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영화의 맨살』 출간을 기념하며, 또 최근 읽은 『다하우에서 온 편지』 덕분에 떠오른 기억을 되새기며, 예전에 번역했던 하스미 시게히코의 「Fiction and the 'Unrepresentable': All Movies are but Variants on the Silent Film」를 다듬어 옮긴다.
흔히 무성영화 이래로 영화는 달라진 게 없다는 표현은 영화에서 음향 사용의 후진성을 질타하거나 무성영화의 우월성을 찬양할 때, 혹은 발성영화에서 지나치게 대사에 의존하는 경향을 경계하며 시각적 연출의 중요성을 강조할 때 쓰이는 수사법이다. 그러나 여기서 하스미는 녹화 기술과 녹음 기술의 발전사를 더듬으며 영화에서 영상과 소리가 본질적으로 분리되어 존재했음을 되새긴다. 그는 나아가 그러한 20세기의 경향이 21세기에 이르러서도 이어지고 있고, 인류사의 비극을 두고 벌어진 '재현 불가능한 것'에 관한 논쟁도 그러한 과거의 재현 양식에 얽매여 있음을 지적한다.
원래 《Theory, Culture and Society》 26권 3호 (2009년 3월)에 실렸던 글이며, 아래 번역은 이후 웹진 《Lola》에 재수록된 영문 원고를 바탕으로 했다. 원문은 《Lola》에서 읽을 수 있다.
허구와 '재현 불가능한 것'
- 모든 영화는 무성영화의 변주에 불과하다 -
Ⅰ
50년 넘게 영화 평론가 생활을 해오면서, 영화 매체의 기본 존재론에 관한 가설 하나가 내 마음 속에 서서히 자리 잡기 시작했다. 이전에도 다른 글에서 이 가설에 관해 어느 정도 암시한 적이 있기는 하지만, 아직 완전한 논의를 펴본 적은 없다. 이제는 해볼 때가 되지 않았나 싶다.
간단히 말해서, 나의 가설이란 영화라는 매체가 아직 소리를 본질적인 구성 요소로 받아들이지 못했다는 것이다. 이 주장은 오락을 위해 제작한 영화든, 예술적 목적을 위해 제작한 영화든, 백 년 넘게 이어져 온 이 매체의 역사 안에서 어떤 형식으로 소비되었든 간에 상관없이 모든 영화에 적용된다. 이 가설을 다른 식으로 표현하자면 소위 발성영화라는 것이 사실은 무성영화의 변주에 지나지 않는다는 말로 바꿀 수도 있을 것이다. 무성영화에서 유성영화로의 전이를 기술적 진보라는 관점에서만 받아들여서는 안 된다. 적어도 20세기가 끝날 때까지는, 카메라를 소리를 녹음하는 장치로 만들고자 하는 시도는 없었다. 카메라는 오로지 움직이는 영상을 재생산하는 장치로만 존재해 왔다. 그러는 동안 별개의 녹음 장치가 소리를 채집했다. 아래에 더 자세히 설명하겠지만, 발성영화의 발전은 따로 기록된 소리와 영상을 인위적으로 동기화하는 데에 바탕을 두고 있다. 이런 점에서 영화란 여전히 매우 불안정한 표현 매체로 남아있다.
영화에서 소리와 영상의 동기화가 "인공적"이라고 말하는 데에는 적어도 두 가지 이유가 있다. 첫째, 이 동기화 과정은 카메라 앞에서 딱따기를 친다는 매우 '비현대적인' 장치를 통해 이루어지고 있으며, 따라서 어떻게 보더라도 '자연스러운' 것으로 간주할 수는 없다. 둘째, 그와 같은 인공적인 동기화 작업이 없더라도, 일련의 무성 영상만으로 설득력 있는 영화를 만드는 것은 완벽하게 가능한 일이다. 감상자들은 사건이 벌어진 후에 소리를 추가한 영화 장면을 범상히 받아들인다. 예를 들어 히치콕 영화의 실내 장면에서 자동차 경적 소리가 들릴 때, 그 소리가 바깥 거리를 지나가는 실제 자동차에서 난 소리라고 진지하게 믿는 사람은 거의 없다. 영화의 소리 세계는 인공적 효과를 강조하면서 디지털 기술의 도래 훨씬 이전에 이미 일종의 '가상현실'을 만들어내었다.
카메라와 녹음기는 영상과 소리의 동기화 방법에 관한 고려 없이 완전히 별개의 기술로 발전했다. 실제로 동기화 기술은 1950년대에 나그라 테이프 레코더의 발전 후에야 비로소 순조롭게 이루어질 수 있었다. 폴란드어로 "녹음할 것이다"라는 뜻을 지닌 나그라는 어느 폴란드 이민자가 설립한 스위스 회사에서 제작했다. 그런 기술을 처음 만든 곳이 할리우드가 아니라는 사실은 매우 시사적이다.
영화 제작 과정에서 현장 녹음이 일반화 된 것은 20세기 중반을 한참 지나서였다. 대표적인 예가 장-뤽 고다르의 〈네 멋대로 해라À bout de souffle, 1960〉다. 이 영화의 촬영 현장에는 음향 엔지니어가 없었다. 현재 이 영화의 상영에 따라붙는 소리는 스튜디오에서 더빙한 것이다. 고다르는 촬영이 진행 중일 때에도 배우들에게 무성영화 시절과 다를 바 없는 태도로 지시를 내렸다고 한다. 요시다 기주의 영화 〈쓸모없는 녀석ろくでなし, 1960〉의 사운드트랙도 마찬가지로 스튜디오에서 더빙한 것이며, 요시다는 이 방식을 1970년대까지 고수했다. 다른 놀라운 사례로는 일본 남부의 한 도시에서 벌어진 수은 중독 현상이 인체에 끼친 파괴적인 영향을 다룬 츠치모토 노리아키의 생생한 다큐멘터리 영화 〈미나미타: 환자들과 그들의 세계水俣ー患者さんとその世界, 1971〉가 있다. 이 영화는 16mm 카메라로 촬영했기 때문에 소리를 함께 녹음할 수 없었다. 그럼에도 이 영화는 치소 공장 인근에 사는 사람들의 육체적 움직임과 얼굴 표정을 통해 수은 중독의 끔찍한 영향을 묘사함으로써 오늘날 악명 높은 산업공해 사례로 남게 된 이 사건에 대중의 관심을 끌어모으는 데에 성공했다. 소리는 촬영이 끝난 다음 스튜디오에서 덧입혀졌지만, 관객은 전혀 부조화를 느끼지 않았다. 1960년대와 70년대에 프랑스와 일본 양쪽에서 촬영 방식을 변화시킨 누벨바그가 사실은 무성영화 시대 이래 근본적으로 달라진 것 없는 기술을 바탕으로 일어났다는 점은 특기할 만하다.
몇몇 영화 문화권, 특히 이탈리아에서는, 소리와 영상을 동시에 기록하는 과정이 보편화되기까지 오랜 시간이 걸렸다. 그런 경우 영화 촬영이란 무엇보다도 시각적 제재를 포착하는 작업이었으며, 소리는 순전히 후반작업의 영역에 속했다. 로베르토 로셀리니를 포함한 거의 모든 이탈리아 네오리얼리즘의 걸작들은 사후 동기화 과정을 통해 소리를 덧입혔다. 인도 뮤지컬 영화에서는 반대의 상황을 볼 수 있는데, 배우들은 전문 대리 가수의 노래를 미리 녹음한 사운드트랙에 맞추어 마임을 선보이며, 따라서 배우의 실제 목소리를 녹음할 필요는 없어진다. 구르 두트의 〈갈증Pyaasa, 1957〉 같은 위대한 걸작들도 이런 방식으로 촬영했으며, 실은 거의 모든 할리우드 뮤지컬도 마찬가지다. 이런 사실은 영화가 여전히 무성영화 극초반기의 현현 방식에서 어떠한 결정적인 단절도 이루어내지 않았음을 보여준다.
논의를 더 밀고 나가기 전에, 모든 영화는 무성영화의 변주에 불과하다는 나의 가설이 소리 도래 이전의 목가적인 시절로 돌아가고 싶다는 향수 어린 소망과는 아무런 상관도 없다는 점을 분명히 해두고 싶다. 하지만 기록을 위해 말해두자면 내가 개인적으로 무성영화를 좋아한다는 점은 인정하겠다. 나는 대다수 작품을 발성영화 도래 이전에 만들었던 데이빗 워크 그리피스, 루이 푀이야드, 에리히 폰 스트하임과 F. W. 무르나우의 영화를 더없이 좋아한다. 또한 나는 얼굴 표정과 신체 움직임의 대가였던 버스터 키튼, 해리 캐리, 자넷 게이너와 같은 배우들이 등장하는 영화를─되도록이면 스크린에 쏘아서, 많은 경우 피아노 반주의 방해도 없이─보는 것을 좋아한다. 그럼에도 나의 가설은 이런 개인적 선호와는 무관하며 전적으로 역사적 조건의 분석에 기반을 두고 있다. 이 가설은 영화사 속의 사실들뿐만 아니라 19세기 이래 사회에 보편적으로 퍼졌던 지식에도 근거를 두고 있다. 이 가설을 확인하기 위해 영화사를 세부까지 알아야 할 필요는 없지만, 영화가 어떤 조건 하에서 만들어지고 발전했는가를 어느 정도 알 필요는 있다. 그래서 이 점을 간략하게 서술하기로 하겠다.
다들 알다시피 영화는 19세기에 이미 존재했던 다양한 기술의 결합을 통해 1895년에 태어났다. 세부 사항에 관한 견해가 갈리기는 하지만, 이 글의 목적을 위해서는 뤼미에르 형제의 시네마토그래프 발명에서 출발하기로 하겠다. 1895년 파리 그랑 카페에서 처음 상영된 〈리옹에 있는 뤼미에르 공장의 출구La Sortie de l'Usine Lumière à Lyon, 1895〉 외 아홉 편의 영화들을 포함하여 초창기에 만들어진 영화들은 물론 소리가 없었다. 영화는 오랫동안 본질적으로 무성 매체였으며, 뤼미에르 형제 외의 다른 사람들이 발전시키고 상업화했을 때도 그러했다. 영화 촬영의 바탕이 되는 기술은 19세기 중반 이래 발전하여 대중성을 획득한 사진술이었다. 시네마토그래프가 이룬 주요한 혁신은 이전에는 순간적으로만 포착할 수 있었던 제재의 움직임을 기계적으로 재현할 수 있게 되면서 사진술에 시간이라는 차원을 더했다는 것이다. 그 결과로 나온 영화라는 매체는 실제 장면을 자르고 붙이고 재배치하여 허구의 내러티브를 시각적으로 창조할 수단을 제공했다. 고대 그리스 이래 서사시와 희곡을 통해 발전해온 서구 전통의 미학 규범을 참조하지 않았다는 이유에서, 어떤 사람들은 영화를 '재현의 사생아'로 간주했다.
1920년대 중반은 영화의 전성기라고 볼 수 있다. 당대를 주도한 많은 감독들은 세밀한 관찰을 통해 일상생활에 자리한 보이지 않는 긴장을 드러내는 영화를 만들었다. 세르게이 에이젠슈타인의 아방가르드 영화뿐만 아니라 아브람 룸과 보리스 바넷을 포함한 스탈린 이전 시대 소비에트 영화의 대표주자들이 만든 영화까지도 포함해서 하는 말이다. 이 시대의 다른 특징으로는 서스펜스에 관한 풍부한 탐구를 들 수 있는데, 다른 어떤 작품보다도 대표적인 예로 프리츠 랑의 1928년작 〈스파이Spione〉가 있다(그의 유명한 1927년작 〈메트로폴리스Metropolis〉보다도 더 그러하다). 존 포드의 서부극, 라울 월쉬의 역사 드라마, 에른스트 루비치의 에로틱 코미디, 버스터 키튼의 코미디, 이토 다이스케의 검술 영화, 프랭크 보재기의 멜로드라마 외에도 여기서 다 언급할 수 없는 그에 필적하는 수많은 이들의 사례에서 볼 수 있듯, 이 시기에 활동한 영화 창작자들은 자신이 선택한 소재를 다루면서 매우 수준 높은 창조력을 성취했다. 영화가 문학에서는 불가능한 표현 형식을 제공하는 새로운 예술 형식으로 떠오른 것이 바로 이 시기였다.
Ⅱ
오늘날 우리는 영화란 당연히 소리를 포함한다고 여기게 되었지만, 나는 여전히 모든 영화가 무성영화의 변주에 불과하다는 주장을 고수한다. 사실 나는 영화에 관한 담론에서 '시청각'이라는 개념을 추방하고 싶다. 영화에 관한 한, '시청각'이라는 개념은 실제에 기초하지 않은 순전한 허구다. 이러한 점에서 영화는 텔레비전과 다르다. 텔레비전은 무성의 시대를 거친 적이 없으며 시청각적 허구에 기원을 두고 있는 것이다. 이런 연유로 매체로서 텔레비전의 상황은 극도로 위태롭다.
이미 거론한 바처럼, 카메라와 음향 녹음기는 각자의 영역에서 신호를 기록하는 장치로서 따로 발전해왔다. 둘은 자연스러운 동기화 상태를 결코 이루지 못했을 뿐만 아니라 상호 배타적인 관계로 존속해왔다고까지 할 수 있다. 영화의 역사는 이 상호 배타성의 역사다. 영상과 소리의 끝나지 않는 갈등이 기술적인 차원에서 구현된 것이 바로 20세기다. 인류는 아직 이 갈등을 궁극적으로 해결할 방법을 찾지 못하고 있다. 이미지와 소리 간의 이 기술적 갈등은 다양한 층위에서 확인할 수 있다. 『축음기, 영화, 타자기』에서 프리드리히 키틀러는 에디슨이 최초의 대량 생산 가능한 음향 녹음/재생 장치를 완성한 즉시 사진사를 불러들였던 일화를 들려준다. 이 유명한 일화는 축음기가 발명된 순간이 시각적으로만 기록될 수 있었음을 보여준다. 이러한 시각적 재생산 기술과 청각적 재생산 기술 사이의 불균형은 20세기 내내 지속되었다.
소리와 영상 사이의 갈등에 관한 더 깊은 통찰을 위해 말라르메의 경우를 살펴보자. 21세기를 사는 우리는 사진사 펠릭스 나다르가 찍은 초상 사진들 덕분에 이 프랑스 시인의 뚜렷한 시각적 형상을 볼 수 있다. 반면 그의 목소리가 어떤 질감을 지녔는지 알려줄 만한 청각적 기록은 존재하지 않는다. 말라르메의 말년에는 영화와 음향 녹음기가 모두 존재했건만, 그의 목소리를 녹음할 기회를 영영 잃어버린 것이다. 우리는 결코 그가 「주사위 던지기」를 낭송하는 소리를 실제로 들을 수 없으리라. 우리에게 있는 것이라고는 그의 목소리가 "낮고 단조로워 애정이라고는 찾아볼 수 없으며 거의 혼잣말을 하는 듯했다"는, 폴 발레리가 남긴 2차 사료뿐이다.
이는 영상 재생산 기술이 음향 녹음 기술에 비해 훨씬 일찍 '민주화'되었다는 역사적 사실을 직접적으로 보여준다. 막심 뒤 캉이나 에밀 졸라 같은 작가들은 사진이 발명된 후 고작 10년만에 사진술을 접할 수 있었다. 이는 활동사진의 세계에서도 마찬가지로, 영화가 발명되고 고작 20년 만에 사샤 기트리처럼 젊고 경험 없는 이도 아나톨 프랑스, 사라 베른하르트, 오귀스트 로댕과 같은 유명 인사들이 출연하는 아마추어 영화(〈우리나라 사람들Ceux de chez nous, 1915〉)를 촬영할 수 있었던 것이다.
제1차 세계대전 발발 무렵, 할리우드는 당시 미국 영화계의 중심부였던 동부 연안 영화계의 식민지에 불과한 존재였다. 아마추어 영화제작의 긴 역사는 적어도 이 시기까지 거슬러 올라간다. 반면 음향 녹음 기술은 훨씬 오랫동안 전문 기술자들 사이에서만 배타적으로 존속했다. 음향 엔지니어들이 아마추어들이 침범할 수 없도록 음향 재현 기술에 관한 독점권을 주의 깊게 지켰다고 해도 과언이 아니다. 이 독점은 1960년대 테이프 레코더의 보급 전까지 무탈하게 지속되었다. 이렇듯 음향 녹음의 민주화가 실현되기까지는 지나치게 오랜 시간이 걸렸다. 그 이유는 기술적이라기보다는 이념적이었다. 앞서 언급한 말라르메의 사례는 목소리가 재현불가능한 일시성을 유지했음을 보여준다. 목소리를 재현한다는 것은 지극히 예민하고 신중하게 접근하지 않고서는 위반할 수 없는 금기처럼 보였다고 말하더라도 지나치지 않다. 이 '목소리에 대한 금지'는 무성영화 시대의 유산이었다. 19세기 말에서 1920년대 중반에 이르는 30년은 인류 역사에 길이 전해지는 영향을 남겼으며, 이를 그저 이후의 단계로 가는 전환기로 격하해서는 안 된다.
목소리를 재현하는 것에 관한 금기는 바로 인간 지식의 구조에서 여전히 목소리가 지니는 우위를 반영한 것이었다. 그 자체로 이미 재현인 영상과는 달리, 목소리는 육체 자체와 동일시되었다. 따라서 목소리를 재현한다는 것은 육체성을 상실함을 암시했다. 그런 탈육체화의 위험을 선점하기 위해서인 양, 목소리는 무형의 왕국에 계속 숨어있었다. 다른 무엇보다도 이것이야말로 아마추어들이 그토록 오랫동안 음향 재현 기술에 접근할 수 없었던 이유다.
나는 말라르메가 자신의 시를 낭송하는 목소리가 왜 한 번도 녹음되지 못했는가를 확신을 갖고 말할 수는 없다. 그러나 음향 녹음의 민주화를 가로막는 어떤 힘의 존재가 있었다는 점만은 의심의 여지가 없다. 자크 데리다는 "존재의 형이상학"에 관한 초창기 비평에서 목소리는 "그 자체를 가리키는 존재"로만 존속한다고 주장했다. 이런 관점에서 보면 음향 녹음의 민주화가 그저 축음기의 대중화를 통해 이루어졌다고 가정해서는 안 된다. 포드식 생산 공정 하에서 일한 공장 노동자들이 가정에서 레코드를 들을 수 있는 능력을 얻게 된 것은 사실이지만, 이는 녹음 기술이 배타적인 전문가 집단에게 맡겨진 이후의 일이었다. 값싸게 재생산된 레코드를 통해 음악이 대중화되면서, 아마추어가 음향 녹음 기술에 접근할 기회는 더욱 줄어들었다.
그러므로 "존재의 형이상학" 하에 음성 언어에 부여된 중심성이 초기 녹음 업계와 한통속이 되어 목소리를 엄격하게 금지할 수 있었던 것이다. 사진이나 영화를 촬영할 기회는 아마추어와 전문가 모두에게 거의 동등했던 반면, 음향 재현의 영역에서는 그런 동등함이 적용되지 않았다. 그렇게 무성영화의 시대가 남긴 흔적은 20세기 내내 지속되었다.
Ⅲ
전문 음향 기술자들의 조직화된 음향 재현 관리 체계가 아니었더라면 발성영화는 무성영화를 무색하게 만들지 못했을 것이다. 그러나 영화의 세계에서 그런 전문가들이 차지한 지위는 그들이 녹음 업계에서 누리던 지위와는 달랐다. 영화 제작의 과정에서는 카메라맨의 필요성이 음향 엔지니어의 필요성보다 앞섰다. 이는 발성영화가 그저 무성영화 시절에 시작된 목소리의 금지를 지속했을 뿐이라는 결론으로 이어진다.
음향 녹음 전문가들보다 영상 재현 전문가들이 주도권을 장악했음은 여러 가지 방식으로 드러난다. 먼저 카메라 소음의 문제를 생각해 보자. 초기 영화 음향 엔지니어들은 카메라의 모터가 내는 큰 소음과 끝없이 싸움을 벌여야 했다. 이 문제에 맞서기 위해 카메라에 부착한 음향 가리개는 "블림프"라고 불렸는데, 이는 1930년대에 같은 이름이 붙었던 비행선이 유명해진 후의 일이다. 블림프는 카메라 소음을 제거하기는 했으나 너무 크고 무거워서 카메라의 움직임을 제한했다. 결국 오늘날까지도 영화에서 카메라 소음은 상대적으로 줄일 수는 있을지언정 완전히 제거할 수 없는 존재로 받아들여지고 있다. 오즈 야스지로의 초창기 발성영화 촬영 현장을 담은 사진에는 우스꽝스럽게도 두꺼운 면방석에 감싸인 카메라가 보인다. 이 사진은 본질적으로 양립할 수 없는 두 기술을 동시에 이용하는 데에서 생겨난 어려움을 생생하게 보여준다.
다른 한편 말하는 모습을 담은 영상에 음향 녹음 기술이 끼어드는 경우에도 전자가 우선권을 차지했다. 카메라맨은 항상 가능한 한 가장 좋은 위치에서 촬영할 수 있었던 반면, 음향 엔지니어는 이상적이지 못한 위치에 마이크로폰을 배치해야 하기 일쑤였다. 마이크로폰이 매달린 붐은 영화에서 절대 보여서는 안 되었다. 이것이 음향 엔지니어가 마이크로폰을 놓을 수 있는 위치를 엄격히 제한했으며, 그로 인해 음향의 질도 경감되곤 했다. 음향 엔지니어는 그렇게 카메라맨에 종속된 존재로 다루어졌으며, 엄격히 제한된 환경 하에 작업해야 했다. 또한 마이크로폰의 그림자가 살짝 피사체나 배경에 걸리는 것도 허용되지 않았으므로, 심지어 조명 담당자도 음향 엔지니어보다 더 우선시 되었다 하겠다. 미조구치 겐지 감독의 음향 엔지니어였던 하시모토 후미오의 회고록(Hashimoto and Ueno, 1996)만 읽어보더라도 영화 음향 녹음의 어려움을 실감할 수 있다.
음향 엔지니어가 감내해야 했던 또 다른 모욕으로는, 그의 작업이 얼마나 훌륭하든 간에 수출 시장을 노리기 위해서는 완전히 무시되어야 했다는 것을 들 수 있다. 많은 나라에서 외국 영화는 현지 언어로 더빙되었으며, 따라서 오리지널 사운드트랙은 버려야 했다. 실제로 음향에 관한 이런 제한은 오늘날까지도 이어지고 있다. 카메라는 무성영화 시절 이래 거의 변함없이 주도권을 쥐고 있다. 이는 대량 생산된 할리우드 블록버스터에서 프레드릭 와이즈먼이나 에릭 로메르 같은 감독들의 고품질 소규모 제작 영화에 이르기까지 한결같다. 이러한 현실이 모든 영화는 무성영화의 변주에 불과하다는 나의 가설을 뒷받침해주고 있는 것이다.
영상과 음향 기록을 진정으로 통합하고자 했던 시도가 전혀 없었다고는 주장할 수 없다. 그러나 촬영과 녹음을 동시에 할 수 있는 카메라는 아마추어 시장을 대상으로 제작된 8mm 코닥 카메라가 유일하다. 이 카메라는 1973년, 전통적인 할리우드 영화 제작 체계가 거의 종말에 이르렀을 즈음에야 등장했다. 하필이면 존 포드가 죽은 바로 그 해에 탄생했다는 섬뜩한 우연의 일치 속에서, 이 발명품은 '영화의 죽음'에 관한 논의의 대두를 예고하는 징조와도 같은 것이었다고 할 수 있다. 그 외 16mm와 35mm 필름을 포함한 다른 필름 포맷에 쓰이는 광학 사운드트랙은 촬영 후에 입혀야 한다. 촬영과 동시에 녹음한 모든 음향은 모두 나그라 테이프 레코더로 채집했다가 이후의 단계에서 필름으로 옮기게 된다. 이런 맥락에서 필름이라는 매체 자체가 소리를 억압했다고 말할 수도 있겠다.
Ⅳ
이제 모든 영화는 무성영화의 변주에 불과하다는 가설을 진지하게 고려해 볼 때가 되었다. 왜냐하면 21세기 디지털 시대에 이르러서야 우리는 영상과 음향 재현의 진정한 통합을 목격하게 되었기 때문이다. 20세기 영화사만 놓고 보자면 내 가설은 꽤 타당해 보인다. 목소리에 대한 금지가 영상과 음향의 동조 재현 기술 발전을 오랫동안 금했다. 디지털 비디오카메라가 발전하고 널리 보급된 21세기의 상황은 이러한 금지를 종식시키는 듯도 하다. 어쩌면 이제야 영화라는 매체가 무성영화라는 패러다임의 기나긴 지배에서 풀려나기 시작하는지도 모른다.
디지털 자기 테이프를 내장한 비디오카메라는 최초로 한 매체 위에 음향과 영상을 동시에 기록할 수 있게 해준다. 디지털 기술이 음향과 영상의 완벽한 합성을 가져다주었다는 생각까지 떠올리지 않더라도, 디지털 비디오카메라가 과거에 감내해야 했던 많은 제한으로부터 영화 음향 녹음 과정을 해방시켜주었다는 점은 인정할 수 있다. 디지털 비디오카메라는 배우의 머리 위에 붐을 뻗어 지향성 마이크로폰을 매달지 않고서도 배우의 실제 목소리를 녹음할 수 있게 해준다. 음향 엔지니어는 카메라맨이나 조명 엔지니어의 요구에 끊임없이 근심걱정하지 않고서도 자기 일을 해낼 수 있다. 이 새로운 환경은 차츰 무성영화 시대에서 이어져 온 영화 만들기 방식과는 사뭇 다른 영화 만들기 방식을 향해 나아가고 있다.
21세기의 시작 이래 여러 뛰어난 영화감독들이 자신의 작품을 디지털 비디오로 제작하기 시작했다. 1990년대부터 〈영화의 역사(들)Histoire(s) du cinéma, 1988-1998〉 연작을 아날로그 비디오를 이용해 촬영했던 장-뤽 고다르는 〈사랑의 찬가Éloge de l'amour, 2001〉의 후반부를 디지털 비디오로 촬영했다. 디지털 비디오로 촬영한 다른 주목할 만한 사례로는 페드로 코스타의 〈반다의 방No Quarto da Vanda, 2000〉, 쿠로사와 키요시의 〈밝은 미래アカルイミライ, 2003〉, 압바스 키아로스타미의 〈102002〉, 빔 벤더스의 〈풍요의 땅Land of Plenty, 2004〉, 알렉산더 소쿠로프의 〈태양Сóлнце, 2005〉, 지아장커의 〈삼협호인三峽好人, 2006〉이 있다. 아오야마 신지의 다큐멘터리 〈AA2005〉 역시 전체를 디지털 비디오로 촬영했다. 이런 사례를 보면 디지털 기술이 동시대 영화의 최전선에 있는 감독들의 상상력을 사로잡고 있음이 분명해진다.
디지털 비디오를 수용하고 있는 많은 동시대 영화감독들이 무성영화 이래의 영화 역사에 발을 담그고 있는 소위 '영화 근본주의자'라는 점은 중요하다. 고다르, 코스타, 쿠로사와, 벤더스, 아오야마가 그렇다. 그들이 나의 가설에 동의하지 않을 수는 있겠지만, 음향과 영상의 동조화된 재현이 우리가 21세기에 들어선 다음에야 비로소 가능해졌다는 역사적 사실을 명확하게 의식하고 있으리라는 점만큼은 의심의 여지가 없다.
하지만 이 감독들의 최근작이 목소리에 대한 금지를 폐기하고 무성영화의 패러다임에서 영화를 해방시키는 데에 성공했는가의 여부는 여전히 의문으로 남아있다. 우리는 디지털 기술에 관한 낙관주의가 정말 1백년 동안의 영화사와 양립할 수 있는지 자문해야 한다. 21세기의 인류는 20세기 역사로부터 얼마나 거리를 두고 있는가? 우리의 삶 전반은 아직도 20세기의 수많은 사건과 환경에 얽매여 있지 않은가? 과거의 영화들이 무성영화의 변주에 불과했던 것처럼, 21세기는 20세기의 변주에 불과한 것은 아닌가?
이런 질문은 최근 홀로코스트의 가스실을 영화로 재현해도 되는가를 두고 벌어졌던 장-뤽 고다르와 클로드 란츠만의 격렬한 논쟁과도 어느 정도 상통한다. 이 논쟁에 관해서 좀 상세하게 설명하기로 하겠다. 홀로코스트와 가스실은 20세기의 상징으로 간주할 수 있다. 란츠만은 〈쇼아Shoah, 1985〉의 감독으로 유명한 인물로, 이 영화에는 가스실에 관한 직접적인 시각적 재현이 전혀 존재하지 않는다. 가스실을 스크린에 재현해서는 안 된다는 란츠만의 주장에 대해 고다르는 영화가 역사적 충실성을 획득하기 위해서는 가스실을 재현할 수 있으며 재현해야만 한다는 반대의 주장을 폈다.
당사자들이 이 격한 다툼에서 물러난 후에도 논쟁은 제라르 바이크만(1999)과 조르주 디디-위베르망(2008)에 의해 계속되었다. 이후의 사례를 검토하기에 앞서 우선 처음 논쟁을 촉발시킨 고다르의 주장을 옮겨보자.
고다르 특유의 도발적인 풍자는 '재현불가능'한 대상에 관해 너무 쉽게 말하는 사람들의 세속적인 독실함을 가리키고 있다. 이것을 진실 없는 형이상학이라고 부를 수도 있겠다. 그는 란츠만이 가스실을 재현하지 않음으로써 홀로코스트 자체를 어떻게 해선가 재현 불가능한 것으로 제시하여 홀로코스트에 관한 논쟁을 간접적으로나마 억압하는 잘못을 저질렀다고 말하고 있다. 란츠만과 더불어 아도르노의 이름을 거론한 것은 홀로코스트 이후에 시는 불가능하다는 아도르노의 유명한 선언을 염두에 둔 발언이다.
아도르노의 발언은 분명 시를 대표주자 중 하나로 내세우고 있는 서구 예술 전체를 가리키고 있다. 『계몽의 변증법』에서 아도르노와 호크하이머는 '베토벤과 카지노 드 파리의 혼합'이 1940년대 미국의 재현 기술을 통해 벌어진 계몽의 자기 파괴 현장이라며 비난했다. 그처럼 영화를 '재현의 사생아'에 불과한 것으로 깎아내렸던만큼, 아도르노에게는 아우슈비츠를 영화로 재현할 수 있다는 생각은 떠오르지도 않았을 것이다. 고다르는 반대로 오직 영화만이 아우슈비츠를 재현할 수 있다고 주장한다. 그는 이미 아도르노 상 수상 연설을 통해 이를 말한 바 있다(Godard, 1996). 그 자리에서 그는 영화의 역할은 사고를 촉진하는 것이라고 선언했다. 가스실의 재현에 실패함으로써 영화는 그에 적합한 역할을 수행하는 데에 실패한 것이다.
바이크만(1999)은 란츠만을 변호하면서 고다르의 입장은 영상을 숭배하는 자의 향수어린 간증에 불과하다고 비판한다. 그는 고다르가 란츠만을 책을 태우는 독재자와 비교한 것에 대해 맹렬히 이의를 제기한다. 다른 한편 디디-위베르망(2004)은 바이크만의 논의 저변에 깔린 '상상 불가능성'이라는 개념을 "이론적 교만"이라고 비판한다. 디디-위베르망은 1944년 집단 수용소 수감자가 몰래 찍은 네 장의 사진을 샅샅이 분석하여 자신의 논거로 삼는다. 그는 우리가 재현 불가능성의 문제를 두고 맴돌기만 한다면 아우슈비츠의 기억이 보존되겠느냐고 심각하게 회의한다.
Ⅴ
나는 상상 불가능한 것이나 재현 불가능한 것이라는 생각에 기대는 듯한 발화에 관해서는 늘 자연스레 의심을 품게 된다. 나는 다음과 같이 주장한 디디-위베르망(2008)의 감정에 동조한다. "'상상 불가능'하다거나 '재현 불가능'하다는 식의 절대적인 개념을 통해 아우슈비츠를 말하는 것은 더 이상 가능하지 않다. 좋은 의도로 꺼낸 말인 경우에도, 그런 겉보기에만 철학적인 어휘는 그저 부주의할 따름이다." 그러나 여기서 나까지 이 논쟁에 끼어 한몫 거들 생각은 없다. 대신 나는 이 논쟁이 부지불식간에 무성영화의 패러다임에 기초한 재현 양식을 영속화하는 방식에 관해 지적하고자 한다.
상상 불가능성이나 재현 불가능성의 문제가 논의될 때, 이 논쟁은 전적으로 시각적 재현의 문제에 집중한다. 어째서인지 청각적 재현은 논의에서 배제된다. 아무도 아우슈비츠의 음향 녹음이 부재한다는 사실에 의문을 던지지 않는다는 것은 이상한 일이다. 우리는 생존자들의 구술 증언을 들을 수는 있으나 살아남지 못한 사람들의 목소리를 직접 녹음한 기록은 없다. 희생자들의 시신을 태운 소각로의 끔찍한 울부짖음과 같은 강제 수용소의 소리 역시 들을 수 없다. 논쟁은 모든 소리가 사라진 현장 한가운데에서 침묵 속에 진행된 듯하다. 이것이 무성영화의 세계와 갖는 섬뜩한 일치는 충격적이다.
이 논쟁의 가장 놀라운 요소는, 모든 참여자들이 이 논쟁이 목소리에 대한 금지 위에 입각하고 있음을 의식하지 못한다는 것이다. 디디-위베르망은 아우슈비츠에 사진 현상소가 있었음을 지적한다. 그러나 그는 음향 녹음 시설이 존재했는지는 거론하지 않는다. UFA라든가 토비스 같은 이름만 떠올려보더라도 독일이 1930년대 유럽에서 발성영화 산업의 최전선에 있었음을 깨달을 수 있지 않은가. 따라서 아우슈비츠에서 통상적인 자료 수집 과정의 일환으로 음향 녹음 기술을 사용하는 것도 전적으로 있었을 법한 일이다. 그럼에도 디디-위베르망은 강제수용소에서 음향 녹음이 이루어졌을 수 있다는 가능성 자체를 떠올리지 않는다. 마찬가지로 고다르는 아우슈비츠의 사진이 남아있을 수 있다는 근거로 나치의 "모든 것을 기록하고자 하는 강박관념"을 거론한다. 그럼에도 그는 소각로의 지옥 같은 소음을 녹음한 기록이 있는지에 관해서는 조금도 관심을 보이지 않는다.
"Toutes les histories" (모든 [히]스토리들)라는 제목이 붙은 〈영화의 역사(들)〉 1부 말미의 한 장면에서 고다르는 직접 등장하여 조지 스티븐스의 〈젊은이의 양지A Place in the Sun, 1951〉를 아우슈비츠와 연결하면서 다음과 같은 흥미로운 발언을 남긴다.
이 말은 엘라자베스가 수영복을 입고 일어나 호숫가에서 연인과 함께 뛰노는 장면의 슬로우 모션과 함께 들려온다. 이 말은 지오토의 그림 〈예수가 막달라 마리아 앞에 나타나다〉에서 막달라 마리아가 예수에게 손을 내뻗는 이미지 위에도 깔린다. 이 장면은 고다르가 이미지의 숭배자라는 바이크만의 비판에 어느 정도 신뢰성을 부여한다. 하지만 중요한 것은 스티븐스가 다른 많은 할리우드 감독들과 마찬가지로 미군과 동행하여 유럽에 가서 제2차 세계대전 중 독일의 군사 침공으로 생겨난 폐허를 촬영했다는 것이다. 이 점을 거론하면서 고다르는 또한 강제수용소를 기록한 필름이 존재할 수 있음을 암시한다. 의미심장하게도 그는 그 컬러 필름에 음향이 있었는지는 언급하지 않는다.
바이크만은 아우슈비츠를 담은 사진적 이미지가 존재할 수 있다는 고다르의 주장에 회의를 표명한다. 그는 가스실의 존재에 관한 그의 지식이 그러한 이미지를 통해서가 아니라 "피해자와 가해자 양자의 공적이고 사적인 풍부한 구술 증언"(1999)을 통해 형성되었다는 점을 논거로 삼는다. 그러나 이 비판은 피해자의 목소리가 녹음되었을 가능성에 관해서는 의식하지 않고 있다. 재현 불가능성이라는 의심스러운 개념을 끌어들이는 대신, 그는 고다르가 음향을 통한 재현의 가능성을 인지하지 못했음을 지적했어야 했다. 고다르의 이미지를 향한 숭배가 지닌 진짜 약점은 바로 이것이다. 란츠만을 지지하는 과정에서 바이크만은 고작 아우슈비츠의 시각적 재현 가능성을 부정하기만 한다.
이 논쟁을 통해 드러난 현장이란 바로 무성영화의 장면에 다름 아니다. 마치 목소리에 대한 금지 때문에 아우슈비츠에서 음향 녹음기의 존재가 지워진 것만 같다. 논의 전체가 시각적 재현만이 중요한 것마냥 전개되고 있다. 아우슈비츠를 담은 네 장의 사진에 관한 디디-위베르망의 분석이나 고다르의 영화에서 나타나는 몽타주 기법은 무성영화의 기법이다. 그 기법이야말로 영화적 허구의 기반이다. 고다르와 란츠만, 디디-위베르망과 바이크만의 논쟁은 무성영화에 기반한 산만한 공간에서 이루어지고 있다. 이는 제2차 세계대전의 거의 모든 기록 영상이 본질적으로 무성이라는 사실을 반영한다.
과연 이는 무성영화가 20세기의 전형적인 재현 양식이었다는 관찰로 이어진다. 어쩌면 이것이야말로 이 논쟁에서 얻어낼 수 있는 가장 중요한 교훈인지도 모른다. 이하는 "Une seule histoire" (하나의 역사)라는 제목이 붙은 〈영화의 역사(들)〉의 2부에서 인용한 것이다.
여기서 언급된 앞의 두 영화는 뤼미에르 형제가 자신들이 발명한 시네마토그래프를 이용해 촬영한 영화들이다. 〈리오 브라보〉는 하워드 혹스가 감독한 1959년의 유명한 서부극이다. 이 영화는 파나비전 플래티넘 카메라로 촬영됐다. 지드의 조카는 마르크 알레그레로, 그는 1925년에 콩고에 갔다. 그가 가져간 데브리 7은 물론 무성 카메라였다. 따라서 고다르는 영화 제작에 사용되는 카메라가 영화의 첫 1백년 동안 거의 바뀌지 않았다고 주장하고 있다. 이는 고다르에게는 내 가설이 별반 새롭지 않으리라는 점을 암시한다.
끝으로, 나는 디디-위베르망의 『모든 것에도 불구한 이미지: 아우슈비츠에서 찍은 네 장의 사진』을 구성하는 거의 모든 글이 2001년에 쓴 글이라는 사실이 담고 있는 의도치 않은 중요성을 지적하고 싶다. 2001년 9월 11일에 일어난 비극적인 사건 또한 우리에게 무성영화를 연상시키는 방식으로 제시되었다. 우리 모두가 세계무역센터로 날아드는 두 비행기를 보았지만, 이 영상들은 어떤 음향도 담고 있지 않았다. 텔레비전은 충돌의 끔찍한 소리를 담아낼 수 없었다. 마찬가지로 우리는 히로시마와 나가사키에 원자폭탄이 투하된 후 솟아오르는 버섯구름을 볼 수 있지만 그 폭탄들이 틀림없이 만들어냈을 선명하고 끔찍한 소리는 듣지 못한다. 9월 11일의 영상은 영상을 음향과 동기화할 수 있었을 디지털 비디오카메라로 포착한 것임에도, 이 사건에 관해 우리가 갖고 있는 것은 영상뿐이다. 충돌의 순간, 현장에 마이크로폰이 없었기 때문에 동기화의 가능성도 이제 영영 사라지고 말았다. 그러므로 2001년 9월 11일의 사건은 여전히 무성영화의 시대인 20세기에 속해있다고 말할 수 있을 것이다. 그 중요한 순간에, 영상과 음향 재현의 동기화는 없었다.
요시다 기주는 히로시마의 기억에 관한 영화 〈거울의 여자들鏡の女たち, 2002〉에서 핵폭발의 음향이나 영상을 재창조하지 않기로 한다. 대신에 영화는 실제로 촬영된 무성 기록 사진으로 넘어간다. 그럼으로써 상상 불가능한 것이 "이론적 교만"의 흔적과는 거리를 둔 채 영화와 통합된다. 요시다의 입장은 히로시마 원자폭탄 투하는 20세기의 비극이므로 그 시대의 무성 매체를 통해서만 접근할 수 있다는 신념을 반영한 것이다.
여기까지 살펴보았을 때, 영화에서 '시청각적' 재현이라는 개념은 허구에 지나지 않는다고 의심 없이 주장할 수 있겠다. 우리에게 '영화'라고 알려진 매체는 실제로는 무성영화의 연장선에 지나지 않는다.
참고 도서 :
- Adorno, Theodor W. and Max Horkheimer (1969) Dialectic of Enlightenment. Continuum.
- Derrida, Jacques (1976) Of Grammatology. Baltimore: Johns Hopkins University Press.
- Didi-Huberman, Georges (2008) Images in Spite of All: Four Photographs from Auschwitz. University of Chicago Press.
- Godard, Jean-Luc (1996) "A propos de cinéma et d’histoire", Trafic 18: 28–32.
- Godard, Jean-Luc (1998) "La Légende du siècle", Les Inrockuptibles 170.
- Hashimoto, Fumio and Koshi Ueno (1996) Ee Oto ya nai ka [Isn’t That a Nice Sound]. Tokyo: Ritoru Moa.
- Kittler, Friedrich (1986) Gramophone, Film, Typewriter. Berlin: Brinkmann & BoseVerlag.
- Wajcman, Gérard (1999) "'Saint Paul' Godard contre 'Moïse' Lanzmann, le match", L’infini 65: 121–7.
흔히 무성영화 이래로 영화는 달라진 게 없다는 표현은 영화에서 음향 사용의 후진성을 질타하거나 무성영화의 우월성을 찬양할 때, 혹은 발성영화에서 지나치게 대사에 의존하는 경향을 경계하며 시각적 연출의 중요성을 강조할 때 쓰이는 수사법이다. 그러나 여기서 하스미는 녹화 기술과 녹음 기술의 발전사를 더듬으며 영화에서 영상과 소리가 본질적으로 분리되어 존재했음을 되새긴다. 그는 나아가 그러한 20세기의 경향이 21세기에 이르러서도 이어지고 있고, 인류사의 비극을 두고 벌어진 '재현 불가능한 것'에 관한 논쟁도 그러한 과거의 재현 양식에 얽매여 있음을 지적한다.
원래 《Theory, Culture and Society》 26권 3호 (2009년 3월)에 실렸던 글이며, 아래 번역은 이후 웹진 《Lola》에 재수록된 영문 원고를 바탕으로 했다. 원문은 《Lola》에서 읽을 수 있다.
- 모든 영화는 무성영화의 변주에 불과하다 -
50년 넘게 영화 평론가 생활을 해오면서, 영화 매체의 기본 존재론에 관한 가설 하나가 내 마음 속에 서서히 자리 잡기 시작했다. 이전에도 다른 글에서 이 가설에 관해 어느 정도 암시한 적이 있기는 하지만, 아직 완전한 논의를 펴본 적은 없다. 이제는 해볼 때가 되지 않았나 싶다.
간단히 말해서, 나의 가설이란 영화라는 매체가 아직 소리를 본질적인 구성 요소로 받아들이지 못했다는 것이다. 이 주장은 오락을 위해 제작한 영화든, 예술적 목적을 위해 제작한 영화든, 백 년 넘게 이어져 온 이 매체의 역사 안에서 어떤 형식으로 소비되었든 간에 상관없이 모든 영화에 적용된다. 이 가설을 다른 식으로 표현하자면 소위 발성영화라는 것이 사실은 무성영화의 변주에 지나지 않는다는 말로 바꿀 수도 있을 것이다. 무성영화에서 유성영화로의 전이를 기술적 진보라는 관점에서만 받아들여서는 안 된다. 적어도 20세기가 끝날 때까지는, 카메라를 소리를 녹음하는 장치로 만들고자 하는 시도는 없었다. 카메라는 오로지 움직이는 영상을 재생산하는 장치로만 존재해 왔다. 그러는 동안 별개의 녹음 장치가 소리를 채집했다. 아래에 더 자세히 설명하겠지만, 발성영화의 발전은 따로 기록된 소리와 영상을 인위적으로 동기화하는 데에 바탕을 두고 있다. 이런 점에서 영화란 여전히 매우 불안정한 표현 매체로 남아있다.
영화에서 소리와 영상의 동기화가 "인공적"이라고 말하는 데에는 적어도 두 가지 이유가 있다. 첫째, 이 동기화 과정은 카메라 앞에서 딱따기를 친다는 매우 '비현대적인' 장치를 통해 이루어지고 있으며, 따라서 어떻게 보더라도 '자연스러운' 것으로 간주할 수는 없다. 둘째, 그와 같은 인공적인 동기화 작업이 없더라도, 일련의 무성 영상만으로 설득력 있는 영화를 만드는 것은 완벽하게 가능한 일이다. 감상자들은 사건이 벌어진 후에 소리를 추가한 영화 장면을 범상히 받아들인다. 예를 들어 히치콕 영화의 실내 장면에서 자동차 경적 소리가 들릴 때, 그 소리가 바깥 거리를 지나가는 실제 자동차에서 난 소리라고 진지하게 믿는 사람은 거의 없다. 영화의 소리 세계는 인공적 효과를 강조하면서 디지털 기술의 도래 훨씬 이전에 이미 일종의 '가상현실'을 만들어내었다.
카메라와 녹음기는 영상과 소리의 동기화 방법에 관한 고려 없이 완전히 별개의 기술로 발전했다. 실제로 동기화 기술은 1950년대에 나그라 테이프 레코더의 발전 후에야 비로소 순조롭게 이루어질 수 있었다. 폴란드어로 "녹음할 것이다"라는 뜻을 지닌 나그라는 어느 폴란드 이민자가 설립한 스위스 회사에서 제작했다. 그런 기술을 처음 만든 곳이 할리우드가 아니라는 사실은 매우 시사적이다.
영화 제작 과정에서 현장 녹음이 일반화 된 것은 20세기 중반을 한참 지나서였다. 대표적인 예가 장-뤽 고다르의 〈네 멋대로 해라À bout de souffle, 1960〉다. 이 영화의 촬영 현장에는 음향 엔지니어가 없었다. 현재 이 영화의 상영에 따라붙는 소리는 스튜디오에서 더빙한 것이다. 고다르는 촬영이 진행 중일 때에도 배우들에게 무성영화 시절과 다를 바 없는 태도로 지시를 내렸다고 한다. 요시다 기주의 영화 〈쓸모없는 녀석ろくでなし, 1960〉의 사운드트랙도 마찬가지로 스튜디오에서 더빙한 것이며, 요시다는 이 방식을 1970년대까지 고수했다. 다른 놀라운 사례로는 일본 남부의 한 도시에서 벌어진 수은 중독 현상이 인체에 끼친 파괴적인 영향을 다룬 츠치모토 노리아키의 생생한 다큐멘터리 영화 〈미나미타: 환자들과 그들의 세계水俣ー患者さんとその世界, 1971〉가 있다. 이 영화는 16mm 카메라로 촬영했기 때문에 소리를 함께 녹음할 수 없었다. 그럼에도 이 영화는 치소 공장 인근에 사는 사람들의 육체적 움직임과 얼굴 표정을 통해 수은 중독의 끔찍한 영향을 묘사함으로써 오늘날 악명 높은 산업공해 사례로 남게 된 이 사건에 대중의 관심을 끌어모으는 데에 성공했다. 소리는 촬영이 끝난 다음 스튜디오에서 덧입혀졌지만, 관객은 전혀 부조화를 느끼지 않았다. 1960년대와 70년대에 프랑스와 일본 양쪽에서 촬영 방식을 변화시킨 누벨바그가 사실은 무성영화 시대 이래 근본적으로 달라진 것 없는 기술을 바탕으로 일어났다는 점은 특기할 만하다.
몇몇 영화 문화권, 특히 이탈리아에서는, 소리와 영상을 동시에 기록하는 과정이 보편화되기까지 오랜 시간이 걸렸다. 그런 경우 영화 촬영이란 무엇보다도 시각적 제재를 포착하는 작업이었으며, 소리는 순전히 후반작업의 영역에 속했다. 로베르토 로셀리니를 포함한 거의 모든 이탈리아 네오리얼리즘의 걸작들은 사후 동기화 과정을 통해 소리를 덧입혔다. 인도 뮤지컬 영화에서는 반대의 상황을 볼 수 있는데, 배우들은 전문 대리 가수의 노래를 미리 녹음한 사운드트랙에 맞추어 마임을 선보이며, 따라서 배우의 실제 목소리를 녹음할 필요는 없어진다. 구르 두트의 〈갈증Pyaasa, 1957〉 같은 위대한 걸작들도 이런 방식으로 촬영했으며, 실은 거의 모든 할리우드 뮤지컬도 마찬가지다. 이런 사실은 영화가 여전히 무성영화 극초반기의 현현 방식에서 어떠한 결정적인 단절도 이루어내지 않았음을 보여준다.
논의를 더 밀고 나가기 전에, 모든 영화는 무성영화의 변주에 불과하다는 나의 가설이 소리 도래 이전의 목가적인 시절로 돌아가고 싶다는 향수 어린 소망과는 아무런 상관도 없다는 점을 분명히 해두고 싶다. 하지만 기록을 위해 말해두자면 내가 개인적으로 무성영화를 좋아한다는 점은 인정하겠다. 나는 대다수 작품을 발성영화 도래 이전에 만들었던 데이빗 워크 그리피스, 루이 푀이야드, 에리히 폰 스트하임과 F. W. 무르나우의 영화를 더없이 좋아한다. 또한 나는 얼굴 표정과 신체 움직임의 대가였던 버스터 키튼, 해리 캐리, 자넷 게이너와 같은 배우들이 등장하는 영화를─되도록이면 스크린에 쏘아서, 많은 경우 피아노 반주의 방해도 없이─보는 것을 좋아한다. 그럼에도 나의 가설은 이런 개인적 선호와는 무관하며 전적으로 역사적 조건의 분석에 기반을 두고 있다. 이 가설은 영화사 속의 사실들뿐만 아니라 19세기 이래 사회에 보편적으로 퍼졌던 지식에도 근거를 두고 있다. 이 가설을 확인하기 위해 영화사를 세부까지 알아야 할 필요는 없지만, 영화가 어떤 조건 하에서 만들어지고 발전했는가를 어느 정도 알 필요는 있다. 그래서 이 점을 간략하게 서술하기로 하겠다.
다들 알다시피 영화는 19세기에 이미 존재했던 다양한 기술의 결합을 통해 1895년에 태어났다. 세부 사항에 관한 견해가 갈리기는 하지만, 이 글의 목적을 위해서는 뤼미에르 형제의 시네마토그래프 발명에서 출발하기로 하겠다. 1895년 파리 그랑 카페에서 처음 상영된 〈리옹에 있는 뤼미에르 공장의 출구La Sortie de l'Usine Lumière à Lyon, 1895〉 외 아홉 편의 영화들을 포함하여 초창기에 만들어진 영화들은 물론 소리가 없었다. 영화는 오랫동안 본질적으로 무성 매체였으며, 뤼미에르 형제 외의 다른 사람들이 발전시키고 상업화했을 때도 그러했다. 영화 촬영의 바탕이 되는 기술은 19세기 중반 이래 발전하여 대중성을 획득한 사진술이었다. 시네마토그래프가 이룬 주요한 혁신은 이전에는 순간적으로만 포착할 수 있었던 제재의 움직임을 기계적으로 재현할 수 있게 되면서 사진술에 시간이라는 차원을 더했다는 것이다. 그 결과로 나온 영화라는 매체는 실제 장면을 자르고 붙이고 재배치하여 허구의 내러티브를 시각적으로 창조할 수단을 제공했다. 고대 그리스 이래 서사시와 희곡을 통해 발전해온 서구 전통의 미학 규범을 참조하지 않았다는 이유에서, 어떤 사람들은 영화를 '재현의 사생아'로 간주했다.
1920년대 중반은 영화의 전성기라고 볼 수 있다. 당대를 주도한 많은 감독들은 세밀한 관찰을 통해 일상생활에 자리한 보이지 않는 긴장을 드러내는 영화를 만들었다. 세르게이 에이젠슈타인의 아방가르드 영화뿐만 아니라 아브람 룸과 보리스 바넷을 포함한 스탈린 이전 시대 소비에트 영화의 대표주자들이 만든 영화까지도 포함해서 하는 말이다. 이 시대의 다른 특징으로는 서스펜스에 관한 풍부한 탐구를 들 수 있는데, 다른 어떤 작품보다도 대표적인 예로 프리츠 랑의 1928년작 〈스파이Spione〉가 있다(그의 유명한 1927년작 〈메트로폴리스Metropolis〉보다도 더 그러하다). 존 포드의 서부극, 라울 월쉬의 역사 드라마, 에른스트 루비치의 에로틱 코미디, 버스터 키튼의 코미디, 이토 다이스케의 검술 영화, 프랭크 보재기의 멜로드라마 외에도 여기서 다 언급할 수 없는 그에 필적하는 수많은 이들의 사례에서 볼 수 있듯, 이 시기에 활동한 영화 창작자들은 자신이 선택한 소재를 다루면서 매우 수준 높은 창조력을 성취했다. 영화가 문학에서는 불가능한 표현 형식을 제공하는 새로운 예술 형식으로 떠오른 것이 바로 이 시기였다.
오늘날 우리는 영화란 당연히 소리를 포함한다고 여기게 되었지만, 나는 여전히 모든 영화가 무성영화의 변주에 불과하다는 주장을 고수한다. 사실 나는 영화에 관한 담론에서 '시청각'이라는 개념을 추방하고 싶다. 영화에 관한 한, '시청각'이라는 개념은 실제에 기초하지 않은 순전한 허구다. 이러한 점에서 영화는 텔레비전과 다르다. 텔레비전은 무성의 시대를 거친 적이 없으며 시청각적 허구에 기원을 두고 있는 것이다. 이런 연유로 매체로서 텔레비전의 상황은 극도로 위태롭다.
이미 거론한 바처럼, 카메라와 음향 녹음기는 각자의 영역에서 신호를 기록하는 장치로서 따로 발전해왔다. 둘은 자연스러운 동기화 상태를 결코 이루지 못했을 뿐만 아니라 상호 배타적인 관계로 존속해왔다고까지 할 수 있다. 영화의 역사는 이 상호 배타성의 역사다. 영상과 소리의 끝나지 않는 갈등이 기술적인 차원에서 구현된 것이 바로 20세기다. 인류는 아직 이 갈등을 궁극적으로 해결할 방법을 찾지 못하고 있다. 이미지와 소리 간의 이 기술적 갈등은 다양한 층위에서 확인할 수 있다. 『축음기, 영화, 타자기』에서 프리드리히 키틀러는 에디슨이 최초의 대량 생산 가능한 음향 녹음/재생 장치를 완성한 즉시 사진사를 불러들였던 일화를 들려준다. 이 유명한 일화는 축음기가 발명된 순간이 시각적으로만 기록될 수 있었음을 보여준다. 이러한 시각적 재생산 기술과 청각적 재생산 기술 사이의 불균형은 20세기 내내 지속되었다.
소리와 영상 사이의 갈등에 관한 더 깊은 통찰을 위해 말라르메의 경우를 살펴보자. 21세기를 사는 우리는 사진사 펠릭스 나다르가 찍은 초상 사진들 덕분에 이 프랑스 시인의 뚜렷한 시각적 형상을 볼 수 있다. 반면 그의 목소리가 어떤 질감을 지녔는지 알려줄 만한 청각적 기록은 존재하지 않는다. 말라르메의 말년에는 영화와 음향 녹음기가 모두 존재했건만, 그의 목소리를 녹음할 기회를 영영 잃어버린 것이다. 우리는 결코 그가 「주사위 던지기」를 낭송하는 소리를 실제로 들을 수 없으리라. 우리에게 있는 것이라고는 그의 목소리가 "낮고 단조로워 애정이라고는 찾아볼 수 없으며 거의 혼잣말을 하는 듯했다"는, 폴 발레리가 남긴 2차 사료뿐이다.
이는 영상 재생산 기술이 음향 녹음 기술에 비해 훨씬 일찍 '민주화'되었다는 역사적 사실을 직접적으로 보여준다. 막심 뒤 캉이나 에밀 졸라 같은 작가들은 사진이 발명된 후 고작 10년만에 사진술을 접할 수 있었다. 이는 활동사진의 세계에서도 마찬가지로, 영화가 발명되고 고작 20년 만에 사샤 기트리처럼 젊고 경험 없는 이도 아나톨 프랑스, 사라 베른하르트, 오귀스트 로댕과 같은 유명 인사들이 출연하는 아마추어 영화(〈우리나라 사람들Ceux de chez nous, 1915〉)를 촬영할 수 있었던 것이다.
제1차 세계대전 발발 무렵, 할리우드는 당시 미국 영화계의 중심부였던 동부 연안 영화계의 식민지에 불과한 존재였다. 아마추어 영화제작의 긴 역사는 적어도 이 시기까지 거슬러 올라간다. 반면 음향 녹음 기술은 훨씬 오랫동안 전문 기술자들 사이에서만 배타적으로 존속했다. 음향 엔지니어들이 아마추어들이 침범할 수 없도록 음향 재현 기술에 관한 독점권을 주의 깊게 지켰다고 해도 과언이 아니다. 이 독점은 1960년대 테이프 레코더의 보급 전까지 무탈하게 지속되었다. 이렇듯 음향 녹음의 민주화가 실현되기까지는 지나치게 오랜 시간이 걸렸다. 그 이유는 기술적이라기보다는 이념적이었다. 앞서 언급한 말라르메의 사례는 목소리가 재현불가능한 일시성을 유지했음을 보여준다. 목소리를 재현한다는 것은 지극히 예민하고 신중하게 접근하지 않고서는 위반할 수 없는 금기처럼 보였다고 말하더라도 지나치지 않다. 이 '목소리에 대한 금지'는 무성영화 시대의 유산이었다. 19세기 말에서 1920년대 중반에 이르는 30년은 인류 역사에 길이 전해지는 영향을 남겼으며, 이를 그저 이후의 단계로 가는 전환기로 격하해서는 안 된다.
목소리를 재현하는 것에 관한 금기는 바로 인간 지식의 구조에서 여전히 목소리가 지니는 우위를 반영한 것이었다. 그 자체로 이미 재현인 영상과는 달리, 목소리는 육체 자체와 동일시되었다. 따라서 목소리를 재현한다는 것은 육체성을 상실함을 암시했다. 그런 탈육체화의 위험을 선점하기 위해서인 양, 목소리는 무형의 왕국에 계속 숨어있었다. 다른 무엇보다도 이것이야말로 아마추어들이 그토록 오랫동안 음향 재현 기술에 접근할 수 없었던 이유다.
나는 말라르메가 자신의 시를 낭송하는 목소리가 왜 한 번도 녹음되지 못했는가를 확신을 갖고 말할 수는 없다. 그러나 음향 녹음의 민주화를 가로막는 어떤 힘의 존재가 있었다는 점만은 의심의 여지가 없다. 자크 데리다는 "존재의 형이상학"에 관한 초창기 비평에서 목소리는 "그 자체를 가리키는 존재"로만 존속한다고 주장했다. 이런 관점에서 보면 음향 녹음의 민주화가 그저 축음기의 대중화를 통해 이루어졌다고 가정해서는 안 된다. 포드식 생산 공정 하에서 일한 공장 노동자들이 가정에서 레코드를 들을 수 있는 능력을 얻게 된 것은 사실이지만, 이는 녹음 기술이 배타적인 전문가 집단에게 맡겨진 이후의 일이었다. 값싸게 재생산된 레코드를 통해 음악이 대중화되면서, 아마추어가 음향 녹음 기술에 접근할 기회는 더욱 줄어들었다.
그러므로 "존재의 형이상학" 하에 음성 언어에 부여된 중심성이 초기 녹음 업계와 한통속이 되어 목소리를 엄격하게 금지할 수 있었던 것이다. 사진이나 영화를 촬영할 기회는 아마추어와 전문가 모두에게 거의 동등했던 반면, 음향 재현의 영역에서는 그런 동등함이 적용되지 않았다. 그렇게 무성영화의 시대가 남긴 흔적은 20세기 내내 지속되었다.
전문 음향 기술자들의 조직화된 음향 재현 관리 체계가 아니었더라면 발성영화는 무성영화를 무색하게 만들지 못했을 것이다. 그러나 영화의 세계에서 그런 전문가들이 차지한 지위는 그들이 녹음 업계에서 누리던 지위와는 달랐다. 영화 제작의 과정에서는 카메라맨의 필요성이 음향 엔지니어의 필요성보다 앞섰다. 이는 발성영화가 그저 무성영화 시절에 시작된 목소리의 금지를 지속했을 뿐이라는 결론으로 이어진다.
음향 녹음 전문가들보다 영상 재현 전문가들이 주도권을 장악했음은 여러 가지 방식으로 드러난다. 먼저 카메라 소음의 문제를 생각해 보자. 초기 영화 음향 엔지니어들은 카메라의 모터가 내는 큰 소음과 끝없이 싸움을 벌여야 했다. 이 문제에 맞서기 위해 카메라에 부착한 음향 가리개는 "블림프"라고 불렸는데, 이는 1930년대에 같은 이름이 붙었던 비행선이 유명해진 후의 일이다. 블림프는 카메라 소음을 제거하기는 했으나 너무 크고 무거워서 카메라의 움직임을 제한했다. 결국 오늘날까지도 영화에서 카메라 소음은 상대적으로 줄일 수는 있을지언정 완전히 제거할 수 없는 존재로 받아들여지고 있다. 오즈 야스지로의 초창기 발성영화 촬영 현장을 담은 사진에는 우스꽝스럽게도 두꺼운 면방석에 감싸인 카메라가 보인다. 이 사진은 본질적으로 양립할 수 없는 두 기술을 동시에 이용하는 데에서 생겨난 어려움을 생생하게 보여준다.
다른 한편 말하는 모습을 담은 영상에 음향 녹음 기술이 끼어드는 경우에도 전자가 우선권을 차지했다. 카메라맨은 항상 가능한 한 가장 좋은 위치에서 촬영할 수 있었던 반면, 음향 엔지니어는 이상적이지 못한 위치에 마이크로폰을 배치해야 하기 일쑤였다. 마이크로폰이 매달린 붐은 영화에서 절대 보여서는 안 되었다. 이것이 음향 엔지니어가 마이크로폰을 놓을 수 있는 위치를 엄격히 제한했으며, 그로 인해 음향의 질도 경감되곤 했다. 음향 엔지니어는 그렇게 카메라맨에 종속된 존재로 다루어졌으며, 엄격히 제한된 환경 하에 작업해야 했다. 또한 마이크로폰의 그림자가 살짝 피사체나 배경에 걸리는 것도 허용되지 않았으므로, 심지어 조명 담당자도 음향 엔지니어보다 더 우선시 되었다 하겠다. 미조구치 겐지 감독의 음향 엔지니어였던 하시모토 후미오의 회고록(Hashimoto and Ueno, 1996)만 읽어보더라도 영화 음향 녹음의 어려움을 실감할 수 있다.
음향 엔지니어가 감내해야 했던 또 다른 모욕으로는, 그의 작업이 얼마나 훌륭하든 간에 수출 시장을 노리기 위해서는 완전히 무시되어야 했다는 것을 들 수 있다. 많은 나라에서 외국 영화는 현지 언어로 더빙되었으며, 따라서 오리지널 사운드트랙은 버려야 했다. 실제로 음향에 관한 이런 제한은 오늘날까지도 이어지고 있다. 카메라는 무성영화 시절 이래 거의 변함없이 주도권을 쥐고 있다. 이는 대량 생산된 할리우드 블록버스터에서 프레드릭 와이즈먼이나 에릭 로메르 같은 감독들의 고품질 소규모 제작 영화에 이르기까지 한결같다. 이러한 현실이 모든 영화는 무성영화의 변주에 불과하다는 나의 가설을 뒷받침해주고 있는 것이다.
영상과 음향 기록을 진정으로 통합하고자 했던 시도가 전혀 없었다고는 주장할 수 없다. 그러나 촬영과 녹음을 동시에 할 수 있는 카메라는 아마추어 시장을 대상으로 제작된 8mm 코닥 카메라가 유일하다. 이 카메라는 1973년, 전통적인 할리우드 영화 제작 체계가 거의 종말에 이르렀을 즈음에야 등장했다. 하필이면 존 포드가 죽은 바로 그 해에 탄생했다는 섬뜩한 우연의 일치 속에서, 이 발명품은 '영화의 죽음'에 관한 논의의 대두를 예고하는 징조와도 같은 것이었다고 할 수 있다. 그 외 16mm와 35mm 필름을 포함한 다른 필름 포맷에 쓰이는 광학 사운드트랙은 촬영 후에 입혀야 한다. 촬영과 동시에 녹음한 모든 음향은 모두 나그라 테이프 레코더로 채집했다가 이후의 단계에서 필름으로 옮기게 된다. 이런 맥락에서 필름이라는 매체 자체가 소리를 억압했다고 말할 수도 있겠다.
이제 모든 영화는 무성영화의 변주에 불과하다는 가설을 진지하게 고려해 볼 때가 되었다. 왜냐하면 21세기 디지털 시대에 이르러서야 우리는 영상과 음향 재현의 진정한 통합을 목격하게 되었기 때문이다. 20세기 영화사만 놓고 보자면 내 가설은 꽤 타당해 보인다. 목소리에 대한 금지가 영상과 음향의 동조 재현 기술 발전을 오랫동안 금했다. 디지털 비디오카메라가 발전하고 널리 보급된 21세기의 상황은 이러한 금지를 종식시키는 듯도 하다. 어쩌면 이제야 영화라는 매체가 무성영화라는 패러다임의 기나긴 지배에서 풀려나기 시작하는지도 모른다.
디지털 자기 테이프를 내장한 비디오카메라는 최초로 한 매체 위에 음향과 영상을 동시에 기록할 수 있게 해준다. 디지털 기술이 음향과 영상의 완벽한 합성을 가져다주었다는 생각까지 떠올리지 않더라도, 디지털 비디오카메라가 과거에 감내해야 했던 많은 제한으로부터 영화 음향 녹음 과정을 해방시켜주었다는 점은 인정할 수 있다. 디지털 비디오카메라는 배우의 머리 위에 붐을 뻗어 지향성 마이크로폰을 매달지 않고서도 배우의 실제 목소리를 녹음할 수 있게 해준다. 음향 엔지니어는 카메라맨이나 조명 엔지니어의 요구에 끊임없이 근심걱정하지 않고서도 자기 일을 해낼 수 있다. 이 새로운 환경은 차츰 무성영화 시대에서 이어져 온 영화 만들기 방식과는 사뭇 다른 영화 만들기 방식을 향해 나아가고 있다.
21세기의 시작 이래 여러 뛰어난 영화감독들이 자신의 작품을 디지털 비디오로 제작하기 시작했다. 1990년대부터 〈영화의 역사(들)Histoire(s) du cinéma, 1988-1998〉 연작을 아날로그 비디오를 이용해 촬영했던 장-뤽 고다르는 〈사랑의 찬가Éloge de l'amour, 2001〉의 후반부를 디지털 비디오로 촬영했다. 디지털 비디오로 촬영한 다른 주목할 만한 사례로는 페드로 코스타의 〈반다의 방No Quarto da Vanda, 2000〉, 쿠로사와 키요시의 〈밝은 미래アカルイミライ, 2003〉, 압바스 키아로스타미의 〈102002〉, 빔 벤더스의 〈풍요의 땅Land of Plenty, 2004〉, 알렉산더 소쿠로프의 〈태양Сóлнце, 2005〉, 지아장커의 〈삼협호인三峽好人, 2006〉이 있다. 아오야마 신지의 다큐멘터리 〈AA2005〉 역시 전체를 디지털 비디오로 촬영했다. 이런 사례를 보면 디지털 기술이 동시대 영화의 최전선에 있는 감독들의 상상력을 사로잡고 있음이 분명해진다.
디지털 비디오를 수용하고 있는 많은 동시대 영화감독들이 무성영화 이래의 영화 역사에 발을 담그고 있는 소위 '영화 근본주의자'라는 점은 중요하다. 고다르, 코스타, 쿠로사와, 벤더스, 아오야마가 그렇다. 그들이 나의 가설에 동의하지 않을 수는 있겠지만, 음향과 영상의 동조화된 재현이 우리가 21세기에 들어선 다음에야 비로소 가능해졌다는 역사적 사실을 명확하게 의식하고 있으리라는 점만큼은 의심의 여지가 없다.
하지만 이 감독들의 최근작이 목소리에 대한 금지를 폐기하고 무성영화의 패러다임에서 영화를 해방시키는 데에 성공했는가의 여부는 여전히 의문으로 남아있다. 우리는 디지털 기술에 관한 낙관주의가 정말 1백년 동안의 영화사와 양립할 수 있는지 자문해야 한다. 21세기의 인류는 20세기 역사로부터 얼마나 거리를 두고 있는가? 우리의 삶 전반은 아직도 20세기의 수많은 사건과 환경에 얽매여 있지 않은가? 과거의 영화들이 무성영화의 변주에 불과했던 것처럼, 21세기는 20세기의 변주에 불과한 것은 아닌가?
이런 질문은 최근 홀로코스트의 가스실을 영화로 재현해도 되는가를 두고 벌어졌던 장-뤽 고다르와 클로드 란츠만의 격렬한 논쟁과도 어느 정도 상통한다. 이 논쟁에 관해서 좀 상세하게 설명하기로 하겠다. 홀로코스트와 가스실은 20세기의 상징으로 간주할 수 있다. 란츠만은 〈쇼아Shoah, 1985〉의 감독으로 유명한 인물로, 이 영화에는 가스실에 관한 직접적인 시각적 재현이 전혀 존재하지 않는다. 가스실을 스크린에 재현해서는 안 된다는 란츠만의 주장에 대해 고다르는 영화가 역사적 충실성을 획득하기 위해서는 가스실을 재현할 수 있으며 재현해야만 한다는 반대의 주장을 폈다.
당사자들이 이 격한 다툼에서 물러난 후에도 논쟁은 제라르 바이크만(1999)과 조르주 디디-위베르망(2008)에 의해 계속되었다. 이후의 사례를 검토하기에 앞서 우선 처음 논쟁을 촉발시킨 고다르의 주장을 옮겨보자.
증명할 수는 없지만, 나는 훌륭한 탐문 기자의 도움을 받는다면 20여 년 간의 탐문 끝에 가스실의 이미지를 찾아낼 수 있으리라 믿는다. 사람들은 수인들이 가스실에 들어가는 모습을 볼 수 있을 것이고, 그들이 나왔을 때 어떤 상태였는가를 볼 수 있을 것이다. 이건 란츠만이나 아도르노 식으로 금지를 선언할 자리가 아니다. 그들은 자신들의 사례를 지나치게 과장한다. 무엇이 '영화화 불가능한가'를 논쟁하기 시작하면 끝이 없다. 책을 태워 없앨 수는 없듯이, 사람들이 영화를 찍는 것을 막을 수는 없다. 그렇지 않으면 우리는 우리가 무엇을 비판하는지도 알지 못하게 될 것이다. (Godard, 1998a: 28)
고다르 특유의 도발적인 풍자는 '재현불가능'한 대상에 관해 너무 쉽게 말하는 사람들의 세속적인 독실함을 가리키고 있다. 이것을 진실 없는 형이상학이라고 부를 수도 있겠다. 그는 란츠만이 가스실을 재현하지 않음으로써 홀로코스트 자체를 어떻게 해선가 재현 불가능한 것으로 제시하여 홀로코스트에 관한 논쟁을 간접적으로나마 억압하는 잘못을 저질렀다고 말하고 있다. 란츠만과 더불어 아도르노의 이름을 거론한 것은 홀로코스트 이후에 시는 불가능하다는 아도르노의 유명한 선언을 염두에 둔 발언이다.
아도르노의 발언은 분명 시를 대표주자 중 하나로 내세우고 있는 서구 예술 전체를 가리키고 있다. 『계몽의 변증법』에서 아도르노와 호크하이머는 '베토벤과 카지노 드 파리의 혼합'이 1940년대 미국의 재현 기술을 통해 벌어진 계몽의 자기 파괴 현장이라며 비난했다. 그처럼 영화를 '재현의 사생아'에 불과한 것으로 깎아내렸던만큼, 아도르노에게는 아우슈비츠를 영화로 재현할 수 있다는 생각은 떠오르지도 않았을 것이다. 고다르는 반대로 오직 영화만이 아우슈비츠를 재현할 수 있다고 주장한다. 그는 이미 아도르노 상 수상 연설을 통해 이를 말한 바 있다(Godard, 1996). 그 자리에서 그는 영화의 역할은 사고를 촉진하는 것이라고 선언했다. 가스실의 재현에 실패함으로써 영화는 그에 적합한 역할을 수행하는 데에 실패한 것이다.
바이크만(1999)은 란츠만을 변호하면서 고다르의 입장은 영상을 숭배하는 자의 향수어린 간증에 불과하다고 비판한다. 그는 고다르가 란츠만을 책을 태우는 독재자와 비교한 것에 대해 맹렬히 이의를 제기한다. 다른 한편 디디-위베르망(2004)은 바이크만의 논의 저변에 깔린 '상상 불가능성'이라는 개념을 "이론적 교만"이라고 비판한다. 디디-위베르망은 1944년 집단 수용소 수감자가 몰래 찍은 네 장의 사진을 샅샅이 분석하여 자신의 논거로 삼는다. 그는 우리가 재현 불가능성의 문제를 두고 맴돌기만 한다면 아우슈비츠의 기억이 보존되겠느냐고 심각하게 회의한다.
나는 상상 불가능한 것이나 재현 불가능한 것이라는 생각에 기대는 듯한 발화에 관해서는 늘 자연스레 의심을 품게 된다. 나는 다음과 같이 주장한 디디-위베르망(2008)의 감정에 동조한다. "'상상 불가능'하다거나 '재현 불가능'하다는 식의 절대적인 개념을 통해 아우슈비츠를 말하는 것은 더 이상 가능하지 않다. 좋은 의도로 꺼낸 말인 경우에도, 그런 겉보기에만 철학적인 어휘는 그저 부주의할 따름이다." 그러나 여기서 나까지 이 논쟁에 끼어 한몫 거들 생각은 없다. 대신 나는 이 논쟁이 부지불식간에 무성영화의 패러다임에 기초한 재현 양식을 영속화하는 방식에 관해 지적하고자 한다.
상상 불가능성이나 재현 불가능성의 문제가 논의될 때, 이 논쟁은 전적으로 시각적 재현의 문제에 집중한다. 어째서인지 청각적 재현은 논의에서 배제된다. 아무도 아우슈비츠의 음향 녹음이 부재한다는 사실에 의문을 던지지 않는다는 것은 이상한 일이다. 우리는 생존자들의 구술 증언을 들을 수는 있으나 살아남지 못한 사람들의 목소리를 직접 녹음한 기록은 없다. 희생자들의 시신을 태운 소각로의 끔찍한 울부짖음과 같은 강제 수용소의 소리 역시 들을 수 없다. 논쟁은 모든 소리가 사라진 현장 한가운데에서 침묵 속에 진행된 듯하다. 이것이 무성영화의 세계와 갖는 섬뜩한 일치는 충격적이다.
이 논쟁의 가장 놀라운 요소는, 모든 참여자들이 이 논쟁이 목소리에 대한 금지 위에 입각하고 있음을 의식하지 못한다는 것이다. 디디-위베르망은 아우슈비츠에 사진 현상소가 있었음을 지적한다. 그러나 그는 음향 녹음 시설이 존재했는지는 거론하지 않는다. UFA라든가 토비스 같은 이름만 떠올려보더라도 독일이 1930년대 유럽에서 발성영화 산업의 최전선에 있었음을 깨달을 수 있지 않은가. 따라서 아우슈비츠에서 통상적인 자료 수집 과정의 일환으로 음향 녹음 기술을 사용하는 것도 전적으로 있었을 법한 일이다. 그럼에도 디디-위베르망은 강제수용소에서 음향 녹음이 이루어졌을 수 있다는 가능성 자체를 떠올리지 않는다. 마찬가지로 고다르는 아우슈비츠의 사진이 남아있을 수 있다는 근거로 나치의 "모든 것을 기록하고자 하는 강박관념"을 거론한다. 그럼에도 그는 소각로의 지옥 같은 소음을 녹음한 기록이 있는지에 관해서는 조금도 관심을 보이지 않는다.
"Toutes les histories" (모든 [히]스토리들)라는 제목이 붙은 〈영화의 역사(들)〉 1부 말미의 한 장면에서 고다르는 직접 등장하여 조지 스티븐스의 〈젊은이의 양지A Place in the Sun, 1951〉를 아우슈비츠와 연결하면서 다음과 같은 흥미로운 발언을 남긴다.
그리고 만약 조지 스티븐스가
아우슈비츠와
라벤스브뤼크에서
최초의 16mm
컬러 필름을 이용하지 않았다면
엘리자베스 테일러는
틀림없이 결코
자신의 양지를 찾지 못했으리라
이 말은 엘라자베스가 수영복을 입고 일어나 호숫가에서 연인과 함께 뛰노는 장면의 슬로우 모션과 함께 들려온다. 이 말은 지오토의 그림 〈예수가 막달라 마리아 앞에 나타나다〉에서 막달라 마리아가 예수에게 손을 내뻗는 이미지 위에도 깔린다. 이 장면은 고다르가 이미지의 숭배자라는 바이크만의 비판에 어느 정도 신뢰성을 부여한다. 하지만 중요한 것은 스티븐스가 다른 많은 할리우드 감독들과 마찬가지로 미군과 동행하여 유럽에 가서 제2차 세계대전 중 독일의 군사 침공으로 생겨난 폐허를 촬영했다는 것이다. 이 점을 거론하면서 고다르는 또한 강제수용소를 기록한 필름이 존재할 수 있음을 암시한다. 의미심장하게도 그는 그 컬러 필름에 음향이 있었는지는 언급하지 않는다.
바이크만은 아우슈비츠를 담은 사진적 이미지가 존재할 수 있다는 고다르의 주장에 회의를 표명한다. 그는 가스실의 존재에 관한 그의 지식이 그러한 이미지를 통해서가 아니라 "피해자와 가해자 양자의 공적이고 사적인 풍부한 구술 증언"(1999)을 통해 형성되었다는 점을 논거로 삼는다. 그러나 이 비판은 피해자의 목소리가 녹음되었을 가능성에 관해서는 의식하지 않고 있다. 재현 불가능성이라는 의심스러운 개념을 끌어들이는 대신, 그는 고다르가 음향을 통한 재현의 가능성을 인지하지 못했음을 지적했어야 했다. 고다르의 이미지를 향한 숭배가 지닌 진짜 약점은 바로 이것이다. 란츠만을 지지하는 과정에서 바이크만은 고작 아우슈비츠의 시각적 재현 가능성을 부정하기만 한다.
이 논쟁을 통해 드러난 현장이란 바로 무성영화의 장면에 다름 아니다. 마치 목소리에 대한 금지 때문에 아우슈비츠에서 음향 녹음기의 존재가 지워진 것만 같다. 논의 전체가 시각적 재현만이 중요한 것마냥 전개되고 있다. 아우슈비츠를 담은 네 장의 사진에 관한 디디-위베르망의 분석이나 고다르의 영화에서 나타나는 몽타주 기법은 무성영화의 기법이다. 그 기법이야말로 영화적 허구의 기반이다. 고다르와 란츠만, 디디-위베르망과 바이크만의 논쟁은 무성영화에 기반한 산만한 공간에서 이루어지고 있다. 이는 제2차 세계대전의 거의 모든 기록 영상이 본질적으로 무성이라는 사실을 반영한다.
과연 이는 무성영화가 20세기의 전형적인 재현 양식이었다는 관찰로 이어진다. 어쩌면 이것이야말로 이 논쟁에서 얻어낼 수 있는 가장 중요한 교훈인지도 모른다. 이하는 "Une seule histoire" (하나의 역사)라는 제목이 붙은 〈영화의 역사(들)〉의 2부에서 인용한 것이다.
역에 도착하는 기차나
〈아기의 식사Repas de bébé, 1895〉에서
〈리오 브라보Rio Bravo, 1959〉에 이르기까지
카메라는 한 번도
근본적으로 변화하지 않았다
팬플렉스 플래티넘은
지드의 조카가
콩고로 향하는
여행길에 가져갔던
데브리 7보다도
덜 발전한 기종이다
여기서 언급된 앞의 두 영화는 뤼미에르 형제가 자신들이 발명한 시네마토그래프를 이용해 촬영한 영화들이다. 〈리오 브라보〉는 하워드 혹스가 감독한 1959년의 유명한 서부극이다. 이 영화는 파나비전 플래티넘 카메라로 촬영됐다. 지드의 조카는 마르크 알레그레로, 그는 1925년에 콩고에 갔다. 그가 가져간 데브리 7은 물론 무성 카메라였다. 따라서 고다르는 영화 제작에 사용되는 카메라가 영화의 첫 1백년 동안 거의 바뀌지 않았다고 주장하고 있다. 이는 고다르에게는 내 가설이 별반 새롭지 않으리라는 점을 암시한다.
끝으로, 나는 디디-위베르망의 『모든 것에도 불구한 이미지: 아우슈비츠에서 찍은 네 장의 사진』을 구성하는 거의 모든 글이 2001년에 쓴 글이라는 사실이 담고 있는 의도치 않은 중요성을 지적하고 싶다. 2001년 9월 11일에 일어난 비극적인 사건 또한 우리에게 무성영화를 연상시키는 방식으로 제시되었다. 우리 모두가 세계무역센터로 날아드는 두 비행기를 보았지만, 이 영상들은 어떤 음향도 담고 있지 않았다. 텔레비전은 충돌의 끔찍한 소리를 담아낼 수 없었다. 마찬가지로 우리는 히로시마와 나가사키에 원자폭탄이 투하된 후 솟아오르는 버섯구름을 볼 수 있지만 그 폭탄들이 틀림없이 만들어냈을 선명하고 끔찍한 소리는 듣지 못한다. 9월 11일의 영상은 영상을 음향과 동기화할 수 있었을 디지털 비디오카메라로 포착한 것임에도, 이 사건에 관해 우리가 갖고 있는 것은 영상뿐이다. 충돌의 순간, 현장에 마이크로폰이 없었기 때문에 동기화의 가능성도 이제 영영 사라지고 말았다. 그러므로 2001년 9월 11일의 사건은 여전히 무성영화의 시대인 20세기에 속해있다고 말할 수 있을 것이다. 그 중요한 순간에, 영상과 음향 재현의 동기화는 없었다.
요시다 기주는 히로시마의 기억에 관한 영화 〈거울의 여자들鏡の女たち, 2002〉에서 핵폭발의 음향이나 영상을 재창조하지 않기로 한다. 대신에 영화는 실제로 촬영된 무성 기록 사진으로 넘어간다. 그럼으로써 상상 불가능한 것이 "이론적 교만"의 흔적과는 거리를 둔 채 영화와 통합된다. 요시다의 입장은 히로시마 원자폭탄 투하는 20세기의 비극이므로 그 시대의 무성 매체를 통해서만 접근할 수 있다는 신념을 반영한 것이다.
여기까지 살펴보았을 때, 영화에서 '시청각적' 재현이라는 개념은 허구에 지나지 않는다고 의심 없이 주장할 수 있겠다. 우리에게 '영화'라고 알려진 매체는 실제로는 무성영화의 연장선에 지나지 않는다.
참고 도서 :
- Adorno, Theodor W. and Max Horkheimer (1969) Dialectic of Enlightenment. Continuum.
- Derrida, Jacques (1976) Of Grammatology. Baltimore: Johns Hopkins University Press.
- Didi-Huberman, Georges (2008) Images in Spite of All: Four Photographs from Auschwitz. University of Chicago Press.
- Godard, Jean-Luc (1996) "A propos de cinéma et d’histoire", Trafic 18: 28–32.
- Godard, Jean-Luc (1998) "La Légende du siècle", Les Inrockuptibles 170.
- Hashimoto, Fumio and Koshi Ueno (1996) Ee Oto ya nai ka [Isn’t That a Nice Sound]. Tokyo: Ritoru Moa.
- Kittler, Friedrich (1986) Gramophone, Film, Typewriter. Berlin: Brinkmann & BoseVerlag.
- Wajcman, Gérard (1999) "'Saint Paul' Godard contre 'Moïse' Lanzmann, le match", L’infini 65: 121–7.