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13년 8월 12일에 쓴 글. 일부 문장을 바꾸고 다듬었다. 영화의 지도에 관한 글을 쓰다가 문득 '예전에 이 비슷한 이야기를 한 적이 있는데?' 하는 생각이 들어서 가져왔다. 이번에 써보려던 글의 방향과는 좀 차이도 있고 독자도 훨씬 분명한 글이긴 하지만 그래도 여전히 유효한 내용이니까. 다만 장황한 예시 중에는 지금은 달리 생각하게 된 부분도 보인다.



주말에 이틀 연속으로 아르헨티나의 영화감독 마티아스 피녜이로의 영화들을 네 편 봤습니다. 마지막 영화인 [비올라]는 몇달 전 전주에서 봤으니, 정확히 말하면 세 편이죠. 2006년에 만들었다는 다큐멘터리를 제외하면 전 작품을 다 본 셈입니다.

피녜이로의 영화에 대해 뭐라고 말할 입장이 못 됩니다. 우선 그에 대해 아는 바가 별로 없고, 솔직히 그의 영화들을 완전히 이해했다고도 말을 못해요. [비올라]를 제외한 그의 다른 영화들을 온전하게 즐겼다고 할 수도 없고. [비올라]도 전주에서 처음 봤을 때는 '이게 뭔가'했어요. 당시 경험을 예습삼아 다시 보니 재미가 두 배 정도 상승하더군요.

- DJUNA, 〈비올라〉 리뷰

종종 지인들이 내가 소장한 DVD나 블루레이를 빌려 가곤 한다. 사실 내가 적극 권장하는 편이다. 나는 한국 관객이 한국의 주류 영화 문화에서 소개하는 범위를 벗어나 좀 더 다양한 영화를 제대로 된 경로로 접하기를 간절히 바라는 편이며, 내가 소장한 타이틀 상당수가 그런 영화들이기 때문이다. 모두가 나처럼 외화를 퍼줘 가며 외국 DVD와 블루레이를 사서 영어 자막으로 영화를 볼 수는 없을 테고, 모름지기 영화를 좋아하는 사람이라면 그래야만 한다고 주장할 생각도 없지만, 합법적/윤리적인 경로를 이용하는 사람이 한국에서 접할 수 있는 영화의 범위에는 한계가 있다는 것도 부정할 수 없는 사실이다. 그러니 주변에 영화에 목이 말라 외국 타이틀이라도 보고는 싶은데 여건이 되지 않아 안타까워하는 사람이 있다면, 모쪼록 내가 가지고 있는 타이틀을 적극 활용해 주기를 바라게 된다.

그런데, 다른 사람에게 프로그래머 노릇을 해본 사람이라면 무슨 말인지 알 테지만, 때로는 순순히 타이틀을 빌려주는 대신 빌려 가는 사람의 선택에 참견하고 싶어질 때가 있다. 이걸 보기 전에 저걸 먼저 보면 좋다든가, 이건 이 판본보다는 다른 판본이 낫다든가 하는 식으로 말이다. 예컨대 나는 누군가 줄스 다신의 〈리피피Du Rififi chez les hommes, 1955〉를 보겠다고 하면 어쩐지 그보다는 장-피에르 멜빌의 〈붉은 원Le Cercle rouge, 1970〉을 먼저 보라고 권하고 싶어진다. 그런 다음 그 사람이 〈붉은 원〉에 이어 〈리피피〉까지 보고 나면 디저트 삼아 마리오 모니첼리의 〈평범한 사람들I Soliti ignoti, 1958〉도 권할 것이다. 또 누군가가 존 포드의 〈내 사랑 클레멘타인My Darling Clementine, 1946〉을 보겠다고 한다면 (그 사람이 그 영화를 두 번 볼 생각이 아니라면) 96분짜리 극장판보다는 103분짜리 내부 시사판을 추천하고 싶다. 반면 샘 페킨파의 〈팻 개럿과 빌리 더 키드Pat Garret & Billy the Kid, 1973〉는 2005년에 제작된 특별판을 먼저 보도록 한 다음 1988년 프리뷰판은 완전히 다른 영화니까 그것도 반드시 챙겨 보도록 권할 듯하다.

참견은 거기서 끝이 아니다. 때로는 영화를 보는 시간이나 순서, 장소에도 참견하고 싶어진다. 예를 들어 ① 와이드 TV와 ② 대형 스크린+프로젝터라는 두 가지 선택항이 있다면, 그리고 누군가 당장 대형 스크린+프로젝터 쪽에는 자리가 나지 않아 와이드 TV로 신도 카네토의 〈오니바바鬼婆, 1964〉를 보겠다고 나선다면, 나는 그보다는 스크린으로 보는 편을 권할 것 같다. 그 영화의 갈대밭은 스크린이 클수록 좋으니까(물론 꼭 〈오니바바〉가 아니더라도, 어차피 영화란 스크린이 크면 클수록 좋기는 하다. 그래도 TV로 보게 내버려두고 싶지 않은 영화들이 있다). 혹은 누군가가 프레스톤 스터지스의 〈팜 비치 이야기The Palm Beach Story, 1942〉와 프랭크 카프라의 〈어느 날 밤에 생긴 일It Happened One Night, 1934〉을 연달아 보겠다고 한다면, 나는 연달아 보는 것은 좋으나 순서를 바꿔보면 어떻겠냐고 말하겠다. 또 어느 혈기왕성한 영화광이 코바야시 마사키의 〈인간의 조건人間の條件, 1959-1961〉을 하루 만에 다 보겠다고 나선다면, 그러지 말고 하루에 한 부씩 끊어서 사흘에 걸쳐 보라고 하겠다. 만약 내가 그 사람을 각별히 아낀다면, 그 사흘 동안에는 매일 영화를 보는 시간도 똑같이 하는 편이 좋고, 해가 뉘엿뉘엿 질 때쯤 영화가 끝나도록 오후 세 시에서 세 시 반 사이에 영화를 보면 더욱 좋으리라는 이야기까지 덧붙일지도 모른다. 프랜시스 포드 코폴라의 대부 3부작을 처음 본다는 사람 앞에서는 〈대부The Godfather, 1972〉와 〈대부 2The Godfather, Part II, 1974〉는 큰 시간 간격을 두고 보지 않아도 괜찮지만 〈대부 3〉는 오랜 시간이 지나 앞의 두 편에 관한 기억이 흐릿해질 무렵 보라고 말해주고 싶은 마음을 억누르기 어렵다. 〈대부 2〉까지 보고 나서 1년쯤 후에 〈대부 3〉를 봐봐요. 그 영화는 그게 어울린다니까. 슬슬 변태 같은 기분이 들지만, 재미있으니까 예를 하나만 더 들겠다. 산제이 가드비의 〈둠Dhoom, 2004〉과 〈둠 2Dhoom 2, 2006〉는, 속편인 〈둠 2〉를 먼저 본 다음에 전편인 〈둠〉을 보는 편이 훨씬 좋다고 확신한다.

그러나 이런 참견을 늘 입 밖에 꺼내지는 않는다. 쓸데없는 오지랖이나 잘난 척처럼 보일까 염려스럽기 때문이기도 하지만, 무엇보다도 사실 그러한 참견에는 생각만큼 뚜렷한 근거가 없음을 알기 때문이다. 물론 모든 참견쟁이에게는 늘 '타당한' 근거가 있다. 그러나 자신에게 좀 더 엄격한 참견쟁이라면, 그 타당한 근거가 실은 그리 타당하지 않다는 사실을, 객관적이라기보다는 극도로 주관적이며 임의적일 뿐이라는 사실도 이미 알고 있기 마련이다.

가령 나는 '영화는 역시 필름으로 스크린에서'라는 주장에 대체로 동조하는 편이다. 그러나 그것은 이상론일 뿐, 그것이 늘 이상적인 감상을 보장하지는 못한다는 사실도 알고 있다. 말이 좋아서 '필름으로 스크린에서'지, 극장에서의 영화 감상이란 늘 수많은 변수에 시달리기 마련이고, 집에서 프로젝터로, 와이드 TV로, 심지어 노트북 모니터로 DVD를 보는 체험만도 못한 극장 체험도 숱하게 겪어보지 않았던가. 또한 이상적이지 못한 환경에서 감상한 영화라고 해서 그 감흥을 무조건 무시할 수 있는 것도 아니다. 박찬욱의 〈복수는 나의 것2002〉이 잔인하다는 말에 지레 겁먹고 굳이 스크린을 마다한 채 DVD를 빌려다가 대낮에 커튼도 치지 않은 양지바른 기숙사 방에서 혼자 노트북으로 영화를 보며 입고 있던 츄리닝 옷자락을 이로 자근자근 물어뜯고 고통에 몸부림쳤던 그 기억을 어떻게 잊을 수 있을까? 나중에 더 큰 스크린으로 다시 볼 기회도 있었지만, 그 영화는 노트북 모니터 속에서 이미 내 영혼에 깊은 상처를 남겼다. 또는 몇 해 전 한국영상자료원에서 코바야시의 〈인간의 조건〉을 상영했을 때, 함께 간 지인들은 그 영화에 몹시 감동했지만 나는 릴이 바뀔 때마다 툭툭 끊어지던 그 필름이, 그리고 내가 처음 접했던 영어 자막과는 사뭇 다른 그 한국어 자막이 신경을 거스르고 영화의 힘마저 깎아내는 듯하여 못내 찜찜한 마음으로 극장을 나서기도 했다. 그때의 상영이 분명 누군가에게는 인생에 길이 남을 영화 체험이었겠으나, 내게 〈인간의 조건〉은 그보다 한 해 전에 상영실을 사흘 동안 차지한 채 DVD로 보았던 그 영화로만 남아있다.

영화의 순서도 마찬가지다. 모든 영화를 그 영향 관계를 따져가며 순서에 맞게 본다는 것은 불가능하다. 폴 토머스 앤더슨의 〈부기 나이츠Boogie Nights, 1997〉를 보는 사람 중 마틴 스콜세지의 〈성난 황소Raging Bull, 1980〉와 〈좋은 친구들Goodfellas, 1990〉, 그리고 미하일 칼라토초프의 〈나는 쿠바Soy Cuba, 1964〉를 미리 봐두는 사람은 얼마나 될까? 또 그중 〈성난 황소〉는 그냥 봐도 괜찮은 영화인가 하면 그렇지도 않아서, 영화광 스콜세지는 그 영화에서 프랭크 보재기의 〈제7의 천국7th Heaven, 1927〉에서부터 아브라함 폴론스키의 〈악의 힘Force of Evil, 1948〉, 로버트 로슨의 〈육체와 영혼Body and Soul, 1947〉, 엘리아 카잔의 〈부둣가에서On the Waterfront, 1954〉, 조지 큐커의 〈스타 탄생A Star is Born, 1954〉 등을 마구 인용하고 있다. 그런 식으로 흐름을 계속 거슬러 올라가다 보면 결국은 영화의 탄생에까지 이를 터인데, 19세기 말에 태어난 열혈 영화광이 아닌 다음에야 그걸 곧이곧대로 순서대로 따라올 사람이 요즘 세상에 어디 있겠는가?

그렇더라도 낯선 영화를 대함에 있어 좀 더 쉽게 접근할 수 있는 영화와 접근하기 어려운 영화가 있지 않은가? 그럴 때 적절한 순서를 제공할 필요도 있지 않을까? 일견 맞는 구석도 있는 말이지만, 나는 이에 관해서도 원론적으로는 부정적인 입장이다. 일단 누가 뭘 쉽게 받아들일지는 알 수 없는 노릇이다. 나는 프리츠 랑의 열렬한 팬이지만, 아무에게도 랑의 영화를 적극적으로 추천하지는 않는다. 내가 너무나 사랑하는 〈M1931〉 같은 영화는, 웬만해서는 보는 이들을 곯아떨어지게 할 뿐일 테고, 설령 그렇지 않더라도 별다른 감흥 없이 지나가 버리리라 생각한다. 하지만 나는 또한 안다. 세상에는 정말로 〈M〉을 처음 본 순간 좋아했거나 적어도 그 훌륭함을 알아보는 관객도 있다는 사실을(실은 〈M〉이 무척 지루하고 독창성 없는 영화라고 여겼던 나로 하여금 〈M〉을 다시 보도록 이끌어준 이도 바로 그런 관객이었다). 영화를 통해 타인과 친해지는 사람들에게는 어떤 사람에게는 어떤 영화가 잘 맞고 어떤 영화는 잘 맞지 않으리라고 지레 단정하는 못된 버릇이 있지만, 타인을 그토록 정확하게 짚어내기란 쉽지 않은 일이다.

지금 당장 소화할 수 없는 영화를 만나는 게 그렇게 기피해야만 할 일도 아니다. 지금 당장은 소화되지 않지만 훗날 다른 각도에서 뒤늦게 깨달음을 안겨줄 체험도 있는 법이다. 한 관객의 식견이 변화하고 넓혀질 수 있다는 가능성을 미리 부정해서는 안 된다. 내게는 그처럼 느리게 다투며 친해진 영화가 많다. 〈M〉이 그런 영화였고, 하워드 혹스의 〈스카페이스Scarface, 1932〉가 그랬고, 포드의 〈수색자The Searchers, 1956〉가 그랬고, 미켈란젤로 안토니오니의 〈일식L'Eclisse, 1962〉이 그랬다. 혹은 코폴라의 〈대부〉나 세르지오 레오네의 〈옛날 옛적 미국에서Once Upon a Time in America, 1984〉처럼 처음 만났을 때부터 재미있게 봤던 영화라고 할지라도, 그 본색을 실감하는 데에는 수년의 시간이 걸린 영화들도 많다. 그렇다면 그들과의 첫 만남은 그저 무의미한, 너무 이른 것이었을까? 그때는 만나지 않았더라면 좋았을까? 하지만 그때 지나치게 일찍 만났기에 겪어야 했던 오판, 시행착오, 바보 같은 발언들, 토론과 논쟁이 없이 과연 훗날의 더 풍요로운 감동이 가능했을까? 알 수 없는 일이다. 오히려 나는 첫 만남의 결핍과 좌절이 그 영화를 거듭 다시 보도록 이끌었다고 생각하는 편이다. 처음 만난 사람의 진가를 두 시간 만에 알아보기란 얼마나 어려운 일인가. 하지만 모든 사람을 한눈에 꿰뚫어 볼 수 있는 사람이 되고자 한다면, 일단 언젠가 어디선가 누군가를 만나고 봐야 할 일이 아닌가. 다만 그때 자신이 본 것이 상대의 전부라고 굳게 믿고 등을 돌려버리지만 않으면 될 일이다.

결국 이것은 각자가 그리는 지도의 문제로 귀결된다. 영화학자나 비평가가 아니더라도, 영화를 보다 보면 지도를 그리게 된다. 그러나 영화의 지도는 지리부도 속의 지형과는 달라서, 대체로 두루뭉술하고 유동적이며 작성자마다 다르다. 어떤 영화가 어떤 방식으로 가까이 붙어 관계 맺는가는 그 사람이 본 영화 자체뿐만 아니라 그날의 영화 감상을 둘러싼 맥락, 나아가 그 사람의 가치관과도 연관 관계를 맺기 때문이다.

가령 내 영화 지도에서는 혹스와 멜빌과 두기봉과 마이클 만이 딱 달라붙어 있다. 한편 멜빌은 존 휴스턴을 사모했던 것 같지만 정말로 휴스턴의 자취가 멜빌에게 남았는지는 좀 의문스럽다. 마찬가지로 오우삼은 멜빌을 사모한다고 말하지만 그것도 짝사랑으로 그친 듯하다. 그런가 하면 멜빌 옆에서는 다신과 자크 베케르, 그리고 때로는 로베르 브레송이 뒷짐을 지고 서서 슬며시 웃고 있다. 약간 뒤쪽으로 클로드 소테의 모습도 어른거린다. 리 마빈과 스즈키 세이준이 멜빌과 친하다고 생각하지는 않지만, 둘은 각각 〈포인트 블랭크Point Blank, 1967〉와 〈살인의 낙인殺しの烙印, 1967〉에 이르면 〈사무라이Le Samouraï, 1967〉를 스쳐 지나가기도 한다. 또 두기봉과 마이클 만 옆에서는 앤더슨의 〈시드니Sidney, 1996〉, 마틴 맥도나의 〈브뤼주에서In Bruges, 2008〉, 그리고 김병서/조의석의 〈감시자들2013〉같은 영화가 어슬렁거린다. 이들은 발표 연도나 국적을 넘어서서 내 영화 세계 안에서 일종의 친족 관계를 형성한다.

그러나 또 다른 지도에서라면 다른 관계가 가능할 것이다. 멜빌-두기봉-만과 연결된다고 생각했던 혹스는 다시 스크루볼 코미디를 통해 에른스트 루비치-빌리 와일더와 붙기도 한다. 한편 스크루볼 코미디라는 장르만 놓고 보면 카프라와 스터지스도 여기에 가세해야 할 것 같은데, 정작 내 지도 안에서 둘은 루비치-혹스-와일더 커넥션과는 떨어진 채 정치 영화라든가 자기반영적 코미디의 세계를 꾸리고 있다. 그리고 정말 뜬금없게도 (워킹 타이틀의 로맨틱 코미디나 우디 앨런의 영화가 아니라) 쿠엔틴 타란티노가 이 근방을 어슬렁거릴 때가 있다. 타란티노가 어디에 얼마나 어떻게 연결되어 있을지는 타란티노만이 알리라.

그리고 이 영화들, 영화인들은 다른 사람의 지도에서는 또 다른 위치를 점하고 다른 영화들과 관계 맺고 있을 것이다. 영화를 좋아하는 사람들 사이에 우정이 존재할 수 있다면, 나는 그 우정이 결국 그 지도를 공유하고, 견주고, 필사하고, 자신의 지도를 수정하고 보완하는 행위를 통해 성립하리라 생각한다. (앞서 길게 언급한 남의 영화 보기에 대한 참견은, 말하자면 자신의 지도를 들이미는 정도의 행위로 생각할 수 있지 않을까)

영화에는 연표와 국경을 통해 그려진 '객관적'인 역사가 존재하지 않는다고 주장하려는 것은 아니다. 모든 역사에서와 마찬가지로, 영화의 역사에서도 연도와 지역은 무척 중요하며, 지도 그리기의 기본 재료가 된다. 그러나 어째서인지 영화는 자꾸 그 경계를 허물고 부정하고 다시 쓰기를 요구하는 경향이 있다. 예를 들어 필름 누아르의 경계를 확정하려는 끝없는 노력, 혹은 현대영화의 존재를 말하려는 숱한 시도와 회의. 표현주의나 네오리얼리즘처럼 교과서에서 명확하게 구분되는 척하는 사조조차도, 사실은 언제나 불분명하다. 아직 자신의 역사를 완고한 시선으로 돌아볼 만큼 나이를 먹지 못해서일 수도 있고, 그 성격상 과거의 시간을 포획해서 복제하고 재현하는 데에 능한 표현 수단이기 때문일 수도 있고, 아니면 아직 영화가 무엇인지 내가 알지 못하기 때문일 수도 있다. 이유야 어찌 되었든 간에, 내게 영화의 세계란 백지 위에 마구잡이로 흩뿌려진 점과 같은 모습으로 다가온다. 그리고 유치원 혹은 초등학교 시절 했던 숙제처럼, 그 선을 이어 그림을 완성하는 것이 영화 관객이 누릴 수 있는 지고의 기쁨 중 하나다. 게다가 여기에는 정해진 답도 없고 순서도 없으며 심지어 점의 위치를 바꿀 권한마저 주어지기도 한다.

그러므로, 간신히 하나의 선분만을 그려낸 다음 그것을 취향이라는 이름으로 묶고 주저앉아버리는 게으름, 이미 지난 점은 다시는 어떤 식으로도 지나지 않겠다는 무모함, 지우개는 쓰지 않겠다는 맹세와 같은 극악무도한 덫에만 걸리지 않는다면, 그리고 한 편의 영화가 반드시 품고 있기 마련인 결핍을 채우고자 하는 의지와 시간만 있다면, 영화를 보는 순서는 생각만큼 그렇게 결정적인 것은 아니다.

…그래도 역시 〈둠〉은 〈둠 2〉를 먼저 본 다음에 보는 게 더 좋은 것 같다.

전주에서 보았을 때보다 어제 봤을 때가 더 재미있었던 이유가 있습니다. 전 앞에서 피네이로의 전작들을 보는 데에 애를 좀 먹었다고 고백했습니다. 하지만 그 영화들을 통하고 나니 [비올라]는 훨씬 재미있는 영화가 되었습니다. 그가 끊임없이 반복하는 스타일, 주제, 소재 그리고 무엇보다 계속 출연하는 배우들(특히 비올라 역의 마리아 빌라르는 그의 네 영화에 모두 나옵니다)이 처음 감상 때에는 무심하게 넘겼던 것들에 새로운 의미를 넣어주더란 말이죠.

- DJUNA, 〈비올라〉 리뷰
Posted by 거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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