닐 게이먼이 쓰고 크리스 리들이 그리고 장미란이 옮긴 그림동화. 닐 게이먼 작품이니 언젠가는 살 수밖에 없었지만 아직 『샌드맨: 서곡』도 못 산 터라 우선순위에서는 조금 밀리는 편이었는데, 마침 닐 게이먼을 좋아하는 친구가 부부 동반으로 아이도 데리고 온다기에 '괜찮으면 선물로 써도 좋지 않아?'라고 구매를 합리화했다. 정작 읽고 보니 작품은 역시나 좋았는데 당장 아이에게 읽어주기에는 망설여지겠다 싶었다. 아이들의 수용력을 무시하는 건 아니고, 썩 다정하지 않은 어조라든가 어휘의 난이도를 고려했을 때 그렇다는 이야기. 또 아이에게 폭력과 죽음에 관한 이야기를 들려줄 때는 망설이게 되는 법이기도 하고, 다른 동화들을 합치고 비튼 이야기인 만큼 '원본'을 먼저 읽히고 싶다는 생각이 들 수도 있겠고. 그래도 조금만 나이가 들면 괜찮겠지.

『샌드맨』 때부터 쭉 드는 의문인데, 왜 닐 게이먼은 그림과 함께하는 작품이 더 좋은 걸까 모르겠다. 당연히 글을 못 쓰거나 묘사가 둔한 작가는 아닌데. 문자를 통해 전달되는 정보를 다시 그림을 통해 전달할 때도 정보가 중복되어 지루하다는 생각이 들기는커녕 서로의 여백을 채워주고 북돋는다. 거꾸로 말하면 글만 있는 작품은 분명히 괜찮은 글인데도 무언가 부족하다는 기분이 들고. 그림이 없는 닐 게이먼의 소설 중에도 물론 좋아하는 작품들이 있지만, 어느 것도 닐 게이먼의 그래픽 노블이나 그림동화만큼 좋아하지는 않는다. 그렇다고 또 닐 게이먼 작품을 TV 드라마나 영화로 보고 싶느냐면 그건 전혀 아니다. 흐르는 시간 속에서 닐 게이먼의 세계를 보면 틀림없이 금세 김이 빠지고 지루해질 거야. 그러니까 그냥 시각적인 요소를 곁들이면 되는 게 아니라 정보의 단절과 연결이 (영상물에 비해 두드러지게) 눈에 띄며 '사실적'인 이미지를 추구하지 않는 정지된 그림이라는 점이 중요한 건데, 그게 왜 닐 게이먼의 글에는 꼭 필요하다고 느끼는지.

하여간 이번에도 글뿐만 아니라 그림이 끝장이다. 잠자는 미녀 이야기야 원형적인 소재나 다를 바 없지만, 막연하게 '마법에 걸려 잠든 세상'이라고만 생각하는 것과 잠든 세계의 구체적인 형상을 목도하는 건 완전히 다른 경험이다. 44~45쪽의 삽화와 글에서 묘사하는 장미 덩쿨의 디테일─거리에 따른 색채 대비─은 한 번도 생각해 본 적 없고, 54~55쪽에 걸친 삽화는 내가 본 좀비 아포칼립스 이미지 중에서도 최고로 꼽을 만했다. 그래픽 노블은 작가가 대본에서 이미지의 위치나 형태 등을 지정하는 줄 아는데, 이 작품의 삽화에도 닐 게이먼의 아이디어가 어느 정도 반영됐을까? 삽화와 글의 배치 순서나 형태 같은 것도? 그러고 보니 그림책 작가와 삽화가가 어떤 식으로 일하는지는 전혀 모르는구나.

동화 비틀기와 페미니즘에 관해서는 언급을 자제하련다. 백여 쪽밖에 안 되고, 직접 읽는 즐거움을 빼앗고 싶지 않으니까. 기본적으로 잠자는 미녀를 여왕이 깨우러 가는 이야기라는 점, 그리고 현대인에게 어울리는 정치적 적절함을 내세우기 위해 원전을 내심 비웃으면서 그것을 비틀어대는 자신의 전복성을 보라고 윙크하는 하수의 작품은 절대 아니라는 점만 말해두겠다. 닐 게이먼은 빌 윌링험의 『페이블즈』가 그렇듯 원전의 얼개와 요소를 존중하면서 거기 남은 가능성이나 여백을 채우고 확장하며 홀로 오롯이 설 수 있는 자기만의 세계를 세운다. 그래서 『잠자는 미녀와 마법의 물렛가락』을 읽기 전에 꼭 원전을 먼저 읽을 필요는 없을 것도 같다. 『잠자는 미녀와 마법의 물렛가락』을 먼저 읽는 아이들에게는 닐 게이먼이 원전으로 삼은 이야기들이 오히려 여백이 될 테고, 그 아이들이 거꾸로 그 여백을 채우는 것도 멋진 일 아닐까?

출판사 웹사이트에서 가져온 이미지인데 색이 실물과 다르다.
녹색으로 보이는 부분은 실은 금갈색.

Posted by 거시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