공항과 기내에서 읽기 적당한 분량의 책을 고르다가 『신 엔진』을 다시 읽었다. 착륙 안내 방송 직전에 다 읽었으니 탁월한 선택이었다. (스티븐 킹 장편 소설 같은 걸 다 읽으려면 몇 시간을 비행해야 할까?)

처음 한동안은 '대체 왜 내가 이 재미있는 소설을 몰라봤지?' 하며 자책했다. 분위기 죽이고, 소도구 인상적이고, 논리 탄탄하고. 설정이 참신하다고 칭찬하는 목소리에는 늘 동의하기 어려웠지만─신도의 신앙심에 의해 신의 힘이 결정된다는 설정, 좋아하기는 하는데 어쨌든 흔하지 않나?─설정만 믿고 잘난 척하는 작품도 아니고. 정말 왜 이런 작품에 시비를 걸었던 거야? 그러나 끝까지 읽고 나니 지난날 내 마음을 다시 이해할 수 있었다. 더 크고 산만했더라면 좋았을 텐데. 지나치게 간결하고 효율적이어서 효과는 너무 뚜렷하고 생기는 덜하다. 역자 후기에서 언급한 대로 밝은 스칼지와 어두운 스칼지가 있다면 아직 본체는 밝은 스칼지가 아닐까. 자기 세계에 심취해 즐겁게 수다를 떤 듯한 다른 작품들과 달리 『신 엔진』은 꼭 필요한 만큼만 써서 핵심을 정확하게 전달한 후 곧장 펜을 놓았다는 인상이다. 물론 그런 글쓰기를 의도적으로 실험해봤을 수도 있으니 이건 추론이라기보다는 상상에 불과하지만.

여하간 덕분에 소설 독자로서 내가 무엇을 원하는지 다시금 확인하게 됐다.

그런데 묘사를 (아마도) 전보다 세밀하게 따라가다 보니 영화로는 무척 보고 싶어졌다. 정확히는 80년대의 존 카펜터 + 롭 보틴이 만든 판본으로. 그게 아니면 80년대의 스튜어트 고든이라도. 신체 훼손 장면들 아날로그 특수효과로 보고 싶고, '주교의 소명' 행진 장면도 매트 페인팅으로 그린 모습을 상상했다. 잘만 연출하면 큰 돈 들이지 않고도 걸작 SF 공포 영화가 나왔을 거다. 요즘 같아서는… 기대 안 해. 우리 주님의 등장 장면 같은 거 굳이 CG로 본들 경외감 같은 거 생길 리 없겠지.

그나저나 존 스칼지 노인의 우주 시리즈 『마지막 행성』까지만 읽고 접었는데 또 신간 나왔네. 계속 재미있으려나.

Posted by 거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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