지인이 몇 달 정도 한국을 떠나 있을 계획이라기에 작은 송별연을 겸하여 함께 영화를 보았다. 어쩐지 내가 영화를 고르는 분위기가 되기에 평소에 소개하고 싶었던 영화 후보 목록을 보여줬더니 하워드 혹스의 〈천사만이 날개가 있다Only Angels Have Wings, 1939〉를 선택했다. 올해 처음 보고 천의무봉의 영화라고 생각했다는 〈리오 브라보Rio Bravo, 1959〉를 필두로 〈레드 리버Red River, 1948〉, 〈엘 도라도El Dorado, 1966〉, 혹은 며칠 전 시네마테크 서울에서 함께 보았던 〈불덩어리Ball of Fire, 1941〉가 남긴 영향이리라.
본 영화가 많아질수록 한 영화를 다시 보는 횟수는 줄어들기 마련이라, 확인해 보니 이 영화도 어느새 거의 5년 만에 다시 보는 영화였다. 5년 사이에 감흥이 줄었으리라고는 생각하지 않았지만, 실제로 다시 보아도 역시나 혹스 영화 중 최고로 꼽아도 좋을 정도로 훌륭하고 뭉클하여 기뻤다. 이런 감독은 생각보다 많지 않다. 가진 것을 다 내어줄 듯 애정을 바쳤으나 차츰 눈에 띄는 결함에 등 돌린 이, 한참 무시했다가 뒤늦게 알아가고 있는 이, 성취한 것보다는 성취할 것을 기대하며 바라보는 이, 한순간 온몸을 불살라 끌어안았고 지금도 존경하지만 한창 마르고 닳도록 언급하던 시절만큼은 아닌 이는 많다. 그러나 영화라는 세계에 갓 입문하던 시절부터 좋아했고, 아직도 그 좋아하는 마음이 10년이 넘도록 조금도 식지 않은 이는 정말 몇 되지 않는다. 그리고 그 몇 되지 않는 이들 가운데 첫손에 꼽을 이가 바로 하워드 혹스다. 장-피에르 멜빌의 금욕적 전문가주의를 향한 숭배가 사그라진 지금에 와서도 혹스의 개인주의와 소규모 공동체 정신은 내 가치관의 근간을 틀어쥐고 있으며, 인간이 짐승으로 변할 때까지 거꾸러뜨리고 발가벗겨 인세의 율법을 박살 내는 무도덕하고 히스테리컬한 코미디를 보면서도 (내 몇몇 지인들이 그렇듯) 괴로움을 느끼기는커녕 그 파괴적인 세계를 열망하게 된다.
* * *
〈천사만이 날개가 있다〉는 혹스의 모험 영화 중에서 가장 어두운 축에 속하는 영화다. 대놓고 필름 누아르로 분류되는 〈깊은 잠The Big Sleep, 1946〉보다도 어둡고, 폭압적인 가부장과 유사 아들의 대립을 그린 심리 서부극 〈레드 리버〉보다도 어둡다. 정서도 어둡고 화면도 어둡다. 지형이 워낙 험해 수로가 아니면 항공로로만 우편물 운송이 가능한 남미의 어느 항구 도시에서 활동하는 비행사들의 이야기를 다룬 이 영화에만큼은 "실존주의적 그림자" 같은 닳고 닳은 표현을 얹더라도 민망하지 않다. 비행에 미쳐 생의 다른 모든 인간관계를 도외시한 채 서로만을 의지하여 살아가는 이곳의 비행사들은 매 순간 목숨을 걸고 자연과 투쟁한다. 그리고 그곳에서 자연 앞에 패배하는 일은 너무나도 흔하기에, 모든 죽음을 재빨리 덮고 소리 높여 웃지 않으면 살아남을 수 없다.
어둠의 심연을 향해 목청껏 소리지르는 이 태도의 중요함에 관해서라면 로빈 우드가 이미 혹스에 관한 비평서 『Howard Hawks』와 『Rio Bravo』를 통해 이야기했으니 구태여 반복할 필요는 없겠지마는, 〈천사만이 날개가 있다〉의 어둠이 소리를 통해 엄습하기에 그토록 위협적이라는 사실은 오늘 다시 보면서야 비로소 인지했다. 거의 모든 영화에 훌륭한 노래 장면을 넣으며 언제나 뛰어난 대사 감각을 발휘하는 혹스가 훌륭한 귀를 지닌 연출자라는 점이야 놀랍지 않다. 그렇더라도 〈천사만이 날개가 있다〉에서처럼 소리가 전편을 감싸 안고 인물들의 숨통을 옥죄는 혹스 영화가 있었던가? 항구에 갓 도착한 아름다운 금발 아가씨 보니 리를 둘러싸고 수작을 벌이는 두 비행사의 코믹한 소동극처럼 시작한 영화는 그들이 자리한 유쾌한 주점 안으로 한 소리가 침입하면서 갑자기 음울해진다. 바로 비행기 엔진 소리다. 주점 주인이자 비행우편사업 경영자인 더치는 손님들과 장단을 맞추며 웃음을 터뜨리다가 그 소리를 듣는 순간 말을 씹어 뱉는다. "나는 저 소리가 싫어." 그 말이 예언이라도 되는 듯, 이후 관객은 그 소리를 들을 때마다 불안에 떨게 된다. 혹스는 물론 비행 장면을 두려워하는 연출자는 아니다. 모형과 화면 합성과 로케이션 촬영을 뒤섞은 비행 장면은 더없이 빼어나서, 그것이 모형이요, 세트임을 알면서도 비행 장면에서는 어김없이 숨을 죽이게 된다. 그럼에도 이 영화에서 비행기는 언제나 눈보다는 귀를 통해 먼저 등장한다. 보이지 않는 저 바깥에서 비행기 엔진 소리가 들려오는 순간, 다른 모든 관심사는 중단되고 인물와 관객은 홀린 듯 초조하게 귀를 쫑긋 세운다.
비행기 소리와 쌍벽을 이루는 무시무시한 소리로 비행 사무소의 무전기에서 흘러나오는 호출 신호도 있다. 무전기는 지상의 사무소와 비행장, 산중의 전망대, 비행 중인 비행기를 연결하고 있지만, 〈천사만이 날개가 있다〉에서 상황을 파악하는 시점은 늘 사무소-술집을 거점으로 한다. 따라서 무전기의 호출 신호는 비행기 소리와 마찬가지로 산 속에서, 하늘에서, '저 바깥'에서 느닷없이 들려와 내부의 모든 활동을 멈추게 하는 소리로 각인된다. 더구나 이 "바랑카 나와라, 바랑카 나와라."라는 호출어는 누가 말하더라도 기계적인 단조로움을 띤다. 분명히 무전기 반대편에 누가 있는지도 알고, 상대에게 악의가 없다는 사실도 확실하건만, 인간미가 억제된 그 호출은 (마찬가지로 가치중립적인) 비행기 소리만큼 불길하다. 불길함은 심지어 메시지의 내용과도 무관하다. 전망대에서 하늘이 맑아 비행하기 좋다고 알리든 하늘이 거칠어 비행하기 어렵다고 알리든, 비행사가 비행의 지속을 알리든 귀환을 알리든, 늘 두려움이 도사린다. 이곳을 벗어나 비행하는 것도, 비행하지 못한 채 이곳에 머물러 있는 것도, 모두 곤경이고 위험이다. '이곳'과는 다른 '저 바깥'의 존재를 알리는 소리는 전부 죽음의 가능성을 지닌다. 화면 안에 정박하지 않은 소리에는 실체가 없고, 설령 그 출처를 짐작할 수 있다 하더라도 그것이 화면 밖의 소리인 그 순간만큼은 화면 밖의 나머지 모든 세상을 대변한다. 그 세상이 죽음으로 가득 차 있다. 혹스의 어떤 모험 영화도 주인공들에게 이 정도의 위협을 부과한 적은 없다.
소리의 출처 자체를 제거할 수 없다면(이 경우에는 비행을 중단하는 방법 뿐인데, 그것은 또 다른 죽음이니까), 소리에 맞서는 가장 효과적인 방법은 소리다. 보니 리가 바랑카에 들어선 후 처음으로 벌어지는 비행 사고에 관한 장면은 사실상 삶과 죽음을 둘러싼 소리들의 대결로만 이루어져 있다고 해도 과언이 아니다. "나는 저 소리가 싫어."라는 더치의 말이 위기의 시작을 알린다. 혹스는 안개가 짙다는 설정을 통해 아예 시야를 가려버린다. 비행기의 위기는 소리로 전달된다. 모두가 비행장에 나와 귀를 기울인다. 문득 비행사 키드가 술집을 향해 소리친다. "거기 음악 중단하고 조용히 하라고 해!" 무슨 음악? 그러고 보니 긴장이 고조된 후에도 술집에서는 유쾌한 음악이 흘러나오고 있었다. 음악을 중단하라는 키드의 일갈은 역설적으로 눈앞의 위기 상황과는 대비되는 다른 음악의 존재를 일깨워준다. 그 음악이 사라지고 나자 본격적으로 비행기 소리가 상황을 장악하고, 결국 사고로 이어진다. 사고 수습 후 지휘자인 제프와 키드는 사무실로 돌아와 대화를 나눈다. 대화 도중에 다시 술집에서 음악이 들려오기 시작한다. 앞서 사라진 순간 그 존재를 의식하기 시작했기에, 이제 음악은 더욱 뚜렷하게 들려온다. 잠시 후 제프가 술집으로 이동하고, 비행사들은 아무 일도 없었다는 듯 왁자지껄 대화를 나누며 유쾌한 소음을 배가한다. 보니는 이 소란에 항의하다가 술집에서 밀려난다. 그리고는 한결 조용한 가운데 조금 전의 다툼을 반추한다. 마침내 다시 술집으로 들어간 보니는 몸소 악단을 지휘하기 시작한다. 모두가 소리 높여 그 어느 때보다도 크고 활기찬 음악을 들려준다. 우리는 죽음 앞에 힘차게 살아있다고. 땅콩 사려! 땅콩!
이 소리의 편재와 진퇴가, 혹스가 음악을 다루며 빚어낸 숱한 명장면 중에서도 〈천사만이 날개가 있다〉의 "땅콩 장수" 합창 장면을 한층 더 고결한 위치로 끌어올린다.
본 영화가 많아질수록 한 영화를 다시 보는 횟수는 줄어들기 마련이라, 확인해 보니 이 영화도 어느새 거의 5년 만에 다시 보는 영화였다. 5년 사이에 감흥이 줄었으리라고는 생각하지 않았지만, 실제로 다시 보아도 역시나 혹스 영화 중 최고로 꼽아도 좋을 정도로 훌륭하고 뭉클하여 기뻤다. 이런 감독은 생각보다 많지 않다. 가진 것을 다 내어줄 듯 애정을 바쳤으나 차츰 눈에 띄는 결함에 등 돌린 이, 한참 무시했다가 뒤늦게 알아가고 있는 이, 성취한 것보다는 성취할 것을 기대하며 바라보는 이, 한순간 온몸을 불살라 끌어안았고 지금도 존경하지만 한창 마르고 닳도록 언급하던 시절만큼은 아닌 이는 많다. 그러나 영화라는 세계에 갓 입문하던 시절부터 좋아했고, 아직도 그 좋아하는 마음이 10년이 넘도록 조금도 식지 않은 이는 정말 몇 되지 않는다. 그리고 그 몇 되지 않는 이들 가운데 첫손에 꼽을 이가 바로 하워드 혹스다. 장-피에르 멜빌의 금욕적 전문가주의를 향한 숭배가 사그라진 지금에 와서도 혹스의 개인주의와 소규모 공동체 정신은 내 가치관의 근간을 틀어쥐고 있으며, 인간이 짐승으로 변할 때까지 거꾸러뜨리고 발가벗겨 인세의 율법을 박살 내는 무도덕하고 히스테리컬한 코미디를 보면서도 (내 몇몇 지인들이 그렇듯) 괴로움을 느끼기는커녕 그 파괴적인 세계를 열망하게 된다.
〈천사만이 날개가 있다〉는 혹스의 모험 영화 중에서 가장 어두운 축에 속하는 영화다. 대놓고 필름 누아르로 분류되는 〈깊은 잠The Big Sleep, 1946〉보다도 어둡고, 폭압적인 가부장과 유사 아들의 대립을 그린 심리 서부극 〈레드 리버〉보다도 어둡다. 정서도 어둡고 화면도 어둡다. 지형이 워낙 험해 수로가 아니면 항공로로만 우편물 운송이 가능한 남미의 어느 항구 도시에서 활동하는 비행사들의 이야기를 다룬 이 영화에만큼은 "실존주의적 그림자" 같은 닳고 닳은 표현을 얹더라도 민망하지 않다. 비행에 미쳐 생의 다른 모든 인간관계를 도외시한 채 서로만을 의지하여 살아가는 이곳의 비행사들은 매 순간 목숨을 걸고 자연과 투쟁한다. 그리고 그곳에서 자연 앞에 패배하는 일은 너무나도 흔하기에, 모든 죽음을 재빨리 덮고 소리 높여 웃지 않으면 살아남을 수 없다.
어둠의 심연을 향해 목청껏 소리지르는 이 태도의 중요함에 관해서라면 로빈 우드가 이미 혹스에 관한 비평서 『Howard Hawks』와 『Rio Bravo』를 통해 이야기했으니 구태여 반복할 필요는 없겠지마는, 〈천사만이 날개가 있다〉의 어둠이 소리를 통해 엄습하기에 그토록 위협적이라는 사실은 오늘 다시 보면서야 비로소 인지했다. 거의 모든 영화에 훌륭한 노래 장면을 넣으며 언제나 뛰어난 대사 감각을 발휘하는 혹스가 훌륭한 귀를 지닌 연출자라는 점이야 놀랍지 않다. 그렇더라도 〈천사만이 날개가 있다〉에서처럼 소리가 전편을 감싸 안고 인물들의 숨통을 옥죄는 혹스 영화가 있었던가? 항구에 갓 도착한 아름다운 금발 아가씨 보니 리를 둘러싸고 수작을 벌이는 두 비행사의 코믹한 소동극처럼 시작한 영화는 그들이 자리한 유쾌한 주점 안으로 한 소리가 침입하면서 갑자기 음울해진다. 바로 비행기 엔진 소리다. 주점 주인이자 비행우편사업 경영자인 더치는 손님들과 장단을 맞추며 웃음을 터뜨리다가 그 소리를 듣는 순간 말을 씹어 뱉는다. "나는 저 소리가 싫어." 그 말이 예언이라도 되는 듯, 이후 관객은 그 소리를 들을 때마다 불안에 떨게 된다. 혹스는 물론 비행 장면을 두려워하는 연출자는 아니다. 모형과 화면 합성과 로케이션 촬영을 뒤섞은 비행 장면은 더없이 빼어나서, 그것이 모형이요, 세트임을 알면서도 비행 장면에서는 어김없이 숨을 죽이게 된다. 그럼에도 이 영화에서 비행기는 언제나 눈보다는 귀를 통해 먼저 등장한다. 보이지 않는 저 바깥에서 비행기 엔진 소리가 들려오는 순간, 다른 모든 관심사는 중단되고 인물와 관객은 홀린 듯 초조하게 귀를 쫑긋 세운다.
비행기 소리와 쌍벽을 이루는 무시무시한 소리로 비행 사무소의 무전기에서 흘러나오는 호출 신호도 있다. 무전기는 지상의 사무소와 비행장, 산중의 전망대, 비행 중인 비행기를 연결하고 있지만, 〈천사만이 날개가 있다〉에서 상황을 파악하는 시점은 늘 사무소-술집을 거점으로 한다. 따라서 무전기의 호출 신호는 비행기 소리와 마찬가지로 산 속에서, 하늘에서, '저 바깥'에서 느닷없이 들려와 내부의 모든 활동을 멈추게 하는 소리로 각인된다. 더구나 이 "바랑카 나와라, 바랑카 나와라."라는 호출어는 누가 말하더라도 기계적인 단조로움을 띤다. 분명히 무전기 반대편에 누가 있는지도 알고, 상대에게 악의가 없다는 사실도 확실하건만, 인간미가 억제된 그 호출은 (마찬가지로 가치중립적인) 비행기 소리만큼 불길하다. 불길함은 심지어 메시지의 내용과도 무관하다. 전망대에서 하늘이 맑아 비행하기 좋다고 알리든 하늘이 거칠어 비행하기 어렵다고 알리든, 비행사가 비행의 지속을 알리든 귀환을 알리든, 늘 두려움이 도사린다. 이곳을 벗어나 비행하는 것도, 비행하지 못한 채 이곳에 머물러 있는 것도, 모두 곤경이고 위험이다. '이곳'과는 다른 '저 바깥'의 존재를 알리는 소리는 전부 죽음의 가능성을 지닌다. 화면 안에 정박하지 않은 소리에는 실체가 없고, 설령 그 출처를 짐작할 수 있다 하더라도 그것이 화면 밖의 소리인 그 순간만큼은 화면 밖의 나머지 모든 세상을 대변한다. 그 세상이 죽음으로 가득 차 있다. 혹스의 어떤 모험 영화도 주인공들에게 이 정도의 위협을 부과한 적은 없다.
소리의 출처 자체를 제거할 수 없다면(이 경우에는 비행을 중단하는 방법 뿐인데, 그것은 또 다른 죽음이니까), 소리에 맞서는 가장 효과적인 방법은 소리다. 보니 리가 바랑카에 들어선 후 처음으로 벌어지는 비행 사고에 관한 장면은 사실상 삶과 죽음을 둘러싼 소리들의 대결로만 이루어져 있다고 해도 과언이 아니다. "나는 저 소리가 싫어."라는 더치의 말이 위기의 시작을 알린다. 혹스는 안개가 짙다는 설정을 통해 아예 시야를 가려버린다. 비행기의 위기는 소리로 전달된다. 모두가 비행장에 나와 귀를 기울인다. 문득 비행사 키드가 술집을 향해 소리친다. "거기 음악 중단하고 조용히 하라고 해!" 무슨 음악? 그러고 보니 긴장이 고조된 후에도 술집에서는 유쾌한 음악이 흘러나오고 있었다. 음악을 중단하라는 키드의 일갈은 역설적으로 눈앞의 위기 상황과는 대비되는 다른 음악의 존재를 일깨워준다. 그 음악이 사라지고 나자 본격적으로 비행기 소리가 상황을 장악하고, 결국 사고로 이어진다. 사고 수습 후 지휘자인 제프와 키드는 사무실로 돌아와 대화를 나눈다. 대화 도중에 다시 술집에서 음악이 들려오기 시작한다. 앞서 사라진 순간 그 존재를 의식하기 시작했기에, 이제 음악은 더욱 뚜렷하게 들려온다. 잠시 후 제프가 술집으로 이동하고, 비행사들은 아무 일도 없었다는 듯 왁자지껄 대화를 나누며 유쾌한 소음을 배가한다. 보니는 이 소란에 항의하다가 술집에서 밀려난다. 그리고는 한결 조용한 가운데 조금 전의 다툼을 반추한다. 마침내 다시 술집으로 들어간 보니는 몸소 악단을 지휘하기 시작한다. 모두가 소리 높여 그 어느 때보다도 크고 활기찬 음악을 들려준다. 우리는 죽음 앞에 힘차게 살아있다고. 땅콩 사려! 땅콩!
이 소리의 편재와 진퇴가, 혹스가 음악을 다루며 빚어낸 숱한 명장면 중에서도 〈천사만이 날개가 있다〉의 "땅콩 장수" 합창 장면을 한층 더 고결한 위치로 끌어올린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