오늘부터 한국영상자료원 시네마테크 KOFA에서 시작한 "영화와 공간: 우디 앨런의 뉴욕" 상영작 중 〈맨하탄 살인사건Manhattan Murder Mystery, 1993〉과 〈브로드웨이의 대니 로즈Broadway Danny Rose, 1984〉를 보고 왔다. 딱히 우디 앨런을 좋아하지도 않는 데다 요즘은 시네마테크 서울에 가서 간절히 보고 싶었던 영화를 볼 때도 틈만 나면 졸 정도로 몸이 좋지 않아서 망설였지만, 〈맨하탄 살인사건〉은 어쩐지 예전부터 보고 싶었던 영화였음을 떠올리며, 또 집에 있어봐야 내가 하리라 생각했던 일은 안 하고 빈둥거리기나 하지 않겠느냐고 자신을 다그치며, 온 힘을 끌어모아 집을 나섰다. 좋은 결단이었다.

화요일 낮인데도 사람이 많아서 깜짝 놀랐다. 줄을 서고 얼마 지나지 않아 지금부터는 곧 시작할 〈맨하탄 살인사건〉 표만 발권하겠다는 안내도 나왔다. 시간이 좀 더 지나자 좌석 선택도 못 하게 하고 사람 수에 따라 표를 나눠주기 시작했다. 평소 관객이 몰리지 않는 영화를 보거나 미리 표를 사두는 편이라서 지금껏 몰랐는데, 원래 사람이 많이 몰리면 상영 시작 10분 전부터는 이렇게 임의로 좌석을 배정한 표를 주며, 이렇게 받은 표로는 꼭 지정된 좌석에 앉을 필요는 없고 그냥 빈자리를 찾아 앉으면 된다고 한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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왜 〈맨하탄 살인사건〉을 보고 싶어했을까? 별다른 이유가 있어서는 아니다. 예전에 우연히 본 이 영화 포스터가 마음에 남았다. 그리고 지금보다도 우디 앨런을 몰랐을 뿐만 아니라 미스터리에 관해서도 잘 몰랐던 시절, 코미디만 만드는 줄 알았던 감독이 살인 사건에 관한 영화를 만들었다는 이야기를 듣고 한번 보고 싶다 생각한 적도 있었다. 돌이켜 보면 무지에서 비롯한 호기심이었고, 이제는 그 사실을 알 정도로 성장하기도 했지만, 그래도 충족되지 않은 호기심은 관성으로 작용했다. 같은 이야기를 거꾸로 하자면, 그사이 나는 우디 앨런의 다른 영화를 몇 편쯤 보고는 이 사람에게는 별로 정이 가지 않는다고 잠정 결론을 내려둔 상황이었고, 남은 건 관성뿐이었다. 그런 연유로 상영관에 들어설 즈음에는 말로만 살인사건을 다룰 뿐, 본령은 뉴욕 남성 중산층 지식인의 신경쇠약과 자조와 오만을 사방으로 휘두르는 〈애니 홀Annie Hall, 1977〉 비슷한 코미디가 펼쳐지겠거니 짐작하고 있었다. 볼 때는 이럭저럭 재미있게 볼 테지만, 영화가 끝난 뒤에는 별다른 호감이나 애정을 느끼지 못한 채 금세 잊어버리겠지.

〈맨하탄 살인사건〉은 그런 마음의 벽을 허물고 들어오는 영화였다. 우선 〈애니 홀〉과 비슷한 세계를 그리리라는 예상은 맞았지만, 우디 앨런이 한 발 뒤로 물러난 가운데 아마추어 탐정 다이앤 키튼이 사건을 주도한다는 점이 즐거웠다. 그제야 과거 〈애니 홀〉이나 〈맨하탄Manhattan, 1979〉를 보면서는 소심하고 결점 많고 나약한 척 굴면서도 여자들에게 떼를 쓰고 윽박지르고 자신의 의지를 관철하고 그 위에 낭만의 불까지 지피는 이 신경질적인 남자에게 무의식적으로 거부감을 느끼고 있었는지도 모르겠다 싶었다.

미스터리 요소가 생각보다 강하다는 점도 반가웠다. 미스터리를 핑계 삼아 장광설을 늘어놓으며 웃음을 유발하여 관객의 환심을 사리라는 예상과는 달리, 영화는 제법 장르 미스터리다운 구석이 있었다. 미심쩍은 조각들을 굳이 살인사건의 증거로 읽어내고자 하는 다이앤 키튼의 강박은 〈이창Rear Windows, 1954〉을 필두로 〈확대Blow-Up, 1966〉나 〈대화The Conversation, 1974〉를 은근슬쩍 떠올리도록 하면서 궁금증을 자아냈다. 미스터리로서 공정하다고 말하기도 어렵고, 사건에 관한 해명이 전부 명료하다고 할 수도 없지만, 적어도 수사 과정에서 새로운 단서가 나옴에 따라 상황을 거듭 다시 추리하도록 유도하며 이후 전개를 갈망하도록 이끄는 힘은 있었다. 다이앤 키튼이 일종의 하드보일드 탐정처럼 발로 수사해놓은 내용을 정리하면 안젤리카 휴스턴이 안락의자 탐정처럼 추리를 늘어놓는 대목은 미스터리 팬을 웃음짓게 했으며, 사건의 진상을 해설하는 대목은 화룡점정이었다. 더구나 우디 앨런은 나름의 방식으로 주류 스릴러의 서스펜스 문법도 반영하고 있다. 아마도 장르에 대한 의식에서 비롯한 것으로 보이는 핸드헬드 촬영과 줌의 적극적인 활용도 효과적이었다. 심지어 한 장면에서는 공포 영화를 방불케 하는 연출까지 확인할 수 있었고 관객들이 짧게 비명을 지르기까지 했다. 통상 '우디 앨런 영화'를 보며 기대할 만한 반응은 아니라서 더욱 즐겼다.

미스터리 요소가 점차 다이앤 키튼-우디 앨런 부부(그러고 보니 이 사람들은 도무지 캐릭터 이름으로 부르고 싶지 않다)의 관계를 뒤흔들고 아슬아슬한 외도의 문을 열어놓으며 로맨스로 이어지는 흐름도 자연스러웠다. 네 중심 인물이 살인사건을 핑계로 개똥철학을 늘어놓으며 삼천포로 빠져 연애에 골몰하는 이야기가 아니다. 살인사건(의 가능성)이 일상에 던지는 흥분이 곧 로맨스의 원동력이다. 다이앤 키튼과 앨런 알다는 성실한 아마추어 탐정이고, 사건을 수사하러 만났을 때는 정말로 수사에 필요한 일을 한다. 하지만 두 사람이 한 자리에서 같은 주제에 관해 토론하고 같은 행동을 하며 함께 시간을 보낸다는 사실 자체가 일종의 데이트요, 외도가 된다. 이걸 당사자도 알고, 우디 앨런도 알고, 관객도 안다. 이 의식은 부부/연인 관계에 관한, 심각하지는 않으나 유효한 질문으로 이어진다. 안정적인 관계(그런 것이 있다면)에 이른 커플은 처음의 흥분을 유지할 수 있나? 일상은 범속하고 지루할 수밖에 없나? 흥분은 파트너 자체에서 나오는가, 상대가 누구든 같은 행동을 하며 시간을 공유한다는 데에서 나오는가? 사건의 수사가 질문을 야기한다. 사건의 종결이 질문을 무마한다. 외적 갈등과 내적 갈등의 결합은 할리우드 영화에서 흔한 구조이기는 하지만, 우디 앨런의 중산층 지식인 사회가 미스터리 장르와 접붙자 만족감이 유달리 컸다. 아마추어 탐정의 미스터리와 로맨스를 결합한다는 점에서는 프랑수아 트뤼포의 유작 〈신나는 일요일!Vivement dimanche!, 1983〉 생각도 잠깐 났다.

더불어 〈맨하탄 살인사건〉은 예상치 못했던 영화광 영화이기도 했다. 〈이창〉과의 관계는 이미 이야기했다. 그밖에 뜬금없는 〈이중 배상Double Indemnity, 1944〉 인용도 반가웠다. 무엇보다도 결말을 장식하는 모 영화를 향한 오마주는 취향을 정통으로 때리는 데가 있었다. 그래, 난 취향이라는 단어를 무척 기피하지만, 이럴 때는 취향이라고밖에 할 수 없다. 〈카이로의 보라색 장미The Purple Rose of Cairo, 1985〉처럼 대놓고 스크린 안팎을 오가며 "영화!"를 부르짖는 영화를 보면서도 미적지근한 감상에 젖는 정도였는데 말이지. 오히려 〈맨하탄 살인사건〉의 오마주는 굳이 필요하지 않은 상황에서 느닷없이 터져 나왔기에 더 깊이 파고들었는지도 모른다. 더구나 영화사에 길이 남는 걸작에 고개를 숙이면서도 열화 복제로 모욕을 안기지는 않는 방식의 오마주였으니. 그나저나 해당 장면에서 새삼 다시 느꼈지만, 우디 앨런은 은근히 특수효과를 잘 쓰는 감독이다. 〈카이로의 보랏빛 장미〉도 그렇고, 이번에 상영하는 뮤지컬 〈모두들 나는 당신을 사랑한다 말하죠Everyone Says I Love You, 1996〉에 나오는 한 장면도 그렇고, 작은 특수효과 아이디어를 예상치 못한 순간에 정확하게 구사하여 마술처럼 보이도록 하는 실력이 있다.

나는 여전히 〈맨하탄〉의 흑백 시네마스코프 화면을 떠올릴 때마다 가슴벅찬 기분을 느낀다. 〈맨하탄〉은 오프닝만으로도 우디 앨런의 가장 훌륭한 영화로 꼽을 만하다. 그러나 그 영화가 거장─고든 윌리스─의 기예에 대한 존경심을 불러일으킨다면, 〈맨하탄 살인사건〉은 마음속에 친구의 선물처럼 간직하고 싶어진다. 적어도 그 뜻밖의 선물이 우디 앨런을 향한 나의 성급한 거부감을 누그러뜨렸음은 분명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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원래는 〈맨하탄 살인사건〉만 보고 귀가하려 했는데, 영화가 워낙 만족스러웠던데다 다음 영화인 〈브로드웨이의 대니 로즈〉의 상영 시간이 90분이 채 되지 않기에 한 편 더 보기로 했다. 브로드웨이의 공연 매니저 대니 로즈가 최근에 다시 뜨기 시작한 담당 가수 루 카노바의 공연을 준비하면서 루의 애인인 티나를 데려오는 길에 벌어지는 이야기. 마틴 스콜세지의 〈일과 후After Hours, 1985〉처럼 일이 엉망진창으로 꼬여가는 와중에 대니 로즈가 가수의 애인과 사랑에 빠지는 뭐 그런 전개 아닐까.

냉정하게 말하자면, 상영관 안이 더운 탓도 있었겠지만, 〈브로드웨이의 대니 로즈〉는 〈맨하탄 살인사건〉만큼 상영 시간 내내 푹 빠져들어 보지는 않았다. 장르를 대하는 온도 차이도 있었을 테고, 〈맨하탄 살인사건〉 쪽이 사건의 흐름을 촘촘히 엮어내며 흐름을 가속하는 솜씨가 더 나았다. 개그도 더 효과적이었고. 아, 뒤에 이야기하겠지만 한국어 자막 품질 차이도 어느 정도 영향을 끼쳤겠구나.

그렇지만 정신없는 요절복통 모험담을 자제한 대신 얻어낸 이 영화의 후반부는 지금까지 본 그 어떤 우디 앨런 영화보다도 심금을 울렸다. 여기서도 우디 앨런은 신경쇠약 직전에 놓인 수다스러운 남자를 연기하지만, 대니 로즈는 자신의 고객을 위해 온몸을 바치는 인물이다. 물론 그 자신은 할 일을 할 뿐이라고 생각할 테고, 고객 서비스 중에 겪게 된 얼토당토않은 곤경 앞에는 불만도 터뜨리기는 한다. 그래도 그토록 이타적인 우디 앨런의 모습은 처음이었다. 그런 대니 로즈의 맞은편에는 티나가 있다. 티나는 인생은 짧고 뭐든 마음 가는 대로 마음껏 저지르며 살면 된다고 믿는다. 대니 로즈는 티나에게 묻는다. 죄의식은 없느냐고. 자신은 죄의식이 너무 강해서 잘못된 짓을 할 수가 없다고. 티나는 그런 기분은 느껴본 적 없다고 말한다. 뭐든 마음대로 하며 살았지만 죄의식을 느끼지 않는다는 여자고, 늘 남을 위해 헌신했지만 죄의식에 시달리는 남자다. 이 두 사람은 함께 모험을 겪는 와중에 타인에게 상처를 하나씩 남긴다. 그리고는 자신이 남긴 상처를 제대로 알지 못한 채 헤어진다. 영화는 그대로 씁쓸함을 남긴 채 끝날 것만 같다.

그다음 대목이 정말 좋았다. 자세한 상황 설명을 피하고 두루뭉술하게 말하자면 이렇다. 우디 앨런은 처음에는 지나가는 장광설이나 캐릭터 설명처럼만 들렸던 죄의식에 관한 대화를 뒤늦게 끌어들이며 대니 로즈와 티나를 조용히 흔든다. 영화가 묘사하는 사건의 양상은 간단하지만, 두 사람이 의식적으로든 무의식적으로든 그 대화를 기억하고 있고(혹은 관객이 그들을 대신해 떠올리고), 그것이 그들의 태도와 행동을 결정하도록 이끈다는 점이 아름답다. 그건 둘 사이에 모종의 유대 관계가 있었기에 가능한 일이다. 사랑이라고 규정하기에는 너무나 섬약하지만, 어쨌거나 분명히 존재하기는 했던 관계. 두 사람은 이를 제대로 인지하지 못한 채 헤어졌다가, 고통받고, 재회한다. 그 단순한 동선과 시간의 흐름, 즉 동행-결별-성찰-재회의 연쇄를 보며 어째서인지 무성영화 시대 슬랩스틱 코미디의 거장들을 떠올렸다(안경을 쓴 우디 앨런의 모습 때문인지 주로 해롤드 로이드를 떠올렸다). 특히 둘의 재회는 분명 발성영화였는데도 기억 속에는 무성영화였던 것처럼 남아있다. 뜻하지 않게 떨어졌던 사람들이 떨어짐을 통해 비로소 상대의 영향력를 인지한 다음 다시 만난다. 그럴 때 대사 이전에 얼굴과 얼굴의 부딪힘에서 흘러나오는 천 마디 말 같은 것이, 〈브로드웨이의 대니 로즈〉의 결말에도 있었다. 그러고 보니 〈맨하탄〉의 대미를 장식하는 질주와 재회에도 그런 것이 있었다. 〈맨하탄〉을 좋아했던 것도 그저 고든 윌리스의 촬영 때문만은 아니었으려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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두 영화를 보고 나니 새삼 우디 앨런의 이러저러한 점이 별로 마음에 안 든다는 이야기도 함부로 하면 안 되겠구나 싶어 반성했다. 해당 영역에 대한 경험이 부족한 사람일수록 쉽게 대상의 고유함과 차이를 무시한 채 공통점을 추출하여 일반화/계열화하면서 섣불리 재단하고 벽을 쌓아대는 법이다. 그런 사람들에 늘 넌덜머리를 내면서 나 역시 자꾸 발을 헛디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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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번 "영화와 공간: 우디 앨런의 뉴욕"에서는 우디 앨런에 관한 다큐멘터리 〈우디 앨런: 우리가 몰랐던 이야기Woody Allen: A Documentary, 2011〉를 제외한 상영작 열일곱 편을 전부 35mm 필름으로 상영한다. 〈맨하탄 살인사건〉과 〈브로드웨이의 대니 로즈〉는 화면비가 1.85:1이었는데, 자막 영사 공간을 화면 밖에 배치하기 위해서인지 애석하게도 좌우 마스킹은 해주지 않았다(왼쪽 커튼만 닫을 수는 없나?). 필름 질은 시네마테크 기준으로 무척 훌륭했다. 자막은 전부 시네마테크 부산에서 가져온 듯하다. 시네마테크 부산에서는 2009년 "우디 앨런 특별전 - Little Big WOODY"와 2013년 "우디 앨런 근작전"을 통해 우디 앨런의 상당수 작품을 상영한 바 있다.

〈맨하탄 살인사건〉의 자막은 매우 만족스러웠다. 다만 〈이중 배상〉을 인용한 부분에서 영화 제목을 "보험 사기극"이라고 옮긴 것은 마음에 걸렸다. 다이앤 키튼이 이웃집에서 벌어진 죽음을 두고 보험금을 노린 살인이 아닐까 의심하자 우디 앨런이 당신 〈이중 배상〉에 너무 빠져서 그렇다고 말하는 대목에서 〈이중 배상〉을 모르는 관객들도 직관적으로 웃을 수 있도록 유도하기 위해 선택한 제목이 아닐까 싶은데, 그건 과잉 친절이다. 어차피 관객들은 그 대사에는 별로 웃지도 않았다. 오히려 〈이중 배상〉을 아는 사람들만 웃을 수 있도록 해두는 편이 나았다. 그리고 영화 속에 잠시 〈이중 배상〉의 장면이 직접 인용되는데, 그 영화 속 영화 장면에서 에드워드 G. 로빈슨에게 말하는 프레드 맥머레이의 대사(한 줄 나온다)는 존댓말로 옮기는 편이 더 적절하다. 물론 〈이중 배상〉은 존대법이 없는(혹은 한국어와는 다른) 문화권에서 나온 영화다. 그러나 그 영화에서 프레드 맥머레이의 캐릭터는 에드워드 G. 로빈슨의 캐릭터보다 한참 어린 게 분명한 데다, 에드워드 G. 로빈슨은 회사 상사이고 개인적으로도 아버지 같은 역할을 하는 인물이다. 존댓말을 피할 이유가 없다. 물론 번역자가 〈이중 배상〉을 보지 않아서 그랬으리라 짐작한다.

〈브로드웨이의 대니 로즈〉 자막은 〈맨하탄 살인사건〉과 비교하면 꽤 아쉬웠다. 전반적으로 대사 길이에 허덕이면서 어쩔 수 없다는 듯 비문으로 빠져든 대목이 자주 눈에 들어왔다. 우디 앨런 영화니까 어쩔 수 없다고 항변할 수도 있겠으나 〈맨하탄 살인사건〉도 결코 대사가 적거나 느린 영화가 아니잖나. 하워드 혹스와 로버트 알트만 영화를 번역해본 경험자로서 말하자면, 현행 큐타이틀 체제가 번역자에게 가혹한 것은 사실이지만, 그렇다고 비문을 필요악으로 인정해야 할 정도는 아니다. 더불어 〈브로드웨이의 대니 로즈〉에는 명백한 오역도 여럿 있었다. 가령 1달러 50센트어치 식사를 하고 10달러를 내면서 잔돈 "9달러 50센트"를 못 받는다고 투덜거리는 대목처럼 원래 대사를 모르더라도 오역임을 확신할 수 있을 대목도 있었고, 한 브로드웨이 공연자가 영화 〈제7의 베일The Seventh Veil, 1945〉을 보고 난 뒤 본의 아니게 제임스 메이슨 흉내를 내게 되었다고 말하는데 "흉내"라는 뜻으로 쓰인 "impression"을 계속해서 "인상주의"로 옮기는 바람에 무슨 말인지 알 수 없게 된 대목도 있었다(그나저나 그 사람 제임스 메이슨 흉내는 정말 훌륭했다. 나 외엔 아무도 웃지 않아 슬펐지만).

다른 극장에서 가져온 자막이라 수정이 어려운지도 모르겠지만, 그보다는 근본적으로 이런 문제를 극장에서 보고 체크하고 수정할 전문 인력이 없거나 부족하지 않겠나 싶다. 시네마테크 자막을 볼 때마다 절감하는 부분이다. 영화를 보던 관객이 의식하고 기억해뒀다 집에 와서 이렇게 글줄로 푸는 것보다 훨씬 더 제대로 된 체계가 필요하지 않을까? 늘 돈에 쪼들리기 마련인 시네마테크 측에서 보기에 번역 품질 문제는 비교적 작은, 당장 매달려 뜯어고치기 어려운 부문일지도 모른다. 하지만 언젠가 어딘가에서부터 변화가 있어야 나아질 수 있지 않겠나.
Posted by 거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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