을 향하고 있다는 점을 발견한다(②). 레이는 멋진 걸 보여주겠다며 레이첼을 밖으로 데리고 나오고, 갑자기 바람이 멎는다(③). 먹구름이 번쩍이고, 멀리서 번개가 치기 시작한다(④). 레이의 집 뒤편 가까운에 벼락이 떨어지자(⑤) 레이와 레이첼은 집안으로 들어간다. 레이는 레이첼에게 벼락은 한 번 떨어진 곳에 다시 떨어지지 않는다고 안심시키지만, 말이 끝나기가 무섭게 같은 자리에 연달아 벼락이 떨어진다(⑥). 번개가 끝나자 레이는 집 안을 둘러보다 전기 장비가 전부 작동하지 않는다는 걸 깨닫고 밖으로 나간다. 집 밖에서 막 돌아오던 로비를 만난 레이는 교회 옆에 벼락이 스물여섯 번 떨어졌다는 정보를 듣고 교회로 간다. 교회 앞에 사람들이 모여든다. 벼락이 연달아 떨어진 곳의 차도가 패였고, 연기가 피어오른다(⑦). 레이는 땅이 팬 곳 주변에 널린 정체불명의 잔해를 만져본다. 연기를 보아하니 뜨거울 것 같지만, 레이는 오히려 차갑다고 말한다(⑧). 지하에서 소리가 들리면서 지표면에 균열이 가고 건물이 무너진다(⑨). 여기서도 이 일들이 한꺼번에 일어나는 게 아니라 처음에는 금이 가고, 사람들이 물러나고, 도로 옆의 건물 창이 깨지며 외장 벽돌이 떨어지고, 지면이 훨씬 광범위하게 요동치면서 여러 건물의 창이 깨지고, 지면이 요동치는 수준을 넘어서 땅이 갈라지고 이동하며 교회 전면이 분리되고, 수도관이 파열되어 물이 뿜어져 나오고, 교회 종탑이 붕괴하고, 잠시 침묵이 흘렀다가, 교회 앞 지면이 불쑥 솟아올랐다가 꺼지면서 폭발이 일어나는 과정이 하나하나 '순서대로' 묘사된다. 이어 연기 속에서 자동차가 내던져진다(⑩). 촉수 같은 것이 등장하며 차를 깔아뭉갠다(⑪). 그러고 나서야 비로소 땅속에서 삼발이가 솟아오른다(⑫). 삼발이는 등장한 뒤에도 바로 광선을 쏘지 않고 뜸을 들인다. 도망가던 사람들은 삼발이가 조용하자 다시 구경하러 모여든다. 삼발이가 몸을 꿈틀거리며 웅장한 뱃고동 같은 소리를 낸다(⑬). 고속으로 회전하는 엔진 소리 같은 것이 나면서 삼발이의 머리 부분이 이리저리 움직이다가 짧은 촉수를 조준하고, 비로소 광선이 쏟아진다(⑭).

이 자극들이 '순서대로' 제시된다는 점을 강조하고 싶다. 자극은 단숨에 과포화 상태로 쏟아지기보다는 하나씩 하나씩 눈과 귀를 집중시키며 축적되고 다음 상황을 기대하게 한다. 자극이 단계별로 제시되자 레이가 반응자로서 개입할 여지도 생긴다. 집 앞 → 뒷마당 → 집 안 → 집 앞 → 교회 가는 길 → 교회 앞으로 이어지는 거짓말처럼 부드러운 동선을 따라가는 동안 관객은 레이에 대해, 레이가 사는 동네의 분위기와 이웃과의 관계에 대해, 자식들을 대하는 레이의 모자람과 신기한 스펙터클을 대하는 레이의 어린애 같은 성격을 감지한다. 그는 삽시간에 벌어지는 재난을 한 자리에서 무력하게 구경하는, 있으나 없으나 마나인 '인간 1'이 아니다. 그는 부드럽게 연결된 공간들을 이동하면서 임박한 재난의 여러 국면을 관찰하고 적극적으로 반응하는, 관객의 심리적인 초점이다.

다시 광선과 공포 이야기로 돌아가서, 광선은 이토록 많은 예비 단계를 통해 긴장을 축적한 뒤에야 비로소 발사된다. 그리고 거기서 끝이 아니다. 광선이 사람들을 해치는 데에도 순서가 있다. 처음에는 광선이 사람에게 맞는 모습도 보여주지 않는다. 맨 처음 광선이 발사되면 화면이 바뀌고 앞서 한 엑스트라가 들고 있었던 휴대용 캠코더가 땅에 떨어진다. 처음 광선의 위력을 보게 되는 건 그 휴대용 캠코더의 저화질 창을 통해서다. 그런 다음 도망치는 군중을 찍은 두 개의 화면이 이어지는데, 여기에서 레이는 새 화면이 시작될 때마다 재빨리 도망쳐 화면 밖으로 나가고(*), 카메라는 익명의 엑스트라들이 하나씩 증발하는 광경을 비교적 멀리서 보여준다. 세 번째 화면은 익명의 여성을 이전보다 훨씬 더 가까운 위치에서 따라가며 시작한다. 그녀는 잠시 후 광선에 맞아 재가 된다. 비명을 지르는 얼굴이 관객의 눈앞에서 그대로 재로 변해 흩어지고, 음향 효과 때문에 심지어 비명마저 청각적으로 증발하는 듯하다. 이것이 〈우주 전쟁〉 전체를 통틀어 삼발이의 광선에 파괴당하는 인간의 모습을 가장 자세하게 보여주는 순간이다. 즉, 광선을 맞은 인간들에 대한 묘사는 화면 밖에서 시작해 → 땅에 떨어진 캠코더의 창을 통해서 → 군중들의 앞뒤에서 멀찍이 → 한 사람의 얼굴 앞에 이르기까지 점점 더 가까워지고, 무시무시해지며 절정을 향한다.

그리고 이렇게 증발한 여인의 잿가루를 뚫고 비로소 레이가 화면의 중앙에 다시 주인공으로 등장하며, 이후 영화는 광선이 인간을 살해하는 모습보다는 레이가 살아남아 질주하는 과정을 따라가며 장면을 마무리한다. 이 과정이 워낙 순식간인 데다 앞서 (*)에서 군중들의 앞뒤에 슬쩍 레이를 지나가게 했던 솜씨가 교묘하여 눈치채지 못하고 지나갈 수도 있지만, 광선의 파괴 효과가 군중에서 개인의 얼굴로 점점 집약되었던 것처럼, 광선의 위협에 노출되는 주체 역시 군중에서 레이로 점점 응축되었던 셈이다. 관객의 심리적 초점인 레이에게로.

단, 피사체가 질주하는 모습에는 어쩔 수 없이 늘 어느 정도 활력이 따라붙게 마련이다. 더구나 그것이 저 유명한 '톰 크루즈의 달리기'라면 더더욱 그렇다. 그렇게 뛰어다니던 레이가 집으로 들어오자마자 아이들에게 짐을 꾸리라고 하고 피난길에 올랐더라면 어땠을까. 앞서 말한 공포의 정조는 일부분 휘발되었을지도 모른다. 그런즉 재난/공포 영화와 액션 영화의 〈우주 전쟁〉의 발단─이게 겨우 발단이라니─을 수놓는 수많은 빛나는 선택 가운데에서 내가 특히 찬탄해 마지 않는 것은 집에 돌아온 레이에 대한 묘사다. 레이는 넋을 잃은 얼굴로 터덜터덜 들어와 부엌에 주저앉는다. 아이들이 무슨 일이냐고 물어도 대답도 못 한다. 그러다 로비가 "몸에 묻은 거 뭐예요?"라고 묻자 그제야 눈빛이 돌아온다. 레이첼이 몸을 만지려 하자 움찔하며 식탁에 부딪친다. 레이첼이 다시 "몸에 묻은 게 뭐냐고?"라고 말하자 레이는 비로소 자기 몸을 내려다본다. 오 쉿. 건물들이 부서지고 연기가 날리는 통에 뛰어다니느라 잠시 잊고 있었다. 이건 그냥 먼지가 아니다. 사람들의 재. 한때 사람이었던 것들. 그 한 박자 늦은 깨달음이 역한 공포를 몰고 온다. 앞서 레이가 증발한 여인의 잿가루를 뚫고 나타나도록 했던 연출은 생각 이상으로 교활했다. 그는 죽은 사람들을 피해 도망쳤지만, 죽은 사람들은 그에게 묻어 따라왔다. 그러고 보면 〈우주 전쟁〉은 뒤늦게 도착한 것들에 관한 영화이기도 하고, 잔상을 남기는 이미지들에 대한 영화이기도 하다.

액션 영화나 공포 영화에서 피 칠갑을 한 주인공이 "이거 내 피 아냐."라고 말하는 장면은 클리셰에 가깝다. 하지만 피가 재로 대체되자 새로운 표현, 새로운 감흥들이 생겨났다. 외계인들이 지구 정복을 꾀하는 이야기라고 대충 넘기지 않고 그들이 어떻게 생긴 기계를 이용할 것인가, 어떻게 등장할 것인가, 어떤 무기를 사용할 것인가, 무기의 효과는 무엇일까를 진지하게 고민하고 거기 담긴 다양한 가능성을 알뜰하게 활용하고 변주한 덕분이다. 게다가 이건 고작 삼발이의 등장과 광선의 효과에 관한 이야기였을 뿐이다. 〈우주 전쟁〉은 이러한 밀도를 시종일관 유지하며 새로운 이미지에 대한 흥분과 두려움 사이의 경계를 달린다. 유이한 문제라면 영화가 너무나도 유려하게 해낸 것을 말로 풀자니 이토록 지리멸렬해진다는 것과, 말이 지리멸렬하기 때문인지 그 진가를 알리고 나누기가 쉽지 않다는 것 정도일까.

* * *

〈우주 전쟁〉에 대해 이야기하자니 최근에 보고 있는 넷플릭스의 〈데어데블〉이 떠오른다. 현재 시즌 1의 7화까지 보았는데, 이 드라마의 신체 훼손 묘사에는 나쁜 버릇이 있다. 물론 〈데어데블〉은 스플래터 공포 영화가 아니며, 신체 훼손 묘사는 잠깐씩만 등장하는 정도다. 하지만 나는 신체 훼손 묘사가 적다고 느끼기보다는 오히려 〈데어데블〉이 한 화에 한 번 정도 꼴로 신체 훼손 묘사를 불필요하게 과시하고 있다는 인상을 받았다.

5화에서 러시아 마피아 중 한 명이 목이 잘린 시체가 되어 돌아오자 그 형제가 애도하던 중 손님을 맞이하는 장면을 예로 들어볼까. 앞선 화에서 마피아가 목이 잘려 죽는 장면은 어렴풋이 보이기는 했지만 그림자 속에서 짧게 처리했다. 그리고 목이 잘린 시체가 바디백에 담겨 돌아오는 장면에서는 아예 시체를 보여주지 않았다. 그러나 시체가 다시 등장하는 이 장면에서는 이야기가 다르다. 카메라는 시체의 가슴을 닦는 형제의 손을 보여주다가 갑자기 반대 방향으로 자리를 옮기고, 이때 시체의 절단 부위─찢어진 살, 끊어진 목뼈─를 꽤 선명하게 보여준다. 심지어 이 훼손된 신체를 보여주는 것이 목적이었다는 듯, 카메라는 시체의 목에서 출발해 슬며시 위로 올라간다. 여기에는 선정적인 과시욕이 있다. 시체를 일부러 감추는 기색이 역력했던 앞의 두 장면과 이 장면의 도입부를 생각하면, 이 연출은 흡사 '우리가 목 잘린 걸 보여줄까요, 말까요~?' 하면서 감상자를 희롱하다가 기어이 보여주고야 마는 자신을 뿌듯해하는 듯하다. 7화 도입부에서 의문의 사내가 일본 야쿠자의 손을 자르는 장면도 같은 방식이다. 칼을 휘둘러 손이 잘리는 순간은 보여주지 않는다. 다음 화면에서는 바닥에 떨어진 잘려나간 손이 등장하는데, 이때는 손의 절단면은 보이지 않는 각도에서 찍었다. 이 정도는 '칼을 휘둘러 손을 잘랐음'을 기호적으로 표현했다고 할 수 있다. 카메라는 식은땀을 흘리는 야쿠자의 얼굴을 담은 화면으로 옮겨가고, 의문의 사내가 질문을 던진다. 그러니까 잘린 손에 대한 묘사는 여기서 끝났다. 하지만 다음 순간, 카메라는 야쿠자를 심문하는 사내의 목소리를 배경 삼아 기어이 야쿠자가 부여잡은 팔을 가까이서 찍고야 만다. 이때는 절단면이 선명하게 보인다. 핏빛 살 사이로 허옇게 잘려나간 뼈의 단면까지 자세히 묘사하고 있다. 그걸 감추었다가 한 발 늦게 클로즈업으로 보여주는 연출에는 이걸로 감상자에게 생리적 충격을 안기겠다는 욕심이 있다.

두 사례 모두 신체 훼손 묘사는 장면에 어떤 것도 더하지 못한다. 이미 알고 있는 정보를 뒤늦게 반복할 뿐, 부연조차 되지 못한다. 그렇다고 신체 훼손 묘사에 쓰인 특수 분장의 질이 대단히 독특하고 뛰어나거나 이를 촬영한 방식이 독창적이어서 어떤 미적 쾌락을 안겨주는 것도 아니다. 그 (계산된) 뒤늦은 타이밍에는 훼손된 신체를 들이밀어 기겁하게 하겠다는 의도가 엿보이는데, 그렇다고 또 기겁할 만큼 과격하거나 집요한 것도 아니어서 딱히 실효를 거두지도 못한 채 의도만 남을 따름이다. 그런데 애초에 왜 그런 의도를? 창작자들이 감상자를 괴롭히는 것을 낙으로 삼는 가학적인 사람들일 가능성을 배제한다면, 아마도 이런 묘사를 통해 〈데어데블〉 세계의 잔혹한 사실성을 간간이 되새겨주겠다는 천진난만한 생각의 결과가 아닐까 싶다. 그보다는 서로 닮은꼴인 윌슨 피스크와 데어데블의 대립, 그리고 그 과정에서 고통받거나 더 나은 공동체를 꿈꾸는 사람들의 고민이 이미 훨씬 더 '사실적'인 생기를 불어넣고 있다는 점을 망각한 채로.

그리고 나는 이 대목에서 유감스럽게도 21세기 한국 영화들의 신체 훼손 묘사를 떠올리고 있다. 서구에서 유행한 "Asian Extreme" 유의 인식에는 찬성하지 않지만, '새로운 세대'의 영화들이 한국 영화계에 이전에 보기 어려웠던 수위의 폭력 묘사를 도입했다는 점은 부정할 수 없다. 자기 작품의 폭력 묘사에 대해서 '보는 사람의 몸이 아팠으면 좋겠다'고 말하던 감독들의 인터뷰도 여럿 떠오른다. 이 새로운 폭력성은 주로 신체 훼손과 맞물려 피어났고, 그리하여 한국 관객들은 이제 배에 칼을 맞는 정도야 아무것도 아니고 손톱이 빠지거나, 아킬레스건이 썰리거나, 손가락이 잘려나가거나, 두개골이 함몰되거나, 날카로운 금속이 목을 관통하거나, 아예 목이 잘리는 광경을 드물지 않게 보게 되었다.

노파심에 말해두지만 새로운 폭력성을 보여준 한국 영화들이 전부 잘못되었다는 말은 아니다. 영화 속의 직접적인 신체 훼손 묘사를 무조건 거부할 생각도 없다. 나는 그 정도로 건전하지도 않으며, 특히 80년대 미국 공포 영화들의 가공할 신체 훼손 묘사에는 기꺼이 환호한다. 하지만 내가 열광했던 신체 훼손 묘사들은 사실성 자체를 무기로 내세우지 않았고, 늘 다른 효과들이 있었다. 때로는 폭력 묘사의 수위 자체가 영화 내에서 윤리적 문제를 제기하기도 했고, 과격하되 과장된 톤이 사실성을 희석해 장면 전체를 코미디나 초현실적인 풍경으로 발전시키기도 했다. 어떤 묘사들은 명백한 인공미에 아랑곳하지 않고 어쨌거나 가공할 만한 특수효과 실력을 선보여 그 자체로 탄성을 자아내기도 했다. 하다못해 특별히 다른 기능이 없더라도 최소한 장면의 맥락 안에서 새로 등장한 시각 정보의 위력을 배가하는 역할을 했고.

하지만 최근의 한국 영화들과 한국 영화에서 영향이 역력한 〈데어데블〉과 같은 외국 드라마/영화에서는 점점 더 사실적인 묘사 자체가 목적이거나 이를 통해 관객에게 생리적 반응을 강요하는 자신의 권능에 도취한 폭력 묘사를 자주 맞닥뜨리게 된다. 물론 그중에서도 최악은 끔찍한 이미지를 들이밀어 관객을 움츠러들게 하는 권력에 도취한 자신을 누군가가 지적했을 때 '현실이 이러한데 난들 어쩌란 말이냐, 이것이 우리가 사는 세상을 정확하게 묘사한 것이다'라고 발뺌하는 영화다. 마치 끔찍한 광경을 찍으면 그걸 찍었다는 사실만으로도 그것에 대한 비판이 되고, 그러므로 자신에게는 면죄부가 주어지며, 하지만 무지몽매한 관객들을 일깨우기 위해서는 그 끔찍함을 날 것으로 들이미는 것이 진정성 있는 예술가의 길이라는 양. 그런 영화들이 만들어내는 게으른 이미지에는 어떤 놀람도 경탄도 내어줄 수 없다. 오직 그 적나라하고 얕은 수작에 대한 신음과 진저리만이 있을 뿐이다.



  1. 옷만 남기 전까지는 '사람'을 보지 '옷'을 보지는 않으므로, 사람이 사라지는 순간 옷은 화면에 새로 '등장'한 시각 요소다 [본문으로]
  2. 그래서 〈고질라〉에서 가장 재미있었던 건 어떻게든 괴수의 동선과 주인공의 동선을 일치시키기 위해 내세우는 변명거리들이었다. 이건 같은 감독이 연출한 〈로그 원: 스타워즈 이야기〉에서도 마찬가지여서, 악역인 크레닉 국장은 은하계 곳곳을 누비며 공작을 벌이는 로그 원 일당의 활약을 일일이 쫓아다니며 스탠딩석에서 관람하지 않으면 안 되는 그루피처럼 보인다. [본문으로]
Posted by 거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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