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국영상자료원 시네마테크 KOFA에서 오랜만에 〈청춘 잔혹 이야기青春残酷物語, 1960〉를 보고 새삼 치를 떨었다. 이 영화 보러 가라고 주변에 권했으면서도, 또 초창기 오시마 나기사는 순전히 화를 내기 위해 영화를 만든 것 같다는 말까지 했으면서도, 정작 그걸 보는 게 어떤 체험인지는 잊고 있었다. 혹은 그건 영화를 볼 때만 비로소 느낄 수 있는 기분인지도. 영화 시작하고 한참을 '대체 내가 왜 내 시간을 할애해서 이런 영화를 보고 있어야 하지? 좋은 영화였다는 기억은 잘못됐던 걸까? 아니면 그사이에 내가 변해서 이제는 이런 영화는 받아들일 수 없게 된 걸까?' 되뇌었다. 그러다 모두 까기가 점점 심해지고 꿈도 희망도 아무것도 남겨놓지 않은 상태에 이르더니 대놓고 너희 모두는 아무것도 못 이룬다고 소리치며 넋이 너덜너덜해질 때까지 두들겨 팬다. 비틀비틀 상영관을 나오며 그제야 기억해 냈다. 맞아, 내가 본 오시마 영화는 다 이런 기분이었지. 한창 회고전을 챙기면서 좋다 좋다 말할 때도, 매번 새 영화가 시작되면 '아, 이번 영화는 별로네? 한소리 또 하고 한소리 또 하고… 무슨 진전이 없어. 어우 답답해. 내가 이런 걸 봐야 해?' 싶다. 그러다 눌릴 대로 눌리 더 도망갈 곳이 없어지면 하나씩 폭발. 비아냥도 풍자도 없는 돌직구 세례.

도대체 오시마 나기사는 왜 영화를 선택했을까, 무슨 생각으로 영화를 만들었을까 계속 생각하게 된다. 이런 서사 자체를 좋아했기 때문에 만들지는 않았을 것이다. 그러기에는 영화 전체에 확신범의 기운, 이 이야기를 도구 삼아 무언가를 하겠다는 의지가 넘쳐 흐른다. 그렇다고 세상을 바꾸기 위해서라든가 어떤 대상이나 현상을 비판하기 위해서는 아닐 것이다. 오시마의 영화에서는 비판이라는 어휘가 함의하는 최소한의 긍정, 대화와 개선의 가능성에 대한 믿음을 느끼지 못하겠다. 제로로 돌아가 다시 시작하자는 정도의 진취성조차 없다. 그는 그저 모든 것을 향해 화를 낸다.

하지만 화를 내는 방법으로 영화는 몹시 비효율적이다(물론 비효율성이야말로 영화의 본성이기는 하다). 아무리 짧은 영화라고 해도 준비에는 오랜 시간이 걸린다. 영화 제작의 절반 이상은 기다림이다. 기다림은 화와는 상극이다. 시간이 지나면 화는 제풀에 가라앉는다. 그런데도 기어이 화를 내는 영화를 만들고야 만 사람이 품은 화의 크기를 생각해 본다. 그 화는 일상에서 깽판을 치는 정도로는 풀 수 없는 화였을 것이다. 또 그 화는 홀로 화풀이한다고 풀리는 화도 아니었을 것이다. 그럼 자신의 화를 공유하기 위함이었을까? 당신들은 왜 화를 내지 않죠? 나와 같이 화를 내줘요! 다만 그렇다고 하기에는 관객의 이입에 눈꼽 만큼도 신경 쓰지 않는 태도가 걸린다. 그가 등장인물의 입을 빌려 토해내는 외침과 저주를 마주하는 건 누구보다도 관객이다. 오시마의 영화를 보고 있노라면 욕을 먹는 기분이 든다. '저는 일본인도 아닌데 저한테 왜 이러세요.' 라고 하소연하고 싶어진 적이 한두 번이 아니다.

하소연이라. 어쩌면 오시마는 정말로 관객이 자신에게 항변하기를 바랐던 게 아닐까. 공격하고 부아를 돋움으로써 침묵을 깨고 불편한 심기를 드러내며 반론을 펴주기를 바랐던 게 아닐까. 거기서부터 토론이 시작되기를 바랐던 게 아닐까. 그러니까 오시마에게 영화는 대화의 출발점에 불과했고, 자신의 영화 앞에 기꺼이 맞서 싸우려 드는 목소리를 간절히 기다리지 않았을까.

(그렇다면 오시마에게는 자신의 영화에 대한 칭찬과 숭배조차 괴로움이었을까?)

Posted by 거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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