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암살〉

카테고리 없음 2015. 7. 24. 05:03
최동훈 감독의 신작 〈암살2015〉을 개봉 당일에 챙겨봤다. 지루함 없이 즐겼고, 기대보다는 못했고, 예상보다는 나았으며, 배우들은 훌륭했고, 전지현은 돋보였고, 전체적으로는 지치는 기분이었다. 이런 영화야말로 나를 가장 힘 빠지게 하는 영화가 아닌지. 안경 쓰고 긴 코트를 입고 기관단총을 든 전지현이 경성의 거리를 내달리거나 흰 웨딩드레스에 피를 묻힌 전지현이 장총을 겨누는 이미지에 대한 매혹을 제외하면, 이 영화를 만든 사람이 결국 무엇에 탐닉했는지, 무엇을 보고 싶었는지 알 수 없었다. 이를 악물지 않는 영화. 어느 장면이든 적당히 보기 좋고, 그래서 어떤 장면도 보기 좋지 않으며, 누구에게도 상처 주지 않지만, 누구의 가슴에도 남지 않고, 분명 흥행할 터이나, 그 흥행이 좋기만 한 일일까 의심하도록 하는 영화. 데뷔 때부터 능구렁이처럼 매끄럽게 사기 치듯 넘어가는 영화를 만들던 최동훈 감독이 이번에는 어떠어떠한 영화를 만들고/보고 싶다는 자신의 열망마저도 매끄럽게 넘겨버린 게 아닐까? 그는 과연 이 현장을 자기 뜻대로 조율했을까? 혹시 조율의 즐거움에 심취한 나머지 모두가 즐겁게 이득을 챙겨갈 만한 영화를 만드는 것만이 유일한 목표가 돼버리진 않았을까? 그러나 180억짜리 영화를 만들면서 모두가 즐거운 결과를 끌어낸다는 건 모두가 이기는 도박판 같은 소리다. 나는 최동훈이 〈리피피Du Rififi chez les hommes, 1955〉를 만들고 싶어하는 감독이라고 생각했는데, 그는 점점 〈황야의 7인The Magnificent Seven, 1960〉을 만들고 있다. 기왕 존 스터지스라면 〈대탈주The Great Escape, 1963〉를 꿈꾸어주셨으면 합니다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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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범죄의 재구성〉 때부터 〈암살〉까지 쭉, 최동훈 영화의 '정서'가 아슬아슬하게 느껴진다.

최동훈은 데뷔 때부터 자신을 살찌운 멋진 범죄 소설과 영화들을 되뇌면서 왜 다들 그런 영화를 안 만드는지 모르겠으나 자신은 그런 영화를 만들 거라고 호언장담한 감독이다. 인터뷰 구석구석 한국 영화의 구질구질함에서 벗어나 날렵하고 매끈한 장르 영화를 만들겠다는 열망이 한껏 전해졌다. 자연히 한국 영화의 리얼리즘은 그의 적이었다. 2011년 초 서울아트시네마에서 열린 "2011년 시네마테크의 친구들 영화제"가 떠오른다. 당시 〈도둑들2012〉을 준비 중이던 최동훈은 거기서 〈리오 브라보Rio Bravo, 1959〉를 소개했다. 관객과의 대화에서 나는 대강 다음과 같은 질문을 던졌다. 감독님께서는 〈리오 브라보〉를 좋아한다고 말씀하시지만 정작 감독님 영화 속의 인물들은 〈리오 브라보〉에서처럼 산뜻해지지 못한 채 늘 뒤로 가면 진흙탕 속에서 나뒹굽니다. 이건 혹시 한국적 리얼리즘이 남긴 강박 아닐까요? 그는 이 질문을 받자마자 자신이 가장 싫어하는 것이 리얼리즘이라고 단언했다.

그때나 지금이나 그 말 자체는 믿는다. 최동훈은 한국 영화를 옭아매는 리얼리즘의 전통을 의식적으로 멀리해왔다. 그에 대한 자부심마저 있을지도 모른다. 예를 들면 이렇다. 〈암살〉 후반부, 암살이 실패로 돌아가고 암살자 안옥윤의 존재가 암살 대상과 경찰들에게 널리 알려진다. 안옥윤은 쌍둥이 자매인 미치코를 연기하면서 미치코의 집에서 이틀을 버틴다. 이전까지 잘 알지도 못하는 상대였던 미치코의 아버지와 여타 고용인들, 약혼자의 눈까지 속였다는 얘기다. 유일하게 자신의 정체를 알아차린 집사는 살해하여 혼자서 시체까지 처리한다. 그리고는 마침내 웨딩드레스를 입고 신부로서 결혼식장에 잠입한다. 만약 누군가가 이런 전개는 믿을 수 없다고 시비를 건다면, 최동훈은 그런 건 그냥 집에 들어서는 대목의 긴장감을 강조하고 집사에게 들켜 살해하는 장면까지 넣어주면 적당히 흐름을 타고 넘어갈 수 있는 부분이라고 대답할 법한 연출자다. 이런 문제에 관해서 나는 최동훈의 편이다. 두기봉이나 쿠엔틴 타란티노 정도로 마술을 벌이지는 못하지만, 그래도 그의 영화 역시 장르 관습에 기대고 고유의 세계를 만들어 리얼리즘에 벗어나려 애쓰며, 곧잘 성공한다.

다만 4년 전에는 부정확했던 질문을 좀 더 다듬어 이렇게 다시 던져보고 싶다. 감독님께서 장르적으로, 영화적으로 벗어던졌다고 생각했던 한국식 리얼리즘이, '정서'라는 형태로 나타나 영화를 뒤흔들고 있는 건 아닌가요?

최동훈은 인터뷰에서 "장르" 만큼이나 "정서"라는 말을 자주 사용한다. 자신의 영화는 이러저러한 장르의 관습과 외피를 갖추고 있지만, 사실은 캐릭터의 정서가 가장 중요한 영화라는 식이다. 그런데 최동훈의 영화를 보면 볼수록 그가 말하는 "정서"가 가리키는 바가 몹시 제한적이라는 생각을 하게 된다.

가령 그는 2012년 4월 《씨네21》에 실린 〈도둑들〉 관련 인터뷰에서 스티븐 소더버그의 〈오션스 일레븐Ocean's Eleven, 2001〉를 두고 "훈훈하게 털고 매끈하게 마무리하는" 그런 이야기는 "판타지"이지만 자신의 영화는 그렇지 않다고 주장한다. 또 그 연장선에서 할리우드 영화는 너무 매끄러운 플롯과 스타 이미지에 의지하여 캐릭터는 빛나지 않는다며 거리를 둔다. 그러면서 강탈 영화의 모범으로 줄스 다신의 〈리피피Du Rififi chez les hommes, 1955〉를 꼽더니, 급기야 자기 영화의 주인공들은 사람 사는 모습을 드러낸다고 힘주어 말한다. 최동훈의 인터뷰에서는 이런 믿음을 심심찮게 확인할 수 있다.

그러니까 최동훈은 마치 장르 관습이라는 매끄러운 기계 장치와 캐릭터가 품고 있는 인간적인 정서는 별개의 층위에서 작동한다고 믿는 듯하다. 실제로 그의 영화는 전자에 대한 매혹에서 출발하지만, 막상 판을 벌인 뒤에는 재빨리 후자로 넘어가고 싶어한다. "계획의 실천"을 그나마 흥미진진하게 묘사한 작품은 데뷔작 〈범죄의 재구성2004〉과 원작에 의존한 〈타짜2006〉 정도다. 지금에 와서 〈도둑들〉의 천만 관객 중 카지노 터는 단계를 기억하는 관객이 몇이나 될까. 지도 한 장 놓고 설계를 끝낸 다음 시시한 코미디로 준비 과정을 때우더니 거사 당일이 되자 허망하게 판을 엎어버리는 〈암살〉에 이르러서는 말할 것도 없다.

대신 최동훈의 영화는 놀라울 정도로 한국 TV 드라마스러운 감상과 사연과 반전에 매달린다. 동료/연인 사이의 피를 토하는 배신, 주인공을 분노케 하는 동료의 비통한 죽음, 모호한 삼각관계, 과거의 원한이나 사연 등등이 겹겹이 쌓인다. 심지어 다섯 편의 장편 중 두 편에서 쌍둥이라는 소재를 사용했고, 〈전우치2009〉에서는 쌍둥이 대신 전생의 그녀와 꼭 닮은 그녀가 등장한다. 만약 이런 부분만을 따로 떼어 지적한다면 그는 그건 다 장르 관습이라며 발뺌할지도 모른다. 하지만 천만에. 이건 전부 그가 겉으로 내세운 장르의 판을 깨면서까지 인물의 '정서'를 합리화하기 위해 사용하는 장치들이다. 고집스럽게 반복 사용하는 소재들을 놓고 보면, 최동훈은 지금 한국 영화계에서 가장 감상적인 작가다. 그는 오우삼 시절의 홍콩 누아르만큼이나 감상적인 영화를 만들고 있다. 다만 오우삼이 자신의 감상을 숨기지 않았던 것과 달리, 최동훈은 "장르 관습"이나 "정서" 같은 어휘 뒤로 숨으며 자신은 그런 사람이 아니라고 손사래를 치려 애쓴다는 차이가 있을 뿐.

감상 자체를 반대하지는 않는다. 하지만 자신이 감상적이라는 사실을 부정하는 감상주의자의 작품은 늘 불안하다. 그게 〈암살〉까지 이르고보니 두 가지 걱정을 떨치기 어렵다.

첫째, 점점 최동훈 영화가 지향(한다고 주장)하는 장르적 즐거움의 밀도가 옅어지고 따분해지고 있다. 〈범죄의 재구성〉 때만 해도 나는 그가 정말로 관객의 심장을 움켜쥐고 농락하여 손톱을 물어뜯고 배를 감싸쥐도록 하는 교활한 영화들을 만들려 한다고 생각했다. 하지만 이후 10년 동안 최동훈의 영화는 점점 더 한국 TV 드라마의 인물 관계도를 이해하는 데에 필요한 수준의 집중력만을 요구하는 편안한 영화가 되고 있다. 액션을 묘사하는 기술은 매끄럽지만, 관객으로서 캐릭터와 함께하며 안위를 염려하고 성공을 기원하게 되지는 않는다. 그저 표피적인 장식이나 곡예를 구경할 따름이다. 첫 문단에서 "안경 쓰고 긴 코트를 입고 기관단총을 든 전지현이 경성의 거리를 내달리거나 흰 웨딩드레스에 피를 묻힌 전지현이 장총을 겨누는 이미지에 대한 매혹을 제외하면"이라고 썼던 건 비아냥이나 과장이 아니라 진심이다. 〈암살〉은 어떤 장면(scene)도 인상적이지 않은 영화였다. 돌이켜보면 애당초 최동훈이 목표했던 바를 엄청나게 잘 해내는 영화를 본 적도 없는 것 같다. 그는 그저 처음부터 '나는 이걸 노릴 거야' 라고 소문을 내서 전문가처럼 보이도록 했을 뿐, 사실은 서툰 사기꾼/도둑/암살자인 게 아닐까 하는 의심이 싹트기 시작한다.

둘째, 감상성, 혹은 최동훈의 표현대로 '정서'를 담당하는 대목의 연출이 점점 더 촌스러워지고 있다. 〈암살〉에서 두 가지 예를 들어보자. 먼저 안옥윤이 어린 시절 겪은 참상을 되뇌는 장면. 어린 안옥윤을 연기할 배우까지 따로 캐스팅하여 굳이 그 한 대목을 시각화하여 인서트로 집어넣은 선택을 받아들이기 어렵다. 〈죠스Jaws, 1975〉에서 퀸트가 USS 인디애너폴리스의 참상을 읊조리는 대목에 실제로 난파된 수병들이 상어떼에 잡아먹히는 모습을 담은 인서트를 넣은 꼴이다(혹시 최동훈이라면 〈죠스〉의 그 장면마저도 플롯에만 의지한 채 캐릭터를 빛나게 하지 못하는 할리우드 영화의 예라고 생각할까?). 그리고 영화의 맨 마지막 장면. 모든 암살이 끝난 후, 죽은 사람들을 떠올리는 안옥윤의 얼굴로 영화가 끝난다. "죽은 사람들을 떠올리는"이라고 했지만, 정확히는 앞서 나왔던 영화 속 화면을 잘라내어 다시 붙이고 있다. 이 연출은 앞서 나왔던 장면들에 새로운 의미를 부여한다기보다는 의미를 애써 쥐어짜낸다. 특히 오달수가 연기한 영감이 안옥윤과 헤어지면서 "우리 잊으면 안 돼." 라고 말하는 대목은 처음 나올 때도 이미 의미심장함으로 차고 넘쳤다. 그걸 다시 끌고 와 살아남은 자의 회상에 집어넣으면서 씁쓸함과 비장함을 부추기는 광경은 민망했다.

이런 태도가 최동훈 개인의 성향이기 전에 한국에서 흥행에 성공해야만 하는 영화를 만들며 후천적으로 떠안게 된 특성일지도 모른다는 의심도 든다. 플롯의 수행과 정서를 분리해서 생각하고, 그래서 사건이 전개되는 장면과 캐릭터의 정서를 드러내는 장면을 따로 할당하고, 진행 중인 플롯과는 별도로 정서를 일일이 해설해줄 제2의 플롯(=과거의 사연, 애정 관계 등등)을 거추장스럽게 붙여가며 관객에게 떠먹인 다음, 급기야는 정서를 담당하는 부분이 플롯을 집어삼키고 뒤흔드는 동안 플롯 자체는 시시할 정도로 앙상해진다. 이것이야말로 흥행 대박을 노리는 한국의 오만가지 픽션들이 끝없이 벌이는 짓거리 아닌가. 애초에 기획을 가능케 했던 소재는 어디까지나 관심 끌기용 미끼에 불과할 뿐, 캐릭터들의 인간적인 정서가 우리 모두를 구원하리니. 병원에서 연애하는 의료 드라마, 검찰청에서 연애하는 검찰 드라마, 식당에서 연애하는 요리 드라마, 모두 같은 태도에서 나온다. 유감스럽게도 〈암살〉은 거기서 별로 멀지 않다. 별로 멀지 않기 때문에 틀림없이 흥행하리라 믿는다. 나는 최동훈이 그 흥행에 기뻐하지 않았으면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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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하는 평론가의 세심한 관찰과 분석과 확장과 가설과 고의적 억측이 필요한 부분인데, 나는 평론가가 아니므로 그냥 간단한 관찰과 무책임한 인상만을 기록해두련다.

〈암살〉을 보던 중 묘하게 영화 밖으로 엄습해 오는 이미지가 있었다. 한 번이었으면 그러려니 넘어갔을 텐데, 그 이미지는 네 번이나 반복됐고, 심지어 최동훈 감독의 다른 영화까지 불러왔다.

네 이미지의 공통점을 요약하면 다음과 같다. 특정 공간 안에서 요란한 사건이 벌어진다. 한참 안에서 엎치락 뒤치락 하던 인물이 공간 밖으로 나간다. 카메라는 인물의 등을 바라보며 함께 공간의 경계를 넘어간다. 그순간 눈앞에 완전히 새로운 공간이 펼쳐진다. 새로운 공간은 마치 이전까지 사건이 벌어지고 있었던 공간과 아무런 상관도 없다는 듯 태연하다. 바로 그때 캐릭터가 느꼈을 법한 어리둥절함이 관객인 내게까지 쏟아졌다. 단순히 인접한 두 개의 다른 공간 사이를 건너왔다는 느낌이 아니라, 아예 존재하는 층위가 다른 공간 사이에 도약이 있었다는 느낌이었다. 느닷없이 낯선 세계에 떨어진 시간여행자가 느낄 법한 황망함에 가까웠다.

그 자체로는 그리 드물지 않은 연출이지만, 〈암살〉에는 이런 순간이 네 번이나 반복되면서 자기 존재를 알려댄다. ① 프롤로그에서 강인국이 암살 시도를 피해 카와구치를 둘러업고 건물 밖으로 나왔을 때. ② 안옥윤과 상하이 피스톨이 한참 총질을 벌이다 마침내 결혼식장 밖으로 나왔을 때. ③ 염석진이 반민특위 재판에서 무죄를 선고 받고 법정을 나왔을 때. ④ 염석진이 총을 맞고 비틀거리다가 울타리 한구석을 무너뜨리고 벌판으로 들어설 때. 특히 네 번째에 이르러서는 이 반복을 의식할 수밖에 없었다. 앞의 세 번이야 건물 출입문이니 그렇다고 해도, 굳이 막아놓은 울타리를 무너뜨린 다음, 조금 전까지는 시내 한복판의 골목 같기만 했던 곳 바로 옆에 허허벌판을 펼쳐 놓더니, 빨랫줄에 하얀 천을 걸어 화면 가득 휘날리게 해서 거의 스즈키 세이준 영화 같은 초현실성을 가미한다. 그 한복판에서 민족의 배신자가 쓰러진다. 안옥윤은 벌판으로 들어서지 않은 채 골목길을 배경으로 그 광경을 지켜본다. 이 정도로까지 공간을 의도적으로 분리하여 이물감을 남긴 사람의 (무)의식에는 무엇이 있었을까? 〈암살〉에서 융화하지 못한 채 어정쩡하게 눈치 보며 공존하고 있는 두 개의 세계는 무엇일까?

말했듯 이 이미지의 정체를 섣불리 지목하여 의미화 할 생각은 없다. 다만 이와 무척 흡사한 장면을 최동훈의 다른 영화에서도 확인할 수 있음을 환기하고 싶다. 바로 〈전우치〉의 마지막 장면에서다. 참고로 그 영화는 족자 그림의 안과 밖, 과거와 현재, 환상의 안과 밖, 영화(세트)의 안과 밖을 오가는 지극히 자기지시적인 영화다. 마지막 장면에서 전우치는 도술을 써서 해변으로 간다. 매우 '그림 같은' 바다가 펼쳐진다. 전우치는 얼떨떨하게 되뇐다. "이것이 바다?" 그리고 느닷없이 영화가 끝난다. 그 순간의 혼란과 망설임이 〈암살〉에도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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진짜 사기꾼은 자신마저 속인다고 한다. 최동훈은 사기를 친다는 사실이 양심에 걸린 나머지 자신의 진정성을 증명하려고 애쓰는 사기꾼 같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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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늘은 한국영상자료원의 "발굴, 복원, 초기영화로의 초대" 상영작 중 〈호프만 이야기The Tales of Hoffmann, 1951〉가 두 번째이자 마지막으로 상영되는 날이다.

〈센소Senso, 1954〉와 〈호프만 이야기〉에 관한 글에서 마틴 스콜세지와 조지 A. 로메로가 〈호프만 이야기〉를 좋아했다고 언급한 바 있다. 스콜세지와 로메로는 모두 어린 시절을 뉴욕 시 브롱스에서 보냈으며, 그 시절 〈호프만 이야기〉에 심취해 있었다. 스콜세지는 TV에서 해주는 〈백만 달러 영화〉라는 프로그램을 통해 흑백에 삭제된 판본으로 처음 봤고, 로메로는 열한 살 즈음에 조카를 교육하고자 하는 삼촌 손에 이끌려 억지로 극장에 가서 보고 넋이 나갔다고 한다. TV에서 해주는 재방송으로도 만족하지 못한 두 사람은 동네 필름 대여소에서 16mm 필름을 대여하기 시작했다. 당시는 아직 비디오테이프가 등장하기 전이었고, 극장에서도 TV에서도 보여주지 않는 영화를 보려면 16mm 영사기와 필름을 대여하는 수밖에 없었다. 같은 지역에 살았던 둘은 같은 대여소를 이용하고 있었고, 그 대여소에는 마침 〈호프만 이야기〉 필름이 딱 한 벌 있었다. 자연히 스콜세지와 로메로는 경쟁 관계에 놓이게 되었다. 필름이 대여 중일 때면 둘은 서로의 존재를 의식했다.

헌데 세상이 다 아는 마이클 파웰 숭배자인 스콜세지는 그렇다 치더라도, 피츠버그의 좀비 대마왕 로메로가 〈호프만 이야기〉를 인생의 영화로 꼽는 이유는 무엇일까? 언뜻 보기에 '고급 예술'인 오페라와 저예산 좀비 공포 영화는 아무런 관련도 없어 보이는데? 그는 이 영화를 그저 좋아하는 정도가 아니라 감독이 되도록 이끈 일등공신으로 거론한다.

일단 지난 글에서도 거론했듯 〈호프만 이야기〉가 "오페라 영화"라는 데에서 예상하게 되는 바와는 달리 로메로 취향의 괴기 · 공포와 그리 멀지 않다는 점을 들 수 있겠다. 다시 반복하자면 독일 낭만주의 문학의 대표 작가 E. T. A. 호프만 소설에서 출발한 〈호프만 이야기〉는 "사람처럼 생생히 움직여 사람을 홀리는 자동 기계 인형, 요부를 이용해 영혼을 빼앗아 보석에 가두는 사악한 마술사, 목숨을 앗아가는 노래 등등이 횡행하는 미숙한 짝사랑의 실패에 관한 이야기"다. 어린 시절 탐독했던 《납골당 이야기》 유의 공포 만화와 이 영화가 자기 속에서 한데 뒤엉켰다는 로메로의 고백은 전혀 이상하지 않다. (스콜세지도 〈검은 수선화Black Narcissus, 1947〉, 〈빨간 구두The Red Shoes, 1948〉, 〈뒤쪽 작은 방The Small Back Room, 1949〉 등에서 나타나는 마이클 파웰/에머릭 프레스버거 콤비의 어두움에 관해 지적한다)

하지만 그보다도 영화 만들기에 관심을 두게 된 이후 로메로가 느낀 바가 좀 더 흥미롭다. 로메로는 고등학생 시절 (자신을 극장에 끌고 갔던 바로 그) 삼촌의 카메라를 빌려 이것저것 실험을 해보곤 했는데, 그때 〈호프만 이야기〉에서 보았던 것을 자신도 할 수 있음을 깨달았다고 한다. 다른 영화에서도 그렇지만 특히 〈호프만 이야기〉에서 파웰은 특수효과의 원리를 감추지 않는다. 믿을 수 없을 정도로 간단하고 투박하여 감탄 섞인 웃음이 나온다. 이것이 '시대적 한계'가 아님은 파웰의 다른 영화를 보면 확인할 수 있다. 파웰은 매체가 지닌 표현의 인공성을 드러냄으로써 각종 예술 장르를 뒤섞은 영화의 이음매를 바라보도록 하고, 그럼으로써 다시 이것이 다른 무엇보다도 "영화"임을 천명한다. 표현의 원리가 눈앞에 빤히 드러나지만, 그 원리에서 나타나는 간결함과 대담함이 다시 그 표현의 효과를 가능케 한다. 브라이언 드 팔마가 말했던, 가짜인 줄 알면서도 여전히 거기에 설득당하도록 하는 영화.

로메로는 이를 두고 표현의 투명성이 자신을 영화 연출에 눈 뜨도록 해주었다는 정도로만 언급하지만, 나는 조금 더 구체적으로, 파웰의 이러한 자세가 로메로 영화의 특수효과에도 영향을 미치지 않았을까 생각하곤 한다. 우리나라에서는 한때 세상에서 가장 잔인한 영화를 만드는 사람처럼 알려진 적도 있다지만, 사실 로메로는 신체 훼손을 묘사할 때 극사실주의를 지향하는 감독이 아니다. 톰 새비니나 그레고리 니코테로 같은 당대 최고의 특수분장 전문가와 함께하면서도 그는 늘 다소 과장되고 인공적인 특수효과를 선호했다. 신체 훼손의 방식은 다소간 만화적이고, 피는 물감임을 숨기지 않는다. 그리하여 그의 좀비 영화에서 신체 훼손은 구역질과 공포를 유발하기보다는 특수효과의 기발함과 박력에 찬탄을 보내도록 하며, 해당 장면은 폭력의 상황보다는 예술적 표현으로 와 닿는다. 그러나 다른 한편 과장된 표현은 해당 장면을 지탱하고 다음 장면으로 이어나가기에 필요한 감정적 효과를 끌어내는 데에는 불편함이 없다. 로메로는 그렇게 관객이 완벽한 이입도 완벽한 소외도 아닌 중간 지대에 머무르도록 한다. 영화 매체가 담는 두 세계를 한꺼번에 직시하도록 하는 그 균형 감각이야말로 〈호프만 이야기〉가 로메로에게 남긴 진짜 가르침이 아닐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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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상영작 서른두 편 중 〈허수아비The Scarecrow, 1920〉, 〈귀신들린 집The Haunted House, 1921〉(유령 들린 집), 〈내 아내의 친척들My Wife's Relations, 1922〉(내 아내의 인간관계), 〈동토The Frozen North, 1922〉(북극), 〈대학College, 1927〉(전문학교) 다섯 편은 음악도 없는 완전 무성으로 상영된다. 오리지널 음악이 없는 무성영화를 상영할 때는 종종 있는 일이다. 음악이 사라진다고 하여 이 영화들이 힘을 잃는다고 생각하지는 않는다. 실제로 과거 학교 상영실 스피커가 고장 났을 때 너무나 영화가 보고 싶었던 친구들과 모여 키튼 영화를 보며 깔깔 웃은 경험도 있다. 하지만 만약 무성영화를 본다는 사실만으로 이미 두려움을 느끼는 관객이라면 다른 작품들을 먼저 보는 편이 좋겠다. 개인적으로는 키튼 장편 중 덜 사랑받는 작품인 〈대학〉을 매우, 몹시, 아주, 강력하게 권하고 싶은데 이렇게 되어 좀 아쉽다. 〈대학〉의 클라이맥스가 선사하는 카타르시스는 정말 굉장한데.

2.
이거 매우 중요하다. 만약 버스터 키튼 영화를 처음 본다면, 〈바보The Saphead, 1920〉로 시작해서는 안 된다. 〈바보〉는 키튼의 첫 장편 주연작이며, 당대에는 성공을 거두어 키튼이 영화계에서 입지를 굳힐 수 있도록 해준 중요한 작품이었지만, 다른 상영작과는 달리 '버스터 키튼 영화'가 아니다. 키튼이 기획/연출/각본을 맡은 아크로바틱 액션 코미디가 아니라는 뜻이다. 단적으로 말해서, 별로 안 웃긴다. 볼 필요가 없다고 말하지는 않겠지만, 손 꼭 붙들고 보라고 권할 정도는 아니다. 지금에 와서 〈바보〉의 의의는 "위대한 무표정"으로 유명한 키튼이 마지막으로 웃는 얼굴을 볼 수 있다는 점일 테지만, 그건 이미 키튼의 팬이 된 사람들에게나 의미 있는 일이다.

3.
팁이라기보다는 마음가짐의 문제인데, 종종 한 영화인의 장편과 단편을 함께 상영하면 장편을 중심으로 놓고 단편은 부록처럼 여기는 경우가 있다. 실제로 만드는 사람 중에도 그렇게 접근하는 사람도 있고. 하지만 버스터 키튼은 아니다. 무엇보다도 그가 장/단편의 구분이 명료하지 않던 시절부터 영화를 만들었던 사람임을 잊어서는 안 된다. 키튼에게는 단편이니까 좀 가볍게, 규모도 작게, 이런 마음가짐은 없었으리라 단언할 수 있다. 〈일주일One Week, 1920〉의 조립식 주택, 〈허수아비〉의 가구, 〈이웃Neighbors, 1921〉의 담벼락과 빨랫줄, 〈극장The Play House, 1921〉의 자기반영성, 〈보트The Boat, 1921〉의 배 등에서 나타나는 어마어마한 집중력은 어떤 장편으로도 대체할 수 없다.

4.
〈카메라맨The Cameraman, 1928〉은 약간 뒤쪽에 배치하면 더 좋다. 반드시 그래야 한다거나 그렇지 않으면 영화의 힘이 떨어진다거나 하지는 않는다. 시간을 낼 수 없다면 앞에 봐도 상관은 없다. 다만 영화와 얽힌 상황을 염두에 두고 보면 감흥이 더 커진다. 키튼은 (지금은 대표작이 된) 야심작 〈제너럴The General, 1926〉의 흥행 실패로 본 손해를 견디지 못한 끝에 자신의 제작사를 포기하고 메이저 스튜디오인 MGM 전속 배우로 들어간다. MGM은 키튼에게 창작의 자유를 허락하지 않았고, 결국 그것이 키튼의 전성기를 끝장내고 말았다. 〈카메라맨〉은 바로 키튼이 갓 MGM에 입사하여 딱 한 번 자기 뜻대로 만든, 그의 전성기 마지막 영화다. 그리고 물론 그는 이 영화에서 카메라맨으로 출연한다. 키튼이 자기 제작사를 운영하며 이룬 업적을 실감한 후 〈카메라맨〉을 보면 전해지는 바가 있을 것이다.

5.
2004년 "버스터 키튼 회고전" 때 있었던 일인데, 버스터 키튼 영화가 너무 웃긴 나머지 관객들이 일단 웃고 보려는 마음가짐을 품는 부작용이 일어나기도 했다. 너무 그런 강박관념을 가질 필요도 없고, 웃음의 강도만으로 영화를 판단하는 실책을 저질러서 좋을 것도 없다. 키튼의 영화를 보다 보면 점점 아크로바틱 액션 개그 외의 다른 면모들도 눈에 들어오며, 그것이 결과적으로는 무성영화의 표현 양식으로 관객을 이끌어 줄 수도 있다. 가령 내가 '웃기지 않은' 무성영화를 즐기게 된 것은 무성영화의 연기 방식에 관해 의식하면서부터였는데, 그 전기를 마련해 준 작품은 〈카메라맨〉이었다. 또 비슷한 맥락에서 키튼의 장편 중 별로 유명하지 않은 〈서부로 가다Go West, 1925〉와 〈싸움왕 버틀러Battling Butler, 1926〉를 강력히 권하고 싶다. 전자는 인간과 소의 우정을, 후자는 지는 싸움에 뛰어든 약골의 분투를 다루는데, 키튼 특유의 아크로바틱 액션은 적지만 다른 측면에서 울림이 굉장하다. (이건 여담인데 마틴 스콜세지는 〈성난 황소Raging Bull, 1980〉를 찍을 때 자신은 권투 영화를 싫어한다면서 유일하게 제대로 된 권투 영화는 〈싸움왕 버틀러〉 뿐이라고 말한 적도 있다. 글쎄, 스콜세지는 틀림없이 〈육체와 영혼Body and Soul, 1947〉도 좋아할 테니 다소간 과장이 섞인 발언으로 받아들여야겠지만)

6.
참, 성룡 팬이라면 만사를 젖혀놓고 〈스팀보트 빌 주니어Steamboat Bill, Jr., 1928〉를 봐야 한다. 성룡이 키튼을 스승으로 모신다는 이야기는 유명하지만, 특히 이 영화를 보면 성룡이 그의 가장 유명한 스턴트 두 개를 키튼에게서 고스란히 가져왔음을 확인할 수 있다.

7.
만약 의욕이 있고 시간과 자본마저 여유로워 버스터 키튼 영화와 함께 볼 다른 영화가 필요하다면, 우선 비슷한 시기의 다른 무성 슬랩스틱 코미디를 생각할 수 있겠다. 아크로바틱 액션과 추격이 클라이맥스를 장식한다는 점에서 찰스 채플린보다는 해롤드 로이드 쪽을 더 권하고 싶다. 특히 〈대학〉은 키튼이 로이드의 〈신입생The Freshman, 1925〉을 보고 다시 만든 영화가 아닌가 싶을 정도로 설정이 흡사하여 둘을 비교하는 재미가 있다. 그런가 하면 〈카메라맨〉의 연장선에서 무성영화의 쇠락과 말년의 키튼을 연결하는 작품으로는 역시 빌리 와일더 감독의 〈선셋 대로Sunset Blvd., 1950〉와 채플린의 〈라임라이트Limelight, 1952〉가 유명하다. 키튼은 두 작품 모두에서 한물간 배우로 출연하여 가슴을 저민다. 조금 덜 가슴 아프고 반가운 영화로는 주디 갈랜드와 밴 존슨이 주연한 뮤지컬 〈즐거웠던 여름날In the Good Old Summertime, 1949〉이 있다. 당시 키튼은 MGM에서 개그 작가로 활동하고 있었는데, 한 슬랩스틱 장면을 해결하지 못해 골머리를 앓던 제작진이 키튼에게 도움을 청했고, 결국 그가 직접 영화에 출연하여 해당 장면을 연기하게 되었다. 또 그는 갈랜드와 존슨이 함께한 슬랩스틱 장면에서 연기를 지도하기도 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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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하 추억을 판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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무성영화 시대의 대표 스타/감독 버스터 키튼의 대표작을 모은 프로그램 "버스터 키튼 특별전-퍼스트 액션 히어로"가 시네마테크 서울에서 6월 25일부터 7월 12일까지 16일(휴무 기간 제외) 동안 열린다. 그가 재능 있는 코미디언에서 한 발 더 내디뎌 자신의 제작팀을 이끌고 영화 전체를 기획/감독한 1920~1928년에 만든 서른한 편의 장/단편 영화를 전부 상영하며, 키튼에 관한 다큐멘터리도 상영하는, 성대한 구성이다.

서울아트시네마에서는 11년 전인 2004년 6월에도 같은 규모의 "아크로바틱 액션 개그 : 버스터 키튼 회고전"을 진행한 바 있다. 역사에 길이 남을 기획이었다고 생각한다. 물론 2004년 6월 이전에도 이후에도 서울아트시네마를 찾았다. 이전에도 이후에도 좋은 프로그램은 많았다. 심지어 버스터 키튼 영화보다 더 강력한 영화들도 많이 만났다. 내 영화 지도 안에서라면 "버스터 키튼 회고전"보다 더 중요한 기획도 여럿 있다.

하지만 이걸로 하나의 세대가 태어났음을 알리는 기획은 2004년의 "버스터 키튼 회고전"이 유일했다. 나만의 착각이요, 과장일 수도 있음을 알지만, 그 감흥을 설명하자면 아래와 같다.

* * *

2004년에도 버스터 키튼은 아주 낯선 이름은 아니었다. 세계적으로 보더라도 키튼은 이미 5~60년대에 망각에서 벗어나 명성을 되찾기 시작했다. 당연히 홈비디오 시대의 혜택도 보았다. 80년대에도 이미 VHS가 출시됐고, 특히 북미 키노 비디오에서는 20년대에 키튼이 만든 서른한 편의 영화를 The Art of Buster Keaton이라는 제목으로 묶어 VHS로 출시했으며, 2001년는 같은 구성으로 DVD도 내놓았다. 한시절 한국 영화광들의 참고서였던 김홍준의 『영화에 대하여 알고 싶은 두세 가지 것들』에서도 분명히 키튼의 이름을 언급했으며, 영화 잡지 《KINO》에서도 간혹 다루었다. 21세기 초에 성룡 열혈팬을 자청했던 류승완 감독이 인터뷰에서 종종 키튼을 거론했던 기억도 난다(예를 들어 《KINO》 2003년 6월호 "제물포 성룡" 박준형 감독과 류승완 감독의 대담 기사).

그래도, 2004년 이전에 한국에서 버스터 키튼 영화를 직접 보기란 쉬운 일은 아니었다. 우선 그는 찰스 채플린처럼 문화적 아이콘으로 자리 잡지 못했기에 브라운관을 자주 찾지 못했다. 네이버 뉴스 라이브러리를 검색해 보면 1988년 3월에 KBS3에서 무성영화 시대 코미디를 엮어 소개한 로버트 영슨 감독의 〈4인의 광대4 Clowns, 1970〉를 방영한 정도가 고작이다(이 영화에는 〈일곱 번의 기회Seven Chances, 1925〉가 축약본으로 들어가 있다). 〈제너럴The General, 1926〉이 "장군"이라는 제목의 VHS로 출시되기는 했지만, 그 외 다른 영화도 출시됐는지는 알 수 없다. 신문 기사를 보면 90년대 들어 여기저기 생긴 영화공간들에서도 역시 〈제너럴〉을 중심으로 소개한 것으로 보이며, 그것도 어디까지나 고전 걸작을 뭉텅이로 소개하는 큰 기획의 한 부분이었다. 다만 1997년 9월 9일 매일경제신문 기사를 보면 서울이동통신(엥?)과 강남 진솔문고가 함께 고객사은행사로 9월 20일, 27일 이틀 동안 하루 세 차례씩 총 6회, 각회 300명씩 총 1800명의 고객을 대상으로 "무성영화 시대의 성룡, 버스터 키튼"이라는 제목의 상영회를 열어 "경찰들, 증기선 빌 2세, 장군" 등을 상영한 적은 있다고 한다.

2000년대 초는 아직 지금처럼 홈비디오 타이틀의 해외 구매가 활성화되지도 않았고, 한미FTA 체결 전이라 무관세 제한도 더 빡빡했다. 무엇보다도 아직은 영화 다운로드가 양성화되거나, 그렇지 않더라도 웹하드마다 누군가가 고전 걸작을 가득 올려놓거나 토렌트가 미쳐 날뛰는 그런 시대도 아니었다. 요컨대 그때 한국에서 키튼은 간신히 영화광들의 관심을 끌 정도로는 알려졌지만, 아직 그 실체를 쉽게 확인할 수는 없는 존재였다. 그렇다고 오슨 웰스처럼 실제로 영화를 보았든 말든 일단 인정하고 봐야 할 것만 같은 불가침의 권위를 갖고 있지도 않았고, 부모 세대 추억의 명화라는 문화적 연결고리도 희미했다.

그런 와중에 서울아트시네마에서 갑자기 12일에 걸쳐 하루 4회차로 버스터 키튼 영화를, 〈제너럴〉 같은 일부 대표작이 아니라 20년대에 그가 만든 거의 모든 영화를, 극장에서 필름으로 쏟아부었다. 그게 키튼과 한국 관객의 진정한 첫 번째 조우였다고 하더라도 지나친 말은 아니리라 생각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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물론 희소성만을 따지자면 비슷한 시기 서울아트시네마에서 했던 다른 프로그램에 대해서도 비슷한 이야기를 할 수 있다. 가령 2003년 11월에 열린 "칼 드레이어 회고전"에서는 칼 테오도르 드레이어의 영화 열여덟 편을 상영했는데, 지금 보면 이쪽이 더 희소성 있는 기획이었다. 내게는 늘 다정한 기억으로 남아 있는 "최양일 회고전"이나 "구로사와 기요시 회고전" 혹은 "버스터 키튼 회고전" 직후에 열린 "로베르토 로셀리니 회고전"도 마찬가지다.

하지만, "버스터 키튼 회고전"은 무언가 달랐다. 무엇이 달랐을까? 버스터 키튼이 달랐다는 대답밖에 할 수 없다.

영화를 보러 모인 익명의 관객들이 함께 폭소를 터뜨리거나 흐느껴 울거나 비명을 지르는 것은 그리 드문 일은 아니다. 영화가 끝나고 박수를 치는 것도, 그렇게까지 낯선 일은 아니다. 관객을 좌석에 밀어붙여 깔아뭉개고 기를 쪽쪽 빨아먹는 영화의 경우, 소리를 통해 모두가 비슷한 기분을 느꼈음을 확인하기는 어렵지만, 그래도 쥐죽은 듯한 침묵─종종 영화가 끝난 후에도 계속되는─속에서 일체감이 전해지곤 한다(〈베이비 제인에게 무슨 일이 생겼는가?What Ever Happened to Baby Jane?, 1962〉 같은 영화가 그렇다). 내 생각에 영화 관객으로서 가장 공유하기 어려운 감정은 영화를 향한 찬탄이다. 찬탄이란 미처 예상하지 못한 영화적 선택이 등장하는 순간 느끼는 일종의 경외감인데, 이 감정을 표현하는 데에는 뚜렷한 신호가 없을 뿐만 아니라 애초에 경외감을 자아내는 이미지에 관한 감수성이 천차만별이라 옆자리에 앉은 관객도 나와 같은 기분을 느꼈다고 확신하기가 쉽지 않다.

키튼의 영화는 탄성을 웃음의 형태로 내뱉어 공유하도록 이끄는 영화다. 코미디로 분류되기는 하지만, 키튼의 영화가 주는 웃음은 우스꽝스러움보다는 놀라움에 더 가깝다. 그는 곤경 앞에 어리석음을 보이기보다는 지나치게 빠르고 독자적인 사고를 통해 미처 예상하지 못한 해결책을 내놓음으로써 관객을 웃긴다. 더구나 그 해결책은 늘 아크로바틱한 움직임을 통해 시각적으로 곧장 전달된다. 예상을 초과하는 영리함으로 웃음을 자아내는 영화는 발성영화 시대에도 적지 않지만, 대사에 의지하는 경우 관객의 이해력에 따라 오차가 생긴다. 키튼은 몸을 날려 모든 관객의 머리를 잡아챈다. 그렇다고 그 해결책이 꽝 때리면 우당탕 쓰러지는 식의 "슬랩스틱"에 국한되는 것도 아니다. 〈손님 접대법Our Hospitality, 1923〉의 폭포 장면에서 나오는 공간 개그처럼 몇 단계의 사고를 바탕에 깐 채 프레임의 안과 바깥을 모두 활용하는 개그조차, 키튼은 단숨에 뇌리에 꽂아넣는다. 고도의 지성이 본능적인 즉물성과 한데 얽혀있다고나 할까.

따라서 키튼의 영화를 보다 웃음을 터뜨렸을 때, 우리는 그저 우스꽝스러운 말 한마디나 몸짓에 웃는 것이 아니라 같은 사고를 공유하고 영화와 대화하고 있음을 부지불식간에 확인하고 있었다. 더구나 그 공유는 웃음만으로는 모자라서, 때로는 말 그대로 "와!" 하는 탄성이나, 박수갈채로까지 나타났다. 키튼은 그런 탄성의 순간을 드문드문 어쩌다 기적적으로 성취한 것이 아니라 거의 모든 영화에서 쉴 새 없이 성취했다. 그런 영화를 두 주에 걸쳐, 하루에 몇 편씩 함께 보고 났을 때 느끼는 고양감과 동지애는 이루 말할 수 없다. 아무도 차마 키튼의 위대함을 설명하지는 못했지만, 함께 시간을 공유하고 나면 손쉽게 공감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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위 문단에서 감히 "우리"라는 표현을 썼는데, 그것이야말로 키튼이 이룬 가장 큰 위업이라고 생각한다. 2004년 그 여름 키튼의 영화를 함께 보았을 때, 서울아트시네마에서는 하나의 세대가 생겨났다.

나는 "우리 세대"의 영화광들이 공유하는 면이 별로 없다고 생각하는 편이다. 문화원이나 정영음 같은 구심점, 거기서 나온 공통의 체험이 없다. 그건 심지어 서울아트시네마를 끌어들이더라도 마찬가지다. 나는 서울아트시네마의 다른 관객들에게 동지애를 느끼지 못하며, 우리가 영화에 관한 유사한 체험이나 공간에 관한 애착을 공유한다고도 단언하기 어렵다. 영혼을 꿰뚫는 충격을 주는 영화를 만나더라도, 그것은 나 혼자 혹은 몇 사람의 충격일 뿐, 그 순간을 함께 경험한 집단이나 세대를 생각하게 되지는 않았다(아마 내 영화 체험의 많은 부분이 미국판 DVD와 Blu-ray, 그리고 학교 영화 동아리를 중심으로 이루어진 탓도 있을 것이다).

유일한 예외가 버스터 키튼이었다. 2004년 6월, 소격동 서울아트시네마에서는 '이 해에 버스터 키튼을 극장에서 필름으로 함께 본 사람들'이라는 유대가 생겨났다. 유대감은 시간이 흐르면서 더 분명해졌다. 일반 개봉관 외의 극장을 기웃거리는 사람들, 영화에 관한 글을 쓰는 사람들 사이에서, 버스터 키튼을 각별하게 품고 있는 사람들이 보였다. 그때 본 그 버스터 키튼을 원체험처럼 간직하는 사람들이 있었다. 나는 종종 이듬해 3월 베르나르도 베르톨루치의 〈몽상가들The Dreamers, 2003〉이 개봉했을 때 버스터 키튼과 찰스 채플린 중 누가 낫냐는 질문에 남몰래 웃었을 우리들의 모습을 상상하곤 한다.

내 주변도 마찬가지였다. 말했듯 영화 동아리에 몸담고 있었기에 내 주변에는 영화를 좋아하는 사람들, 서울아트시네마를 즐겨 찾는 사람들이 있었지만, 대체로 우리는 다 따로였다. 그 당시 서울아트시네마를 찾은 기억을 되짚어 보면, 우리가 함께 누군가의 어떤 영화를 좋아했던 기억은 뜻밖에 잘 떠오르지 않는다. 심지어 "버스터 키튼 회고전"과 같은 해 가을에 열린 "에른스트 루비치 회고전"조차 그랬다(여담이지만 나는 아직도 그때 지랄염병을 해서 사람들을 루비치 앞에 내몰지 않은 것을 후회한다). 몇 사람이 좋아했고, 몇 사람이 발견의 기쁨을 맛보았다. 그것은 개인의 체험이고 개인의 깨달음이었다. 열 몇 명, 때로는 스무 명이 넘는 사람이 단체 관람을 해도 마찬가지였다.

오직 키튼만이, "우리" 모두가 단서 없이 좋아했던 이였다. 굳이 열변을 토하며 꼬드기지 않아도 함께 보러 갈 수 있는 대상이요, 기나긴 토론 없이도 찬성할 수 있는 존재. 이름을 부르는 것만으로 연대할 수 있는 존재. 그래서 동아리 창립 이후 최초로 거금을 들여 캐나다 아마존에서(당시는 캐나다 달러가 한결 쌌다) 배송에 몇 달씩 걸리는(당시 캐나다 아마존 일반 배송은 배송에만 몇 개월이 걸렸다) The Art of Buster Keaton 박스 세트를 사기로 결의하는 데에도 누구 하나 망설임이 없었다. 마침내 DVD 박스 세트가 도착한 다음에는 이후 몇 년 동안 새로 가입한 이들에게 무조건 키튼 영화를 보여주었다. 덕분에 〈셜록 주니어Sherlock Jr., 1924〉는 아직도 내 평생 가장 여러 번 본 영화로 남아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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냉정하게 생각하면 아마 이 모든 것 또한 착각에 불과하리라. 2004년 "버스터 키튼 회고전"은 고작 12일 동안 열렸다. 때는 6월 중순이었고, 대학생들의 학기는 완전히 끝나지 않은 상황이었다. 무엇보다도 이 프로그램이 오직 서울아트시네마에서만 열렸을 뿐, 다른 지역으로 옮겨가지 못했다는 점을 기억해야 한다. 그 수혜자는 그때 소격동을 찾을 수 있었던 몇백, 몇천 명 정도일 것이다. 하나의 세대라는 표현을 쓰기에는 아무래도 과장이 심하다.

그럼에도, 그런 과장이라도 쓰지 않고서는 표현할 수 없는 유대감을 기억한다. 키튼을 만남으로써 어떤 전환점에 이르고 말았다는 자각을 실감한다. 영화를 쫓아다니는 사람으로서 아직도 그 만남의 순간을 소중히 간직하고 있는 다른 사람들의 존재를 의식한다. 건 지난 12년 동안 딱 한 번, 버스터 키튼만이 줄 수 있었던 기분이었다.

(실은 작년 "탄생 120주년 존 포드 회고전" 때 더러 비슷한 기분을 느낀 적이 있었다. 하지만 키튼에 비하면 간헐적이었다. 무엇보다도 영화계가 쏟아부은 공력이 다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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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1년이 지났다. 11년은 통상 한 세대가 지났다고 말하기에는 짧은 기간이지만, 경험상 영화 관객의 세대는 생각보다 빨리 바뀐다. 특히 동시대적으로 소비되지 않는 영화의 관객층은 더욱 그렇다. 서너 해만 지나고 나면 다시 처음부터 출발해야 한다. 한때 버스터 키튼 영화를 주변에 지겹도록 소개하고 상영하여 당분간 키튼 영화는 보지 않아야겠다고 생각했던 시간도 있었는데, 그 시간도 금세 지나가 이제는 다시 키튼을 이야기하는 사람이 많지 않다.

그렇기에 이번 "버스터 키튼 특별전"을 더 기대하고 있다. 내가 키튼을 다시 만날 수 있기를 기대하기보다는, 11년 전 내가 그러했듯 키튼을 말로만 들었던 사람들이 극장을 찾기를 기대한다. 그래서 또 그때와 마찬가지로 극장 안에서 하나 되는 기운을 느끼고, 시네마테크 서울을 찾아가는 개별 관객이 아니라 버스터 키튼의 이름으로 묶인 하나의 세대가 자라나기를 희망한다. 앞으로 이어질 16일이 새로운 관객들의 영화 체험에서 하나의 전기가 되기를 기원한다.

이 프로그램은 누군가들의 인생을 바꿀 수도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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어린 시절 처음 판도라의 상자(영화 말고)에 관한 이야기를 들었을 때부터 이날 이때까지 이상하다고 생각한 부분이 있다.

익히 알려졌다시피 판도라가 상자를 여는 바람에 안에 담겨 있던 온갖 재앙이 세상에 창궐하게 되지만, 황급히 상자를 닫아 희망만은 남게 된다는 것이 이야기의 결말이다. 보통은 이 결론에 관해 '그래도 희망은 남아있다'는 식으로 긍정적인 측면을 강조한다. 하지만 그 논리를 도무지 이해할 수 없었다. 재앙은 상자 밖으로 나와 창궐하게 됐다. 즉, 상자는 내용물의 영향력을 막는 용도로 쓰이고 있다. 그렇다면 상자를 마저 열어 희망까지 내보냈어야 하지 않나? 상자를 너무 일찍 닫아버렸기 때문에 희망마저 없는 세계가 된 거 아냐?

그래서 만약 이 이야기에 교훈이 있다면 그건 그래도 희망은 남아있다는 것이라기보다는, 지금 이 세상에는 희망이 존재하지 않으며, 희망이란 정신 승리하는 데에나 쓰는 우리집 금송아지 같은 존재라는 게 아닐까 생각하게 됐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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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국영상자료원 시네마테크 KOFA에서 오랜만에 〈청춘 잔혹 이야기青春残酷物語, 1960〉를 보고 새삼 치를 떨었다. 이 영화 보러 가라고 주변에 권했으면서도, 또 초창기 오시마 나기사는 순전히 화를 내기 위해 영화를 만든 것 같다는 말까지 했으면서도, 정작 그걸 보는 게 어떤 체험인지는 잊고 있었다. 혹은 그건 영화를 볼 때만 비로소 느낄 수 있는 기분인지도. 영화 시작하고 한참을 '대체 내가 왜 내 시간을 할애해서 이런 영화를 보고 있어야 하지? 좋은 영화였다는 기억은 잘못됐던 걸까? 아니면 그사이에 내가 변해서 이제는 이런 영화는 받아들일 수 없게 된 걸까?' 되뇌었다. 그러다 모두 까기가 점점 심해지고 꿈도 희망도 아무것도 남겨놓지 않은 상태에 이르더니 대놓고 너희 모두는 아무것도 못 이룬다고 소리치며 넋이 너덜너덜해질 때까지 두들겨 팬다. 비틀비틀 상영관을 나오며 그제야 기억해 냈다. 맞아, 내가 본 오시마 영화는 다 이런 기분이었지. 한창 회고전을 챙기면서 좋다 좋다 말할 때도, 매번 새 영화가 시작되면 '아, 이번 영화는 별로네? 한소리 또 하고 한소리 또 하고… 무슨 진전이 없어. 어우 답답해. 내가 이런 걸 봐야 해?' 싶다. 그러다 눌릴 대로 눌리 더 도망갈 곳이 없어지면 하나씩 폭발. 비아냥도 풍자도 없는 돌직구 세례.

도대체 오시마 나기사는 왜 영화를 선택했을까, 무슨 생각으로 영화를 만들었을까 계속 생각하게 된다. 이런 서사 자체를 좋아했기 때문에 만들지는 않았을 것이다. 그러기에는 영화 전체에 확신범의 기운, 이 이야기를 도구 삼아 무언가를 하겠다는 의지가 넘쳐 흐른다. 그렇다고 세상을 바꾸기 위해서라든가 어떤 대상이나 현상을 비판하기 위해서는 아닐 것이다. 오시마의 영화에서는 비판이라는 어휘가 함의하는 최소한의 긍정, 대화와 개선의 가능성에 대한 믿음을 느끼지 못하겠다. 제로로 돌아가 다시 시작하자는 정도의 진취성조차 없다. 그는 그저 모든 것을 향해 화를 낸다.

하지만 화를 내는 방법으로 영화는 몹시 비효율적이다(물론 비효율성이야말로 영화의 본성이기는 하다). 아무리 짧은 영화라고 해도 준비에는 오랜 시간이 걸린다. 영화 제작의 절반 이상은 기다림이다. 기다림은 화와는 상극이다. 시간이 지나면 화는 제풀에 가라앉는다. 그런데도 기어이 화를 내는 영화를 만들고야 만 사람이 품은 화의 크기를 생각해 본다. 그 화는 일상에서 깽판을 치는 정도로는 풀 수 없는 화였을 것이다. 또 그 화는 홀로 화풀이한다고 풀리는 화도 아니었을 것이다. 그럼 자신의 화를 공유하기 위함이었을까? 당신들은 왜 화를 내지 않죠? 나와 같이 화를 내줘요! 다만 그렇다고 하기에는 관객의 이입에 눈꼽 만큼도 신경 쓰지 않는 태도가 걸린다. 그가 등장인물의 입을 빌려 토해내는 외침과 저주를 마주하는 건 누구보다도 관객이다. 오시마의 영화를 보고 있노라면 욕을 먹는 기분이 든다. '저는 일본인도 아닌데 저한테 왜 이러세요.' 라고 하소연하고 싶어진 적이 한두 번이 아니다.

하소연이라. 어쩌면 오시마는 정말로 관객이 자신에게 항변하기를 바랐던 게 아닐까. 공격하고 부아를 돋움으로써 침묵을 깨고 불편한 심기를 드러내며 반론을 펴주기를 바랐던 게 아닐까. 거기서부터 토론이 시작되기를 바랐던 게 아닐까. 그러니까 오시마에게 영화는 대화의 출발점에 불과했고, 자신의 영화 앞에 기꺼이 맞서 싸우려 드는 목소리를 간절히 기다리지 않았을까.

(그렇다면 오시마에게는 자신의 영화에 대한 칭찬과 숭배조차 괴로움이었을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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보통의 멍청한 영화들은 관객의 지성을 모독하여 불쾌감을 안기지만 〈쥬라기 월드Jurassic World, 2015〉는 자신의 지성을 모독하여 즐거움을 선사한다. 그 즐거움은 단지 못 만든 영화를 비웃는 데에서 오는 즐거움만은 아니다. 이 영화에는 최소한의 상식과 체면, 일관성마저 놓아버린 채 그저 기회가 있을 때마다 가능한 한 날뛰고 싶다는 탐욕에 초등학생처럼 달려드는 민망한 즐거움이 있다. 아이들의 보호자가 느닷없이 공룡에게 채이는 순간 모든 감정선과 장면의 리듬을 중단하고 사나운 공룡들이 인간을 가지고 놀다 잡아먹는 장면을 걸신들린 듯 구경하는 낯두꺼운 창작자, 랩터와 티렉스와 백인 남성 액션 영웅의 하이파이브를 부끄러워하기는커녕 단독 쇼트로 하나씩 잡아 서로를 바라보게 해놓고 그 광경에 감동의 눈물을 흘리는 정신의 소유자만이 제공할 수 있는 순진무구한 희열을 부정하기 어렵다(다만 극 중 끊임없이 위기 상황을 모니터를 통해 관람한다는 행위를 부각한 것은 그런 영화의 태도에 대한 자의식적 고백이자 변명일지도). 장면마다 새 각본가가 투입되어 앞 장면은 보지도 않고 이어 쓴 듯한 각본을 가지고 이렇게 즐거울 수 있다니, 극작술에 바쳐온 인류(와 할리우드)의 노력이 다 허망하다. 불과 며칠 전에 『우주 상인』의 "과격함, 순진함, 무책임함"에 관해 "구시대의 쾌락이고, 남에게 선뜻 권하기 어려운 쾌락이며, 지금 와서 재현한다고 하면 나조차 반기지 못할 쾌락"이라고 말했는데, 섣부른 판단이었음을 포효하는 티렉스 앞에 인정한다.

비판하고 싶은 부분이 딱 하나 있다. 사고가 발생한 후 랩터 조련사 오웬(해군 복무 시절 군용 돌고래 조련 실험을 담당했다는 설정)은 방문객들의 안전을 도외시한 채 사고를 조용히 수습하려는 운영진의 태도에 화를 내며 통제실을 나서는데, 나가기 전에 공룡애호가인 직원 로워리의 책상에 진열된 공룡 피규어를 치고 간다. 변명의 여지가 없는 행동이다. 그 직후 '왜 내 피규어에 화풀이야!' 라는 표정을 짓는 로워리의 모습을 잡아준 것은 좋았지만, 그 정도로는 부족하다. 오웬이 랩터에게 물려 팔 하나를 잃음으로써 화가 난다는 이유만으로 남의 피규어를 함부로 대한 데에 대한 처벌을 받도록 하거나, 아니면 로워리에게 사과하고 배상하도록 해야 했다. 그것이야말로 이 영화의 정신에 어울리는 태도가 아닐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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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LA 위클리》 영화평론가 에이미 니콜슨이 4월 28일에 쓴 칼럼 「Stop Laughing at Old Movies, You $@%&ing Hipsters」를 번역했다.

"힙스터"가 가리키는 대상에 관한 이견은 있을 수 있겠지만, 거의 전적으로 공감한다. 이와 같은 현상은 특수효과나 세트뿐만 아니라 지금과는 다른 연기 양식, 다른 문화권의 영화에서 나타나는 낯선 행동 및 사고 패턴을 대하는 관객들에게서도 찾아볼 수 있다. 영화가 자신이 아는 바 그대로의 현실에 복속하기를 바랄 뿐, 다른 현실을 창조하고 안내하는 다른 표현을 받아들이는 데에 동참하는 것을 못내 우스꽝스럽다 여기는 관객. 2015년 6월 13일 시네마테크 서울에서 상영한 〈백야Le notti bianche, 1957〉를 보며 처음부터 끝까지, 클라이맥스에서까지 한껏 코웃음을 흘렸던 내 옆의 관객도 그에 해당했다 말할 수 있겠지.

원문은 《LA 위클리》 홈페이지에서 읽을 수 있다.


옛날 영화 비웃지 좀 마라, 이 XX 힙스터들아


원조 힙스터인 홀든 콜필드는 영화에 관해서라면 머저리였다. 그는 영화를 싫어했다. 배우는 사기꾼이고, 각본가는 창녀고, 질질 짜는 영화를 보면서 코를 훌쩍이는 관객은 "실제로는 씹새끼들"이라고 생각했다.

홀든은 그냥 못난 정도가 아니었다. 그보다 더 악질이었다. 웃는 녀석이었다. 극장의 다른 관객들이 눈물을 흘리는 동안 냉담하게 킬킬거리는 천치였다. 홀든도 인정한다. "나도 만약 영화관 같은 데서 내 뒤에 앉았더라면 아마 앞좌석으로 몸을 기울여 나더러 제발 입 좀 닥치라고 했을 거라는 얘기다."

이번 주, 어느 이른바 교양 있는 영화 공연에 참석한 자리에서, 나는 홀든을 떠올렸다. LA 오페라에서 이탈리아 공포영화 감독 마리오 바바의 1961년 작 〈지구 중심의 헤라클레스Ercole al centro della terra〉를 상영하면서 23인조 오케스트라와 아홉 명의 가수를 동원하여 대사를 서글픈 음악으로 바꾸어 들려주는 자리였다.

이건 듣기보다 그럴싸한 기획이다. 영화의 줄거리는 고상한 비극의 모든 요소를 건드린다. 헤라클레스는 자신의 진정한 사랑인, 사악한 삼촌(젊은 날의 크리스토퍼 리)의 마법에 걸린 여왕을 구하기 위해 자신의 불멸성을 포기하고 치유법을 찾고자 지하세계로 내려간다. 그러나 그의 친구인 테세우스 또한 하데스의 딸 페르세포네를 사랑하여 신들의 진노를 사고, 헤라클레스는 그런 친우를 설득하여 그의 행복을 포기하고 자신의 연인과 그 연인의 왕국을 구해달라고 설득해야만 한다.

바바의 영화는 영화와 연극 사이의 중간지대에 존재한다. 그의 세트는 세트처럼 보이며―그가 영화 한 편을 만드는 데에 다섯 자리 수를 넘어가는 돈을 쓴 적은 거의 없다―헤라클레스(레그 파크)가 적들을 향해 던지는 커다란 바윗덩어리는 스티로폼임이 분명하다. 바바는 사실주의를 추구하는 대신 인공물을 끌어안는다. 그는 스크린을 현란한 빨강, 분홍, 초록빛으로 물들이고, 우리가 앞으로 나아와 자신을 맞아 주리라 믿는다.

그냥 오페라였다면 별문제가 되지 않았을 것이다. 연극 관객들은 상상력을 사용할 준비가 돼 있다. 내 옛 편집자이자 연극 평론가였던 스티븐 리 모리스가 말했던 것처럼, 연극과 영화의 차이는 무대 위의 배우는 "들어라, 저기 성이 있다!"라고 말한 다음 판지로 만든 상자를 가리켜도 괜찮다는 데에 있다. 그러나 같은 상황이 스크린 위에서 벌어질 경우, 객석에 앉은 사람들은 근사한 망루와 도개교를 기대한다.

〈지구 중심의 헤라클레스〉를 보러 온 관객들은 스티로폼 바위가 우스꽝스럽다고 생각했다. 그들은 파크가 입을 벌리고 윤기훈이 노래를 부르는 순간 마구 웃기 시작했다. 잠시 후 대다수 사람들은 웃음을 가라앉혔다. 하지만 관객 중 3분의 1은 계속해서 바바의 비통한 환상 서사극을 코미디처럼 대했다. 용암에 타오르는 사람? 웃겨 돌아가시겠네! 목이 잘리는 아가씨? 이렇게 웃길 수가! 마리오 바바가 웃겨서 웃는 게 아니었다. 그들은 마리오 바바가 그들에게서 감정을 끌어내려고 한다는 이유 때문에 웃고 있었다. (지휘자 패트릭 모가넬리와 가수들의 감정이 상했을지도 모른다는 점은 아무도 신경 쓰지 않는 듯했다)

내 뒤에 앉은 남자는 자리에 어울리지 않는 하이와언 셔츠를 입은 채 사우어 패치 키즈 캔디를 우물거리며 91분 동안 킬킬거렸다. 나는 제우스에게 그 작자를 향해 스티로폼이 아닌 바윗덩어리를 던져달라고 한참을 간청했다. 그의 집요한 웃음은 자신의 우월함에 대한 광고였다. 가짜인 게 분명한 가짜 바위에 "속는 것"을 거부하는 것이 영웅적인 행위라도 된다는 듯이. 하지만 꿈을 꿀 수 없을 정도로 쿨하다는 사실에 의기양양해 할 만한 이유가 어디 있는가.

나는 오페라 관객들이 감정적 방관자로 머무른다는 사실에 놀랐다. 실리적인 측면에서만 보더라도, 다들 일반 영화 티켓의 몇 배나 되는 돈을 내고 심지어 평소에 신는 것보다 더 좋은 신발을 신는 수고까지 감수하며 온 자리 아니던가. 하지만 충격을 받지는 않았다. 지난 몇 년 간 옛 영화를 보러 갔다가 부적절한 웃음으로 감상을 망친 사례가 수차례 되는 데다, 그 웃음소리는 점점 더 커져가는 것만 같다. 내가 들은 끔찍한 이야기 중에는 관객들이 〈텍사스 전기톱 학살The Texas Chainsaw Massacre, 1974〉, 〈엑소시스트The Exorcist, 1973〉, 〈샤이닝The Shining, 1980〉, 〈2001: 스페이스 오디세이2001: A Space Odyssey, 1968〉, 〈괴물The Thing, 1982〉, 〈아라비아의 로렌스Lawrence of Arabia, 1962〉 그리고 〈대부The Godfather, 1972〉를 보면서 웃었다는 이야기도 있었다. 장난해? 〈대부〉를 보면서!? 게다가 심술궂게도, 똑같은 관객들이 정작 고전 코미디를 보는 동안에는 조용했다. 현대 관객은 과거 사람들보다 한 수 위여야 하기라도 한다는 듯이. 하지만 그건 모두가 지는 경쟁이다. 영화인들의 노력은 무시당하고, 힙스터들은 돈을 버리며, 우리처럼 방해받지 않는 환경에서 좋은 영화를 보고 싶었던 나머지 사람들은 팝콘 한 통과 빨대 한 자루로 씹스터를 죽이는 방법을 고민하게 된다.

CGI가 우리의 상상력을 정복해버린 건 아닌가 싶다. 바바의 시대에는 그 누구도 모든 소품이 완벽하기를 기대하지 않았다. 그는 끓인 옥수수 가루로 용암을 만들었다. 두려움을 자아내는 것은 헤라클레스의 얼굴에 떠오른 공포였다. 하지만 놀라운 것들을 그려낼 수 있게 된 지금, 우리는 진짜라고 믿을 만한 것들을 기대한다. 사실적인 특수효과에 대한 강조는 우리로 하여금 홀든 콜필드처럼 영화를 평가하도록 이끈다. 진짜냐 가짜냐? 우리는 성의 사실성에 너무나 집착한 나머지 성 안의 캐릭터들에는 별로 신경 쓰지 않는다. 그리고 보다 많은 노력을 요하는 오래된 영화들은 곤경에 처하고 있다.

그나마 오페라 가수 윤기훈은 헤라클레스를 공연하는 동안 찾아올 낄낄거림에 대한 대비가 되어 있었는지도 모르겠다. 그는 〈세비야의 이발사〉에서 피가로 역을 맡은 적도 있는데, 이 250년 묵은 오페라에는 다음과 같은 선견지명 어린 대사가 나온다. "나는 울음이 나올까 두려워 서둘러 모든 것을 비웃어버리지."

홀든 콜필드는 『호밀밭의 파수꾼』 주인공.

그러고 보니 신기한 우연의 일치. 〈백야〉에서 나탈리아는 세입자, 할머니, 가정부와 함께 다름 아닌 〈세비야의 이발사〉를 보러 갔다가 세입자를 향한 사랑을 확신하게 된다. 그 모든 코웃음의 근원이었던 사랑. 혹시 우연이 아닌 걸까? 혹시 비스콘티가 이 시리도록 맑고 가냘픈 사랑 이야기를 변호하기 위해 〈세비야의 이발사〉를 인용하진 않았으려나? 애석하게도 나는 오페라에는 문외한이라 해당 장면이 〈세비야의 이발사〉 중 어떤 대목인지 알지 못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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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3년 8월 12일에 쓴 글. 일부 문장을 바꾸고 다듬었다. 영화의 지도에 관한 글을 쓰다가 문득 '예전에 이 비슷한 이야기를 한 적이 있는데?' 하는 생각이 들어서 가져왔다. 이번에 써보려던 글의 방향과는 좀 차이도 있고 독자도 훨씬 분명한 글이긴 하지만 그래도 여전히 유효한 내용이니까. 다만 장황한 예시 중에는 지금은 달리 생각하게 된 부분도 보인다.



주말에 이틀 연속으로 아르헨티나의 영화감독 마티아스 피녜이로의 영화들을 네 편 봤습니다. 마지막 영화인 [비올라]는 몇달 전 전주에서 봤으니, 정확히 말하면 세 편이죠. 2006년에 만들었다는 다큐멘터리를 제외하면 전 작품을 다 본 셈입니다.

피녜이로의 영화에 대해 뭐라고 말할 입장이 못 됩니다. 우선 그에 대해 아는 바가 별로 없고, 솔직히 그의 영화들을 완전히 이해했다고도 말을 못해요. [비올라]를 제외한 그의 다른 영화들을 온전하게 즐겼다고 할 수도 없고. [비올라]도 전주에서 처음 봤을 때는 '이게 뭔가'했어요. 당시 경험을 예습삼아 다시 보니 재미가 두 배 정도 상승하더군요.

- DJUNA, 〈비올라〉 리뷰

종종 지인들이 내가 소장한 DVD나 블루레이를 빌려 가곤 한다. 사실 내가 적극 권장하는 편이다. 나는 한국 관객이 한국의 주류 영화 문화에서 소개하는 범위를 벗어나 좀 더 다양한 영화를 제대로 된 경로로 접하기를 간절히 바라는 편이며, 내가 소장한 타이틀 상당수가 그런 영화들이기 때문이다. 모두가 나처럼 외화를 퍼줘 가며 외국 DVD와 블루레이를 사서 영어 자막으로 영화를 볼 수는 없을 테고, 모름지기 영화를 좋아하는 사람이라면 그래야만 한다고 주장할 생각도 없지만, 합법적/윤리적인 경로를 이용하는 사람이 한국에서 접할 수 있는 영화의 범위에는 한계가 있다는 것도 부정할 수 없는 사실이다. 그러니 주변에 영화에 목이 말라 외국 타이틀이라도 보고는 싶은데 여건이 되지 않아 안타까워하는 사람이 있다면, 모쪼록 내가 가지고 있는 타이틀을 적극 활용해 주기를 바라게 된다.

그런데, 다른 사람에게 프로그래머 노릇을 해본 사람이라면 무슨 말인지 알 테지만, 때로는 순순히 타이틀을 빌려주는 대신 빌려 가는 사람의 선택에 참견하고 싶어질 때가 있다. 이걸 보기 전에 저걸 먼저 보면 좋다든가, 이건 이 판본보다는 다른 판본이 낫다든가 하는 식으로 말이다. 예컨대 나는 누군가 줄스 다신의 〈리피피Du Rififi chez les hommes, 1955〉를 보겠다고 하면 어쩐지 그보다는 장-피에르 멜빌의 〈붉은 원Le Cercle rouge, 1970〉을 먼저 보라고 권하고 싶어진다. 그런 다음 그 사람이 〈붉은 원〉에 이어 〈리피피〉까지 보고 나면 디저트 삼아 마리오 모니첼리의 〈평범한 사람들I Soliti ignoti, 1958〉도 권할 것이다. 또 누군가가 존 포드의 〈내 사랑 클레멘타인My Darling Clementine, 1946〉을 보겠다고 한다면 (그 사람이 그 영화를 두 번 볼 생각이 아니라면) 96분짜리 극장판보다는 103분짜리 내부 시사판을 추천하고 싶다. 반면 샘 페킨파의 〈팻 개럿과 빌리 더 키드Pat Garret & Billy the Kid, 1973〉는 2005년에 제작된 특별판을 먼저 보도록 한 다음 1988년 프리뷰판은 완전히 다른 영화니까 그것도 반드시 챙겨 보도록 권할 듯하다.

참견은 거기서 끝이 아니다. 때로는 영화를 보는 시간이나 순서, 장소에도 참견하고 싶어진다. 예를 들어 ① 와이드 TV와 ② 대형 스크린+프로젝터라는 두 가지 선택항이 있다면, 그리고 누군가 당장 대형 스크린+프로젝터 쪽에는 자리가 나지 않아 와이드 TV로 신도 카네토의 〈오니바바鬼婆, 1964〉를 보겠다고 나선다면, 나는 그보다는 스크린으로 보는 편을 권할 것 같다. 그 영화의 갈대밭은 스크린이 클수록 좋으니까(물론 꼭 〈오니바바〉가 아니더라도, 어차피 영화란 스크린이 크면 클수록 좋기는 하다. 그래도 TV로 보게 내버려두고 싶지 않은 영화들이 있다). 혹은 누군가가 프레스톤 스터지스의 〈팜 비치 이야기The Palm Beach Story, 1942〉와 프랭크 카프라의 〈어느 날 밤에 생긴 일It Happened One Night, 1934〉을 연달아 보겠다고 한다면, 나는 연달아 보는 것은 좋으나 순서를 바꿔보면 어떻겠냐고 말하겠다. 또 어느 혈기왕성한 영화광이 코바야시 마사키의 〈인간의 조건人間の條件, 1959-1961〉을 하루 만에 다 보겠다고 나선다면, 그러지 말고 하루에 한 부씩 끊어서 사흘에 걸쳐 보라고 하겠다. 만약 내가 그 사람을 각별히 아낀다면, 그 사흘 동안에는 매일 영화를 보는 시간도 똑같이 하는 편이 좋고, 해가 뉘엿뉘엿 질 때쯤 영화가 끝나도록 오후 세 시에서 세 시 반 사이에 영화를 보면 더욱 좋으리라는 이야기까지 덧붙일지도 모른다. 프랜시스 포드 코폴라의 대부 3부작을 처음 본다는 사람 앞에서는 〈대부The Godfather, 1972〉와 〈대부 2The Godfather, Part II, 1974〉는 큰 시간 간격을 두고 보지 않아도 괜찮지만 〈대부 3〉는 오랜 시간이 지나 앞의 두 편에 관한 기억이 흐릿해질 무렵 보라고 말해주고 싶은 마음을 억누르기 어렵다. 〈대부 2〉까지 보고 나서 1년쯤 후에 〈대부 3〉를 봐봐요. 그 영화는 그게 어울린다니까. 슬슬 변태 같은 기분이 들지만, 재미있으니까 예를 하나만 더 들겠다. 산제이 가드비의 〈둠Dhoom, 2004〉과 〈둠 2Dhoom 2, 2006〉는, 속편인 〈둠 2〉를 먼저 본 다음에 전편인 〈둠〉을 보는 편이 훨씬 좋다고 확신한다.

그러나 이런 참견을 늘 입 밖에 꺼내지는 않는다. 쓸데없는 오지랖이나 잘난 척처럼 보일까 염려스럽기 때문이기도 하지만, 무엇보다도 사실 그러한 참견에는 생각만큼 뚜렷한 근거가 없음을 알기 때문이다. 물론 모든 참견쟁이에게는 늘 '타당한' 근거가 있다. 그러나 자신에게 좀 더 엄격한 참견쟁이라면, 그 타당한 근거가 실은 그리 타당하지 않다는 사실을, 객관적이라기보다는 극도로 주관적이며 임의적일 뿐이라는 사실도 이미 알고 있기 마련이다.

가령 나는 '영화는 역시 필름으로 스크린에서'라는 주장에 대체로 동조하는 편이다. 그러나 그것은 이상론일 뿐, 그것이 늘 이상적인 감상을 보장하지는 못한다는 사실도 알고 있다. 말이 좋아서 '필름으로 스크린에서'지, 극장에서의 영화 감상이란 늘 수많은 변수에 시달리기 마련이고, 집에서 프로젝터로, 와이드 TV로, 심지어 노트북 모니터로 DVD를 보는 체험만도 못한 극장 체험도 숱하게 겪어보지 않았던가. 또한 이상적이지 못한 환경에서 감상한 영화라고 해서 그 감흥을 무조건 무시할 수 있는 것도 아니다. 박찬욱의 〈복수는 나의 것2002〉이 잔인하다는 말에 지레 겁먹고 굳이 스크린을 마다한 채 DVD를 빌려다가 대낮에 커튼도 치지 않은 양지바른 기숙사 방에서 혼자 노트북으로 영화를 보며 입고 있던 츄리닝 옷자락을 이로 자근자근 물어뜯고 고통에 몸부림쳤던 그 기억을 어떻게 잊을 수 있을까? 나중에 더 큰 스크린으로 다시 볼 기회도 있었지만, 그 영화는 노트북 모니터 속에서 이미 내 영혼에 깊은 상처를 남겼다. 또는 몇 해 전 한국영상자료원에서 코바야시의 〈인간의 조건〉을 상영했을 때, 함께 간 지인들은 그 영화에 몹시 감동했지만 나는 릴이 바뀔 때마다 툭툭 끊어지던 그 필름이, 그리고 내가 처음 접했던 영어 자막과는 사뭇 다른 그 한국어 자막이 신경을 거스르고 영화의 힘마저 깎아내는 듯하여 못내 찜찜한 마음으로 극장을 나서기도 했다. 그때의 상영이 분명 누군가에게는 인생에 길이 남을 영화 체험이었겠으나, 내게 〈인간의 조건〉은 그보다 한 해 전에 상영실을 사흘 동안 차지한 채 DVD로 보았던 그 영화로만 남아있다.

영화의 순서도 마찬가지다. 모든 영화를 그 영향 관계를 따져가며 순서에 맞게 본다는 것은 불가능하다. 폴 토머스 앤더슨의 〈부기 나이츠Boogie Nights, 1997〉를 보는 사람 중 마틴 스콜세지의 〈성난 황소Raging Bull, 1980〉와 〈좋은 친구들Goodfellas, 1990〉, 그리고 미하일 칼라토초프의 〈나는 쿠바Soy Cuba, 1964〉를 미리 봐두는 사람은 얼마나 될까? 또 그중 〈성난 황소〉는 그냥 봐도 괜찮은 영화인가 하면 그렇지도 않아서, 영화광 스콜세지는 그 영화에서 프랭크 보재기의 〈제7의 천국7th Heaven, 1927〉에서부터 아브라함 폴론스키의 〈악의 힘Force of Evil, 1948〉, 로버트 로슨의 〈육체와 영혼Body and Soul, 1947〉, 엘리아 카잔의 〈부둣가에서On the Waterfront, 1954〉, 조지 큐커의 〈스타 탄생A Star is Born, 1954〉 등을 마구 인용하고 있다. 그런 식으로 흐름을 계속 거슬러 올라가다 보면 결국은 영화의 탄생에까지 이를 터인데, 19세기 말에 태어난 열혈 영화광이 아닌 다음에야 그걸 곧이곧대로 순서대로 따라올 사람이 요즘 세상에 어디 있겠는가?

그렇더라도 낯선 영화를 대함에 있어 좀 더 쉽게 접근할 수 있는 영화와 접근하기 어려운 영화가 있지 않은가? 그럴 때 적절한 순서를 제공할 필요도 있지 않을까? 일견 맞는 구석도 있는 말이지만, 나는 이에 관해서도 원론적으로는 부정적인 입장이다. 일단 누가 뭘 쉽게 받아들일지는 알 수 없는 노릇이다. 나는 프리츠 랑의 열렬한 팬이지만, 아무에게도 랑의 영화를 적극적으로 추천하지는 않는다. 내가 너무나 사랑하는 〈M1931〉 같은 영화는, 웬만해서는 보는 이들을 곯아떨어지게 할 뿐일 테고, 설령 그렇지 않더라도 별다른 감흥 없이 지나가 버리리라 생각한다. 하지만 나는 또한 안다. 세상에는 정말로 〈M〉을 처음 본 순간 좋아했거나 적어도 그 훌륭함을 알아보는 관객도 있다는 사실을(실은 〈M〉이 무척 지루하고 독창성 없는 영화라고 여겼던 나로 하여금 〈M〉을 다시 보도록 이끌어준 이도 바로 그런 관객이었다). 영화를 통해 타인과 친해지는 사람들에게는 어떤 사람에게는 어떤 영화가 잘 맞고 어떤 영화는 잘 맞지 않으리라고 지레 단정하는 못된 버릇이 있지만, 타인을 그토록 정확하게 짚어내기란 쉽지 않은 일이다.

지금 당장 소화할 수 없는 영화를 만나는 게 그렇게 기피해야만 할 일도 아니다. 지금 당장은 소화되지 않지만 훗날 다른 각도에서 뒤늦게 깨달음을 안겨줄 체험도 있는 법이다. 한 관객의 식견이 변화하고 넓혀질 수 있다는 가능성을 미리 부정해서는 안 된다. 내게는 그처럼 느리게 다투며 친해진 영화가 많다. 〈M〉이 그런 영화였고, 하워드 혹스의 〈스카페이스Scarface, 1932〉가 그랬고, 포드의 〈수색자The Searchers, 1956〉가 그랬고, 미켈란젤로 안토니오니의 〈일식L'Eclisse, 1962〉이 그랬다. 혹은 코폴라의 〈대부〉나 세르지오 레오네의 〈옛날 옛적 미국에서Once Upon a Time in America, 1984〉처럼 처음 만났을 때부터 재미있게 봤던 영화라고 할지라도, 그 본색을 실감하는 데에는 수년의 시간이 걸린 영화들도 많다. 그렇다면 그들과의 첫 만남은 그저 무의미한, 너무 이른 것이었을까? 그때는 만나지 않았더라면 좋았을까? 하지만 그때 지나치게 일찍 만났기에 겪어야 했던 오판, 시행착오, 바보 같은 발언들, 토론과 논쟁이 없이 과연 훗날의 더 풍요로운 감동이 가능했을까? 알 수 없는 일이다. 오히려 나는 첫 만남의 결핍과 좌절이 그 영화를 거듭 다시 보도록 이끌었다고 생각하는 편이다. 처음 만난 사람의 진가를 두 시간 만에 알아보기란 얼마나 어려운 일인가. 하지만 모든 사람을 한눈에 꿰뚫어 볼 수 있는 사람이 되고자 한다면, 일단 언젠가 어디선가 누군가를 만나고 봐야 할 일이 아닌가. 다만 그때 자신이 본 것이 상대의 전부라고 굳게 믿고 등을 돌려버리지만 않으면 될 일이다.

결국 이것은 각자가 그리는 지도의 문제로 귀결된다. 영화학자나 비평가가 아니더라도, 영화를 보다 보면 지도를 그리게 된다. 그러나 영화의 지도는 지리부도 속의 지형과는 달라서, 대체로 두루뭉술하고 유동적이며 작성자마다 다르다. 어떤 영화가 어떤 방식으로 가까이 붙어 관계 맺는가는 그 사람이 본 영화 자체뿐만 아니라 그날의 영화 감상을 둘러싼 맥락, 나아가 그 사람의 가치관과도 연관 관계를 맺기 때문이다.

가령 내 영화 지도에서는 혹스와 멜빌과 두기봉과 마이클 만이 딱 달라붙어 있다. 한편 멜빌은 존 휴스턴을 사모했던 것 같지만 정말로 휴스턴의 자취가 멜빌에게 남았는지는 좀 의문스럽다. 마찬가지로 오우삼은 멜빌을 사모한다고 말하지만 그것도 짝사랑으로 그친 듯하다. 그런가 하면 멜빌 옆에서는 다신과 자크 베케르, 그리고 때로는 로베르 브레송이 뒷짐을 지고 서서 슬며시 웃고 있다. 약간 뒤쪽으로 클로드 소테의 모습도 어른거린다. 리 마빈과 스즈키 세이준이 멜빌과 친하다고 생각하지는 않지만, 둘은 각각 〈포인트 블랭크Point Blank, 1967〉와 〈살인의 낙인殺しの烙印, 1967〉에 이르면 〈사무라이Le Samouraï, 1967〉를 스쳐 지나가기도 한다. 또 두기봉과 마이클 만 옆에서는 앤더슨의 〈시드니Sidney, 1996〉, 마틴 맥도나의 〈브뤼주에서In Bruges, 2008〉, 그리고 김병서/조의석의 〈감시자들2013〉같은 영화가 어슬렁거린다. 이들은 발표 연도나 국적을 넘어서서 내 영화 세계 안에서 일종의 친족 관계를 형성한다.

그러나 또 다른 지도에서라면 다른 관계가 가능할 것이다. 멜빌-두기봉-만과 연결된다고 생각했던 혹스는 다시 스크루볼 코미디를 통해 에른스트 루비치-빌리 와일더와 붙기도 한다. 한편 스크루볼 코미디라는 장르만 놓고 보면 카프라와 스터지스도 여기에 가세해야 할 것 같은데, 정작 내 지도 안에서 둘은 루비치-혹스-와일더 커넥션과는 떨어진 채 정치 영화라든가 자기반영적 코미디의 세계를 꾸리고 있다. 그리고 정말 뜬금없게도 (워킹 타이틀의 로맨틱 코미디나 우디 앨런의 영화가 아니라) 쿠엔틴 타란티노가 이 근방을 어슬렁거릴 때가 있다. 타란티노가 어디에 얼마나 어떻게 연결되어 있을지는 타란티노만이 알리라.

그리고 이 영화들, 영화인들은 다른 사람의 지도에서는 또 다른 위치를 점하고 다른 영화들과 관계 맺고 있을 것이다. 영화를 좋아하는 사람들 사이에 우정이 존재할 수 있다면, 나는 그 우정이 결국 그 지도를 공유하고, 견주고, 필사하고, 자신의 지도를 수정하고 보완하는 행위를 통해 성립하리라 생각한다. (앞서 길게 언급한 남의 영화 보기에 대한 참견은, 말하자면 자신의 지도를 들이미는 정도의 행위로 생각할 수 있지 않을까)

영화에는 연표와 국경을 통해 그려진 '객관적'인 역사가 존재하지 않는다고 주장하려는 것은 아니다. 모든 역사에서와 마찬가지로, 영화의 역사에서도 연도와 지역은 무척 중요하며, 지도 그리기의 기본 재료가 된다. 그러나 어째서인지 영화는 자꾸 그 경계를 허물고 부정하고 다시 쓰기를 요구하는 경향이 있다. 예를 들어 필름 누아르의 경계를 확정하려는 끝없는 노력, 혹은 현대영화의 존재를 말하려는 숱한 시도와 회의. 표현주의나 네오리얼리즘처럼 교과서에서 명확하게 구분되는 척하는 사조조차도, 사실은 언제나 불분명하다. 아직 자신의 역사를 완고한 시선으로 돌아볼 만큼 나이를 먹지 못해서일 수도 있고, 그 성격상 과거의 시간을 포획해서 복제하고 재현하는 데에 능한 표현 수단이기 때문일 수도 있고, 아니면 아직 영화가 무엇인지 내가 알지 못하기 때문일 수도 있다. 이유야 어찌 되었든 간에, 내게 영화의 세계란 백지 위에 마구잡이로 흩뿌려진 점과 같은 모습으로 다가온다. 그리고 유치원 혹은 초등학교 시절 했던 숙제처럼, 그 선을 이어 그림을 완성하는 것이 영화 관객이 누릴 수 있는 지고의 기쁨 중 하나다. 게다가 여기에는 정해진 답도 없고 순서도 없으며 심지어 점의 위치를 바꿀 권한마저 주어지기도 한다.

그러므로, 간신히 하나의 선분만을 그려낸 다음 그것을 취향이라는 이름으로 묶고 주저앉아버리는 게으름, 이미 지난 점은 다시는 어떤 식으로도 지나지 않겠다는 무모함, 지우개는 쓰지 않겠다는 맹세와 같은 극악무도한 덫에만 걸리지 않는다면, 그리고 한 편의 영화가 반드시 품고 있기 마련인 결핍을 채우고자 하는 의지와 시간만 있다면, 영화를 보는 순서는 생각만큼 그렇게 결정적인 것은 아니다.

…그래도 역시 〈둠〉은 〈둠 2〉를 먼저 본 다음에 보는 게 더 좋은 것 같다.

전주에서 보았을 때보다 어제 봤을 때가 더 재미있었던 이유가 있습니다. 전 앞에서 피네이로의 전작들을 보는 데에 애를 좀 먹었다고 고백했습니다. 하지만 그 영화들을 통하고 나니 [비올라]는 훨씬 재미있는 영화가 되었습니다. 그가 끊임없이 반복하는 스타일, 주제, 소재 그리고 무엇보다 계속 출연하는 배우들(특히 비올라 역의 마리아 빌라르는 그의 네 영화에 모두 나옵니다)이 처음 감상 때에는 무심하게 넘겼던 것들에 새로운 의미를 넣어주더란 말이죠.

- DJUNA, 〈비올라〉 리뷰
Posted by 거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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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맥베스Macbeth, 1948〉 이후 할리우드를 떠나 유럽에서 영화를 만들던 오슨 웰스는 〈악의 손길Touch of Evil, 1958〉로 10년 만에, 그리고 마지막으로 할리우드에 복귀한다. 할리우드 시스템과 불화를 일삼는 독불장군이라는 잘못된 평판과 달리 할리우드의 웰스는 촬영 기간과 제작비를 준수하고자 노력하는 감독이었고, 〈악의 손길〉도 제작비를 살짝 넘기고 예정보다 하루 더 촬영하기는 했지만 대체로 잡음 없이 촬영을 마쳤다. 10년 만의 귀환에 웰스의 지인들은 앞다투어 촬영을 도왔고, 촬영 중에는 스튜디오도 딱히 간섭하지 않았으니(밤 장면이 많은 영화인데 실제로 밤에 로케이션 촬영을 했기 때문에 스튜디오 중역들이 촬영장을 찾기 어려웠다), 이는 웰스가 할리우드에서 보낸 가장 만족스러운 시기 가운데 하나였다.

그러나 후반 작업으로 넘어가면서 불화가 시작됐다. 웰스에게는 최종편집권이 없였고, 유니버설은 웰스의 비전을 탐탁지 않게 여겼다. 스튜디오의 러프컷을 본 웰스는 1957년 12월 5일 제작부장 앞으로 58쪽짜리 메모를 써서 구구절절 자신이 이 영화에 적절하다고 생각하는 방향을 설명했으나, 유니버설은 이를 묵살하고 93분짜리 극장판을 만들어 동시상영용 B무비로 개봉했다. 유럽에서는 장-뤽 고다르와 프랑수아 트뤼포가 이 영화에 열광하고 있었지만, 미국에서 〈악의 손길〉은 큰 반향을 얻지 못하고 모습을 감췄다.

20년 가까운 세월이 흐른 후, 1970년대 중반 유니버설은 자사 아카이브에서 108분짜리 〈악의 손길〉 필름을 발견한다. 이것은 웰스가 메모를 작성한 후에 완성한 내부 시사용 필름으로, 웰스의 의견을 일부 반영하고 있었으며 1958년에는 빛을 보지 못했던 판본이었다. 때는 유럽 영화 문화의 영향을 받은 미국에도 영화광 세대가 생긴 시점이었고, 웰스는 젊은 영화광들이 추앙하는 작가 중 하나였다. 이를 의식한 유니버설은 이 108분짜리 〈악의 손길〉을 극장에 걸고 비디오로도 출시하면서 감독의 의견을 반영한 무삭제 복원판이라고 뻥을 쳤다. (당시 웰스는 아직 살아있었는데, 과연 그가 어떤 반응을 보였는지, 그 자신도 극장에 가서 이 판본을 보고 관객과의 대화도 진행했을지 궁금하다)

웰스가 세상을 떠나고도 13년 후인 1998년, 〈지옥의 묵시록Apocalypse Now, 1979〉의 편집자로 유명한 월터 머치는 유니버설의 복원팀과 공조하여 조너선 로젠봄을 비롯한 웰스 연구자들의 도움을 받아 웰스가 남긴 메모를 토대로 〈악의 손길〉을 재편집한다. 그렇게 완성한 복원판의 길이는 112분이 됐다.

이 세 판본 중 어느 것도 웰스의 "감독판"은 아니다. 이중 복원판만을 담고 있는 정발판 〈악의 손길〉 블루레이가 "감독판"이라는 명칭을 달고 있는 것은 얼마 전 이야기했던 〈옛날 옛적 미국에서Once Upon a Time in America, 1984〉 "감독 확장판"과 마찬가지로 과장 · 허위 광고다. 〈악의 손길〉은 저마다 결함을 안고 있는 이 세 개의 판본 사이에서 나타나는 차이와, 58쪽의 메모에만 담겨 있을 뿐 실현되지 못한 웰스의 비전 사이 어딘가를 떠도는 형태로 존재한다. 정발판과 달리 미국판 블루레이는 극장판, 내부 시사판, 복원판을 동등하게 대접하고 있으며 웰스의 메모도 책자로 함께 수록했는데, 참으로 고마운 정성이다.

〈악의 손길〉 블루레이 (유니버설)


이 블루레이에 굳이 트집을 잡자면 그마저도 〈악의 손길〉의 모든 조각을 담아낸 구성은 아니라는 점을 들 수는 있겠다. 50년대는 극장에 와이드스크린이 보급되던 전환기로, 당시의 와이드스크린 영화들은 (지금도 많은 와이드스크린 영화들이 그렇지만) 1.33:1 화면비로 촬영한 다음 화면 위아래를 가려 1.85:1로 영사하였다. 다만 아직 와이드스크린 영사 시설을 갖추지 못한 극장이라면 마스킹을 풀고 1.33:1으로 상영했을 가능성도 있다. 그렇다면 웰스는 어떤 화면비를 선호했는가? 1998년 〈악의 손길〉 복원판의 제작을 담당한 릭 슈미들린이 촬영감독 러셀 메티와 촬영기사 필립 H. 라스롭이 남긴 기록을 토대로 웰스는 1.85:1을 의도했고 실제로 그가 참석한 모든 상영은 1.85:1로 이루어졌다고 밝혔으며, 웰스 또한 그 구구절절한 58쪽짜리 메모에서 화면비 이야기는 남기지 않았지만, 논쟁은 지금껏 계속되고 있다. 거기에는 여러 가지 이유가 있을 터이나, 무엇보다도 오리지널 필름의 위아래를 가리지 않은 1.33:1 화면비의 화면 구도가 너무나 안정적이고 보기 좋다는 것이 핵심이겠다.

사실 이건 그렇게 이상한 일은 아니다. 말했듯 와이드스크린 전환기의 영화들은 종종 상영 시설에 따라 화면비가 달라지곤 했으며, 또한 이미 이 시기에 TV 방영까지 염두에 두고 촬영하는 경우도 있었다. 전환기의 감독과 촬영감독들에게 여러 화면비를 한꺼번에 의식하며 촬영에 임하는 건 그렇게 드문 일은 아니었다. 하지만 그렇다면, 설령 웰스가 제1 화면비로 선택하지는 않았다고 해도, 1.33:1 또한 이 영화의 화면비 아닐까?

그런 이유에서 영국의 홈비디오 제작사 유레카에서는 〈악의 손길〉의 세 판본을 다시 각각 1.33:1과 1.85:1로 수록하여 총 여섯 개 판본을 수록한 블루레이를 내놓았다. 이미지 품질은 유니버설 쪽이 미세하게 더 낫고(유니버설이 유레카보다 몇 년 늦게 새로운 복원판을 만들었다. 다만 이는 근소한 차이이며, 취향에 따라 유레카를 선호하는 이도 많다), 1.85:1 화면비는 유니버설의 프레이밍이 더 정확해 보이지만(유니버설판의 구도가 더 안정적이다), 1.33:1 화면비 수록은 유레카판의 큰 장점이다.

〈악의 손길〉 블루레이 (유레카)


세 판본, 혹은 여섯 판본 사이의 차이를 여기서 일일이 늘어놓을 여력은 없다. 각 판본 사이의 가장 크고 중요한 차이는 웰스가 의도했던 교차 편집의 구조라고 보지만, 보통 가장 자주 언급되는 차이는 오프닝이다.

익히 알려졌다시피 이 오프닝은 3분 동안 이어지는 장엄한 롱테이크로 이루어졌다. 카메라가 크레인을 타고 날아오른 뒤 기나긴 거리를 활강하면서 주인공 바가스와 수전이 폭탄을 실은 자동차와 앞서거니 뒤서거니 같은 길을 가는 광경은 수십 수백 번을 보아도 질리지 않는 묘기 대행진이다. 그런데 웰스는 원래 이 장면에서 음향도 실험하고 싶어했다. 그는 카메라가 미국-멕시코 국경 마을의 한복판을 가로지르는 동안 배경음악 없이 주변 상가에서 들려오는 음악과 엑스트라들이 내는 소리를 들여보내고, 겹치고, 나가게 하는 음향 몽타주를 추구했다. 또한 웰스는 그러는 동안 화면 위에 크레딧이 뜨지 않기를 바랐다.


〈악의 손길〉 복원판 오프닝

이러한 의도를 반영한 복원판이 등장하기 전까지, 유니버설에서 만든 판본들은 전부(즉 극장판과 내부 시사판 모두) 웰스의 의도를 무시했다. 화면에는 크레딧이 붙었고, 다채로운 음향 효과 대신 배경음악이 깔렸다.

나는 〈악의 손길〉을 복원판 DVD로 처음 만났기 때문에, 그러한 뒷이야기를 접했을 때는 유니버설의 실책에 혀를 차는 쪽이었다. 그러다 영국 영화 잡지 《Sight & Sound》에서 10년에 한 번씩 전세계 영화인들을 대상으로 진행하는 "영화 사상 최고의 영화" 투표─〈시민 케인Citizen Kane, 1941〉에 "영화 사상 가장 위대한 영화"의 멍에를 씌웠던 그 투표─의 2002년 목록을 훑던 중 조지 A. 로메로가 작성한 목록을 만났다. 로메로는 자신이 고른 열 편에 관해 하나씩 코멘트를 덧붙였는데, 그중 〈악의 손길〉에 관해 이렇게 썼다. "솔직히 까놓고 말해서 누가 〈시민 케인〉을 필요로 하냐? 난 영원토록 〈악의 손길〉을 끌어안고 갈 거다. 근데 '복원판'은 아냐. 맨시니를 내놔!"

처음에는 이게 무슨 말인지 이해하지 못했다가, 뒤늦게 〈악의 손길〉 작곡가가 헨리 맨시니였음을 깨달았다. 〈티파니에서 아침을Breakfast at Tiffany's, 1961〉이나 〈핑크 팬더The Pink Panther, 1963〉의 음악으로 유명한 그 사람이다. 아하, 복원판 이전 〈악의 손길〉 오프닝에는 맨시니의 음악이 실려 있나 보군?

그래서 찾아 들어보았다. 듣고 나니 웰스가 얼마나 자기 확신이 강한 창작자였는지 알 수 있었다. 나 같으면 누가 내 영화 오프닝을 위해 이런 음악을 작곡해서 넣어주면 설령 그게 의도가 아니었다고 해도 넙죽 엎드려 받지 않았을까. 어떻게 이런 음악을 듣고도 58쪽짜리 메모 맨 첫 줄에 "현재 영화의 오프닝에 깔린 배경 음악은 임시로 넣어둔 것으로 알겠습니다…" 라고 쓸 수 있지?!


〈악의 손길〉 복원 전 오프닝 (1.85:1)

물론 웰스의 의도는 이해할 수 있다. 복원판을 보다가 이 판본을 보면 확실히 크레딧 자막 때문에 화면에 대한 집중력이 떨어진다. 또 음악이 너무나 압도적이고 화면과 잘 어우러지는 나머지 여기 묘사된 상황을 의식하고 사고하기가 어려워진다. 그저 카메라가 움직이고 사람이 움직이고 자동차가 움직이며 화면이 바뀜에 따라 음악이 바뀌는 과정 전체가 하나의 음악적 덩어리로 밀려오면서 급기야 자동차에 폭탄이 실려 있다는 사실마저 잠시 잊어버릴 지경이다. 웰스가 이를 바라지 않았으리라는 점은 알겠다.

하지만 이 또한 실로 영화적인 황홀경 아닌가! 〈악의 손길〉을 복원판으로 먼저 접한 나도 이 음악을 포기할 수 없을 정도인데 하물며 이전 판본들로 먼저 만났을 로메로 같은 골수팬들이 이 음악에 느낄 애정은 어떻겠나. 무슨 수를 써서라도 끌어안고 가야지.

아래는 마찬가지로 맨시니의 음악이 있는 1.33:1 화면비 영상이다. 참, 이참에 서울아트시네마/시네마테크 서울 상영본도 정리해두도록 하자. 2007년 "오슨 웰스 특별전"에서는 극장판 16mm 필름을 1.33:1 화면비로 상영했고, 이번 2015년 "탄생 100주년 오슨 웰스 회고전"에서는 복원판 DCP를 1.85:1 화면비로 상영했다. 현재 시네마테크 서울 프로그램 데이터베이스에 기재된 상영 시간은 두 프로그램 모두 잘못됐다. 듣기로는 이렇게 판본이 여럿 있는 영화들의 경우 상영본을 받아 직접 틀어보기 전에는 판본을 확실히 알기 어렵다고 한다.


〈악의 손길〉 복원 전 오프닝 (1.33:1)

Posted by 거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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