영화 〈실크 스타킹Silk Stockings, 1957〉이 미국에서 블루레이로 출시된다기에 생각나서.

〈실크 스타킹〉은 에른스트 루비치가 연출하고 그레타 가르보가 출연한 〈니노치카Ninotchka, 1939〉를 50년대 MGM에서 뮤지컬로 리메이크한 작품이다. 물론 루비치 특유의 날카로운 코미디를 기대해서는 안 되며, 무신경하게 성차별적이기까지 하다. 더구나 50년대 MGM 뮤지컬로서도 그리 뛰어난 작품은 아니다. 프레드 아스테어와 시드 채리스라는 할리우드 역사상 가장 우아한 춤꾼들이 출연하여 능숙한 몸놀림을 선보이기는 하지만, 둘의 진면목을 보여준다고 하기는 어렵다.

DVD로 이 영화를 처음 본 이후 꽤 시간이 흐른 지금에 와서 기억에 남는 것은 두 가지다. 하나는 피터 로르. 〈실크 스타킹〉을 처음 보았을 때 나는 아직 피터 로르의 팬이 아니었고 그가 누구인지도 몰랐지만, 땅딸막한 러시아인이 의자와 탁자를 붙들고 주저앉다시피 하여 카자크 춤 비슷한 것을 추는 광경에 어찌나 웃었는지 모른다.

다른 하나는 아래 소개할 "입체음향" 장면이다. 1950년대 할리우드는 TV 보급으로 인한 관객 수 감소를 극복하기 위해 영화관에서만 제공할 수 있는 여러 장치를 고안했다. 관객들에게 "어머, 이 영화는 극장에서 봐야만 해!"라는 인상을 심어주기 위함이었다. 그런 노력의 결과 50년대 할리우드에서는 색채, 와이드스크린, 입체음향을 사용한 영화가 증가하게 되며, 잠시 3D 영화도 유행하게 된다(단, 이 모든 요소는 이 시기보다 훨씬 전에 이미 발명되었다는 점을 짚어 둔다). "입체음향" 장면은 바로 이러한 유행 속에서 탄생했다. 러시아의 유명 작곡가를 꼬드겨 프랑스에서 영화를 만들고자 하는 미국 제작자와 그동안 수중 뮤지컬만 찍다가 이참에 이미지 변신을 꾀하고자 하는 배우가 기자들을 모아놓고는 요즘 관객을 끌어모으는 원동력은 이야기나 배우나 연출이 아니라 색채, 와이드스크린, 입체음향이라며 노래를 부른다. 물론 〈실크 스타킹〉은 실제로 1950년대에 나온 컬러 시네마스코프 입체음향 영화였고, "입체음향" 장면은 재니스 페이지의 의상 색깔, 화면의 가로 폭을 강조하는 안무와 공간 배치, 입체 음향 효과를 보란 듯이 전시하며 가사의 내용을 표현 양식에도 반영한다. 할리우드 특유의 뻔뻔한 자기 풍자 겸 자기 과시다.

한편 〈실크 스타킹〉은 아스테어가 MGM에서 찍은 마지막 뮤지컬이기도 했다. "입체음향" 장면의 가사 중에는 예전에는 파트너와 뺨과 뺨을 맞대고 친밀하고 가벼운 춤을 추었지만 이제는 엉덩이를 뒤로 쭉 빼고 무릎으로 미끄러져야 한다는 대목이 있는데, 여기서 "뺨과 뺨을 맞대고(cheek to cheek)"라는 표현은 물론 아스테어가 30년대에 진저 로저스와 함께 출연한 대표작 〈탑 햇Top Hat, 1935〉에 나오는 "뺨을 맞대고" 장면에 대한 인용이다. 20년이 넘게 할리우드 뮤지컬의 태산북두였던 배우가 할리우드에서 뮤지컬을 가장 잘 만들던 스튜디오에서 출연한 마지막 작품에서 영화 제작자를 연기하며 자기 스타일의 춤은 수명이 다했다는 가사의 노래를 웃으면서 부른 다음 정말로 떠나버렸다니. "입체음향" 장면이 애초에 의도했던 것 이상으로 쓰디쓴 자기반영성이 아닐 수 없다. 할리우드에서 한 시대는 이런 식으로 끝나곤 했다. 쾅 소리가 아닌 웃음과 함께.

Posted by 거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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