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암살〉

카테고리 없음 2015. 7. 24. 05:03
최동훈 감독의 신작 〈암살2015〉을 개봉 당일에 챙겨봤다. 지루함 없이 즐겼고, 기대보다는 못했고, 예상보다는 나았으며, 배우들은 훌륭했고, 전지현은 돋보였고, 전체적으로는 지치는 기분이었다. 이런 영화야말로 나를 가장 힘 빠지게 하는 영화가 아닌지. 안경 쓰고 긴 코트를 입고 기관단총을 든 전지현이 경성의 거리를 내달리거나 흰 웨딩드레스에 피를 묻힌 전지현이 장총을 겨누는 이미지에 대한 매혹을 제외하면, 이 영화를 만든 사람이 결국 무엇에 탐닉했는지, 무엇을 보고 싶었는지 알 수 없었다. 이를 악물지 않는 영화. 어느 장면이든 적당히 보기 좋고, 그래서 어떤 장면도 보기 좋지 않으며, 누구에게도 상처 주지 않지만, 누구의 가슴에도 남지 않고, 분명 흥행할 터이나, 그 흥행이 좋기만 한 일일까 의심하도록 하는 영화. 데뷔 때부터 능구렁이처럼 매끄럽게 사기 치듯 넘어가는 영화를 만들던 최동훈 감독이 이번에는 어떠어떠한 영화를 만들고/보고 싶다는 자신의 열망마저도 매끄럽게 넘겨버린 게 아닐까? 그는 과연 이 현장을 자기 뜻대로 조율했을까? 혹시 조율의 즐거움에 심취한 나머지 모두가 즐겁게 이득을 챙겨갈 만한 영화를 만드는 것만이 유일한 목표가 돼버리진 않았을까? 그러나 180억짜리 영화를 만들면서 모두가 즐거운 결과를 끌어낸다는 건 모두가 이기는 도박판 같은 소리다. 나는 최동훈이 〈리피피Du Rififi chez les hommes, 1955〉를 만들고 싶어하는 감독이라고 생각했는데, 그는 점점 〈황야의 7인The Magnificent Seven, 1960〉을 만들고 있다. 기왕 존 스터지스라면 〈대탈주The Great Escape, 1963〉를 꿈꾸어주셨으면 합니다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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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범죄의 재구성〉 때부터 〈암살〉까지 쭉, 최동훈 영화의 '정서'가 아슬아슬하게 느껴진다.

최동훈은 데뷔 때부터 자신을 살찌운 멋진 범죄 소설과 영화들을 되뇌면서 왜 다들 그런 영화를 안 만드는지 모르겠으나 자신은 그런 영화를 만들 거라고 호언장담한 감독이다. 인터뷰 구석구석 한국 영화의 구질구질함에서 벗어나 날렵하고 매끈한 장르 영화를 만들겠다는 열망이 한껏 전해졌다. 자연히 한국 영화의 리얼리즘은 그의 적이었다. 2011년 초 서울아트시네마에서 열린 "2011년 시네마테크의 친구들 영화제"가 떠오른다. 당시 〈도둑들2012〉을 준비 중이던 최동훈은 거기서 〈리오 브라보Rio Bravo, 1959〉를 소개했다. 관객과의 대화에서 나는 대강 다음과 같은 질문을 던졌다. 감독님께서는 〈리오 브라보〉를 좋아한다고 말씀하시지만 정작 감독님 영화 속의 인물들은 〈리오 브라보〉에서처럼 산뜻해지지 못한 채 늘 뒤로 가면 진흙탕 속에서 나뒹굽니다. 이건 혹시 한국적 리얼리즘이 남긴 강박 아닐까요? 그는 이 질문을 받자마자 자신이 가장 싫어하는 것이 리얼리즘이라고 단언했다.

그때나 지금이나 그 말 자체는 믿는다. 최동훈은 한국 영화를 옭아매는 리얼리즘의 전통을 의식적으로 멀리해왔다. 그에 대한 자부심마저 있을지도 모른다. 예를 들면 이렇다. 〈암살〉 후반부, 암살이 실패로 돌아가고 암살자 안옥윤의 존재가 암살 대상과 경찰들에게 널리 알려진다. 안옥윤은 쌍둥이 자매인 미치코를 연기하면서 미치코의 집에서 이틀을 버틴다. 이전까지 잘 알지도 못하는 상대였던 미치코의 아버지와 여타 고용인들, 약혼자의 눈까지 속였다는 얘기다. 유일하게 자신의 정체를 알아차린 집사는 살해하여 혼자서 시체까지 처리한다. 그리고는 마침내 웨딩드레스를 입고 신부로서 결혼식장에 잠입한다. 만약 누군가가 이런 전개는 믿을 수 없다고 시비를 건다면, 최동훈은 그런 건 그냥 집에 들어서는 대목의 긴장감을 강조하고 집사에게 들켜 살해하는 장면까지 넣어주면 적당히 흐름을 타고 넘어갈 수 있는 부분이라고 대답할 법한 연출자다. 이런 문제에 관해서 나는 최동훈의 편이다. 두기봉이나 쿠엔틴 타란티노 정도로 마술을 벌이지는 못하지만, 그래도 그의 영화 역시 장르 관습에 기대고 고유의 세계를 만들어 리얼리즘에 벗어나려 애쓰며, 곧잘 성공한다.

다만 4년 전에는 부정확했던 질문을 좀 더 다듬어 이렇게 다시 던져보고 싶다. 감독님께서 장르적으로, 영화적으로 벗어던졌다고 생각했던 한국식 리얼리즘이, '정서'라는 형태로 나타나 영화를 뒤흔들고 있는 건 아닌가요?

최동훈은 인터뷰에서 "장르" 만큼이나 "정서"라는 말을 자주 사용한다. 자신의 영화는 이러저러한 장르의 관습과 외피를 갖추고 있지만, 사실은 캐릭터의 정서가 가장 중요한 영화라는 식이다. 그런데 최동훈의 영화를 보면 볼수록 그가 말하는 "정서"가 가리키는 바가 몹시 제한적이라는 생각을 하게 된다.

가령 그는 2012년 4월 《씨네21》에 실린 〈도둑들〉 관련 인터뷰에서 스티븐 소더버그의 〈오션스 일레븐Ocean's Eleven, 2001〉를 두고 "훈훈하게 털고 매끈하게 마무리하는" 그런 이야기는 "판타지"이지만 자신의 영화는 그렇지 않다고 주장한다. 또 그 연장선에서 할리우드 영화는 너무 매끄러운 플롯과 스타 이미지에 의지하여 캐릭터는 빛나지 않는다며 거리를 둔다. 그러면서 강탈 영화의 모범으로 줄스 다신의 〈리피피Du Rififi chez les hommes, 1955〉를 꼽더니, 급기야 자기 영화의 주인공들은 사람 사는 모습을 드러낸다고 힘주어 말한다. 최동훈의 인터뷰에서는 이런 믿음을 심심찮게 확인할 수 있다.

그러니까 최동훈은 마치 장르 관습이라는 매끄러운 기계 장치와 캐릭터가 품고 있는 인간적인 정서는 별개의 층위에서 작동한다고 믿는 듯하다. 실제로 그의 영화는 전자에 대한 매혹에서 출발하지만, 막상 판을 벌인 뒤에는 재빨리 후자로 넘어가고 싶어한다. "계획의 실천"을 그나마 흥미진진하게 묘사한 작품은 데뷔작 〈범죄의 재구성2004〉과 원작에 의존한 〈타짜2006〉 정도다. 지금에 와서 〈도둑들〉의 천만 관객 중 카지노 터는 단계를 기억하는 관객이 몇이나 될까. 지도 한 장 놓고 설계를 끝낸 다음 시시한 코미디로 준비 과정을 때우더니 거사 당일이 되자 허망하게 판을 엎어버리는 〈암살〉에 이르러서는 말할 것도 없다.

대신 최동훈의 영화는 놀라울 정도로 한국 TV 드라마스러운 감상과 사연과 반전에 매달린다. 동료/연인 사이의 피를 토하는 배신, 주인공을 분노케 하는 동료의 비통한 죽음, 모호한 삼각관계, 과거의 원한이나 사연 등등이 겹겹이 쌓인다. 심지어 다섯 편의 장편 중 두 편에서 쌍둥이라는 소재를 사용했고, 〈전우치2009〉에서는 쌍둥이 대신 전생의 그녀와 꼭 닮은 그녀가 등장한다. 만약 이런 부분만을 따로 떼어 지적한다면 그는 그건 다 장르 관습이라며 발뺌할지도 모른다. 하지만 천만에. 이건 전부 그가 겉으로 내세운 장르의 판을 깨면서까지 인물의 '정서'를 합리화하기 위해 사용하는 장치들이다. 고집스럽게 반복 사용하는 소재들을 놓고 보면, 최동훈은 지금 한국 영화계에서 가장 감상적인 작가다. 그는 오우삼 시절의 홍콩 누아르만큼이나 감상적인 영화를 만들고 있다. 다만 오우삼이 자신의 감상을 숨기지 않았던 것과 달리, 최동훈은 "장르 관습"이나 "정서" 같은 어휘 뒤로 숨으며 자신은 그런 사람이 아니라고 손사래를 치려 애쓴다는 차이가 있을 뿐.

감상 자체를 반대하지는 않는다. 하지만 자신이 감상적이라는 사실을 부정하는 감상주의자의 작품은 늘 불안하다. 그게 〈암살〉까지 이르고보니 두 가지 걱정을 떨치기 어렵다.

첫째, 점점 최동훈 영화가 지향(한다고 주장)하는 장르적 즐거움의 밀도가 옅어지고 따분해지고 있다. 〈범죄의 재구성〉 때만 해도 나는 그가 정말로 관객의 심장을 움켜쥐고 농락하여 손톱을 물어뜯고 배를 감싸쥐도록 하는 교활한 영화들을 만들려 한다고 생각했다. 하지만 이후 10년 동안 최동훈의 영화는 점점 더 한국 TV 드라마의 인물 관계도를 이해하는 데에 필요한 수준의 집중력만을 요구하는 편안한 영화가 되고 있다. 액션을 묘사하는 기술은 매끄럽지만, 관객으로서 캐릭터와 함께하며 안위를 염려하고 성공을 기원하게 되지는 않는다. 그저 표피적인 장식이나 곡예를 구경할 따름이다. 첫 문단에서 "안경 쓰고 긴 코트를 입고 기관단총을 든 전지현이 경성의 거리를 내달리거나 흰 웨딩드레스에 피를 묻힌 전지현이 장총을 겨누는 이미지에 대한 매혹을 제외하면"이라고 썼던 건 비아냥이나 과장이 아니라 진심이다. 〈암살〉은 어떤 장면(scene)도 인상적이지 않은 영화였다. 돌이켜보면 애당초 최동훈이 목표했던 바를 엄청나게 잘 해내는 영화를 본 적도 없는 것 같다. 그는 그저 처음부터 '나는 이걸 노릴 거야' 라고 소문을 내서 전문가처럼 보이도록 했을 뿐, 사실은 서툰 사기꾼/도둑/암살자인 게 아닐까 하는 의심이 싹트기 시작한다.

둘째, 감상성, 혹은 최동훈의 표현대로 '정서'를 담당하는 대목의 연출이 점점 더 촌스러워지고 있다. 〈암살〉에서 두 가지 예를 들어보자. 먼저 안옥윤이 어린 시절 겪은 참상을 되뇌는 장면. 어린 안옥윤을 연기할 배우까지 따로 캐스팅하여 굳이 그 한 대목을 시각화하여 인서트로 집어넣은 선택을 받아들이기 어렵다. 〈죠스Jaws, 1975〉에서 퀸트가 USS 인디애너폴리스의 참상을 읊조리는 대목에 실제로 난파된 수병들이 상어떼에 잡아먹히는 모습을 담은 인서트를 넣은 꼴이다(혹시 최동훈이라면 〈죠스〉의 그 장면마저도 플롯에만 의지한 채 캐릭터를 빛나게 하지 못하는 할리우드 영화의 예라고 생각할까?). 그리고 영화의 맨 마지막 장면. 모든 암살이 끝난 후, 죽은 사람들을 떠올리는 안옥윤의 얼굴로 영화가 끝난다. "죽은 사람들을 떠올리는"이라고 했지만, 정확히는 앞서 나왔던 영화 속 화면을 잘라내어 다시 붙이고 있다. 이 연출은 앞서 나왔던 장면들에 새로운 의미를 부여한다기보다는 의미를 애써 쥐어짜낸다. 특히 오달수가 연기한 영감이 안옥윤과 헤어지면서 "우리 잊으면 안 돼." 라고 말하는 대목은 처음 나올 때도 이미 의미심장함으로 차고 넘쳤다. 그걸 다시 끌고 와 살아남은 자의 회상에 집어넣으면서 씁쓸함과 비장함을 부추기는 광경은 민망했다.

이런 태도가 최동훈 개인의 성향이기 전에 한국에서 흥행에 성공해야만 하는 영화를 만들며 후천적으로 떠안게 된 특성일지도 모른다는 의심도 든다. 플롯의 수행과 정서를 분리해서 생각하고, 그래서 사건이 전개되는 장면과 캐릭터의 정서를 드러내는 장면을 따로 할당하고, 진행 중인 플롯과는 별도로 정서를 일일이 해설해줄 제2의 플롯(=과거의 사연, 애정 관계 등등)을 거추장스럽게 붙여가며 관객에게 떠먹인 다음, 급기야는 정서를 담당하는 부분이 플롯을 집어삼키고 뒤흔드는 동안 플롯 자체는 시시할 정도로 앙상해진다. 이것이야말로 흥행 대박을 노리는 한국의 오만가지 픽션들이 끝없이 벌이는 짓거리 아닌가. 애초에 기획을 가능케 했던 소재는 어디까지나 관심 끌기용 미끼에 불과할 뿐, 캐릭터들의 인간적인 정서가 우리 모두를 구원하리니. 병원에서 연애하는 의료 드라마, 검찰청에서 연애하는 검찰 드라마, 식당에서 연애하는 요리 드라마, 모두 같은 태도에서 나온다. 유감스럽게도 〈암살〉은 거기서 별로 멀지 않다. 별로 멀지 않기 때문에 틀림없이 흥행하리라 믿는다. 나는 최동훈이 그 흥행에 기뻐하지 않았으면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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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하는 평론가의 세심한 관찰과 분석과 확장과 가설과 고의적 억측이 필요한 부분인데, 나는 평론가가 아니므로 그냥 간단한 관찰과 무책임한 인상만을 기록해두련다.

〈암살〉을 보던 중 묘하게 영화 밖으로 엄습해 오는 이미지가 있었다. 한 번이었으면 그러려니 넘어갔을 텐데, 그 이미지는 네 번이나 반복됐고, 심지어 최동훈 감독의 다른 영화까지 불러왔다.

네 이미지의 공통점을 요약하면 다음과 같다. 특정 공간 안에서 요란한 사건이 벌어진다. 한참 안에서 엎치락 뒤치락 하던 인물이 공간 밖으로 나간다. 카메라는 인물의 등을 바라보며 함께 공간의 경계를 넘어간다. 그순간 눈앞에 완전히 새로운 공간이 펼쳐진다. 새로운 공간은 마치 이전까지 사건이 벌어지고 있었던 공간과 아무런 상관도 없다는 듯 태연하다. 바로 그때 캐릭터가 느꼈을 법한 어리둥절함이 관객인 내게까지 쏟아졌다. 단순히 인접한 두 개의 다른 공간 사이를 건너왔다는 느낌이 아니라, 아예 존재하는 층위가 다른 공간 사이에 도약이 있었다는 느낌이었다. 느닷없이 낯선 세계에 떨어진 시간여행자가 느낄 법한 황망함에 가까웠다.

그 자체로는 그리 드물지 않은 연출이지만, 〈암살〉에는 이런 순간이 네 번이나 반복되면서 자기 존재를 알려댄다. ① 프롤로그에서 강인국이 암살 시도를 피해 카와구치를 둘러업고 건물 밖으로 나왔을 때. ② 안옥윤과 상하이 피스톨이 한참 총질을 벌이다 마침내 결혼식장 밖으로 나왔을 때. ③ 염석진이 반민특위 재판에서 무죄를 선고 받고 법정을 나왔을 때. ④ 염석진이 총을 맞고 비틀거리다가 울타리 한구석을 무너뜨리고 벌판으로 들어설 때. 특히 네 번째에 이르러서는 이 반복을 의식할 수밖에 없었다. 앞의 세 번이야 건물 출입문이니 그렇다고 해도, 굳이 막아놓은 울타리를 무너뜨린 다음, 조금 전까지는 시내 한복판의 골목 같기만 했던 곳 바로 옆에 허허벌판을 펼쳐 놓더니, 빨랫줄에 하얀 천을 걸어 화면 가득 휘날리게 해서 거의 스즈키 세이준 영화 같은 초현실성을 가미한다. 그 한복판에서 민족의 배신자가 쓰러진다. 안옥윤은 벌판으로 들어서지 않은 채 골목길을 배경으로 그 광경을 지켜본다. 이 정도로까지 공간을 의도적으로 분리하여 이물감을 남긴 사람의 (무)의식에는 무엇이 있었을까? 〈암살〉에서 융화하지 못한 채 어정쩡하게 눈치 보며 공존하고 있는 두 개의 세계는 무엇일까?

말했듯 이 이미지의 정체를 섣불리 지목하여 의미화 할 생각은 없다. 다만 이와 무척 흡사한 장면을 최동훈의 다른 영화에서도 확인할 수 있음을 환기하고 싶다. 바로 〈전우치〉의 마지막 장면에서다. 참고로 그 영화는 족자 그림의 안과 밖, 과거와 현재, 환상의 안과 밖, 영화(세트)의 안과 밖을 오가는 지극히 자기지시적인 영화다. 마지막 장면에서 전우치는 도술을 써서 해변으로 간다. 매우 '그림 같은' 바다가 펼쳐진다. 전우치는 얼떨떨하게 되뇐다. "이것이 바다?" 그리고 느닷없이 영화가 끝난다. 그 순간의 혼란과 망설임이 〈암살〉에도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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진짜 사기꾼은 자신마저 속인다고 한다. 최동훈은 사기를 친다는 사실이 양심에 걸린 나머지 자신의 진정성을 증명하려고 애쓰는 사기꾼 같다.
Posted by 거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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