어쩌면 잭 스나이더는 크리스토퍼 놀란이 가질 수 없는 영혼의 반대편 같은 존재가 아닐까. 둘 다 기본적으로는 꿈 많은 소년 기질에 심취한 창작자들이다. 그중 더 어른스럽거나 어른스러운 척 할 수 있는 건 놀란이다. 놀란은 자신의 공상을 바라보는 다른 사람들의 시선을 의식할 줄 알며, 공상을 포장할 만한 야심과 교양(영화적 교양 같은 거 말고 그냥 양식 있는 현대 사회 성인으로서 그래도 이 정도 매무새는 갖춰야 한다는 인식)도 갖추고 있다. 그는 공상을 영화 안팎에서 구조화/언어화하려 정연히 전달함으로써 어른으로 대접받고자 하는 영국 기숙학교 도련님 같다. 반면 스나이더는 "다크"한 거 보면서 큭큭큭 거리는 자신의 기질을 조금도 감추거나 정련하려 들지 않는다. 그는 장난감을 가지고 노는 어린아이처럼 자기 환상을 보란듯이 퍼부으며, 그런 태도에 조금이라도 회의를 품기는커녕 위선 없는 자신의 태도가 마냥 근사하다고 여기는 듯하다. (놀란의 남자 주인공들이 상실한 아내의 망령에 휩싸인 금욕적인 사내들인 데에 반해 스나이더의 남자 주인공들이 종종 황홀한 섹스를 즐기며 무력하게 위기에 처한 어머니/연인을 구해내는 데에 몰두한다는 점 또한 두 감독의 소년성이 지닌 공통점과 차이점을 드러낸다고 할 수 있지 않을까?)
유기적인 영화를 만들어낸다는 측면에서는 스나이더 쪽이 훨씬 더 엉망이며 빈말로라도 좋은 영화라고 말하기 어려운 결과물을 내놓고 있다. 그러나 〈배트맨 대 슈퍼맨: 저스티스의 시작Batman v Superman: Dawn of Justice, 2016〉을 보는 동안, 어쩌면 미국산 슈퍼히어로를 다루는 데에는 유치찬란하고 과도하며 편협한 것을 진지하고 멋지다고 여기는 스나이더의 기질이 더 핵심과 맞닿아 있는 건지도 모르겠다는 생각이 들었다. 설마 〈강철의 사나이Man of Steel, 2013〉를 만들었던 창작자가 지금까지 나온 실사판 배트맨 중에서도 제일로 꼽을 만한 배트맨 해석을 내놓을 줄이야. '자기가 사는 도시를 더 나은 곳으로 바꿔 놓을 만한 재력을 갖추고 있으면서도 어렸을 때 강도에게 총 맞아 죽은 부모에 대한 원한을 몇십 년 넘도록 고스란히 유지한 채 1인 자경 활동에 나서는 중년 범죄자'가 어떤 인간일까 상상해 보노라면, 대놓고 '사실성'을 강조했던 놀란의 배트맨보다 스나이더의 배트맨이 더욱 정곡을 찌르고 있음은 부정하기 어렵다. 《씨네21》의 김혜리 기자는 이 폭력적인 배트맨의 "아전인수 및 인종주의적 발언은 딕 체니나 도널드 트럼프라면 모를까, 우리가 아는 브루스 웨인의 프로필을 벗어난다"고 썼지만, 그리고 확실히 나도 크립토나이트 창은 일단은 가상의 위협에 대한 억지책으로 만들어 놓는 선에서 그치도록 했어야지 바로 '슈퍼맨을 죽이겠어'로 가는 건 곤란하다고 생각했지만, 그렇더라도 우악스럽고 편협하며 사고가 망가져 있는 지친 우익 폭력배 배트맨의 모습은 수도승에 가까운 크리스천 베일의 배트맨보다 더 자연스럽게 와 닿는다. 이런 배트맨이라면, 허우대 좋으면서도 무기력해 보이는 벤 애플렉의 얼굴을 통해 육화된 넋 나간 편집광 배트맨이라면, 신용할 수 없는 절대적 타자/숙적의 입에서 자신의 (그 오랜 세월 동안 조금도 가벼워지지 않은) 근원적인 트라우마를 건드리는 핵심 단어가 나오는 순간 칼을 거두는 것도 이해할 수 있다. 그에게도 그만의 크립토나이트가 있나니.
배트맨이 한 축을 잡아준 덕분에 슈퍼맨에 대한 해석도 명료해졌다. 헨리 카빌이 연기하는 슈퍼맨은 인간관계에서든 사회활동에서든 올바르다고 간주 되는 행동을 하기는 하지만, 진심 어린 박애 정신과 사랑 속에서 그렇게 행동한다기보다는 그것이 인간에게는 올바른 행동이라고 배웠기 때문에 흉내만 낼 뿐인 모범생 소시오패스 같다. 그가 재난 앞에서 인간들을 구조하는 장면의 과도하게 장엄한 구도와 모호한 표정에서는 신적인 존재의 애정과 자비보다는 '이 버러지들은 왜 이러고 있는 걸까' 하는 냉담함이 엿보인다. 심지어 초반부 클라크 켄트로서 로이스 레인을 달래는 대목조차도 '연인이 속상해하며 관계에 회의적일 때는 로맨틱한 몸(개그)로 밀어붙여라' 라는 매뉴얼을 읽고 그대로 실천하는 것만 같을 정도이니 말 다했다. 할리우드가 지성이 있고 영어를 할 줄 아는 '우리 편' 외계인을 이토록 매몰차게 그린 사례가 있었을까. 짐작건대 스나이더는 슈퍼맨을 싫어하거나 적어도 그에게 공감하지 못하는 듯하다. 하지만 이처럼 몰이해를 동력으로 삼아 그려낸 슈퍼맨의 모습에서 전해지는 외계인다운 비인간미는, 어쨌거나 외계인이면서도 나쁜 외계인들에게 맞서는 착한 외계인으로 거듭나느라 갈팡질팡했던 〈강철의 사나이〉보다 더욱 뚜렷한 일관성을 지니고 있다. 제아무리 박애주의적인 행동을 하더라도 결국은 그 행동 저변에 자리한 인간다움은 재현할 수 없는 타자. 그렇기에 가장 고마운 순간에조차 두려움을 느끼게 되는 잠재적 위협. 바로 배트맨의 시선이다. 즉 〈배트맨 대 슈퍼맨〉은 배트맨의 시선을 중심으로 한 배트맨 영화이며, 그 시선 안에서 슈퍼맨에 대한 묘사는 일관적이다. 그러므로 그가 배트맨이 먹인 크립토나이트 때문에 평범한 인간에 가까워져 흠씬 두들겨 맞고 신음하게 된 다음에야 비로소 로이스에게 사랑한다는 고백을 하고 인류 절멸의 위협을 막기 위해 신의 자리에서 내려오게 되는 것도 당연한 전개라면 당연한 전개다.
물론 이와 같은 해석을 정치적으로 비판할 수는 있다. 스나이더가 자신이 그려낸 배트맨과 거리를 두고자 노력한 흔적은 보이지 않는다. 슈퍼맨이 배트맨에게 맞아 넝마가 되는 대목에는 비탄이나 고통의 쇼트보다는 한낱 인간이 신적인 존재를 끌어내려 바닥을 기게 하고 있다는 역전의 쾌락, 폭력의 기쁨이 어려 있다. 또 둠스데이와 슈퍼맨과 원더우먼이 말 그대로 초인적으로 맞붙을 때는 그 광경을 바라볼 수밖에 없는 무기력한 인간 배트맨의 시점이 삽입된다. 배트맨이 초인/외계인을 인간과 다른 미지의 위협으로 바라보며 두려워하고 분노하는 순간, 슈퍼맨에 관한 저 유명한 슬로건 "Up in the sky, look: It's a bird. It's a plane. It's Superman!"은 빨갱이 공포로 얼룩진 50년대 SF 공포 액션 영화 〈외계에서 온 것The Thing from Another World, 1951〉에 나오는 저 유명한 경고 "Watch the skies. Everywhere. Keep looking. Keep watching the skies."와 겹쳐지는 듯하다. (그리고 이 연상이 우연이 아니라는 듯, 렉스 루터는 "The Red Capes are coming! The Red Capes are coming!"이라고 말한다.) 조금 과도하게 말하자면, 여기서 스나이더는 〈바람과 사자The Wind and the Lion, 1975〉를 만든 극우 마초 감독 존 밀리어스 곁에 서 있다.
그러나 다시 앞으로 돌아가서, 그것이야말로 배트맨이라는 캐릭터의 한 본질이 아닌지. 배트맨을 계속 진지하게 히어로로 떠받드는 한, 이 해석은 언젠가는 나올 수밖에 없었다. 그걸 실현하는 데에는 외톨이들을 사랑하는 몽상가 팀 버튼이나 배트맨이라는 존재가 빚어내는 사회적/관념적인 대립에 몰두한 건축가 놀란이 아니라 야단법석 사방을 때려 부수며 으하하하 다크하다 다크해 라고 환희하는 스나이더가 필요했던 거고. 물론 오래전 대런 아로노프스키가 계획대로 〈배트맨: 원년〉을 만들었더라면 이보다 훨씬 다층적인 우익 자경단 배트맨의 초상을 그려내었으리라 짐작하는 바이지만, 어쨌거나 그 근사한 계획이 무산된 지도 어언 십여 년이 지난 지금에 와서는 아쉬우나마 스나이더의 공로를 인정해야겠다.
* * *
배트맨이 슈퍼맨을 흠씬 두들겨 패는 과정의 쾌락에 관해 이야기한 김에 덧붙이자면, 스나이더가 청소년기의 과시적 암흑에 사로잡힌 창작자임은(일라이 로스나 매튜 본처럼?) 특히 가학적인 묘사, 좀 더 정확히는 고귀하고 존중해야 할 존재를 처참하게 '능욕'하는 이미지를 만들어내는 데에서 나타난다. 범죄자의 몸에 박쥐 낙인을 찍거나, 슈퍼맨의 어머니를 찍은 폴라로이드 사진이나, 처참하게 망가지는 슈퍼맨의 묘사 모두 극의 전개나 관객의 호응을 위해 필요한 수준 이상으로 과도하다. (비슷하게 슈퍼맨이 진창을 뒹구는 묘사가 있었던 〈슈퍼맨 돌아오다Superman Returns, 2006〉와 비교해 보라.) 바로 이 후안무치하면서도 심상한 악취미의 전시야말로 놀란이 제아무리 '사실적'인 배트맨을 그리고자 한들 절대 손대지 않았을 영역이며 식자들의 논란과 비판과 비난을 피해가기 어려울 요소인 동시에 〈배트맨 대 슈퍼맨〉이 독자적인 해석으로 자립할 수 있도록 해준 기반이다. 여기서 "악취미"보다는 "심상함"을 강조하고 싶다. 스나이더 유의 창작자들에게는 영어에서 "tongue-in-cheek"이라고 하는, 관객에게 윙크를 던지며 장난스럽게 '나는 이런 것도 한다'라고 과시하는 동시에 눙치는 거리 두기가 보이지 않는다. 그들은 사회적으로 논란이 될 만한 불쾌한 욕망(이런 욕망 자체는 누구에게나 있다고 생각하는데) 앞에 주저하거나 이를 걸러내는 자기 검열 필터가 없는 것처럼 보인다. 나 또한 불쾌한 욕망을 지닌 감상자로서 그처럼 절제되지 않은 묘사의 쾌락은 이해하고 인정하며, 그것이 "tongue-in-cheek"으로 일관하며 모두가 짜고 치는 안전한 소꿉놀이를 반복하는 것보다는 더 "영화답다"고 여기는 마음도 없지 않지만, 그러한 태도가 저예산 착취 영화가 아니라 모두가 기다리는 초고예산 블록버스터를 잠식하면서 세계적인 흥행으로 이어지고 있는 상황 앞에서는 역시 꺼림칙함을 완전히 걷어내기는 어렵다.
* * *
이미 영화적으로 엉망임을 전제한 뒤 굳이 서사 상의 성취에 관해 언급하는 이런 글을 쓰는 것의 불편함은 말할 것도 없고…
유기적인 영화를 만들어낸다는 측면에서는 스나이더 쪽이 훨씬 더 엉망이며 빈말로라도 좋은 영화라고 말하기 어려운 결과물을 내놓고 있다. 그러나 〈배트맨 대 슈퍼맨: 저스티스의 시작Batman v Superman: Dawn of Justice, 2016〉을 보는 동안, 어쩌면 미국산 슈퍼히어로를 다루는 데에는 유치찬란하고 과도하며 편협한 것을 진지하고 멋지다고 여기는 스나이더의 기질이 더 핵심과 맞닿아 있는 건지도 모르겠다는 생각이 들었다. 설마 〈강철의 사나이Man of Steel, 2013〉를 만들었던 창작자가 지금까지 나온 실사판 배트맨 중에서도 제일로 꼽을 만한 배트맨 해석을 내놓을 줄이야. '자기가 사는 도시를 더 나은 곳으로 바꿔 놓을 만한 재력을 갖추고 있으면서도 어렸을 때 강도에게 총 맞아 죽은 부모에 대한 원한을 몇십 년 넘도록 고스란히 유지한 채 1인 자경 활동에 나서는 중년 범죄자'가 어떤 인간일까 상상해 보노라면, 대놓고 '사실성'을 강조했던 놀란의 배트맨보다 스나이더의 배트맨이 더욱 정곡을 찌르고 있음은 부정하기 어렵다. 《씨네21》의 김혜리 기자는 이 폭력적인 배트맨의 "아전인수 및 인종주의적 발언은 딕 체니나 도널드 트럼프라면 모를까, 우리가 아는 브루스 웨인의 프로필을 벗어난다"고 썼지만, 그리고 확실히 나도 크립토나이트 창은 일단은 가상의 위협에 대한 억지책으로 만들어 놓는 선에서 그치도록 했어야지 바로 '슈퍼맨을 죽이겠어'로 가는 건 곤란하다고 생각했지만, 그렇더라도 우악스럽고 편협하며 사고가 망가져 있는 지친 우익 폭력배 배트맨의 모습은 수도승에 가까운 크리스천 베일의 배트맨보다 더 자연스럽게 와 닿는다. 이런 배트맨이라면, 허우대 좋으면서도 무기력해 보이는 벤 애플렉의 얼굴을 통해 육화된 넋 나간 편집광 배트맨이라면, 신용할 수 없는 절대적 타자/숙적의 입에서 자신의 (그 오랜 세월 동안 조금도 가벼워지지 않은) 근원적인 트라우마를 건드리는 핵심 단어가 나오는 순간 칼을 거두는 것도 이해할 수 있다. 그에게도 그만의 크립토나이트가 있나니.
배트맨이 한 축을 잡아준 덕분에 슈퍼맨에 대한 해석도 명료해졌다. 헨리 카빌이 연기하는 슈퍼맨은 인간관계에서든 사회활동에서든 올바르다고 간주 되는 행동을 하기는 하지만, 진심 어린 박애 정신과 사랑 속에서 그렇게 행동한다기보다는 그것이 인간에게는 올바른 행동이라고 배웠기 때문에 흉내만 낼 뿐인 모범생 소시오패스 같다. 그가 재난 앞에서 인간들을 구조하는 장면의 과도하게 장엄한 구도와 모호한 표정에서는 신적인 존재의 애정과 자비보다는 '이 버러지들은 왜 이러고 있는 걸까' 하는 냉담함이 엿보인다. 심지어 초반부 클라크 켄트로서 로이스 레인을 달래는 대목조차도 '연인이 속상해하며 관계에 회의적일 때는 로맨틱한 몸(개그)로 밀어붙여라' 라는 매뉴얼을 읽고 그대로 실천하는 것만 같을 정도이니 말 다했다. 할리우드가 지성이 있고 영어를 할 줄 아는 '우리 편' 외계인을 이토록 매몰차게 그린 사례가 있었을까. 짐작건대 스나이더는 슈퍼맨을 싫어하거나 적어도 그에게 공감하지 못하는 듯하다. 하지만 이처럼 몰이해를 동력으로 삼아 그려낸 슈퍼맨의 모습에서 전해지는 외계인다운 비인간미는, 어쨌거나 외계인이면서도 나쁜 외계인들에게 맞서는 착한 외계인으로 거듭나느라 갈팡질팡했던 〈강철의 사나이〉보다 더욱 뚜렷한 일관성을 지니고 있다. 제아무리 박애주의적인 행동을 하더라도 결국은 그 행동 저변에 자리한 인간다움은 재현할 수 없는 타자. 그렇기에 가장 고마운 순간에조차 두려움을 느끼게 되는 잠재적 위협. 바로 배트맨의 시선이다. 즉 〈배트맨 대 슈퍼맨〉은 배트맨의 시선을 중심으로 한 배트맨 영화이며, 그 시선 안에서 슈퍼맨에 대한 묘사는 일관적이다. 그러므로 그가 배트맨이 먹인 크립토나이트 때문에 평범한 인간에 가까워져 흠씬 두들겨 맞고 신음하게 된 다음에야 비로소 로이스에게 사랑한다는 고백을 하고 인류 절멸의 위협을 막기 위해 신의 자리에서 내려오게 되는 것도 당연한 전개라면 당연한 전개다.
물론 이와 같은 해석을 정치적으로 비판할 수는 있다. 스나이더가 자신이 그려낸 배트맨과 거리를 두고자 노력한 흔적은 보이지 않는다. 슈퍼맨이 배트맨에게 맞아 넝마가 되는 대목에는 비탄이나 고통의 쇼트보다는 한낱 인간이 신적인 존재를 끌어내려 바닥을 기게 하고 있다는 역전의 쾌락, 폭력의 기쁨이 어려 있다. 또 둠스데이와 슈퍼맨과 원더우먼이 말 그대로 초인적으로 맞붙을 때는 그 광경을 바라볼 수밖에 없는 무기력한 인간 배트맨의 시점이 삽입된다. 배트맨이 초인/외계인을 인간과 다른 미지의 위협으로 바라보며 두려워하고 분노하는 순간, 슈퍼맨에 관한 저 유명한 슬로건 "Up in the sky, look: It's a bird. It's a plane. It's Superman!"은 빨갱이 공포로 얼룩진 50년대 SF 공포 액션 영화 〈외계에서 온 것The Thing from Another World, 1951〉에 나오는 저 유명한 경고 "Watch the skies. Everywhere. Keep looking. Keep watching the skies."와 겹쳐지는 듯하다. (그리고 이 연상이 우연이 아니라는 듯, 렉스 루터는 "The Red Capes are coming! The Red Capes are coming!"이라고 말한다.) 조금 과도하게 말하자면, 여기서 스나이더는 〈바람과 사자The Wind and the Lion, 1975〉를 만든 극우 마초 감독 존 밀리어스 곁에 서 있다.
그러나 다시 앞으로 돌아가서, 그것이야말로 배트맨이라는 캐릭터의 한 본질이 아닌지. 배트맨을 계속 진지하게 히어로로 떠받드는 한, 이 해석은 언젠가는 나올 수밖에 없었다. 그걸 실현하는 데에는 외톨이들을 사랑하는 몽상가 팀 버튼이나 배트맨이라는 존재가 빚어내는 사회적/관념적인 대립에 몰두한 건축가 놀란이 아니라 야단법석 사방을 때려 부수며 으하하하 다크하다 다크해 라고 환희하는 스나이더가 필요했던 거고. 물론 오래전 대런 아로노프스키가 계획대로 〈배트맨: 원년〉을 만들었더라면 이보다 훨씬 다층적인 우익 자경단 배트맨의 초상을 그려내었으리라 짐작하는 바이지만, 어쨌거나 그 근사한 계획이 무산된 지도 어언 십여 년이 지난 지금에 와서는 아쉬우나마 스나이더의 공로를 인정해야겠다.
배트맨이 슈퍼맨을 흠씬 두들겨 패는 과정의 쾌락에 관해 이야기한 김에 덧붙이자면, 스나이더가 청소년기의 과시적 암흑에 사로잡힌 창작자임은(일라이 로스나 매튜 본처럼?) 특히 가학적인 묘사, 좀 더 정확히는 고귀하고 존중해야 할 존재를 처참하게 '능욕'하는 이미지를 만들어내는 데에서 나타난다. 범죄자의 몸에 박쥐 낙인을 찍거나, 슈퍼맨의 어머니를 찍은 폴라로이드 사진이나, 처참하게 망가지는 슈퍼맨의 묘사 모두 극의 전개나 관객의 호응을 위해 필요한 수준 이상으로 과도하다. (비슷하게 슈퍼맨이 진창을 뒹구는 묘사가 있었던 〈슈퍼맨 돌아오다Superman Returns, 2006〉와 비교해 보라.) 바로 이 후안무치하면서도 심상한 악취미의 전시야말로 놀란이 제아무리 '사실적'인 배트맨을 그리고자 한들 절대 손대지 않았을 영역이며 식자들의 논란과 비판과 비난을 피해가기 어려울 요소인 동시에 〈배트맨 대 슈퍼맨〉이 독자적인 해석으로 자립할 수 있도록 해준 기반이다. 여기서 "악취미"보다는 "심상함"을 강조하고 싶다. 스나이더 유의 창작자들에게는 영어에서 "tongue-in-cheek"이라고 하는, 관객에게 윙크를 던지며 장난스럽게 '나는 이런 것도 한다'라고 과시하는 동시에 눙치는 거리 두기가 보이지 않는다. 그들은 사회적으로 논란이 될 만한 불쾌한 욕망(이런 욕망 자체는 누구에게나 있다고 생각하는데) 앞에 주저하거나 이를 걸러내는 자기 검열 필터가 없는 것처럼 보인다. 나 또한 불쾌한 욕망을 지닌 감상자로서 그처럼 절제되지 않은 묘사의 쾌락은 이해하고 인정하며, 그것이 "tongue-in-cheek"으로 일관하며 모두가 짜고 치는 안전한 소꿉놀이를 반복하는 것보다는 더 "영화답다"고 여기는 마음도 없지 않지만, 그러한 태도가 저예산 착취 영화가 아니라 모두가 기다리는 초고예산 블록버스터를 잠식하면서 세계적인 흥행으로 이어지고 있는 상황 앞에서는 역시 꺼림칙함을 완전히 걷어내기는 어렵다.
이미 영화적으로 엉망임을 전제한 뒤 굳이 서사 상의 성취에 관해 언급하는 이런 글을 쓰는 것의 불편함은 말할 것도 없고…