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맥베스Macbeth, 1948〉 이후 할리우드를 떠나 유럽에서 영화를 만들던 오슨 웰스는 〈악의 손길Touch of Evil, 1958〉로 10년 만에, 그리고 마지막으로 할리우드에 복귀한다. 할리우드 시스템과 불화를 일삼는 독불장군이라는 잘못된 평판과 달리 할리우드의 웰스는 촬영 기간과 제작비를 준수하고자 노력하는 감독이었고, 〈악의 손길〉도 제작비를 살짝 넘기고 예정보다 하루 더 촬영하기는 했지만 대체로 잡음 없이 촬영을 마쳤다. 10년 만의 귀환에 웰스의 지인들은 앞다투어 촬영을 도왔고, 촬영 중에는 스튜디오도 딱히 간섭하지 않았으니(밤 장면이 많은 영화인데 실제로 밤에 로케이션 촬영을 했기 때문에 스튜디오 중역들이 촬영장을 찾기 어려웠다), 이는 웰스가 할리우드에서 보낸 가장 만족스러운 시기 가운데 하나였다.

그러나 후반 작업으로 넘어가면서 불화가 시작됐다. 웰스에게는 최종편집권이 없였고, 유니버설은 웰스의 비전을 탐탁지 않게 여겼다. 스튜디오의 러프컷을 본 웰스는 1957년 12월 5일 제작부장 앞으로 58쪽짜리 메모를 써서 구구절절 자신이 이 영화에 적절하다고 생각하는 방향을 설명했으나, 유니버설은 이를 묵살하고 93분짜리 극장판을 만들어 동시상영용 B무비로 개봉했다. 유럽에서는 장-뤽 고다르와 프랑수아 트뤼포가 이 영화에 열광하고 있었지만, 미국에서 〈악의 손길〉은 큰 반향을 얻지 못하고 모습을 감췄다.

20년 가까운 세월이 흐른 후, 1970년대 중반 유니버설은 자사 아카이브에서 108분짜리 〈악의 손길〉 필름을 발견한다. 이것은 웰스가 메모를 작성한 후에 완성한 내부 시사용 필름으로, 웰스의 의견을 일부 반영하고 있었으며 1958년에는 빛을 보지 못했던 판본이었다. 때는 유럽 영화 문화의 영향을 받은 미국에도 영화광 세대가 생긴 시점이었고, 웰스는 젊은 영화광들이 추앙하는 작가 중 하나였다. 이를 의식한 유니버설은 이 108분짜리 〈악의 손길〉을 극장에 걸고 비디오로도 출시하면서 감독의 의견을 반영한 무삭제 복원판이라고 뻥을 쳤다. (당시 웰스는 아직 살아있었는데, 과연 그가 어떤 반응을 보였는지, 그 자신도 극장에 가서 이 판본을 보고 관객과의 대화도 진행했을지 궁금하다)

웰스가 세상을 떠나고도 13년 후인 1998년, 〈지옥의 묵시록Apocalypse Now, 1979〉의 편집자로 유명한 월터 머치는 유니버설의 복원팀과 공조하여 조너선 로젠봄을 비롯한 웰스 연구자들의 도움을 받아 웰스가 남긴 메모를 토대로 〈악의 손길〉을 재편집한다. 그렇게 완성한 복원판의 길이는 112분이 됐다.

이 세 판본 중 어느 것도 웰스의 "감독판"은 아니다. 이중 복원판만을 담고 있는 정발판 〈악의 손길〉 블루레이가 "감독판"이라는 명칭을 달고 있는 것은 얼마 전 이야기했던 〈옛날 옛적 미국에서Once Upon a Time in America, 1984〉 "감독 확장판"과 마찬가지로 과장 · 허위 광고다. 〈악의 손길〉은 저마다 결함을 안고 있는 이 세 개의 판본 사이에서 나타나는 차이와, 58쪽의 메모에만 담겨 있을 뿐 실현되지 못한 웰스의 비전 사이 어딘가를 떠도는 형태로 존재한다. 정발판과 달리 미국판 블루레이는 극장판, 내부 시사판, 복원판을 동등하게 대접하고 있으며 웰스의 메모도 책자로 함께 수록했는데, 참으로 고마운 정성이다.

〈악의 손길〉 블루레이 (유니버설)


이 블루레이에 굳이 트집을 잡자면 그마저도 〈악의 손길〉의 모든 조각을 담아낸 구성은 아니라는 점을 들 수는 있겠다. 50년대는 극장에 와이드스크린이 보급되던 전환기로, 당시의 와이드스크린 영화들은 (지금도 많은 와이드스크린 영화들이 그렇지만) 1.33:1 화면비로 촬영한 다음 화면 위아래를 가려 1.85:1로 영사하였다. 다만 아직 와이드스크린 영사 시설을 갖추지 못한 극장이라면 마스킹을 풀고 1.33:1으로 상영했을 가능성도 있다. 그렇다면 웰스는 어떤 화면비를 선호했는가? 1998년 〈악의 손길〉 복원판의 제작을 담당한 릭 슈미들린이 촬영감독 러셀 메티와 촬영기사 필립 H. 라스롭이 남긴 기록을 토대로 웰스는 1.85:1을 의도했고 실제로 그가 참석한 모든 상영은 1.85:1로 이루어졌다고 밝혔으며, 웰스 또한 그 구구절절한 58쪽짜리 메모에서 화면비 이야기는 남기지 않았지만, 논쟁은 지금껏 계속되고 있다. 거기에는 여러 가지 이유가 있을 터이나, 무엇보다도 오리지널 필름의 위아래를 가리지 않은 1.33:1 화면비의 화면 구도가 너무나 안정적이고 보기 좋다는 것이 핵심이겠다.

사실 이건 그렇게 이상한 일은 아니다. 말했듯 와이드스크린 전환기의 영화들은 종종 상영 시설에 따라 화면비가 달라지곤 했으며, 또한 이미 이 시기에 TV 방영까지 염두에 두고 촬영하는 경우도 있었다. 전환기의 감독과 촬영감독들에게 여러 화면비를 한꺼번에 의식하며 촬영에 임하는 건 그렇게 드문 일은 아니었다. 하지만 그렇다면, 설령 웰스가 제1 화면비로 선택하지는 않았다고 해도, 1.33:1 또한 이 영화의 화면비 아닐까?

그런 이유에서 영국의 홈비디오 제작사 유레카에서는 〈악의 손길〉의 세 판본을 다시 각각 1.33:1과 1.85:1로 수록하여 총 여섯 개 판본을 수록한 블루레이를 내놓았다. 이미지 품질은 유니버설 쪽이 미세하게 더 낫고(유니버설이 유레카보다 몇 년 늦게 새로운 복원판을 만들었다. 다만 이는 근소한 차이이며, 취향에 따라 유레카를 선호하는 이도 많다), 1.85:1 화면비는 유니버설의 프레이밍이 더 정확해 보이지만(유니버설판의 구도가 더 안정적이다), 1.33:1 화면비 수록은 유레카판의 큰 장점이다.

〈악의 손길〉 블루레이 (유레카)


세 판본, 혹은 여섯 판본 사이의 차이를 여기서 일일이 늘어놓을 여력은 없다. 각 판본 사이의 가장 크고 중요한 차이는 웰스가 의도했던 교차 편집의 구조라고 보지만, 보통 가장 자주 언급되는 차이는 오프닝이다.

익히 알려졌다시피 이 오프닝은 3분 동안 이어지는 장엄한 롱테이크로 이루어졌다. 카메라가 크레인을 타고 날아오른 뒤 기나긴 거리를 활강하면서 주인공 바가스와 수전이 폭탄을 실은 자동차와 앞서거니 뒤서거니 같은 길을 가는 광경은 수십 수백 번을 보아도 질리지 않는 묘기 대행진이다. 그런데 웰스는 원래 이 장면에서 음향도 실험하고 싶어했다. 그는 카메라가 미국-멕시코 국경 마을의 한복판을 가로지르는 동안 배경음악 없이 주변 상가에서 들려오는 음악과 엑스트라들이 내는 소리를 들여보내고, 겹치고, 나가게 하는 음향 몽타주를 추구했다. 또한 웰스는 그러는 동안 화면 위에 크레딧이 뜨지 않기를 바랐다.


〈악의 손길〉 복원판 오프닝

이러한 의도를 반영한 복원판이 등장하기 전까지, 유니버설에서 만든 판본들은 전부(즉 극장판과 내부 시사판 모두) 웰스의 의도를 무시했다. 화면에는 크레딧이 붙었고, 다채로운 음향 효과 대신 배경음악이 깔렸다.

나는 〈악의 손길〉을 복원판 DVD로 처음 만났기 때문에, 그러한 뒷이야기를 접했을 때는 유니버설의 실책에 혀를 차는 쪽이었다. 그러다 영국 영화 잡지 《Sight & Sound》에서 10년에 한 번씩 전세계 영화인들을 대상으로 진행하는 "영화 사상 최고의 영화" 투표─〈시민 케인Citizen Kane, 1941〉에 "영화 사상 가장 위대한 영화"의 멍에를 씌웠던 그 투표─의 2002년 목록을 훑던 중 조지 A. 로메로가 작성한 목록을 만났다. 로메로는 자신이 고른 열 편에 관해 하나씩 코멘트를 덧붙였는데, 그중 〈악의 손길〉에 관해 이렇게 썼다. "솔직히 까놓고 말해서 누가 〈시민 케인〉을 필요로 하냐? 난 영원토록 〈악의 손길〉을 끌어안고 갈 거다. 근데 '복원판'은 아냐. 맨시니를 내놔!"

처음에는 이게 무슨 말인지 이해하지 못했다가, 뒤늦게 〈악의 손길〉 작곡가가 헨리 맨시니였음을 깨달았다. 〈티파니에서 아침을Breakfast at Tiffany's, 1961〉이나 〈핑크 팬더The Pink Panther, 1963〉의 음악으로 유명한 그 사람이다. 아하, 복원판 이전 〈악의 손길〉 오프닝에는 맨시니의 음악이 실려 있나 보군?

그래서 찾아 들어보았다. 듣고 나니 웰스가 얼마나 자기 확신이 강한 창작자였는지 알 수 있었다. 나 같으면 누가 내 영화 오프닝을 위해 이런 음악을 작곡해서 넣어주면 설령 그게 의도가 아니었다고 해도 넙죽 엎드려 받지 않았을까. 어떻게 이런 음악을 듣고도 58쪽짜리 메모 맨 첫 줄에 "현재 영화의 오프닝에 깔린 배경 음악은 임시로 넣어둔 것으로 알겠습니다…" 라고 쓸 수 있지?!


〈악의 손길〉 복원 전 오프닝 (1.85:1)

물론 웰스의 의도는 이해할 수 있다. 복원판을 보다가 이 판본을 보면 확실히 크레딧 자막 때문에 화면에 대한 집중력이 떨어진다. 또 음악이 너무나 압도적이고 화면과 잘 어우러지는 나머지 여기 묘사된 상황을 의식하고 사고하기가 어려워진다. 그저 카메라가 움직이고 사람이 움직이고 자동차가 움직이며 화면이 바뀜에 따라 음악이 바뀌는 과정 전체가 하나의 음악적 덩어리로 밀려오면서 급기야 자동차에 폭탄이 실려 있다는 사실마저 잠시 잊어버릴 지경이다. 웰스가 이를 바라지 않았으리라는 점은 알겠다.

하지만 이 또한 실로 영화적인 황홀경 아닌가! 〈악의 손길〉을 복원판으로 먼저 접한 나도 이 음악을 포기할 수 없을 정도인데 하물며 이전 판본들로 먼저 만났을 로메로 같은 골수팬들이 이 음악에 느낄 애정은 어떻겠나. 무슨 수를 써서라도 끌어안고 가야지.

아래는 마찬가지로 맨시니의 음악이 있는 1.33:1 화면비 영상이다. 참, 이참에 서울아트시네마/시네마테크 서울 상영본도 정리해두도록 하자. 2007년 "오슨 웰스 특별전"에서는 극장판 16mm 필름을 1.33:1 화면비로 상영했고, 이번 2015년 "탄생 100주년 오슨 웰스 회고전"에서는 복원판 DCP를 1.85:1 화면비로 상영했다. 현재 시네마테크 서울 프로그램 데이터베이스에 기재된 상영 시간은 두 프로그램 모두 잘못됐다. 듣기로는 이렇게 판본이 여럿 있는 영화들의 경우 상영본을 받아 직접 틀어보기 전에는 판본을 확실히 알기 어렵다고 한다.


〈악의 손길〉 복원 전 오프닝 (1.33:1)

Posted by 거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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