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16 시네바캉스 서울"이 다 끝났으니 조금 더 자세하게 이야기해도 좋겠네요. 저는 존 카펜터 감독의 〈안개The Fog, 1980〉에서 에이드리언 바보가 연기한 스티비 웨인을 참 좋아합니다.

메마르고 단단한 외모에 스티비 웨인이라는 이름을 지닌 그녀는 캘리포니아의 한적한 바닷가 마을 안토니오 베이에서 자기 방송국을 운영하는 지역 라디오 DJ입니다. 방송국 본부가 외딴 등대에 있어서, 웨인은 등대 꼭대기에서 창문 가득 넘실거리는 바다를 바라보며 마을 사람들에게 목소리를 들려주지요. 가끔은 "여기엔 물밖에 없"다며 외로움도 타지만, "그래도 시카고보단 낫지."라며 마음을 다잡습니다. 스티비에게는 아들 앤디가 있고, 앤디의 아버지에 관한 언급은 전혀 없습니다. 스티비가 방송국에 가 있는 동안은 코브리츠 부인이라는 나이 지긋한 베이비시터가 앤디를 돌봐줍니다. 스티비와 앤디, 코브리츠 부인의 관계는 분란 없이 화목합니다.

스티비의 방송은 그리 대단한 방송은 아닌 것 같습니다. 적어도 영화에 묘사되는 것만 보면 그녀의 방송에는 게스트도 없고, 특별 코너도 없습니다. 길고 따사로운 멘트를 들려주는 것도 아닙니다. 음악 사이에 "여러분 듣고 있나요? 달리 할 일이 없으면 저와 함께하시죠." 수준의 멘트를 넣는 정도입니다. 허투루 운영한다는 이야기는 아니고, 방송 로고를 여럿 녹음해 고르는 모습을 볼 수 있기는 하지만, 특별히 우수한 방송을 위해 열을 올리는 것 같지는 않습니다. 스티비는 방송의 내용보다도 자신이 홀로 자신의 방송국을 꾸려나가며 자립하고 있다는 사실 자체에 좀 더 의의를 두고 있을 듯합니다.

아, 스티비가 방송에 관해 자부심을 느낄 만한 요소가 한 가지 더 있습니다. 바로 그녀의 목소리입니다. 방송 중에 스티비는 나지막하고 섹시한 목소리를 사용합니다. 평소 말투와 방송할 때 말투를 비교해보면 스티비가 이 목소리의 효과를 알고 있으며 이를 방송용으로 활용한다는 점은 분명합니다. 방송 도중 기상관측소 직원과 안개에 관해 심각한 대화를 나누다가도 "잠깐만, 방송 좀 하고."라며 다시 마이크를 잡고 섹시한 목소리를 들려줄 정도입니다. 그는 자신의 매력을 이해하고 있고, 이를 주체적으로 활용합니다.

그런 스티비가 안토니오 베이를 덮친 죽음의 안개에 대해 깨닫게 됩니다. 안갯속에 무언가가 있고, 그것이 사람들을 죽입니다. 스티비는 즉시 마을 보안관에게 연락을 취한 뒤 라디오 방송을 통해 자신의 집 주소를 알리고 듣고 있는 사람이 있다면 앤디를 구해달라고 부탁합니다. 이후 제가 가장 좋아하는 대목이 나옵니다. 스티비는 방송을 통해 앤디에게 말합니다. "앤디, 내 말 들리는지 모르겠구나. 가지 못해서 미안하다. 함께 있어 주지 못해서 미안해. 앤디, 이해해주렴. 난 여기 있어야 해." 그러고는 스티비는 방송을 통해 안개의 확산 경로를 알립니다. 어느 길은 이미 안개로 막혔다, 어느 길은 괜찮다, 살아남았다면 어느 곳으로 가라. 최후의 순간 외에는 직접 물리적 액션에 나서지는 않지만, 스티비는 모든 주요 인물을 교회로 모아 클라이맥스에 이르도록 하는 일등공신입니다.

함께 이 영화의 각본을 쓰고 각각 제작과 연출을 담당한 데브라 힐과 존 카펜터의 시선은 존경스럽습니다. 스티비는 혼자서 자신과 아들의 생활을 꾸려나가는 독립 여성입니다. 일에 지나치게 몰두해서, 혹은 남편이 없으므로 어머니로서 부족하며, 따라서 아들과의 사이가 틀어졌다는 묘사는 전혀 없습니다. 그녀는 자신이 직접 집으로 가서 앤디를 구하려고 해봐야 소용이 없으며 등대에 남아 방송을 하는 것이 더 많은 사람을 살릴 수 있는 길이라는 사실을 냉철하게 판단한 후, 자신이 경영하는 방송국과 자신의 목소리를 이용해 마을 사람들을 위기에서 구해냅니다. 이때 데브라 힐과 존 카펜터는 앤디를 죽여 '모성애가 부족한 어머니'인 스티비에게 징벌을 가하지도 않습니다. 물론 모자의 관계는 처음부터 돈독했으므로, 스티비와 앤디가 다시 만나 새삼 가족의 소중함을 깨닫는 일도 없습니다. 스티비는 처음부터 끝까지 스티비답고, 그것이 모두를 살립니다. 지금도 적지 않은 영화들이 비슷한 상황에 부닥친 여성 인물을 자식 목숨 걱정하느라 지나치게 감정적으로 변한 민폐쟁이 아줌마로 그리곤 한다는 점을 떠올리면, 〈안개〉의 담백함은 한층 근사하게 느껴집니다.

모든 위험이 사라진 후, 방송을 통해 안개를 주의하라고 말하는 스티비의 대사는 존 카펜터가 좋아하는 하워드 혹스 감독(의 영향 아래에서 연출을 맡은 크리스천 니비 감독)의 영화 〈외계에서 온 것The Thing from Another World, 1951〉에 바치는 오마주입니다. 하지만 〈외계에서 온 것〉의 남자 기자는 군인과 과학자들의 다툼에서 밀려난 채 구경만 하다가 사건이 모두 해결된 후에야 비로소 냉전 공포를 상기시키는 대사를 읊조릴 따름입니다. 〈안개〉에서 스티비의 목소리는 공포에 대해 경고함과 동시에 사람들이 그 공포와 맞설 수 있도록 길을 안내합니다. 그리고 이때 안개는 안토니오 베이 사람들이 과거에 집단적으로 저지른 죄에서 비롯한 것입니다. 하늘을 조심하라던 〈외계에서 온 것〉의 경고가 미지의 타자에 대한 호전적인 대응을 권장한다면, 안개를 조심하라는 〈안개〉의 경고는 내부의 자성을 요구합니다. 조금 극적으로 말하자면, 스티비는 공동체 내부에서 빛을 밝히는 양심의 수호자인 셈입니다. 저는 하워드 혹스의 열렬한 팬이기는 하지만, 적어도 이 점에 관해서만큼은 존 카펜터가 오마주 이상의 성취를 거두었음을 인정해야겠습니다.

Posted by 거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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