미국 시간으로 오늘이 로버트 드니로의 일흔세 번째 생일이군요. 그리고 올해는 〈택시 드라이버Taxi Driver, 1976〉 개봉 40주년이기도 합니다.

그래서 재미삼아 폴 슈레이더가 쓴 〈택시 드라이버〉 각본 도입부를 번역해보았습니다. 각본을 이렇게도 쓴다는 예로 전부터 소개하고 싶었어요. 저는 세상에서 제일 지겨운 일 중 하나가 영화 각본 읽는 일이라고 생각하는데, 이런 각본이라면 좀 다르지 않을까 싶습니다. 흔히 영화 각본은 그 자체로는 완성된 작품이 아니고 앞으로 만들 영화의 설계도 노릇을 한다고들 합니다만, 폴 슈레이더는 각본 자체를 특정한 규격과 목적에 좌우되지 않는 완결된 창작물로 대했던 모양입니다. 그러고 보니 (별로 관계는 없지만 자신이 가장 좋아하는 영화 세 편에 〈택시 드라이버〉를 넣곤 하는) 쿠엔틴 타란티노도 자기 각본을 독립된 작품으로 여긴다고 들었습니다. 감독으로서 자신이 하는 일은 각본가로서의 자신이 쓴 '원작'을 '각색'하는 거라고 말이지요. 그래서 그는 영화를 발표할 때마다 각본 출간에도 열을 올리고, 은퇴한 뒤에도 소설이나 희곡을 쓸 거라고 했죠.

옮기고 보니 재미있어서 취미 삼아 한두 장씩 번역해서 전체를 다 번역해도 좋겠다고 생각했습니다. 물론 생각으로 끝나겠지만요.

참, 〈택시 드라이버〉는 얼마 후인 8월 23일부터 한국영상자료원 시네마테크 KOFA에서 열리는 "영화와 공간: 마틴 스콜세지 인 뉴욕" 프로그램을 통해 4K 디지털 복원판(4K 디지털 영사)으로 관람하실 수 있습니다. 이미 Blu-ray를 통해 소개됐습니다만, 복원 결과가 무척 좋습니다. 지금 한국에서 보면 더욱 파괴력을 발휘할 만한 영화이기도 하고요. 저는 특히 아래 각본에서 트래비스가 스물여섯 살이라는 점을 강조하고 싶습니다. 산전수전 다 겪고 삶에 지친 중년이 아니라 군대 제대하고 무기력함과 불면증에 시달리며 방향 없는("무엇을 향해 나아가는지는 알 수 없다.") 폭력을 향해 나아가는 이십대 중반 남자라는 얘깁니다. 참으로 친근하지요?

트래비스 비클, 나이 스물여섯, 호리호리하고, 단단하고, 완전한 고독자. 겉보기에 외모는 괜찮다. 잘생겼다고까지 할 수 있을 정도. 조용하고 흔들림 없는 시선에, 상대방을 무장해제하는 미소가 불현듯 번뜩이며 얼굴을 환히 밝힌다. 하지만 그 미소 뒤에서, 어두운 눈 주변에서, 여윈 뺨에서, 평생에 걸친 자신만의 공포, 공허, 고독으로 인해 피어난 불길한 긴장이 느껴진다. 사시사철 차가운 땅을, 거주민들이 좀처럼 입을 열지 않는 나라를 떠돌며 살아왔던 것만 같은 모습이다. 머리가 움직이고, 표정은 변해도, 눈은 늘 미동도 깜빡임도 없이 텅 빈 공간을 꿰뚫어 본다.
지금 트래비스는 뉴욕시의 밤을 더 어두운 그림자 속에 묻힌 그림자처럼 드나들며 떠돌고 있다. 눈에 띄지도 않고, 눈에 띌 이유도 없다. 트래비스는 환경에 녹아든다. 그는 라이더 청바지, 카우보이 부츠, 격자무늬 웨스턴 셔츠와 "킹콩 중대, 1968-70"이라는 패치가 박힌 낡은 베이지색 군용 재킷을 입는다.
그에게서는 섹스의 냄새가 난다. 메스꺼운 섹스, 억압된 섹스, 고독한 섹스지만, 그래도 섹스는 섹스다. 그는 원초적인 수컷의 힘 자체이며, 계속해서 앞으로 나아간다. 무엇을 향해 나아가는지는 알 수 없다. 하지만 더 가까이서 들여다보면 그 불가피한 성질을 깨닫게 된다. 클록 스프링을 끝없이 조여 댈 수만은 없는 법. 지구가 태양을 향해 나아가듯, 트래비스 비클은 폭력을 향해 나아간다.


트레비스가 일자리를 얻다

영화는 맨해튼 택시 차고의 외관에서 시작된다. 진입로 위에 걸린 비바람에 낡은 간판에는 "택시는 이쪽"이라고 적혀 있다. 노란 택시들이 바삐 드나든다. 때는 겨울, 도로 경계석에 눈이 쌓여 있고 바람이 울부짖는다.
차고 안에는 다양한 색깔의 택시들이 줄줄이 주차되어 있다.
택시들이 공회전하는 소리와 기사들의 말소리가 메아리친다. 허연 숨과 배기가스가 허공을 가득 채운다.
택시 회사 사무실 복도. 빼꼼 열린 문에는 다음과 같이 적혀 있다:

- 인사과 -
메이비스 택시 회사
블루 앤 화이트 캡 회사
애크미 택시
믿음직한 택시 서비스
JRB 캡 컴퍼니
스피도 택시 서비스

바쁘게 업무 중인 사무실 소리: 발걸음 소리, 타이핑 소리, 다투는 소리.
인사과 사무실은 뒤죽박죽 난장판이다. "메이비스, B&W, 애크미"라는 머리글자가 적힌 종잇장 등속이 부스러져 가는 석고벽에 기댄 채 쌓여 있다. 때는 3월. 책상은 양식, 보고서, 낡은 업라이트 로열 타자기로 어수선하다.
머리가 헝클어진 중년의 뉴요커가 책상에서 고개를 든다. 그 중년 인사과 직원과 책상 앞에 선 젊은이가 대화하는 모습으로 컷.
이 젊은이가 트래비스 비클이다. 그는 청바지, 부츠, 군용 재킷을 입고 있다. 그가 필터 없는 담배를 한 모금 빤다.
인사과 직원은 진이 빠져 있다. 출근할 때부터 진이 빠져 있다. 트래비스는 그와는 완전히 딴판이다. 그의 강철처럼 강렬한 시선은 인사과 직원조차 뒤흔들어 근무시간의 권태에서 빠져나오게 할 정도다.

인사과 직원: (외화면) 택시국하고는 문제없고?
트래비스: (외화면) 없어요.
인사과 직원: (외화면) 면허증은 있고?
트래비스: (외화면) 네.
인사과 직원: 왜 택시기사가 되고 싶은 거지?
트래비스: 밤에 잠을 못 자서요.
인사과 직원: 그거라면 포르노 극장이 있잖나.
트래비스: 압니다. 해봤죠.
(인사과 직원은 거들먹거리고는 있지만 살짝 호기심을 느끼며 상대를 훑어본다. 트래비스는 차갑고 거리감 느껴지는 암호다. 그는 자기 입이 무슨 말을 하고 있는지 모르는 것처럼 말한다.)
인사과 직원: 그래서 요샌 뭐 하는데?
트래비스: 밤에는 주로 이것저것 타고 돌아다닙니다. 지하철, 버스. 구경하는 거죠. 그럴 바엔 돈도 벌자 싶어서요.
인사과 직원: 우린 부적응자는 필요 없는데.
(트래비스가 입술 사이로 거의 알아볼 수 없을 정도로 엷은 미소를 띄운다.)
트래비스: 농담이죠? 밤에 사우스 브롱스나 할렘에서 택시 몰 사람이 또 있다고요?
인사과 직원: 그럼 자넨 밤에 시 외곽에서 일하고 싶단 말이야?
트래비스: 어디서든 언제든 괜찮아요. 고를 형편 아니라는 거 압니다.
인사과 직원: (잠시 생각하다가) 운전 기록은 어떤데?
트래비스: 깨끗해요. 완전 깨끗하죠. (말을 멈추고 엷은 미소) 제 양심처럼 깨끗해요.
인사과 직원: 이봐, 똑똑한 척 하려면 당장 나가.
트래비스: (사과하는 어조로) 죄송합니다. 그럴 생각은 없었습니다.
인사과 직원: 건강은? 전과는?
트래비스: 역시 깨끗합니다.
인사과 직원; 나이는?
트래비스: 스물여섯요.
인사과 직원: 학력은?
트래비스: 조금요. 여기저기.
인사과 직원: 병무기록은?
트래비스: 1971년 5월 명예제대 했습니다.
인사과 직원: 밤에 부업으로 뛰려고?
트래비스: 아뇨, 긴 근무가 좋습니다.
인사과 직원: (심드렁하게, 거의 혼잣말처럼) 밤에 부업하는 사람들은 여기 많아.
트래비스: 그렇다더군요.
인사과 직원: (트래비스를 올려다보며) 뭐, 우리가 그렇게 깐깐하게 굴진 않아. 항상 들어오고 나가고 하는 거지. (서랍을 뒤져 분홍색, 노란색, 하얀색 양식을 모은다.) 이 양식 작성해서 저기 책상에 앉은 아가씨에게 주고 전화 번호 남기게. 전화 있나?
트래비스: 아뇨.
인사과 직원: 그럼 내일 다시 와.
트래비스: 알겠습니다.

(맨해튼의 밤 풍경 위로 크레딧이 올라간다. 눈은 녹았다. 이제 봄이다.
비가 내려 번들거리고 축축하고 우울한 맨해튼 극장가의 밤. 사방에 택시와 우산이 뒤엉켜 있다. 잘 차려 입은 행인들이 택시를 향해 밀고 달리고 손을 흔든다. 미드타운 쇼를 보고 나온 고급 극장의 고객님들께서는 가난하고 평범한 이들에게 떨어지는 비가 자신들에게도 떨어진다는 사실을 깨닫고 충격을 받는다.
둔탁하게 후드득후드득 떨어지는 빗소리를 배경으로 경적과 고함이 끊임없이 이어진다. 노란색, 빨간색, 초록색 신호가 인도와 자동차에 반사돼 눈부시게 빛난다.
"비 오는 도시에서는 택시기사가 왕." 이러한 택시기사들의 격언은 오늘밤의 활동을 통해 사실로 밝혀진다. 이 난장판 속에 택시들만이 기세등등하다. 그들은 어려움 없이 비와 차량 사이를 뚫고 미끄러지며 자신들이 고른 상대를 태우고, 자신들이 고른 상태를 퇴짜 놓고, 자신들이 원하는 곳으로 간다.
시 외곽으로 더 나가면 군중들은 그렇게 정신 없지도 화려하지도 않다. 비는 거리의 부랑자와 늙은 빈자에게도 떨어진다. 마약중독자들은 비 내리는 길모퉁이에 여전히 서 있고, 창녀들은 비 내리는 인도를 여전히 어슬렁거린다. 그리고 택시들은 그들에게도 서비스를 제공한다. 크레딧이 지나가는 내내 바깥에서 들려오는 소리는 멀리 떨어진 방이나 모퉁이를 돌아가면 나오는 가게에서 들려오는 소리처럼 둔중하게 들린다. 그 소리를 듣는 이들은 안전하고도 특권적인 거리를 확보하고 있다.
맨해튼 밤 생활의 다양한 지층을 살핀 후, 카메라는 그중 한 택시로 다가서기 시작한다. 아마도 트래비스 비클이 운전하고 있을 택시를 향해서. 크레딧이 끝난다.)

왼쪽부터 폴 슈레이더, 마틴 스콜세지, 로버트 드 니로

Posted by 거시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