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하 추억을 판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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무성영화 시대의 대표 스타/감독 버스터 키튼의 대표작을 모은 프로그램 "버스터 키튼 특별전-퍼스트 액션 히어로"가 시네마테크 서울에서 6월 25일부터 7월 12일까지 16일(휴무 기간 제외) 동안 열린다. 그가 재능 있는 코미디언에서 한 발 더 내디뎌 자신의 제작팀을 이끌고 영화 전체를 기획/감독한 1920~1928년에 만든 서른한 편의 장/단편 영화를 전부 상영하며, 키튼에 관한 다큐멘터리도 상영하는, 성대한 구성이다.

서울아트시네마에서는 11년 전인 2004년 6월에도 같은 규모의 "아크로바틱 액션 개그 : 버스터 키튼 회고전"을 진행한 바 있다. 역사에 길이 남을 기획이었다고 생각한다. 물론 2004년 6월 이전에도 이후에도 서울아트시네마를 찾았다. 이전에도 이후에도 좋은 프로그램은 많았다. 심지어 버스터 키튼 영화보다 더 강력한 영화들도 많이 만났다. 내 영화 지도 안에서라면 "버스터 키튼 회고전"보다 더 중요한 기획도 여럿 있다.

하지만 이걸로 하나의 세대가 태어났음을 알리는 기획은 2004년의 "버스터 키튼 회고전"이 유일했다. 나만의 착각이요, 과장일 수도 있음을 알지만, 그 감흥을 설명하자면 아래와 같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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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04년에도 버스터 키튼은 아주 낯선 이름은 아니었다. 세계적으로 보더라도 키튼은 이미 5~60년대에 망각에서 벗어나 명성을 되찾기 시작했다. 당연히 홈비디오 시대의 혜택도 보았다. 80년대에도 이미 VHS가 출시됐고, 특히 북미 키노 비디오에서는 20년대에 키튼이 만든 서른한 편의 영화를 The Art of Buster Keaton이라는 제목으로 묶어 VHS로 출시했으며, 2001년는 같은 구성으로 DVD도 내놓았다. 한시절 한국 영화광들의 참고서였던 김홍준의 『영화에 대하여 알고 싶은 두세 가지 것들』에서도 분명히 키튼의 이름을 언급했으며, 영화 잡지 《KINO》에서도 간혹 다루었다. 21세기 초에 성룡 열혈팬을 자청했던 류승완 감독이 인터뷰에서 종종 키튼을 거론했던 기억도 난다(예를 들어 《KINO》 2003년 6월호 "제물포 성룡" 박준형 감독과 류승완 감독의 대담 기사).

그래도, 2004년 이전에 한국에서 버스터 키튼 영화를 직접 보기란 쉬운 일은 아니었다. 우선 그는 찰스 채플린처럼 문화적 아이콘으로 자리 잡지 못했기에 브라운관을 자주 찾지 못했다. 네이버 뉴스 라이브러리를 검색해 보면 1988년 3월에 KBS3에서 무성영화 시대 코미디를 엮어 소개한 로버트 영슨 감독의 〈4인의 광대4 Clowns, 1970〉를 방영한 정도가 고작이다(이 영화에는 〈일곱 번의 기회Seven Chances, 1925〉가 축약본으로 들어가 있다). 〈제너럴The General, 1926〉이 "장군"이라는 제목의 VHS로 출시되기는 했지만, 그 외 다른 영화도 출시됐는지는 알 수 없다. 신문 기사를 보면 90년대 들어 여기저기 생긴 영화공간들에서도 역시 〈제너럴〉을 중심으로 소개한 것으로 보이며, 그것도 어디까지나 고전 걸작을 뭉텅이로 소개하는 큰 기획의 한 부분이었다. 다만 1997년 9월 9일 매일경제신문 기사를 보면 서울이동통신(엥?)과 강남 진솔문고가 함께 고객사은행사로 9월 20일, 27일 이틀 동안 하루 세 차례씩 총 6회, 각회 300명씩 총 1800명의 고객을 대상으로 "무성영화 시대의 성룡, 버스터 키튼"이라는 제목의 상영회를 열어 "경찰들, 증기선 빌 2세, 장군" 등을 상영한 적은 있다고 한다.

2000년대 초는 아직 지금처럼 홈비디오 타이틀의 해외 구매가 활성화되지도 않았고, 한미FTA 체결 전이라 무관세 제한도 더 빡빡했다. 무엇보다도 아직은 영화 다운로드가 양성화되거나, 그렇지 않더라도 웹하드마다 누군가가 고전 걸작을 가득 올려놓거나 토렌트가 미쳐 날뛰는 그런 시대도 아니었다. 요컨대 그때 한국에서 키튼은 간신히 영화광들의 관심을 끌 정도로는 알려졌지만, 아직 그 실체를 쉽게 확인할 수는 없는 존재였다. 그렇다고 오슨 웰스처럼 실제로 영화를 보았든 말든 일단 인정하고 봐야 할 것만 같은 불가침의 권위를 갖고 있지도 않았고, 부모 세대 추억의 명화라는 문화적 연결고리도 희미했다.

그런 와중에 서울아트시네마에서 갑자기 12일에 걸쳐 하루 4회차로 버스터 키튼 영화를, 〈제너럴〉 같은 일부 대표작이 아니라 20년대에 그가 만든 거의 모든 영화를, 극장에서 필름으로 쏟아부었다. 그게 키튼과 한국 관객의 진정한 첫 번째 조우였다고 하더라도 지나친 말은 아니리라 생각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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물론 희소성만을 따지자면 비슷한 시기 서울아트시네마에서 했던 다른 프로그램에 대해서도 비슷한 이야기를 할 수 있다. 가령 2003년 11월에 열린 "칼 드레이어 회고전"에서는 칼 테오도르 드레이어의 영화 열여덟 편을 상영했는데, 지금 보면 이쪽이 더 희소성 있는 기획이었다. 내게는 늘 다정한 기억으로 남아 있는 "최양일 회고전"이나 "구로사와 기요시 회고전" 혹은 "버스터 키튼 회고전" 직후에 열린 "로베르토 로셀리니 회고전"도 마찬가지다.

하지만, "버스터 키튼 회고전"은 무언가 달랐다. 무엇이 달랐을까? 버스터 키튼이 달랐다는 대답밖에 할 수 없다.

영화를 보러 모인 익명의 관객들이 함께 폭소를 터뜨리거나 흐느껴 울거나 비명을 지르는 것은 그리 드문 일은 아니다. 영화가 끝나고 박수를 치는 것도, 그렇게까지 낯선 일은 아니다. 관객을 좌석에 밀어붙여 깔아뭉개고 기를 쪽쪽 빨아먹는 영화의 경우, 소리를 통해 모두가 비슷한 기분을 느꼈음을 확인하기는 어렵지만, 그래도 쥐죽은 듯한 침묵─종종 영화가 끝난 후에도 계속되는─속에서 일체감이 전해지곤 한다(〈베이비 제인에게 무슨 일이 생겼는가?What Ever Happened to Baby Jane?, 1962〉 같은 영화가 그렇다). 내 생각에 영화 관객으로서 가장 공유하기 어려운 감정은 영화를 향한 찬탄이다. 찬탄이란 미처 예상하지 못한 영화적 선택이 등장하는 순간 느끼는 일종의 경외감인데, 이 감정을 표현하는 데에는 뚜렷한 신호가 없을 뿐만 아니라 애초에 경외감을 자아내는 이미지에 관한 감수성이 천차만별이라 옆자리에 앉은 관객도 나와 같은 기분을 느꼈다고 확신하기가 쉽지 않다.

키튼의 영화는 탄성을 웃음의 형태로 내뱉어 공유하도록 이끄는 영화다. 코미디로 분류되기는 하지만, 키튼의 영화가 주는 웃음은 우스꽝스러움보다는 놀라움에 더 가깝다. 그는 곤경 앞에 어리석음을 보이기보다는 지나치게 빠르고 독자적인 사고를 통해 미처 예상하지 못한 해결책을 내놓음으로써 관객을 웃긴다. 더구나 그 해결책은 늘 아크로바틱한 움직임을 통해 시각적으로 곧장 전달된다. 예상을 초과하는 영리함으로 웃음을 자아내는 영화는 발성영화 시대에도 적지 않지만, 대사에 의지하는 경우 관객의 이해력에 따라 오차가 생긴다. 키튼은 몸을 날려 모든 관객의 머리를 잡아챈다. 그렇다고 그 해결책이 꽝 때리면 우당탕 쓰러지는 식의 "슬랩스틱"에 국한되는 것도 아니다. 〈손님 접대법Our Hospitality, 1923〉의 폭포 장면에서 나오는 공간 개그처럼 몇 단계의 사고를 바탕에 깐 채 프레임의 안과 바깥을 모두 활용하는 개그조차, 키튼은 단숨에 뇌리에 꽂아넣는다. 고도의 지성이 본능적인 즉물성과 한데 얽혀있다고나 할까.

따라서 키튼의 영화를 보다 웃음을 터뜨렸을 때, 우리는 그저 우스꽝스러운 말 한마디나 몸짓에 웃는 것이 아니라 같은 사고를 공유하고 영화와 대화하고 있음을 부지불식간에 확인하고 있었다. 더구나 그 공유는 웃음만으로는 모자라서, 때로는 말 그대로 "와!" 하는 탄성이나, 박수갈채로까지 나타났다. 키튼은 그런 탄성의 순간을 드문드문 어쩌다 기적적으로 성취한 것이 아니라 거의 모든 영화에서 쉴 새 없이 성취했다. 그런 영화를 두 주에 걸쳐, 하루에 몇 편씩 함께 보고 났을 때 느끼는 고양감과 동지애는 이루 말할 수 없다. 아무도 차마 키튼의 위대함을 설명하지는 못했지만, 함께 시간을 공유하고 나면 손쉽게 공감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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위 문단에서 감히 "우리"라는 표현을 썼는데, 그것이야말로 키튼이 이룬 가장 큰 위업이라고 생각한다. 2004년 그 여름 키튼의 영화를 함께 보았을 때, 서울아트시네마에서는 하나의 세대가 생겨났다.

나는 "우리 세대"의 영화광들이 공유하는 면이 별로 없다고 생각하는 편이다. 문화원이나 정영음 같은 구심점, 거기서 나온 공통의 체험이 없다. 그건 심지어 서울아트시네마를 끌어들이더라도 마찬가지다. 나는 서울아트시네마의 다른 관객들에게 동지애를 느끼지 못하며, 우리가 영화에 관한 유사한 체험이나 공간에 관한 애착을 공유한다고도 단언하기 어렵다. 영혼을 꿰뚫는 충격을 주는 영화를 만나더라도, 그것은 나 혼자 혹은 몇 사람의 충격일 뿐, 그 순간을 함께 경험한 집단이나 세대를 생각하게 되지는 않았다(아마 내 영화 체험의 많은 부분이 미국판 DVD와 Blu-ray, 그리고 학교 영화 동아리를 중심으로 이루어진 탓도 있을 것이다).

유일한 예외가 버스터 키튼이었다. 2004년 6월, 소격동 서울아트시네마에서는 '이 해에 버스터 키튼을 극장에서 필름으로 함께 본 사람들'이라는 유대가 생겨났다. 유대감은 시간이 흐르면서 더 분명해졌다. 일반 개봉관 외의 극장을 기웃거리는 사람들, 영화에 관한 글을 쓰는 사람들 사이에서, 버스터 키튼을 각별하게 품고 있는 사람들이 보였다. 그때 본 그 버스터 키튼을 원체험처럼 간직하는 사람들이 있었다. 나는 종종 이듬해 3월 베르나르도 베르톨루치의 〈몽상가들The Dreamers, 2003〉이 개봉했을 때 버스터 키튼과 찰스 채플린 중 누가 낫냐는 질문에 남몰래 웃었을 우리들의 모습을 상상하곤 한다.

내 주변도 마찬가지였다. 말했듯 영화 동아리에 몸담고 있었기에 내 주변에는 영화를 좋아하는 사람들, 서울아트시네마를 즐겨 찾는 사람들이 있었지만, 대체로 우리는 다 따로였다. 그 당시 서울아트시네마를 찾은 기억을 되짚어 보면, 우리가 함께 누군가의 어떤 영화를 좋아했던 기억은 뜻밖에 잘 떠오르지 않는다. 심지어 "버스터 키튼 회고전"과 같은 해 가을에 열린 "에른스트 루비치 회고전"조차 그랬다(여담이지만 나는 아직도 그때 지랄염병을 해서 사람들을 루비치 앞에 내몰지 않은 것을 후회한다). 몇 사람이 좋아했고, 몇 사람이 발견의 기쁨을 맛보았다. 그것은 개인의 체험이고 개인의 깨달음이었다. 열 몇 명, 때로는 스무 명이 넘는 사람이 단체 관람을 해도 마찬가지였다.

오직 키튼만이, "우리" 모두가 단서 없이 좋아했던 이였다. 굳이 열변을 토하며 꼬드기지 않아도 함께 보러 갈 수 있는 대상이요, 기나긴 토론 없이도 찬성할 수 있는 존재. 이름을 부르는 것만으로 연대할 수 있는 존재. 그래서 동아리 창립 이후 최초로 거금을 들여 캐나다 아마존에서(당시는 캐나다 달러가 한결 쌌다) 배송에 몇 달씩 걸리는(당시 캐나다 아마존 일반 배송은 배송에만 몇 개월이 걸렸다) The Art of Buster Keaton 박스 세트를 사기로 결의하는 데에도 누구 하나 망설임이 없었다. 마침내 DVD 박스 세트가 도착한 다음에는 이후 몇 년 동안 새로 가입한 이들에게 무조건 키튼 영화를 보여주었다. 덕분에 〈셜록 주니어Sherlock Jr., 1924〉는 아직도 내 평생 가장 여러 번 본 영화로 남아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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냉정하게 생각하면 아마 이 모든 것 또한 착각에 불과하리라. 2004년 "버스터 키튼 회고전"은 고작 12일 동안 열렸다. 때는 6월 중순이었고, 대학생들의 학기는 완전히 끝나지 않은 상황이었다. 무엇보다도 이 프로그램이 오직 서울아트시네마에서만 열렸을 뿐, 다른 지역으로 옮겨가지 못했다는 점을 기억해야 한다. 그 수혜자는 그때 소격동을 찾을 수 있었던 몇백, 몇천 명 정도일 것이다. 하나의 세대라는 표현을 쓰기에는 아무래도 과장이 심하다.

그럼에도, 그런 과장이라도 쓰지 않고서는 표현할 수 없는 유대감을 기억한다. 키튼을 만남으로써 어떤 전환점에 이르고 말았다는 자각을 실감한다. 영화를 쫓아다니는 사람으로서 아직도 그 만남의 순간을 소중히 간직하고 있는 다른 사람들의 존재를 의식한다. 건 지난 12년 동안 딱 한 번, 버스터 키튼만이 줄 수 있었던 기분이었다.

(실은 작년 "탄생 120주년 존 포드 회고전" 때 더러 비슷한 기분을 느낀 적이 있었다. 하지만 키튼에 비하면 간헐적이었다. 무엇보다도 영화계가 쏟아부은 공력이 다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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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1년이 지났다. 11년은 통상 한 세대가 지났다고 말하기에는 짧은 기간이지만, 경험상 영화 관객의 세대는 생각보다 빨리 바뀐다. 특히 동시대적으로 소비되지 않는 영화의 관객층은 더욱 그렇다. 서너 해만 지나고 나면 다시 처음부터 출발해야 한다. 한때 버스터 키튼 영화를 주변에 지겹도록 소개하고 상영하여 당분간 키튼 영화는 보지 않아야겠다고 생각했던 시간도 있었는데, 그 시간도 금세 지나가 이제는 다시 키튼을 이야기하는 사람이 많지 않다.

그렇기에 이번 "버스터 키튼 특별전"을 더 기대하고 있다. 내가 키튼을 다시 만날 수 있기를 기대하기보다는, 11년 전 내가 그러했듯 키튼을 말로만 들었던 사람들이 극장을 찾기를 기대한다. 그래서 또 그때와 마찬가지로 극장 안에서 하나 되는 기운을 느끼고, 시네마테크 서울을 찾아가는 개별 관객이 아니라 버스터 키튼의 이름으로 묶인 하나의 세대가 자라나기를 희망한다. 앞으로 이어질 16일이 새로운 관객들의 영화 체험에서 하나의 전기가 되기를 기원한다.

이 프로그램은 누군가들의 인생을 바꿀 수도 있다.


Posted by 거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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