말만 해놓고 얼마나 보겠나 했는데, 시네마테크 서울아트시네마의 "나루세 미키오 특별전" 상영작 스물여섯 편 중 어느덧 열네 편을 보았다. 한 편 한 편 볼 때마다 기쁨이 더욱 커 간다. 더없는 지복이다. 이전에도 몇 편을 띄엄띄엄 보기는 했지만, 이렇게 짧은 시간 동안 여러 편을 함께 놓고 보니 그제야 나루세의 영화 또한 발 루튼이나 버드 뵈티커나 오즈 야스지로나 마스무라 야스조처럼 마구 많이 보아야 함을 알겠다. 한 편 한 편도 소중하지만 여러 번 보았던 배우들이 비슷한 역할, 다른 역할로 나와 비슷한 갈등, 다른 갈등 속에서 비슷한 결론, 다른 결론에 이끌리면서 영화들 사이에서 나루세 미키오라는 하나의 거대한 영화가 팽창하는 광경을 목격하는 경험이란 한없이 풍요롭다.

이런 황홀경 속에 말해 본들 바람둥이의 불성실한 애정 고백으로밖에 들리지 않을 테지만, 어제 〈산의 소리山の音, 1954〉를 보면서 문득 내가 가장 좋아하는 일본 영화 감독은 나루세라고 선언할 수도 있겠다는 생각이 들었다. 실은 이건 은근히 고민스러운 문제였다. 내가 일본 영화를 좋아하는 것은 틀림없는 사실이다. 좋아하는 감독도 많다. 시미즈 히로시, 오즈 야스지로, 미조구치 켄지, 키노시타 케이스케, 쿠로사와 아키라, 코바야시 마사키, 시노다 마사히로, 오카모토 키하치, 신도 카네토, 이마무라 쇼헤이, 스즈키 세이준, 이치카와 콘, 오시마 나기사… 그러나 그중 가장 좋아하는 일본 영화 감독이 누구인가를 생각할 때면 답이 곤궁했다. 이 사람도 저 사람도 좋아서라기보다는, 이 사람도 저 사람도 무언가 한 군데씩은 나와 맞지 않는 면이나 아쉬운 점이 있는 탓이다. 하워드 혹스처럼 찰칵 맞아 떨어지는, 영화가 훌륭할 뿐만 아니라 사상적으로도 나라는 인간에게 딱 맞물려 들어오는 그런 맛이 없달까. 일본 영화에서 바로 그런 자리를 나루세에게 내어주어도 좋겠다고 생각했다.

물론 나루세는 평생 89편의 영화를 만들었고, 나는 그중 일부를 한두 번씩 보았을 뿐이다. 내가 본 모든 나루세 영화를 하나로 묶을 만한─그런 것이 가능하기나 하다면─관점도 없다. 가령 〈떠돌이 배우旅役者, 1940〉는 무척 재미있는 영화였지만, 〈아내妻, 1953〉와 어떤 공통점이 있느냐고 묻는다면 딱히 떠오르는 건 없다. 그럼에도 여러 영화 속에서 공통적으로 전해지는 작자의 태도가 있고, 나는 그 태도에 이루 말할 수 없는 감동을 느낀다. 혹스의 영화에서 들었던 찰칵하는 소리가 들린다.

내가 경애하는 나루세는 어떤 사람인가? 그는 동아시아 사회 특유의 인간관계가 개인에게 부과하는 일상적인 괴로움을 이해하는 사람이다. 그는 가족이기 때문에, 부부이기 때문에, 연인이기 때문에, 누구누구의 딸, 아내, 엄마이기에 통념상 당연하다는 듯이 부과되는 '도리'의 몰지각한 폭력성을 직시한다. 그 폭력성은 상대의 비난이나 외도, 무관심을 통해서뿐만 아니라 관심과 애정을 통해서도 나타난다. 상대의 의도가 선하며 그 의도를 표현하는 방식이 잘못되지 않았다는 것을 알 때조차, 그 상대가 '나의 누구누구'이고 나와 같은 공간을 차지한 채 혹은 나의 공간을 침범하면서 자리를 차지하기에 느낄 수밖에 없는 한없는 고통이 있다. 그것은 너무 당연하다는 듯이 거기에 존재하기에 새삼 지적하고 논의하고 빼내기도 어려운 작은 가시 같은 고통이다. 이 관계 안에 편입된다는 것 자체가, 이 관계가 개인에게 무언가를 부과한다는 것 자체가 잘못되었다.

나루세는 그런 고통을 쥐고 앉아 힘들다 되뇌며 억눌리고 소멸하는 개인의 수난사를 전시하는 데에 만족하지 않는다. 그는 이를 끝까지 밀고 나가 관계가 기어이 끊어질 때까지 냉정하게 바라본다. 그는 비판하거나 풍자하거나 조롱하거나 선동하지 않는다. 다만 너무나도 정밀하고 차가운 눈으로 그 관계를 응시하면서 그러한 고리라면 끊어버리는 편이 좋지 않으냐고 말한다.

더욱이 경탄스러운 점은, 그게 상대에 대한 부정이나 비난으로 이어지지 않는다는 거다. 다른 가족 구성원은 다 거지 같으니까 버려버려야 해. 아버지는 죽어야 해. 이런 성난 젊은이의 태도가 아니다. 오히려 나루세는 이 공동체가 당연하다고 생각하는 질척질척한 관계를 끊고 모두가 각자 개인으로서 홀로 존재할 때, 완전히 남남이 될 때, 그제야 비로소 남남이기에 공존할 수 있는 부분이 생긴다고까지 말한다. 이를테면 〈번개稻妻, 1952〉의 결말. 김성욱 프로그래머는 상영 후 영화를 소개하면서 결말에서 딸과 어머니가 화해한다고 말했다. "화해"라는 표현을 쓸 수는 있지만, 내가 보기에 그 화해는 한국 가족 드라마에서 흔히 쓰이는 그런 화해는 아니다. 가족 간에 갈등이 치열하게 전개되다가 이쪽저쪽 다 눈물 한 바가지씩 흘린 다음(여기까지는 나루세도 똑같이 한다) '그래도 어쨌든 우리는 가족이니까'라고 상대를 보듬고 가족 공동체를 긍정하면서 함께 나아가는, 그런 화해는 아니다. 딸과 어머니는 돌이킬 수 없는 지경까지 치달아 균열을 목도한다. 그 순간 바깥에서 번개가 친다. 아주 이상한, 정체불명의 상쾌함이 몰려오고, 딸은 웃는다. 그것은 어머니와 나는 완전히 다른 인간이구나, 사고의 전제가 다르고 같은 언어로 소통할 수 없는 남남이구나, 하는 자각의 순간이다. 그런 자각 다음에, 즉 '딸이라면 모름지기', '부모라면 모름지기'라는 최소한의 전제조차 사라진 다음에, 비로소 딸은 남을 보듯 어머니를 편히 대할 수 있게 된다. 함께 대화할 수 있고, 걸을 수 있게 된다. 모든 걸 이해하고 함께 짊어져야 할 책무가 없으니까. 우린 각자 다른 개인으로 함께 존재하니까.

가족 공동체를 중심으로 형성된 동아시아 사회에 넌덜머리를 내곤 하는 개인으로서, 나는 나루세 영화를 보며 숨도 못 쉬게 답답한 공기에 헉헉대는 동시에 비할 데 없는 기쁨과 상쾌함을 느낀다. 질식할 듯한 상황을 단순화 하지 않은 채 세밀히 꿰뚫어 살피고 짚어내는 나루세의 시선이 상쾌하고, 그것을 끊어버리는 편이 나을 거라고 말하는 나루세의 단호함이 상쾌하다. 서로 누구의 무엇으로 존재하지 않아도 돼. 우리가 '더없이 가까운 한가족'으로서 보내는 애정과 연민조차 속박이야. 우리는 본질적으로 남남이고, 서로 그것을 인정할 때 오히려 공존할 수 있는 거야. (나루세의 후기작이자 어쩌면 나루세 영화의 총집편이라고도 할 수 있을 대가족 영화 〈딸, 아내, 엄마娘, 妻, 母, 1960〉에서는 이런 태도가 아예 대사로 나온다. 아직 2016년이 채 일주일도 지나지 않았고 앞으로도 봐야 할 나루세 영화가 많으나, 올해의 영화이자 올해의 대사라고 말하고 싶은 유혹을 느꼈다.)

내가 이 나라의 방송을 장악할 수 있다면, 나는 명절 때마다 나루세의 영화를 방영하겠다. 우리의 행복이 거기에 달려 있는지도 모른다.
Posted by 거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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