특히 최근 영화계의 '시네 토크' 유행을 생각해 보면, 아마도 많은 관객이 쿠로사와 키요시 감독의 〈거미의 눈동자蜘蛛の瞳, 1998〉 같은 영화야말로 '평론가'의 '해석' 또는 '분석'이 필요한 영화라고 생각하겠거니 싶다. 전개가 생뚱맞아 뭐가 뭔지 알 수 없고 때로는 웃기기도 한데, 그렇다고 마음 놓고 코미디라고만 여길 수는 없는 진지한(≒느린) 분위기가 있고, 일견 의미심장하게 들리는 대사도 있고, 거기에 감독도 전세계적으로 유명한 감독이라고 하니까, 그렇다면 여기에는 눈에 보이는 것과는 다른 어떤 '상징'이 있을 것이며, 그 상징의 심오한 '의미'를 깨달을 수 있다면 이 영화를 제대로 '독해'할 수 있을 테고, 그것이야말로 평론가의 역할이라는 식으로 말이다. 청부살인 조직의 두목이 화석 애호가라는 설정에는 어떤 의미가 있죠? 조직의 중간 관리자는 왜 니지마를 인터뷰하면서 뜬금없이 실내에서 우산을 쓰나요? 하얀 천으로 감싼 말뚝이 상징하는 바는 뭐죠?

그렇게 하나씩 의미를 부여하여 일관된 서사를 확정하고 머릿속에 욱여넣은 다음 '아, 나는 인제 〈거미의 눈동자〉가 무슨 말을 하려고 하는지 깨달았다.' 라고 자족하는 감상법도 있을 테지만, 아니, 그게 아직도 보편적인 영화 감상이 지향하는 바일 테지만, 나로서는 쿠로사와가 일견 서사가 뚜렷한 장르 영화나 의미 체계가 분명한 극영화를 만드는 듯하면서도 쉽사리 그러한 범주에 붙잡히지 않고 영상 자체의 형상이 지닌 즐거움을 바탕으로 거듭 달아나는 모습 속에서 쉽게 닳지 않는 기쁨을 느낀다. 청부살인 팀의 지휘자 이와사키는 왜 자신의 팀원에게 롤러스케이트 타는 연습을 해두라고 했나? 청부살인 조직 안에서 권태를 느끼며 지금의 삶에서 벗어나고 싶어하는 이와사키 내면의 욕망이 롤러스케이트라는 형태로 나타났다고 '해석'해야 할까? 부하들 또한 결국 자신과 같은 기분을 느끼며 비슷한 처지에 처하리라는 예감에 미리 연습해두라고 했다고? 헛소리다. 알게 뭔가. 그렇게 팔짱 끼고 잘난 척하면서 서사 안으로 포섭해서 설명할 일이 아니다. 쿠로사와의 롤러스케이트에는 다만 이름뿐인 텅 빈 사무실을 끊임없이 오가는, 그 자체로는 아무런 의미도 담고 있지 않은 운동이 눈과 귀에 전달하는 자극이 빚어내는 그 자체의 유쾌만이 존재한다. 영화 전체가 그런 식이다. 이름뿐인 무역 회사 사무실에서 이 살인자들이 할 일이 있을 리가 없다. 그래도 한 녀석은 롤러스케이트를 타며 방을 드나들고, 니지마는 존재 이유를 알 수 없는 서류에 착실하게 도장을 찍고, 그 옆으로 다시 이와사키와 다른 팀원이 들어와 아무런 인사도 잡담도 설명도 없이 제각각 자리에 앉아 무언가에 열중하는 장면이 전달하는 벙찌는 운동의 노골적으로 무의미한 즐거움을 어떻게 의미화하여 설명할 수 있을까. 그 장면의 길이가 적절함을 이론으로 해명할 수 있을까. 때로는 〈포인트 블랭크Point Blank, 1967〉를, 때로는 〈순응자Il conformista, 1970〉를, 아마도 〈소나티네ソナチネ, 1993〉를, 그리고 자신의 전작 〈뱀의 길蛇の道, 1998〉까지 인용해 가며 복수심이 하얗게 불타고 아무것도 남지 않은 남자가 청부살인자로 전직하여 겪는 사건에 관한 이야기를 들려주는 척하고 있지만, 이 영화는 장르 기표로 표면을 장식해놓았을 뿐 실제로는 어떤 기의에도 몰두하지 않은 채 다만 영상를 실시간으로 목격하는 순간에만 누릴 수 있는 움직임과 침묵을 음미한다. 공허는 새로운 것의 시작이라고 강조하는 두목의 뜬금없는 일장연설 역시 화석의 상징 의미라든가 복수 이후 허무해진 니지마를 두고 하는 말이라기보다는 차라리 불현듯 의미 체계에서 벗어나기 위해 몸부림치는 영화 자체를 두고 하는 말은 아닐지. 이건 영화에서 서사가 애당초 무의미하다거나 필요 없다거나 배제해야 한다는 주장은 아니다. 오히려 더듬어볼 수 있는 서사가 있어야 거기에 복무하기보다는 탈주하고자 하는 영화=움직이는 영상의 역동성을 실감할 수 있는 법. 〈거미의 눈동자〉는 서사가 낡은 관습을 따라 부서져 나가 막을 내릴 때까지 좌충우돌 내달리며 시선을 분산시키고 의미로부터의 탈주 자체를 즐기기 위해 만든 영화 같다.

(그러고 보면 예전부터 쿠로사와가 장-뤽 고다르를 좋아했다는 말을 들으면 나로서는 도저히 이해할 수도 즐길 수도 없는 고다르에게서 그는 무엇을 보는 걸까 궁금했는데, 오랜만에 〈거미의 눈동자〉를 다시 보면서 문득 나도 이제는 고다르의 초기작들을 즐길 수 있을지도 모르겠다는 생각이 들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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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보다 앞서 만든 〈뱀의 길〉은 한결 서사가 뚜렷하다. 영문 리뷰를 몇 찾아보니─영어권에서도 별반 유명하지 않기는 마찬가지지만, 2013년에 영국에서 NTSC 방식의 합본 DVD가 출시되면서 타이틀 리뷰가 몇 개 나왔다─〈거미의 눈동자〉에 대해서는 대충 말을 흐리며 얼버무리고, 〈뱀의 길〉에 대해서는 손에 땀을 쥐는 뒤틀린 스릴러라는 식으로 소개하는 경향이 보인다. 여기나 저기나 다들 보는 눈은 비슷하구나 싶다.

확실히 〈뱀의 길〉은 인물과 서사만을 따라가도 재미있다. 범죄 조직에게 딸을 잃은 미야시타는 동료 니지마와 함께 복수의 길에 나선다. 하지만 누구에게 책임을 물어야 하는지는 생각만큼 명확하지 않고(이것도 〈포인트 블랭크〉가 떠오르는 대목이다), 단숨에 끝날 것만 같았던 일이 점점 커지는 가운데 니지마와 미야시타 각자가 간직한 비밀이 서서히 드러난다. 분위기가 음침한 것치고는 유머도 풍성한데, 그렇다고 〈거미의 눈동자〉처럼 서사 세계(디제시스)를 허물어뜨리는 유머는 아니다. 결말까지 무슨 일이 왜 어떻게 벌어졌는지 설명하기도 어렵지 않다. 또 명확하지 않은 부분이 있다고 해도(결국 미야시타의 딸을 죽인 것은 누구인가?) 서사를 흔들리게 하지는 않는다.

그렇다고는 해도 〈뱀의 길〉이 훌륭한 범죄 영화라고만 말하는 건 비겁하다. 여기에도 장르 관습이나 서사만으로는 설명하기 어려운 부분이 있다. 니지마는 미야시타를 도와 범죄 조직의 일원을 납치해서 고문하는 와중에도 자신의 일상을 유지한다. 그는 학원 선생이다. 아니, 학원 선생이라는 말도 편의상의 표현에 불과하다. 영화는 그가 정확히 어디서 뭘 하는 사람인지 알려주지 않는다. 니지마는 납치한 자를 가둬놓은 창고에서 나와 자전거를 타고 어디론가 향한다. 그가 도착한 곳은 '학생'들이 기다리는 '교실'이다. 널찍한 방에 책상과 의자와 칠판이 갖춰져 있다. 인사도 없고, 수업 내용에 대한 설명도 없다. 니지마는 다짜고짜 칠판에 어떤 수식을 적은 다음, 학생들에게 수식을 전개해보라고 말한다. 이 수식이 어떤 수식인지는 알 수 없다. 마침 해당 분야에 대한 사전 지식을 갖춘 관객이 있다면 모를까, 적어도 다수 관객이 자연스럽게 눈치 챌 수 있는 수식은 아니다. 어쩌면 존재하지 않는 분야, 존재하지 않는 수식을 멋대로 그럴 듯하게 칠판에 끼적이고 있는지도 모른다는 의심이 든다. 니지마의 수업 장면은 여러 차례 등장하지만, 그가 무엇을 가르치는지는 끝내 밝혀지지 않으며, 범죄와 관련된 중심 플롯과도 아무런 관련이 없다. 이해할 수 없는 수식을 제외하면 단서는 하나뿐이다. 니지마는 한 학생의 풀이를 보고 말한다. "오카바야시, 그러면 안 돼! 그렇게 하면 공간이 뒤집어지고 시간이 거꾸로 흐른다고. 세계가 붕괴하고 말아. 너는 신이 아니잖아. 잘 봐, 이렇게 하는 거야." 니지마는 세계의 운행을 연구하는 자인가?

그런 추론과 의미 부여도 재미는 있지만, 사실 내가 정말 재미있다고 생각하는 건 이 수업 장면을 어쩌면 지나칠 정도로 진지하게 묘사하는 쿠로사와의 태도다. 수강생 중에는 아마도 영재인 듯한 소녀가 있다. 소녀는 니지마가 내는 문제를 매번 빠르고 완벽하게 풀어낸다. 심지어 니지마가 틀린 부분을 고쳐주기도 한다. 한 장면에서, 소녀와 니지마는 함께 칠판 앞에 서서 주거니 받거니 즉흥 연주를 벌이는 재즈의 대가들마냥 수식을 전개한다. 이때 칠판은 작고, 소녀와 니지마는 자신들의 풀이를 다른 사람들에게 보여주려 노력하지 않는다. 두 사람의 몸이 수식을 가린다는 얘기다. 더구나 칠판이 높지도 않고 책상이 높이차를 두고 배치된 것도 아니라서, 뒤쪽에 앉은 학생의 시야는 좁을 수밖에 없다. 서서히 뒤쪽에 앉아 있던 학생들이 하나둘 노트를 들고 칠판 앞에 와서 수식을 베껴 적기 시작한다. 모든 배우/캐릭터가 진지하지만, 사실 이건 정말 웃긴 광경이다. 대체 이 장면의 '의미'는 무엇인가? 소녀와 니지마의 학업성취도가 다른 학생들보다 한참 앞서있음은 이미 이전 장면들을 통해 충분히 제시됐다. 〈뱀의 길〉은 천재의 학문적 성장에 관한 할리우드 영화가 아니며, 소녀와 니지마의 학문이 일취월장하여 새로운 경지를 개척했고 주변 사람들이 그들을 우러러보게 됐다는 식의 전개에도 아무런 관심이 없다. 이미 말했듯 관객은 수식을 읽어낼 수 없으며, 그 수식이 어떤 분야에 해당하는지조차 알지 못한다. 정말이지 '흰색은 글씨요, 녹색은 칠판'일 뿐이다. 그런데도 배우들이 노트를 들고 앞으로 나아와 뭔지 알 수 없는 글씨를 옮겨적는 모습을 진지하게 담아낼 때, 촬영 현장의 모습을 상상하지 않을 수 없다. 다시 정리해보자. 수식이 이 영화의 서사 안에서 갖는 의미는 없다. 심지어 진짜 수식인지도 알기 어렵다. 그나마 실재하는 학문 분야라면 배우들은 자신이 무얼 하는지 최소한의 인식이라도 있었을 테지만, 만약 그것이 아무렇게나 그어댄 표시에 불과하다면, 결국 현장의 모두는 아무런 의미도 없는 무언가를 하는 시늉을 하고 있을 뿐이다. 여기에서 뚜렷한 것은 오직 교실과 책상과 의자와 시선과 몸이 만들어내는 물리적 제약과, 그 제약을 극복하기 위한 움직임뿐이다. 쿠로사와는 그걸 기록하고 있다. 마치 〈거미의 눈동자〉 속 사무실 장면에서 아무 의미도 없는 행동을 매우 열심히 해내는 네 배우의 운동을 기록하듯이. 의미는 과소하고 존재는 과다하다. 쿠로사와는 그렇게 자꾸만 서사 안의 의미와 게임을 벌이며 관객의 지각을 서사 세계 바깥으로 향하게 한다.

내가 좋아하는 대목 하나 더. 미야시타와 니지마는 납치 목표를 창고로 끌고온다. 끌려온 자는 허세를 부리며 미야시타를 도발한다. 니지마가 다짜고짜 권총을 쏘아 상대를 질리게 한 다음 말한다. "여기는 방음 처리가 돼 있어. 힘껏 소리 질러봐야 아무도 못 들어." 이 대사는 듣는 순간 웃음이 새어나온다. 보통 영화에서는 방음 처리가 된 공간을 묘사할 때 그것을 시각적으로도 강조한다. 공간 자체가 너무 커서도 안 되고, 창문도 없고, 벽도 두껍고, 벽 안쪽에 방음재도 있고, 출입문도 두껍고, 문틀을 비롯해 소리가 새어나갈 수도 있겠다 싶은 부분들은 특히 든든히 틀어막는다. 〈뱀의 길〉은 이중 어떤 것도 하지 않는다. 일단 창고가 너무 커서 소리가 잘 울린다. 불투명창으로 보이기는 하지만, 창고 사방에 커다란 창문도 나 있다. 벽이 특별히 두꺼워 보이지는 않는다. 방음재는 눈을 씻고 봐도 찾아볼 수 없다. 공간 구조를 볼까. 포로를 묶어두는 커다란 창고가 있고, 거기서 바로 문으로 이어지는 관리실 같은 공간이 있고, 다시 관리실에서 밖으로 나가는 출입문이 있다. 창고-관리실을 잇는 문과 관리실-바깥을 잇는 문 모두 평범 그 자체다. 심지어 창고-관리실을 잇는 문은 거의 열어두어 언제든지 포로가 소리치는 것을 들을 수 있게 해두었다. 관리실에서 바깥으로 나갈 때도 소리가 새어나가지 않도록 창고와 이어지는 문을 닫아두는 꼼꼼함 따위는 찾아볼 수 없다. 그러므로 "여기는 방음 처리가 돼 있어. 힘껏 소리 질러봐야 아무도 못 들어."라는 대사를 듣는 순간, 적당히 촬영에 쓰기 좋은 창고를 구해다 놓고 굳이 방음 처리를 시각적으로 구현할 생각도 하지 않은 채로 여기는 방음이라고 우기고 있는 쿠로사와의 B무비스러운 뻔뻔함을 의식하게 된다.

그런데 이건 딱 봐도 말이 안 되는 상황을 대사로 대충 우기고 넘어간다는 비웃음은 아니다. 오히려 이곳이 방음 공간이라고 우기더라도 그 주장을 아슬아슬하게 받아들일 만하다는 사실, 연출자의 그 아슬아슬한 대담함이 '그것참 걸작인걸!' 하는 긍정적인 웃음을 끌어낸다. 쿠로사와가 창고를 방음 공간처럼 보이도록 하려는 노력을 기울이지 않는 건 사실이다. 하지만 그렇다고 여기가 방음 공간일 리 없다는 허점을 드러내지도 않는다. 허허벌판에서 "여기는 방음 처리가 돼 있어." 라고 말하면 그건 바보스럽다고 비웃을 만하다. 하지만 낡아 보일지언정 외부와 직접 연결된 모습은 보이지 않는 창고 안에서 "여기는 방음 처리가 돼 있어."라고 주장한다면 그럴 리가 없다고 반박하기 쉽지 않다.

쿠로사와의 뻔뻔한 방음 처리에 관해 생각하다보면 매우 당연한 사실에 이르게 된다. 영화에서 방음 공간 묘사는 시각적인 것과는 거의 상관없으며, 실은 매우 구현하기 쉽다는 사실이다. 방음 공간은 어떻게 생겨나는가? 시각적으로는 방음 공간에 눈에 띄는 허점만 만들지 않으면 된다. 앞서 거론한 '여기는 방음 처리 됐음'이라는 기표를 일일이 챙기지 않아도 된다. 그런 다음 그 안에서는 무슨 소리를 내더라도 상관없다. 카메라가 바깥으로 나가지 않는 한, 관객은 방음 여부를 확인할 수 없다. 또 바깥으로 나가더라도 어려울 것 하나 없다. 방음 공간 안에서 들리던 소리를 들려주지 않으면 그만이다. 섬세하게 연출하려면 바깥의 소리는 남겨둘 수도 있겠지만, 기본적으로는 그냥 영상 위에 얹은 음향을 빼기만 하면 된다. (자크 타티는 〈플레이타임Playtime, 1968〉에서 이걸 개그로 활용한다.) 즉, 영화에서 방음은 공간을 그럴 듯하게 보여주는 것보다는 서사 세계 바깥에서 이루어지는 음향 조작에 달린 문제다.

생각을 더 연장해 보면, 역설적으로 그러므로 영화에서 '진짜' 방음 공간을 있는 그대로 제시하기란 불가능함을 알 수 있다. 영화의 가장 기본적인 형태를 일정 시간 동안 카메라 앞의 대상을 촬영하여 필름 위에 남긴 기록이라고 생각할 때, 화면에 보이는 모든 피사체는 한때 진짜 거기에 있었던 대상의 형상임을 확신할 수 있다. 그러나 음향은 언제나 출처가 불분명하며 덧입혀진 것이다. 심지어 현장에서 동시 녹음을 한 음향조차 영상 위에 덧입혀진다. 그것이 동시 녹음이라는 사실은 만든 사람의 주장을 통해서만 확인할 수 있을 뿐, 영화를 보는 동안에는 어떤 방법으로도 확인할 수 없다. 따라서 진짜 방음 공간이 있고 그 방음 공간의 안팎을 동시 녹음을 이용해 기록한다고 하더라도, 영화를 보는 관객은 그것이 진짜 방음 공간이라고 말할 수 없다. 영화에서 진짜 방음 공간의 재현은 불가능하다. 방음 공간은 언제나 영상과 음향의 접합을 통해 만들어진 것이다. 나는 물론 지금 하스미 시게히코의 「허구와 '재현 불가능한 것': 모든 영화는 무성영화의 변주에 불과하다」를 떠올리고 있다.

마침 〈뱀의 길〉에는 방음 공간이 제기하는 영상과 음향의 분리에 관한 문제와, 하스미가 논문에서 제기한 비극의 불완전한 재현이라는 문제를 한데 모아놓은 듯한 설정도 있다. 미야시타는 자신의 딸을 죽인(죽인 것으로 추정되는) 자를 납치해다 묶어놓고 TV를 끌고 와서 딸이 놀이터에서 뛰노는 모습이 담긴 홈비디오를 틀어준다. 이 홈비디오 영상에는 음향이 없다. 그 영상을 틀어놓은 상태로, 미야시타는 딸의 인적사항과 사망 당시 사체의 상태를 기록한 보고서를 읽어준다. 말하자면 미야시타는 서로 의미하는 바가 다른 영상과 음향을 즉석에서 합성하여 몽타주 효과를 노리는 감독의 역할을 수행하고 있다. 아마도 포로에게 네놈이 죽인 내 딸은 이런 아이였다, 이렇게 (보다시피) 아름답고 천진난만한 아이를 이렇게 (듣다시피) 끔찍하게 살해한 너의 죄를 느껴봐라, 라는 의도일 것이다. 이 의도는 전혀 먹히지 않는다. 나중에 포로는 이 영상과 보이스 오버 내레이션을 너무 많이 보고 들은 탓에 지겹다는 듯한 표정까지 짓는다.

여기서부터 스포일러. 미야시타의 딸을 죽인(죽였다고 추정되는) 자들은 몸값을 노린 협박범이나 아동성애자 혹은 살인범이 아니라 스너프 필름 전문 제작업자들이었다. 미야시타는 원래 그 스너프 필름을 판매하는 판매사원이었다. 그리고 니지마 또한 같은 업자들에게 딸을 잃었다. 미야시타의 복수라고 생각했던 것은 사실은 니지마의 복수였다. 미야시타를 제외한 모든 제작업자들이 죽자, 니지마는 이번에는 미야시타를 같은 창고에 감금한다. 미야시타는 자신은 비디오를 팔기만 했을뿐, 내용물은 뭔지도 몰랐다고 주장한다. 그러자 니지마는 미야시타가 했던 대로 TV를 끌고 온다. 자기 딸의 생전 모습을 보여주어 죄책감을 유발하게 하려는 걸까? 아니다. 니지마는 그런 게 통하지 않는다는 걸 알고 있다. 니지마가 미야시타에게 보여주는 것은 미야시타의 딸이 죽어가는 모습을 담은 스너프 필름이다. 이 스너프 필름에는 음향이 딸려나온다. 살해당한 딸에 관한 서사를 만들어서 들려주던 미야시타는 처음으로, 딸의 살해 광경을 눈과 귀로 직접 마주한다.

어차피 그것도 영화 안의 소리이니 분리된 영상과 음향을 붙여 만든 거짓 세계의 형상 아닌가. 그렇지만 여기서 쿠로사와는 음향을 묘한 방식으로 사용한다. 스너프 필름이 시작된다. 누군가가 들고 있는 카메라가 움직이고, 발소리가 들린다. 그러므로 아마도 이것은 비디오 촬영자가 녹음한 현장의 음향일 것이다. 그런데 이 폐공장의 공간음을 담는 것 같던 이 음향이 점점 공명하고 증폭하면서 서사 세계 바깥으로 번져나온다. 그러면서 영화는 스너프 필름의 내용을 보여주는 대신, 그걸 보는(카메라를 보는) 미야시타의 얼굴을 보여준다. 미야시타의 반응은 매우 신기하다. 그는 딸이 살해당하는 모습을 보고 싶지 않아했다. 그런데 여기서 그는 눈을 부릅뜬 채로 귀만 막고 있다. 소리를 막아야 이 영상이 가짜가 된다는 듯이. 하지만 소리는 이미 서사 세계 바깥의 존재가 되었으므로, 서사 세계 안의 캐릭터인 그는 막을 수 없다. 결국 그는 귀를 막고 있던 양손을 내린다. 카메라를 정면으로 응시하면서, 들릴 리 없는 소리를 듣는 것처럼. 서사 세계 바깥을 대면하게 된 것처럼.
Posted by 거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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